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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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행크스의 연기는 연기 같지 않다. 자연스럽다. 일상이다. 아카데미가 두 번이나 선택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실로 연기의 최고봉이다. 설경구의 연기는 매우 연극적이다. 최민식은 파토스를 극대화시킨 연기를 보여준다. 송강호는 자연스럽다. 밀양에서 보여준 송강호의 연기는 일상이다. 개인적으로 송강호를 한국 최고 배우로 꼽는 이유다.

이 영화 아바타의 그래픽은 자연스럽다. 어색하지 않다. 그래픽이라고 애써 인지하기 전엔 제 존재를 숨긴다. 게다가 3D로 보면 더더욱 실감난다. 아바타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는 이유다.

영화는 제국주의의 침탈과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두 개의 골조로 한다. 다만 자아 정체성의 혼란은 영화 제목만큼 뻔해 보인다. 오히려 제국주의의 침탈이란 주제가 더 명징하다. 나비 족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은 제국주의 시대의 열강(列强)과 닮아있다. 나비족의 문명을 우습게 알고 그들의 기술적 뒤쳐짐을 무시한다. 나비족을 신비롭게 그린 것에서 ‘오리엔탈리즘’과 비슷한 징후도 느껴진다. 다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의 말 그대로 환영이고 나비족의 가이아적 생태는 실존한다. 20세기 역사와 달리 영화 속 미개인들은 이러한 자연의 힘으로 침략을 이겨낸다.

왜 인간의 영혼을 가진 자가 나비족을 대표하는 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에서 백인이 흑인의 상징적 존재가 되는 그런 부조리함이 겹쳐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상업 영화가 지는 약한 고리 정도로 봐줘야겠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예술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영리한 상업 영화를 만들 뿐이다. ‘터미네이터’에서는 인류의 무한한 기술발전이 초래할 세계의 붕괴를, ‘타이타닉’에선 계급과 사회적 억압기제를 뛰어 넘는 위대한 사랑을 역설했다. 뻔한 주제를 뻔하지 않게 드러내는 그 치밀함이 제임스 카메론의 재능이다. 이 이상을 바라는 건 말 그대로 유토피아다. 즉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란 말이다.

헌데 이 영화에 대한 언론의 평이 재밌다. 동아일보에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상상력을 떠받치는 기술과 자본의 힘 앞에 할말을 잃는다.  ★★★★ (박유희) 

그저 현란한 비주얼만 추구했다. ★★☆ (정지욱)

조선일보에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로운 영상미를 보여준다고는 하지만 볼 내용 자체가 새롭지는 않은, 제임스 캐머런의 보기 드문 범작.★★★ 이상용·영화평론가 

―영화기술의 선구자, 또 한 번 영화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황희연·영화칼럼니스트

한겨레 이지성 기자는 ‘억’소리 나는 볼거리.. ‘싼티’나는 아이디어 라고 말했다.

결국 일간지 기자들은 영화의 콘텐츠 부족을 개탄하는 의견이 다수다. 조선일보는 기자들을 동원하진 않았지만 특이하게 동아일보와 비슷한 평점을 매겼다. 유력 일간지 기자간의 카르텔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다. 상대적으로 낮은 평점은 매체 자체의 영향력에 걸맞은 비판 의식과 달라야 한다는 강박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예의 그 콧대 높음이 역으로 천박하다.

이에 반해 씨네 21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평을 내 놓는다.

★★★★★ 지상 최대의 쇼 김도훈

★★★★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 미래의 영화를 선취했다 김봉석

★★★★ 무섭다, 날개를 단 카메론 감독! 박평식

★★★★★ 신이 질투할까 걱정스러운, Brave New World 이용철

★★★★★ 귀신이 봐도 싼다 주성철

★★★★ 블록버스터 역사의 새 이정표 이동진

★★★★ 앞으로 수년간 이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를 말할 수 없다 황진미

찬사 일색이다. 새로운 황홀경을 체험한 듯하다. 평론가들이 별 다섯 개를 다 주는 작품은 2~3년에 한번 꼴이라고 보았을 때 이런 찬사는 보기 드물다. 이렇듯 영화 전문 잡지와 일간지와의 평가가 꽤 많이 차이 난다. 헌데 영화를 보더라도 영화 평론가들이 일간지 문화부 기자들보다 더 많이 봤을 테다. 물론 이동진 씨는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긴 하지만 그는 조선일보 내에서도 영화 부문에선 에이스였다.

