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 소통의 기술, 세상을 향해 나를 여는 방법
유정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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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인 중 한 명이 위 필자에게 수업을 들었다 한다. 그녀는 자신감을 강조하며 ‘니들이 세상의 벽에 부딪혀 아파하는 건 제 자신을 믿지 못해서이다’ 라며 나르시시즘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러한 강조는 사뭇 현실과 괴리되어 보였고 제 자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평하는 잘난자의 오만까지 느꼈다고 지인은 전했다. 참고로 지인은 서울대가 아닌 타 학교에 다닌다. 즉 서울대 학벌도 아니고 그녀처럼 예쁘지도 않다. 이 책 서울대 말하기 강의는 ‘서울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학벌이란 공통 분모위에서 시작하여 외모에 자신이 있어야만 빛을 발하는 건지도 모른다.

 유정아는 서울대 출신에 아나운서도 했다. 그녀의 프로필을 보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그닥 어려움이 없는 듯하다. 삶의 표피만 보고 판단했기에, 심층에 깔린 그녀만의 역경을 간과했을지 모르나 그녀의 자신만만한 글은 내 심증을 더 강하게 해준다. 무엇보다 타인과 소통을 하기 위해선 그이와 눈높이를 맞추는 ‘공감’의 능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프로필은 공감을 자아내기는커녕 스스로의 부족함을 돌아보게끔 한다. 무엇보다 타인에게 해주는 충고란 많이 아파한 후 간절한 고백의 형태로 이뤄지는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여기기에 그녀의 이 딱딱한 글은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특히 수업 텍스트와 같은 구성과 ‘밥 먹으면 배부르다’와 같은 뻔한 아포리즘의 나열은 필자가 책을 쉬이 만들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1분 만에 수강신청이 완료된 인기 강의라는 홍보 문구 또한 어느 정도 괜찮은 교양 수업은 대부분 1분 만에 수강신청이 완료되는 현실에 비춰 볼 때 그닥 매력적이지도 않다. 무엇보다 서울대라는 브랜드 네임을 마케팅 포인트로 삼은 판매 전략은 불편하기도 하다. 서울대라는 간판이 후광효과를 일으켜 왠지 거만한 그녀의 표지 사진을 한껏 추어올렸으니 책의 마케팅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마치 최근 본 가장 최악의 영화인 ‘2012’처럼 먹을 거 없는 작품을 와이드 릴리스로 판매하려는 출판사의 지나친 마케팅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지은 클래식 에세이 ‘마주침’은 꽤나 좋았더랬다. 이런 감성적이고 유한계급식 글쓰기가 그녀에겐 딱일 듯하다. 고백의 언어가 아닌 명령과 지시의 언어로 가득 찬 위의 책은 어떠한 공감도 이끌어 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출판사의 홍보 전략에 넘어가 책을 구입한, 말 못하는 이들은 별것 없는 레토릭에 화만 치솟았을지 모른다. 나 또한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이 책을 끝까지 읽었지만 알맹이 없는 말의 향연에 괜히 시간만 아까웠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책의 저자는 마리 앙트와네트 같다.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라 했던 그녀처럼 저자 또한 말하기가 힘들면 자신감을 가지세요란 말을 한다. 결국 자신이 갖춘 학벌과 미모가 아닌 제 자신감이 스스로를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끔 했다 여기는, 자기객관화가 덜 된 사람의 글을 읽고 마음이 동할 이들은 누구일까 싶다. 제 자신을 좀 더 반추하고선 반성의 글을 내는 것이 책을 구매한 사람에게 필자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애프터 서비스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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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0-01-2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끔찍한 책이더군요.. 마켓팅에 완전히 당했다는 느낌밖에..

바밤바 2010-01-25 14:2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렇게 책 쓰기도 쉽지 않은데~ ㅎ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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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책을 읽고 나서 좋다는 말을 하기는 쉽다. 듣는 이도 그 정도 표현이면 감내할만 하다. 헌데 좋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이고 일상적이라 가슴을 두드리진 못한다. 말이 가슴에 엉키고 영혼에 스며들려면 조금은 장황해야하고 세심해야 한다. 김연수의 소설에 대해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또한 좋다고 말할 것이다. 부질없을 정도의 짧은 대답이지만 그토록 명쾌하고 가벼운 말이 없다. 왜 좋냐고 하면 그때서야 끝을 알 수 없는 언어의 향연이 시작될 테다. 바지런 피우며 말을 직조하고 생각을 풀어낼 테다. 그 말과 짧은 생각의 단편이 지금 시작된다.

