심청, 연꽃의 길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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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은 ‘심청’을 주인공으로 한 동양의 오디세이를 구상했다. 그 오디세이는 매춘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몸을 사고파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행위가 지극히 자연스레 이뤄진다. 다만 청이의 자아가 성장하는 방식은 작가가 강제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는 처음엔 성공지상주의자로 보인다. 성의 매개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러다 제 정인과 행복을 꿈꾸는 로맨티스트로 바뀐다. 삶의 바닥에 부딪혔을 댄 다시금 성공지상주의자가 되었다가 어느 순간 박애주의자로 변모한다. 이런 ‘약한 고리’는 청이에게 공감하기 힘들게 한다. 청이에게 능동성을 부여하여 ‘여성 잔혹사’라는 비판을 튕겨내려 애쓴 흔적은 보이나 캐릭터와 공감이 되지 않기에 이야기는 겉돈다. 지극히 불행해 보이던 한 여인이 어느 순간 쉽게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는 것 따위는 작가의 욕심이 지나쳤다고 말해준다.

또 청이가 새로 정착할 때마다 세밀히 묘사되는 사창가의 모습은 가독력을 떨어뜨린다. 무언가 곁가지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았던 ‘태평천국운동’에 관한 부분은 후에 한마디로 마무리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추스르는게 버거웠다는 방증이다 한중일, 괌을 아우르고 제국주의와 상업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녹여내기엔 ‘소설’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다. 즉 진중권이 자주 말하는 ‘데우스엑스마키나’가 자주 사용된다. 무엇보다 황석영은 여성의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하루키 소설이 보여주는 예의 ‘여성의 마음을 훔친 듯’한 어찌할 수 없는 공감을 느끼기 힘들다. 지나치게 보듬으려는 노작가의 욕심이 곳곳에 묻어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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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12-28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무척 재미있게 봤는데. ㅎㅎ 어쩜 여성의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했는지 대단하다고 극찬을 했어요; 남자가 생각하는 여성의 심리가 대체 어떤건지 궁금해지네요.(하루키의 여성상은 너무 남성주의적 판타지라고 보거든요) 암튼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제가 볼 땐 황석영은 하루키에비할 작가는 아니라고 봅니다.

연휴 내내 책 많이 읽으셨네요. 전 부어라마셔라 하느라 아직도 헤롱헤롱 '-'

바밤바 2009-12-28 16:12   좋아요 0 | URL
이야~ 난 오늘부터 부어라 마셔라~ ㅋㅋ
뽀님 좋은 연휴~~ㅎ
 
객지 황석영 중단편전집 1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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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젊은 시절 단편 모음이다. 단편이기에 호흡은 짧고 재미난 시도도 많아 보인다. ‘아우를 위하여’에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았고 ‘입석 부근’에선 김훈의 느낌도 났다. 특히 소설이 묘사하는 60년대 풍경은 서사보다 더 진득한 울림을 줬다. ‘객지’에서 이야기한 당시 노동자의 삶은 투박한 묘사만으로도 절절했고 지금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에 앎의 기쁨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시 노동환경이나 임금구조 같은 것들. 무엇보다 ‘개밥바라기별’에 나온 ‘공사판 아저씨’가 잠시 언급되는 듯 하여 반가웠다.

그의 단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징하다. 김연수 식의 꼬임이나 김훈이 보인 문장에 대한 지나친 탐닉도 보이지 않는다. 글로 그의 소설을 다시 매듭짓는 건 덧없다 하겠다. 그래도 덕분에 황석영이 왜 이야기꾼인지 알게 되었다. 최근에 나온 소설들보다 좀 더 살냄새가 많이 난다. 지금의 다습고 관조적 시각도 나쁘진 않으나 이야기를 지나치게 벌려 놔 다소 헐거운 근작(近作)들 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엔 좀 더 땅에 가까운 이야기를 했더랬다. ‘심청’이나 ‘바리데기’에서 바다를 아우른 그의 ‘구라’가 다소 미진한 느낌이 들어 사족(蛇足)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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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의 경제학 - 본능 속에 숨겨진 인간 행동과 경제학의 비밀
비키 쿤켈 지음, 박혜원 옮김 / 사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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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는 Instant Appeal 이다. 본능의 경제학이라 명명된 이유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익숙한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책은 재미있다. 사례도 풍부하다. 1982년 1월 13일 워싱턴 DC에서 일어나 에어플로리다 소속 보잉 737기의 사고는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의 잠언과도 궤를 같이 한다. 글래드웰은 한국의 수직적 문화가 완곡어법을 발달 시켰고 그게 괌에서 있었던 비행 사고의 원인이라 했다. 비키 쿤켈도 마찬가지로 위계 질서라는 ‘신성한 소’가 완곡어법을 낳았고 이게 82년 참사의 원인이라 한다. 원인과 결과가 비슷한 사건이지만 해석하는 방식의 다름이 재미를 준다.