일간지 기자들의 평을 보면 아무래도 케인즈가 이야기한 ‘미인선발대회’ 이야기가 생각난다. 미인선발대회 채점자들은 자신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는 게 아니라 남들이 높은 점수를 줄 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점을 준다는 이론이다. 아바타라는 영화는 세계에 동시 개봉했다. 결국 외국 유력 언론의 평을 듣지 못했기에 일간지 기자들은 눈대중으로 평점을 매긴 듯하다. 영화를 많이 보는 이라면 온당 뻔한 줄거리를 탓할 줄 알았을 테다. 평범함을 비범하게 만드는 제임스 카메론의 장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다. 시오노 나나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면 이렇게 느꼈다지 않나. ‘천재란 결국 평범함 속에서 비범함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본다’라고.

결국 매체 영향력은 크지만 어설픈 전문기자의 아바타 흠집 내기는 실패한 듯하다. 매체 영향력은 작지만 전문적인 영화 평론가의 말이 대중과 일치한다. 간만에 대중과 전문가 평점이 일치하는 영화가 나왔는데 기자들은 그와 같이 호흡하지 못해 아쉽다. ‘다크 나이트’도 대중과 전문가, 나아가선 기자들의 평점이 거의 비슷했다. 아마 국내와 미국의 개봉 일자가 달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게임이론에서처럼 리더가 있으면 팔로어처럼 따라 하기만 되는 게 문화 평이니 말이다. 간만에 제 자신이 리더가 된 일간지 기자들은 어설픈 헤아림으로 핀잔을 맞을 듯하다. 물론 이 글에선 씨네 21 기자들의 평이 옳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그 도그마가 사맛디 아니한다면 글이 거슬릴 수도 있겠다. 참으로 대중은 알기 어렵고 제 자신을 알기는 더더욱 어려운 듯하다. 그래도 너무 정치적 바름을 추구하다보면 그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 힘들다. 간만에 좋은 영화를 보았기에 일간지들의 ‘딴지’가 거슬려 또 다른 딴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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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20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오늘 저녁 9시까지 매진되있어서 못봤어요.. 거참..

바밤바 2009-12-20 23:44   좋아요 0 | URL
3D로 보세요.. 신기함. 앞에서 잿가루가 날리고 사람이 불쑥 틔어나옴~ ㅎㅎ

무해한모리군 2009-12-21 08:26   좋아요 0 | URL
네 24일날 밤에 볼듯해요~ 어찌나 3d만 빨리 매진이 되는지 --;;

바밤바 2009-12-21 15:25   좋아요 0 | URL
이야~ 클스마스이브에 보겠네요~ ㅋ 대단대단^^

마노아 2009-12-21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일반 극장에서 한 번 봤는데 3D로 다시 한 번 보려고 해요. 리뷰 인상깊게 읽었어요.^^

바밤바 2009-12-21 15:26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반가워요^^ ㅋ 저도 이승환 좋아라 하는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ㅎ

Arch 2009-12-2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추천했어요. 바밤바님 눈썰미가 대단한데요^^
저도 제국주의와 정체성, 왜 나비족의 대표가 인간의 아바타인지 등등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좀 더 생각하면 재미있는 얘기가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전 3D로 보진 않았지만 영화 속 장면과 인물들의 움직임이 너무 아름다워서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그나저나 누구누구 빵꾸똥꾸들. 아, 이 말도 아깝다.^^

바밤바 2009-12-21 15:26   좋아요 0 | URL
오~ 누나 방가방가^^ㅋㅋㅋㅋ 역시 아름다운 영화였어~~ ㅎㅎ
 
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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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심드렁했다. 불친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아팠다. 아픈데 끌렸다. 아플수록 몰입했고 그런 몰입이 잔망스럽게 느껴졌다. 상처를 후벼 팔수록 그 피범벅에 오롯이 집중했다. 책과 나와의 거리는 바투 이어져있었지만 소설과 내 삶의 거리는 그토록 먼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이 심란하다. 그들의 아픔을 터럭만큼 느꼈을 뿐인데도 나는 밤새 낮게 울었다.

황석영은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해주는 작가다. 덕분에 고맙고 한껏 우러르고 싶다. 중 2 때 배운 ‘학마을 사람들’과 같은 소설은 상흔(傷痕)의 외피에 불과했다. 이렇게 다소곳이 적나라해야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란 말이 가슴에 여울진다. 왜 전쟁은 슬픈지. 왜 같은 민족끼리의 전쟁은 더더욱 슬픈지. 배웠다. 간만에 마음이 가벼워졌다. 혼령(魂靈)을 내세운 그 에두름 덕인 듯하다. 카타르시스 같은 슬픔이 가벼운 삶을 흔든다. 아직도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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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고미숙 지음 / 사계절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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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미숙 씨에게 수업을 들은 지인들이 있다. 그들의 호불호는 나뉜다. 그녀의 깊은 사유가 좋다는 쪽과, 386 특유의 거들먹거림과 마초 주의적 사고가 싫다는 말. 이 책을 보면 두 이야기 다 수긍이 간다. 우선 인생의 지난함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차원으로의 극복을 강조하는 그녀의 객기를 보자. 삶의 고통을 다른 차원으로 이겨내라는 몽상가적인 타이름이 나온다. 개인의 자지레한 아픔을 환원적으로 일반화시키는 그 무던함에서 386적 오만이 느껴진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생각의 과정은 꽤나 치밀하고 재미있다. 그녀는 마초이면서 공부를 많이 한 사상가가 맞는 듯하다.