 책은 닿을 수 없는 말과 마음에 관한 이야기다. 김연수는 종종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다 보니 말에 대한 더듬이가 잘 발달 되어 있다. 이 예민한 더듬이가 느끼는 작은 세상을 말로 풀어내기 위해 비단을 뽑아내는 누에처럼 그는 온몸으로 글을 밀어낸다. 또 잗다라한 말의 차이에서 세계의 끝과 시작만큼의 이질감을 느끼고 파고든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나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엔 이러한 이질감이 잘 드러난다. 소통의 부재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일상의 흔적에서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더 많은 말로 그 공간을 메운다. 특히 언어가 다른 이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묘한 설렘과 조그마한 불신은 이야기를 직조하는 고갱이이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같은 언어를 쓰는 이들 사이에서도 드러난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엔 섬이 있어서 애씀만으론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좁힐 수 없고 다리를 놓아 애써 이어 붙일 수도 없다. 섬을 섬으로 오롯이 인정할 때에야 서로 다른 자아는 하나의 해안이 되고 지구를 만든다. ‘기억할만한 지나침’에 나오는 소녀나 ‘내겐 휴가가 필요해’의 전 안기부 직원도 세상에 섭슬리지 못하는 하나의 섬으로 떠다닌다. 그렇게 부유(浮遊)하며 느껴지는 외로움을 누군가는 껴안고 누군가는 저버린다. 특별히 잡초가 무성한 섬엔 바다의 향취만 미만하다.

 무엇보다 추억에 대한 짙은 그리움이 각 단편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 ‘달로 간 코미디언’에선 김득구의 죽음과 그에 얽힌 아버지의 부재가 가슴에 멍울진 한 여인이 나타난다. 아비의 부재가 낳은 짙은 생채기가 추억과 맞물리며 시나브로 옅어진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선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성찰이 드러난다. 어느 노파와 젊은이를 바투 이어주는 한 편의 시와 그에 대한 담론에서, 죽음은 삶의 대립항이 아닌 또 다른 무늬다. 흔적이다. 이러한 죽음의 애달픔과 죽은이에 대한 그리움은 길항작용을 하여 마음에 너울대고 삶의 빈틈에 켜켜이 쌓인다. 그 쌓임이 마음을 다독이고 벌어진 상처를 아물게 한다.

 글을 또 다른 글로 풀어내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다. 사물을 활자화된 텍스트로 옮겨내는 데엔 어느 정도 상상의 공간을 활용할 수 있으나, 글은 글로써 엄연히 존재하기에 운신의 폭이 좁다. 그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선 더 벼려진 말을 써야 되고 한층 웅숭깊은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분의 말은 찌꺼기이고 지나친 화장으로 메스꺼움을 주는 꽃 파는 노파의 지분거림이다. 김연수의 글은 쉬이 익히지 않아 집중을 요구하고 문장은 사유를 담기위해 조금은 늘어져 있다. 다만 자늑자늑 다가오는 사유와 치유의 힘은 ‘생활의 발견’과 같은 깨달음과 가르침을 준다. 낮은 가독성은 쉽게 읽히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은유이고 늘어진 문장은 채워진 곳보다 비어있는 곳이 많은 세상에 대한 늘임표다. 글로 삶을 환원하는 방식이다.

 이 리뷰 또한 지나친 상징어의 남발로 ‘좋다’란 말 보다 못한 촌스러움으로 읽힐 수 있겠다. 어차피 김연수의 글 또한 삶보다 못한 지식인의 ‘스토리 텔링’이라고 보았을 때 이런 촌스러움이 마냥 부질없기만 한건 아니다. 오히려 말은 횡행하고 마음은 어둑해지는 세상에 조그마한 징검다리 중 하나의 짱돌 노릇 정도는 하지 않을까 한다.   