‘후크 송’이 유행하는 이유도 이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비틀즈는 ‘she loves you'라는 곡에서 'yeah'라는 단어를 29번 사용한다. 멜로디뿐만 아니라 단어도 묘하게 중독적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단어 yeah 전후로 잠깐의 끊기를 시도한다. ’Can't buy me love'나 'I want to hold your hand', 'Please, please, me' 또한 중독성 단어를 노래 전체에 걸쳐 몇 차례 반복한다. 손담비의 ‘토요일 밤에’나 소녀시대의 ‘Gee'와 같은 경우도 같은 범주로 해석 가능하겠다. 후크 송은 인간의 생체 리듬과 잘 맞는 곡이기에 청중의 ’본능‘을 잘 이용한 사례라 하겠다.

다만 미국 정치인의 사례가 많아 쉽게 와 닿지 않는 점, 뒤로 갈수록 프레임에 맞춘 억지 해석이 늘어난 것은 흠이라 하겠다. 문화에 따라 각기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변수도 많이 일반화하가 어려운 예시도 많다. 무엇보다 사회 문화적 사안을 다루고 있기에 경제학에 국한시킨 책 제목도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이 책은 경제학 책이라기 보단 말콤 글래드웰 류의 사회학 서적에 가깝다. 재기 발랄하면서 연성화된 사회학 서적. 책은 쉬이 읽히고 시간도 얼마 들지 않으니 짬짬이 읽으면 되겠다. 다만 이 책은 1년 전에 외국에서 출판되었고 국내에는 1년이 지난 이번 달에나 나왔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렇게까지 화제가 된 책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중요 일간지에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소개했으며 간만에 그들과 나의 의견이 포개진 괜찮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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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의 역사 - 전화로 읽는 한국 문화사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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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은 미시사로 거시사를 다루길 즐겨한다. 인물과 사상에서 연재하는 그의 글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전화로 보는 한국 문화 훔쳐보기다.

애초 전화는 귀중품이었다. 사교보다는 정말 필요에 의해 전화를 써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화는 필수품이 되었다. ‘소통의 과잉’ 시대가 일어난 거다. 책은 전화에 대한 언급을 하다 전화와 관련된 산업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책이 뒤로 갈수록 지루해지는 이유다. 맺는말의 그 올곧은 맺음이 있지 않았다면 독자는 이 책을 읽고 많이 공허했을 테다.

강준만은 한국에서 전화가 종교의 위치에 오른 이유로 일곱 가지를 제시한다. 첫 째, 고독으로부터의 탈출 욕구. 1990년대 들어 급속하게 붕괴되는 공동체를 경험하던 한국인들이다. 기술적 통신수단을 사용해서 타인과 아직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확인해보길 갈망했던 문화적 배경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초고밀집사회에서 동질적 한국인들은 서로 부대끼며 사는 걸 사람 사는 것 같다고 말하며 늘 빨리빨리를 외칠 정도로 성격이 급하다. 휴대 전화가 없는 사람이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욕을 먹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 있다. 김택근은 “휴대전화는 인간에게서 자꾸 여백을 앗아간다. 전화를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어 있다. 내가 엿보듯 누군가도 날 훔쳐본다. 우리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고 말한다. 윤영민은 “문자메시지는 고독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지만 역으로 고독과 고립을 참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고독의 역설이다.

