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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의 역사 - 전화로 읽는 한국 문화사 ㅣ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1월
평점 :
강준만은 미시사로 거시사를 다루길 즐겨한다. 인물과 사상에서 연재하는 그의 글을 봐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전화로 보는 한국 문화 훔쳐보기다.
애초 전화는 귀중품이었다. 사교보다는 정말 필요에 의해 전화를 써야 하는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화는 필수품이 되었다. ‘소통의 과잉’ 시대가 일어난 거다. 책은 전화에 대한 언급을 하다 전화와 관련된 산업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책이 뒤로 갈수록 지루해지는 이유다. 맺는말의 그 올곧은 맺음이 있지 않았다면 독자는 이 책을 읽고 많이 공허했을 테다.
강준만은 한국에서 전화가 종교의 위치에 오른 이유로 일곱 가지를 제시한다. 첫 째, 고독으로부터의 탈출 욕구. 1990년대 들어 급속하게 붕괴되는 공동체를 경험하던 한국인들이다. 기술적 통신수단을 사용해서 타인과 아직도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확인해보길 갈망했던 문화적 배경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초고밀집사회에서 동질적 한국인들은 서로 부대끼며 사는 걸 사람 사는 것 같다고 말하며 늘 빨리빨리를 외칠 정도로 성격이 급하다. 휴대 전화가 없는 사람이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욕을 먹는 이유가 이런 배경에 있다. 김택근은 “휴대전화는 인간에게서 자꾸 여백을 앗아간다. 전화를 지니고 다닌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게 되어 있다. 내가 엿보듯 누군가도 날 훔쳐본다. 우리 삶은 더욱 고달파졌다”고 말한다. 윤영민은 “문자메시지는 고독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지만 역으로 고독과 고립을 참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고독의 역설이다.
둘째 이유로 한국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는 것을 든다. 전석호는 “우리는 어느 사회계층이든 즐겁게 어울리고 휴식을 취한 공간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폐쇄적 공간에 몰입하게 되고 전화에 탐닉하게 된다. 텔레비전 시청이 손꼽히는 여가 선용 방법으로 부상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옥외 여건이 넉넉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인은 스트레스 폭발을 개인적이기 보다 집단적인 표출로 드러내며 이것은 휴대폰이 정치적 무기로 활용될 수 있는 걸 시사한다. 한국정치는 카타르시스 기능이 유난히 발달해 있다. 헌데 이런 기능은 일시적이고 기만적이기에 다른 스트레스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가 기본적으로 ‘반감의 정치’라는 건 그것이 스트레스 해소의 사이클을 형성한다는 방증이다.
세 번째 이유로 공사구분의식이 희박한 한국 문화를 꼽는다. 피에르 레비는 ‘디지털 시대의 가상 현실’에서 ‘뫼비우스 효과’를 말했다. “이런 뫼비우스 효과는 여러 영역 속에서 변화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관계, 고유한 것과 공통적인 것과의 관계, 주관과 객관의 관계, 지도와 영토의 관계,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예로 들 수 있다. 한계는 더 이상 분명치 않다. 장소와 시간이 뒤섞인다. 분명한 경계가 없어지고 공과 사의 개념이 사라진다.” 한국은 가상화를 들먹일 것도 없이 문화적으로 공사구분의식이 희박하다. 핸드폰 번호는 사적인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공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한국에선 휴대 전화가 울리면 즉각 받는 것이 에티켓이 되었다. 휴대전화 소리는 새로운 공공 음악이 됐다. 이런 배경에는 한 세대 이상 지속된 식민 통치의 경험, 한국 전쟁, 한 세대에 걸친 강압적 권위주의 통치 때문에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없게 된 이유가 크다.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선 집단주의적 가치에 충실해야 했지만 자신과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각자도생하거나 개인적 연고에 의존하는 수밖엔 없었다. 결국 한국에선 공적으로 발표된 것도 사적 네트워크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 휴대전화는 개인화를 심화시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늘 집단화와 연결돼 있다.
네 번째 이유는 한국이 인맥사회라는 거다. 한국인은 인맥을 정당한 능력으로 간주한다. 어떤 일을 해결할 때 학연과 지연, 혈연을 찾아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허나 부탁한 일이 닥쳐서 전화하면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 일상적으로 전화정치를 해둬야 한다. 연고가 없으면 꾸준하게 전화 문안인사를 드려야 한다. 안부전화를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 대단한 홍보 자산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에서 유명 연예인과 자연스레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란 걸 과시하는 게 고정메뉴로 자리 잡았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전문브로커들도 전화 통화로 자신의 역량을 과시한다.
다섯 번째 이유로 한국이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초강력 1극 구조 사회라는 것을 든다. 그렇기에 중심이나 상하계층 구조가 없는 전화 커뮤니케이션을 한풀이 하듯 저항적으로 즐긴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가치 패러독스 현상이다. 이는 평소 삶에 녹아있는 가치와 정반대되는 가치를 의도적 활동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하는 역설이다. 미국은 평소 개인주의적으로 살기에 공동체주의에 피곤함을 느낄 정도로 치일 일이 없다. 반면 한국은 공동체에 치인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집단주의적이기에 공동체주의에 대해 피곤하게 생각한다. 사회적 영역에서 그걸 피하게 되는 것이다. 전화는 본질적으로 초강력 1극 구조에 저항하는 미디어다. 티비나 라디오는 중심이나 상하 계층적 구조가 있다. 인터넷마저 포털이란 중심이 있다. 전화는 1대1 관계일 뿐이므로 한국형 평등주의에 잘 어울린다. 또 전화는 위험부담 없는 안전한 만남을 증가시켰다. 헌데 서열이나 계급이 동등하거나 낮은 사람과의 약속은 높은 사람의 전화에 의해 취소되거나 변경도리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되었다. 이것은 항상 만들어질 수 있으며 동시에 항상 취소될 수 있는 상황,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붙인다. 결국 한국처럼 원래 사전 약속문화가 약하고 위계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약속이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나라에서 휴대전화는 기존 권력구조와 관계를 강화시키는 면이 있다. 휴대전화가 사실상 노동 감시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섯 번째 이유는 한국의 ‘구별짓기’문화다. 전화는 1990년대 이전까지 특권이었고 1990년대부터 오락이었으며, 2000년대 들어선 종교가 되었다. 휴대전화 교체주기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다는 게 이것을 잘 드러낸다. 한국은 여전히 초고속 압축 성장을 겪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뒤진 걸 정보화시대에 만회하겠다는 의지로 풍만하다. 디지털 경제는 속도경영을 요구한다. 새것을 빨리 받아들이고 빨리 내버리는 정보처리 방식이 ‘냄비근성’과 잘 맞아 떨어진다. 얼리 어답터 층이 세계에서 가장 두터운 나라로 한국이 꼽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달리보면 구습타파에 능하고 새로운 도전을 사랑하는 진취적 민족이라고 긍정평가할 수도 있겠다.
일곱 번째 이유는 휴대전화가 국민적 자존심과 국민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 경제적 배경이다.
강준만의 책을 정리하는 형태로 서평을 써봤다. 정리하는 일이 상상하는 일만큼 창의성이 요구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올 곧으려 노력하는 강준만의 노력이 근사해 보인다. 이 책은 사소한 사물 하나에도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다는 걸 가르쳐 준다. 휴대폰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 진정 좋은 책이라면 이 책은 좋은 책의 한 갈래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