*책을 선물해주신 마음 예쁜 이에게 다시 한번 더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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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20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예요.
저도 참 좋았어요.
'김연수는 종종 번역으로 밥벌이를 하다 보니 말에 대한 더듬이가 잘 발달 되어 있다.'
는 의견에 특히 전적으로 동의. 묘하게 어떤 책은 번역된 책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언제 라님하고 같이 우리집에 초대할게요. 맛난 것도 먹고, 맘에 드는 책을 막 가져가삼 ㅎㅎㅎ

바밤바 2009-11-21 21:27   좋아요 0 | URL
오~ 기대할께요^^ 저도 음반 몇 개 가져갈테니 같이 듣도록하여요~ㅎ
민종 형님은 뭘 가지고 오시려나~ㅎ
 
클래식, 그 은밀한 삶과 치욕스런 죽음 - 불멸의 음반 100 최악의 음반 20
노먼 레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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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브르를 다 돌아다니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테다. 하루에 여덟 시간 정도를 보낸다는 가정하에서다. 물론 그림 하나를 보는 데 10초면 족하다. 그만큼 루브르에는 작품이 많다. 헌데 교향곡은 어떤가. 한 곡에 짧으면 30분, 길면 100분 정도 걸린다. 모차르트의 작품만 다 들어도 한 달은 오디오 앞에서 보내야 할 테다. 미술과 달리 클래식 음악의 시장 규모가 줄어드는 데는 이러한 시간적 제약이 있다. 이뿐만 아니다. 그림을 한 편 보고나면 차 후 봤던 그림인지 아닌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다. 헌데 클래식은 다르다. 교향곡 한곡을 다 들어도 특정 소절이 들었던 교향곡에서 발췌된 건지 아닌지 헷갈리기 일쑤다. 한곡의 교향곡을 들어본 척이라도 하려면 10번 정도는 들어야 한다. 그야말로 엄청난 시간 소모다. 특히 하이든이나 바흐의 곡은 대부분 비슷하다. 이들은 특정한 작곡 기법을 바탕으로 대량의 곡을 양산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다 같은 곡으로 들릴 정도다.

 특히 요즘 같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에선 클래식 같은 문화장르는 덜 매력적이다. 이미 20세기 초, 프로이트는 신경병의 원인으로 고도화된 문화적 축적을 지목했다. 즉 인간이 몇  천년 동안 쌓아올린 지적 성과물을 유지하고 발전해 나가는 데 엄청난 지력이 소모되므로 신경쇠약과 같은 병이 부작용으로 발생한다는 거다. 헌데 21세기 초인 지금은 그때보다 더 많은 지적 성과물이 쌓여져 있다. 이러한 시대에 클래식을 감상한다는 것은 유한계급이나 혹은 제 삶을 충분히 꾸려갈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의 취미일 테다. 클래식의 죽음. 이건 시대의 조류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다.


2.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고파 한다. 글을 쓰는 이는 소설을 남기고 환쟁이는 그림을 남긴다. 음악 하는 이는 곡을 남겼다. 헌데 녹음 기술이 발달하면서 곡이 아니라 연주로도 자신의 존재증명이 가능해졌다. 클래식 음반계가 새로운 곡을 만들기보다 연주에 집중하게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새로운 곡을 만들지 않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아니다. 충분히 많다. 우선 음악 자체를 홍보하는 일이 쉽지 않다. 클래식이란 안정된 타이틀을 얻으려면 시간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데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미 음악 애호가에겐 들어야 할 클래식 레퍼토리만으로도 벅차다. 앞서 지적했듯 한 음악가의 전곡을 오롯이 듣는 데만 해도 몇 달이 걸린다. 과거의 좋은 곡을 놔두고 요즘 음악을 들을 이유가 없다. 물론 다른 장르의 음악은 열외로 한다. 

 그러니 연주로 제 존재 증명하는 데 힘쓴다. 헌데 음반으로 하는 음악 감상이 일반화 되다 보니 다들 비슷한 수준의 연주를 하게 된다. 연주의 차이는 잗다라 하다. 자신은 매우 파격적이라고 연주하지만 같은 곡을 가지고 연주하다 보니 예민하지 않으면 큰 차이를 못 느낀다. 결국 연주 레퍼토리는 바닥이 나고 새로운 곡으로 청중의 귀를 붙잡기도 어렵다. 클래식의 죽음. 기술 진보에 따른 필연이다.