둘째 이유로 한국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는 것을 든다. 전석호는 “우리는 어느 사회계층이든 즐겁게 어울리고 휴식을 취한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폐쇄적 공간에 몰입하게 되고 전화에 탐닉하게 된다. 텔레비전 시청이 손꼽히는 여가 선용 방법으로 부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옥외 여건이 넉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은 스트레스 폭발을 개인적이기 보다 집단적인 표출로 드러내며 이것은 휴대폰이 정치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걸 시사한다. 한국정치는 카타르시스 기능이 유난히 발달해 있다. 헌데 이런 기능은 일시적이고 기만적이기에 다른 스트레스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가 기본적으로 ‘반감의 정치’라는 건 그것이 스트레스 해소의 사이클을 형성한다는 방증이다.

세 번째 이유로 공사구분의식이 희박한 한국 문화를 꼽는다. 피에르 레비는 ‘디지털 시대의 가상 현실’에서 ‘뫼비우스 효과’를 말했다. “이런 뫼비우스 효과는 여러 영역 속에서 변화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 고유한 것과 공통적인 것과의 관계, 주관과 객관의 관계, 지도와 영토의 관계,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한계는 더 이상 분명치 않다. 장소와 시간이 뒤섞인다. 분명한 경계가 없어지고 공과 사의 개념이 사라진다.” 한국은 가상화를 들먹일 것도 없이 문화적으로 공사구분의식이 희박하다. 핸드폰 번호는 사적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공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국에선 휴대 전화가 울리면 즉각 받는 것이 에티켓이 되었다. 휴대전화 소리는 새로운 공공 음악이 됐다. 이런 배경에는 한 세대 이상 지속된 식민 통치의 경험, 한국 전쟁, 한 세대에 걸친 강압적 권위주의 통치 때문에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없게 된 이유가 크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선 집단주의적 가치에 충실해야 했지만 자신과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각자도생하거나 개인적 연고에 의존하는 수밖엔 없었다. 결국 한국에선 공적으로 발표된 것도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휴대전화는 개인화를 심화시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늘 집단화와 연결돼 있다.

네 번째 이유는 한국이 인맥사회라는 거다. 한국인은 인맥을 정당한 능력으로 간주한다. 어떤 일을 해결할 때 학연과 지연, 혈연을 찾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허나 부탁한 일이 닥쳐서 전화하면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 일상적으로 전화정치를 해둬야 한다. 연고가 없으면 꾸준하게 전화 문안인사를 드려야 한다. 안부전화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대단한 홍보 자산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에서 유명 연예인과 자연스레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란 걸 과시하는 게 고정메뉴로 자리 잡았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전문브로커들도 전화 통화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한다.

다섯 번째 이유로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초강력 1극 구조 사회라는 것을 든다. 그렇기에 중심이나 상하계층 구조가 없는 전화 커뮤니케이션을 한풀이 하듯 저항적으로 즐긴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가치 패러독스 현상이다. 이는 평소 삶에 녹아있는 가치와 정반대되는 가치를 의도적 활동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역설이다. 미국은 평소 개인주의적으로 살기에 공동체주의에 피곤함을 느낄 정도로 치일 일이 없다. 반면 한국은 공동체에 치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집단주의적이기에 공동체주의에 대해 피곤하게 생각한다. 사회적 영역에서 그걸 피하게 되는 것이다. 전화는 본질적으로 초강력 1극 구조에 저항하는 미디어다. 티비나 라디오는 중심이나 상하 계층적 구조가 있다. 인터넷마저 포털이란 중심이 있다. 전화는 1대1 관계일 뿐이므로 한국형 평등주의에 잘 어울린다. 또 전화는 위험부담 없는 안전한 만남을 증가시켰다. 헌데 서열이나 계급이 동등하거나 낮은 사람과의 약속은 높은 사람의 전화에 의해 취소되거나 변경도리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항상 만들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항상 취소될 수 있는 상황,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붙인다. 결국 한국처럼 원래 사전 약속문화가 약하고 위계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약속이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나라에서 휴대전화는 기존 권력구조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면이 있다. 휴대전화가 사실상 노동 감시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섯 번째 이유는 한국의 ‘구별짓기’문화다. 전화는 1990년대 이전까지 특권이었고 1990년대부터 오락이었으며, 2000년대 들어선 종교가 되었다. 휴대전화 교체주기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게 이것을 잘 드러낸다. 한국은 여전히 초고속 압축 성장을 겪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뒤진 걸 정보화시대에 만회하겠다는 의지로 풍만하다. 디지털 경제는 속도경영을 요구한다. 새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빨리 내버리는 정보처리 방식이 ‘냄비근성’과 잘 맞아 떨어진다. 얼리 어답터 층이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나라로 한국이 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달리보면 구습타파에 능하고 새로운 도전을 사랑하는 진취적 민족이라고 긍정평가할 수도 있겠다.

일곱 번째 이유는 휴대전화가 국민적 자존심과 국민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적 배경이다.

강준만의 책을 정리하는 형태로 서평을 써봤다. 정리하는 일이 상상하는 일만큼 창의성이 요구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올 곧으려 노력하는 강준만의 노력이 근사해 보인다. 이 책은 사소한 사물 하나에도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는 걸 가르쳐 준다. 휴대폰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 진정 좋은 책이라면 이 책은 좋은 책의 한 갈래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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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0-02-01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 꽤 좋은 정보인데요. 제가 휴대전화와 관련한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이 도움될 것 같아요. 이렇게 정리를 잘 하시다니... 이것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것, 창의성이 요구된다는 것, 글 써 본 사람이라면 다 압니다. 덕분에 잘 읽고 갑니다. 저도 구입해야겠어요. 인용할 게 많아요.

바밤바 2010-02-06 17:14   좋아요 0 | URL
와우. 기대할께요.^^ 강준만은 요즘 자기 이야기보단 남의 이야기를 자주해서 그만의 특징이 다소 바랜듯 합니다. 화이팅!!ㅎ
 
레이첼 결혼하다 - Rachel Getting Marri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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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카메라는 불친절하다. 홈비디오를 찍듯 등장인물을 훑는다. 눈에 띄는 미모를 가진 ‘킴’이 보인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그녀다. 끽연(喫煙)을 하고 육두문자를 남발한다.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지만 쉽게 다가설 순 없다. 타이틀에 나오는 레이첼은 그녀의 언니다. 이야기는 이 결혼식에서 발화점을 찾는다.

영화는 사소해 보이는 말다툼에서 가족의 상처를 드러낸다. 약물 중독으로 인생을 낭비하였던 킴이지만 가족의 지나친 관심 혹은 경계가 불편하다. 묘한 긴장의 분위기엔 킴의 동생 에단이 흐르고 있다. 에단은 킴이 약물중독 상태에서 운전한 차를 타고 가다 호수에 빠져 익사했다. 에단은 킴에겐 끝까지 짊어지고 갈 ‘스티그마타’이고 가족에겐 그 이유가 어쨌든 상처다. 모두가 봉합해 놓았던 상처가 결혼식을 기화로 폭발한다.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생채기다. 애써 괜찮은 척 하려 했던 깊은 배려가 모질게 상처를 후벼 판다. 소설가 김형경의 말에 따르면 애도(哀悼)를 충실히 하지 못한 여분의 정서가 드러나는 거다.

결국 가족 모두는 혼란스러워 한다. 레이첼의 임신 사실이 터지려던 상처를 봉합하는 듯하지만 대증요법(對症療法)일 뿐이다. 결국 킴이 차사고가 나고 제 상처를 문신으로 드러내고서야 다들 마음을 눅인다. 클리셰해 보이기도 하다. 허나 조나단 드미 감독은 극(劇)적인 분위기보다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춘 연출로 진부함을 이겨낸다. 다들 조금은 아픈 채로 제 삶을 향해 떠난다. 이혼한 부모도 결혼한 언니도 그들 각자의 삶에서 햇살처럼 웃으며 최선을 다한다.

영화의 연출은 다소 산만하다. 루즈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아 있으며 미용실에서의 우연과 같은 ‘약한고리’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래도 사람의 동선을 따라가듯 찍은 카메라가 이런 무리수 또한 일상으로 비치게 한다. 그들 각자의 레이첼과 얽힌 추억 읊조림은 킴의 상처 드러내기로 이어지고, 장인과 사위의 그릇 빨리 씻기 경쟁은 에단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을 보여준다. 이렇듯 사소한 일상에 상처가 있다는 이야기를 가벼운 카메라는 묵직하게 보여준다. 사뭇 느리게 진행되지만 각 이야기의 매듭이 적절히 묶여있다. 성긴 고리를 이어주는 단단함이다.