 #이 책은 클래식 음악사의 뒷부분을 이야기하며 연대기 순으로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헌데 책을 보며 이보다 더 도저한 필연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여 생각을 읊조려 보았다. 클래식을 좋아한다 하여도 이 음악이 내재한 지위재적 성격은 여전히 불편하다. 문제는 이러한 지위재적 성격에 클래식을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다. 문화적 구별 짓기를 위한 도구로써 클래식만큼 시간이 많이 드는 게 또 없다. 과시적 취미로 삼을만하다. 참으로 복잡한 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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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1-16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당신이 클래식을 듣는 이유는?
백분을 들일 만큼 무언가 있는거겠지요?

바밤바 2009-11-16 16:10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정신은 그리 강한 것 같지 않으니 시간이 답이겠네요^^
부가 답변은 밑에 써클님이 해주신 듯~ ㅎ

비로그인 2009-11-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 읽으셨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클래식을 듣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만큼 시계가 천천히 가게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연주와 음반에 대한 것, 클래식 음악과 그것을 둘러싼 것들이 문화자본으로서 어떤 영향을 하는지, 레브레히트가 중점을 두고 기술한 것 가운데 어떤 것이 수긍할 만한 것인지..등 생각할 거리는 많아 보입니다.

언젠가 저도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가 있을 듯 하네요..^^
즐거운 월요일 되세요~ (위에 휘님도요 ㅋ)

바밤바 2009-11-16 16:11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았던 거 같아요~
시계가 느리게 가게 한다는 말이 적절한 듯~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일수록 음악과 친해지면 마음이 다습해 질 듯^^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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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자신이 그녀의 첫사랑이길 바라고 여자는 그가 자신의 마지막 남자이길 바란다.’ 야심만만 같은 프로에서 자주 언급되는 진부한 아포리즘이다. 헌데 이 아포리즘은 남자와 여자, 그들 각자의 사랑에 관한 생각을 잘 나타낸다는 데서 되새겨 볼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 남자는 10대 중반에 성욕과 맞물린 열정 덕에 긴긴 밤을 지새우고 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성욕의 알싸한 맛을 알아간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사랑에 관한 다른 정의는 그들 자신의 성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남자는 ‘첫사랑을 절대 잊지 못한다’는 시시한 말도 첫 경험 당시 두려움 따윈 없고 쾌감과 설렘만이 남는 남자의 욕망을 나타낸다. 이에 반해 사회적으로 성이 억압된 여성은 첫 경험을 두려워하고 죄의식을 느끼며 임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한나와 미하엘이 처음 몸을 섞었던 10대 중반과 30대 중반이란 나이는 알맞은 접점이다. 가장 쾌감을 만끽할 시기였기에 둘의 사랑은 깊었고 남들과 달랐다. 또한 쉬이 사위어들지 않을 불꽃이었다. 

 이 영화는 이러한 사랑 놀음에서 파생된 씨줄과 날줄이 적절히 엮여져 있다. 영화를 관통하는 세 가지 관점은 나이차가 많이 나는 연인들 간의 사랑, 아우슈비츠, 그리고 인간이 숨기고 싶어 하는 지독한 약점 혹은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둘의 사랑은 적당히 탐스러운 30대 여인의 농밀함과 육체의 쾌락과 감정적 사랑을 구분하기 힘든 10대의 무분별함 속에서 찬란히 빛난다. 세간의 시선은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기에 더 간절해진다. 파격적이지만 중요한 극 중 장치다.