재미있는 건 우리와 다른 결혼 풍습이다. 이들은 결혼 전날 축가 연습을 하며 하나의 축제로 결혼을 맞이한다. 허겁지겁 결혼을 끝내고 일 하나를 치러냈다는 뿌듯함을 주는 우리와는 다르다. 그런 삶의 여유와 어울림이 부러웠다.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결합과 인도식 결혼식을 하는 그 문화적 다양성 또한 영화 자체의 메시지보다 더 근사한 울림을 준다. 쉽게 이혼을 하고 또 쉬이 사람을 만나는 그들의 풍습엔 ‘현실을 즐기라’라는 아포리즘이 담겨 있을지 모른다. ‘정(情)’이란 말로 모든 걸 견디고 보듬고 사는 우리네 모습도 아름답지만 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그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아마 그 근사한 결혼이 준 행복의 이미지 덕분일 테다.

킴의 아비도 빨리 불안을 잊고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누렸으면 한다. 그는 한국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속 깊고 자상한 아버지 같은 모습이다. 그 속 깊음이 킴의 상처를 드러낼 기회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마음속으로만 울게 했다. 조금은 그 웅숭깊은 속을 고백으로 채워야 멀어진 그들 각자가 바투 이어질 듯하다.

죽음에 대한 문화가 다르고 삶을 즐기는 방식이 다른 한국인인 내가 이 영화를 즐겼다는 건 이 작품이 수작이라는 방증(傍證)이다. 스케치 같은 사소한 묘사로 실루엣을 그려내고 속마음을 보여주는 감독의 역량 덕이다. 내 마음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이렇듯 아물었으면 한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였지만 비워진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우는 건 없어진 다리 한 쪽을 목발로 메우는 것 마냥 끝없는 허전함이다. 그 허전함을 이겨내는 게 삶이란 걸 언제가 읽은 니체의 책에서 본 듯하다. 그걸 견디는 이를 니체는 ‘위버멘쉬’라고 했다. 초인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초월적인 어떤 것을 동경하는 자는 아니다. 오히려 지금 현실에서 낮은 포복을 하다 살갗이 벗겨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자다. 그러기에 위버멘쉬는 극복하는 자이지만 초월이 아닌 현실의 생생한 결을 안고 넘어가는 사람이다.

이런 위버멘쉬는 삶의 부정성을 단지 긍정함으로써 극복하려는 자가 아니다. 삶의 부정성을 받아들이면서, 삶에 긴장감을 끊임없이 부여하며 그 부정성을 극복해가는 자다. 그러기에 위버멘쉬는 어쩔 수 없이 삶을 주어진 것으로 체념하거나 만족 혹은 이해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삶의 불안, 갈등, 고통을 회피하며 초월적 존재를 동경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위버멘쉬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찾아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습관의 껍질에서 벗어나 결과에서 과정으로, 상승에서 몰락으로의 변용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몰락은 삶을 파탄으로 이끄는 몰락이 아니라 이전의 습관적 자신에 대한 몰락이며 새로운 극복의 계기를 위한 몰락이 되어야 한다. 위버멘쉬의 극복은 인간 자신에 내재한 자유스러운 긍정에 따른 것이다. 이것은 자유정신을 통해 가능하다.

말이 길었다. 이 영화는 위번멘쉬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김형경의 에세이와 호흡을 같이 하는 영화다. 에단의 죽음, 부모의 이혼, 언니와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긍정한다면 킴은 제 상처를 오롯이 극복할 테다. 허나 니체 또한 이런 모진 삶을 견디지 못해 광기에 사로잡혔기에 그러한 경지는 실로 어렵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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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2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런..
아까 쓴 댓글에 "위버멘쉬" 로 다시 댓글 남기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또 보네요..^^

바밤바 2009-12-21 22:32   좋아요 0 | URL
헛^^;; 신기한데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