 헌데 아우슈비츠가 나오며 이야기는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낸다. 한나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 정책에 참여한 과거 경력이 발단이다. 무엇보다 한나 슈미츠라는 이름에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쓴 한나 아렌트를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죄의 범박함과 관료제의 비이성적 구조를 갈파했던 한나 아렌트는, 소설의 한나와 묘하게 오버랩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독일인 특유의 꼼꼼함과 확신이 있었던 한나를 이해하게끔 하는 단초가 된다. 다만 이야기의 구조를 한층 더 깊게 만드는 그녀의 상처가 단순한 아우슈비츠 이상의 말을 자아낸다. 글을 읽지 못하는 한나의 문맹이 말로 풀어지지 못했던 모든 복선의 시발점이었다. 그녀는 문맹을 인정하는 치욕을 세상이 퍼붓는 비난과 긴 수감 생활보다 더 두려웠기에 죄를 인정하고 또 부풀린다. 이 두 가지 중요 포인트가 법정에서 드러나며 이야기는 그녀를 동정하게끔 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미하엘의 무력함에 대한 질타를 가한다. 그녀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비난과 무참히 그를 버렸던 이별의 생채기가 그를 저어하게 만든다. 결국 미하엘 또한 한나 만큼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후엔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게 하는 비겁함이 그의 결혼을 파경으로 이끌고 그의 삶을 비루하게 한다. 그의 끝없는 방황은 누군가와 닮았다. 삶의 또 다른 회전목마다. 상처를 피해 도망만 다니던 그도 결국엔 자신을 치유하기로 결심한다. 한나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하며 말이다.

 그가 처음 읽어주는 책은 오디세이다. 오디세이는 매우 유명한 이야기다. 헌데 단지 유명하고 많이 회자되기에 이 책을 고른 건 아니었다. 그러면 왜 하필 오디세이 일까? 그건 10년의 트로이 전쟁과 10년의 항해 때문에 보냈던 오디세우스의 20년 방황이 남 이야기 같지 않아서 일 테다. 미하엘도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긴 방황을 접고 그의 페넬로페인 한나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무의식적 선택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선택이란 그렇게 진지한 고민 끝에 내려지는 일보단 순간의 감정에 좌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이성에 억눌러져 있던 무의식에 좌우되기 마련이고 엉키고 설킨 무의식이 제 살길을 도모하려 미하엘에게 오디세이를 택하라 한 것이다. 오디세이를 읽으며 그 또한 한나의 문맹만큼 큰 상처로 남은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비겁함’에 대한 씻김굿을 벌였고 제 아픔을 눅였을 테다. 그 후 그는 많은 책을 읽어준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간절함과 첫사랑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이 그를 ‘더 리더’로 만들어 준 것이다.

 헌데 한나는 가석방을 남겨두고 그 날 밤 자살한다. 교도소 내에서도 수녀와 같은 엄격함과 자애로움을 동시에 보여줬던 그녀는 결국 자신을 첫사랑으로 여기는 그 아이와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물론 쇼생크 탈출에서 보여줬던 가석방 후 얼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늙은이마냥 힘겨운 세상을 버거워 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은 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파 뱀에 물려 죽었던 클레오파트라의 심정과 바투 이어져 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그에게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 되었고 무뚝뚝했던 그녀 또한 그를 영원히 가슴에 품은 것이다.

 다만 소설이 주는 잔향은 영화보다 짙지는 않다. 아마 영상이란 매체가 주는 매혹이 소설 속 설명보다 더 농염했기 때문일 테다. 무엇보다 소설을 읽기 전 영화를 보았기 때문에 특정 묘사마다 어떤 장면이 떠올라서 일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 덕에 나는 한나를 더 이해하였고 케이트 윈슬렛이 보여줬던 그 눈빛의 떨림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곧 있음 눈이 켜켜이 쌓여 세상을 하얗게 만들 시절이 다가올 테다. 나도 누군가에게 책 읽어주는 사람이 되어 그이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싶다. 짙은 빛깔의 흔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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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세트 - 전10권 삼국지 (민음사)
나관중 지음, 이문열 엮음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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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우파다. 국내 작가 중 가장 많은 욕을 먹는다. 80년 대 학번 선배들은 그의 책을 안고 세상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심장이 뜨거워졌다고 한다. 헌데 요즘 그에 대한 세상의 대우는 박하다. ‘홍위병’관련 발언이나 촛불 시위에 대한 부정적 언급은 이문열에게 보수 꼴통이란 이미지까지 주었다. 그런 그늘진 구석과 달리 그의 문장은 현란하다. 말은 적당히 리듬감 있고 생각은 웅숭깊다. 사상은 적당히 치우쳐있지만 문장은 명쾌하고 고문(古文)과 범박하지 않은 어휘가 적당히 섞여 맛깔 나는 글을 선사한다. 이 책 삼국지에서도 그렇다. 오히려 대중과 가장 알맞은 접점을 찾았다는 면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삼국지는 무협지처럼 조금은 현란하고 과시적이며 극 중 인과관계는 약간 허술하다. 그렇기에 재미있고 사람들이 좋아한다. 황석영이나 김홍신, 심지어 장정일도 평역을 남겼다. 황석영이나 김홍신은 원전에 충실하다 보니 읽는 맛이 덜하고 장정일은 새로운 시도를 하였으나 삽입된 그림이 더 기억에 남는다. 원작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며 글을 이끌어간 이문열의 삼국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다.  

또한 삼국지는 매우 보수적인 정치관을 갖고 있으며 영웅사관에 기초한 문학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한(漢)나라라는 부패한 국가를 조조 같은 군벌이 뒤집으려는 시도를 사람들은 불편하게 본다. 또한 이런 군웅들 때문에 피폐해져 가는 백성의 삶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시각은 지극히 편협해 보인다. 인맥과 혈연에 의한 정치는 동양적 구습의 절정으로 보이고 지나치게 충성을 강요하는 측면은 전체주의의 맹아로도 읽힌다. 진보적 사관을 가진 이에겐 여러모로 불편하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불편해 하는 좌파 지식인들은 삼국지에선 정도를 뛰어넘는 불편함을 느낀다.

헌데 삼국지가 이야기하는 세상과 현재의 세상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의리가 중요하고 명분이 중요시되며 권력 투쟁은 더 치열해졌다. 달관하지 않는 이상 삼국지가 이야기하는 서사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촘촘한 이야기 구조는 빽빽한 세상에서 살아나갈 박진감을 주고 두서없는 말의 향연은 궤변일지라도 논쟁의 쾌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삼국지를 알지 못하면 현재의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교양서로도 읽을만하다. 특히 한자를 많이 쓰고 시구(詩句)를 많이 삽입하여 고문학을 읽는 듯한 쾌감을 주는 이문열의 삼국지는 적절한 선택이다.

다만 삼국지에 몰입한 나머지 제 자신을 제갈량이나 유비와 같은 인물로 보고선 세상을 폄훼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고에이에서 만든 삼국지 게임을 하고선 허랑방탕한 세상을 비웃으며 온라인에서 마스터베이션 하는 행위는 지극히 삼가야 한다. 김영하가 이에 관한 단편 소설을 쓴 적이 있는 데 중딩 때 내 모습이 떠올라 약간 씁쓸하였다. 컴퓨터 게임이 짜놓은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열패감을 잊으려는 노력은 비루한 삶을 더 침강하게 할 뿐이다. 헌데 와우(WoW)같은 오락이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현실은 삶이 더욱 비루해지고 그 비루함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군상들의 치밀함이 한층 강화된 진실을 말해 준다.

삼국지의 세계는 현실과 닿지 못하는 이상의 세계고 그곳의 몇몇 군상들은 다소 평면적이다. 제갈량이나 곽가의 깊은 헤아림은 감탄을 주지만 현실 속 상대는 삼국지 속 우둔한 그들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삼국지를 읽고 과대망상에 걸리면 안 되는 이유다. 폰 노이만이 이야기한 게임 이론을 바탕으로 봐도 선택은 항상 실시간적이고 상대의 우월전략과 열등전략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게 일어나는 봐, 제갈량의 신묘한 계략은 쉬이 이루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다만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했을 때 보인 재기발랄함이나 평판을 중요시했던 유비의 영악한 올곧음은 배울만하다. 삼국지란 소설이 꾸준히 읽히는 이유다.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이문열의 삼국지는 많은 장점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장점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다만 삼국지에 천착하여 세상을 다 안다 여기는 어쭙잖은 인간들을 주위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너무 어릴 때 삼국지를 읽은 자들이 보이는 폐해 중 가장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적당히 즐기면서 읽다보면 삼국지의 마니아가 돼 있을 테다. 지나치지 않은 공평무사한 마니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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