 이야기는 잘 읽힌다. 구술문학처럼 입말을 주로 사용해서 그렇다. 애써 젠체하지도 않고 말로 사람을 기죽이려 하지 않는다. 드문드문 푸코적 사유나 들뢰즈의 노마디즘이 주석 없이 언급되지만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소설을 하나의 도그마로 설정하여 담론의 전개했기에 한계가 명확하다. 소설 속 인물에서 진리를 찾고 설파하기에 사유의 기반이 허약할 수밖에 없다. 조정래가 말했듯 소설은 작가의 성향을 오롯이 드러내는 고백의 글에 가깝다. 이렇다 보니 임꺽정과 홍명희는 맞닿을 수밖에 없다. 결국 고미숙이 말한 임꺽정의 노마디즘과 청석골의 꼬뮌주의는 홍명희가 바라마지 않았던 탈봉건주의와 이상사회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물론 홍명희에 대한 언급도 종종 하며 이야기의 치우침을 경계하려 한다. 그러나 서사의 바탕은 역사 속 임꺽정이 아닌 홍명희의 임꺽정이다. 임꺽정이란 이야기가 도그마라는 전제를 독자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소구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미숙은 또 갖바치를 언급하며 그와 같은 공부가 본래적 공부라 강조한다. 요즘 사람들의 공부는 밥벌이를 위한 공부로 삶을 살찌우는 게 아니라 핍진하게 하는 것이라 역설한다. 지극히 온당하지만 사뭇 속세와 괴리된 듯한 그 준엄함이 살짝 거슬린다. 개인적으로 일상의 구접스러움을 이겨내는 사람이야 말로 평범하지만 그만큼 위대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두가 학문에 매진하고 갖바치마냥 신통방통한 능력을 가진다면 삶은 또 다른 차원의 배척과 집단의 다툼이 있을 테다.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며 그 대응으로 개인의 노마디즘을 강화하라는 말이 레토릭으로 들리는 이유다. 자본 없이 실존의 불안을 이겨내기 힘들고 공부만으론 자본을 양산해 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을 읽고서 괜찮은 영화 한 편 보고 난 뒤의 카타르시스와 울림 정도만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현 상황에선 자본 축적과 관련된 모든 게 다 노동이다. 푸코가 말했듯 광기란 말은 언제나 있어왔지만 그 쓰임이 시대에 따라 달랐듯 공부란 말도 이젠 그 의미가 달라졌을 뿐이다.

 고미숙이 쓴 ‘열하일기’와 ‘이 영화를 보라’ 외에도 몇 권을 더 읽은 적이 있다. 예전엔 그녀가 풀어내는 사유에 감동하였고 스스로의 불민함을 탓하였으며 그녀의 다름이 지극히 옳아 보였다. 허나 지인들의 절박함과 스스로의 비루함을 절감하는 시간을 보내며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의 다름은 삶의 탈출구를 제공하기 보단 현실이 얼마나 던적스러운지를 가르쳐주는 고매한 불평이라고 본다. 물론 청석골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거침없이 너나들이하는 모양새는 원시의 힘이 느껴져 좋고 또 지극히 바람직하다. 다만 역사는 이러한 바람직함 속에서 비루함을 드러냈고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더 많은 억압기제를 낳았다. 이것이 현실을 고르디우스의 매듭마냥 얽히게 하였고 모두를 자본을 양산하기 위한 부품으로 일정 기능을 하게 만들었다.

 결국 자유를 꿈꿀수록 현실에서 버둥거리는 사람들에게 지극한 공부는 답이 아니다. 지나치게 명쾌한 해법은 경쾌하지만 공허하다. 아마도 고미숙은 개인의 변화가 사회 변혁을 이끌어 낼 거란 믿음에서 한 말일테다. 허나 현실이 개인을 옮아 매는 방식이 너무나 치밀한 요즘이다. 그 치밀함이 천라지망(天羅地網)과 같다. 위 고사에서 ‘천’에 해당하는 말이 요즘엔 자본이다. 책은 유쾌하지만 삶은 버겁고 책은 명징하지만 삶은 고민의 연속이다. 섭생(攝生)의 기술을 통해 편안한 삶을 살았다는 도가(道家)의 사람들도 현 한국 사회에선 허덕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정신적 성장만으론 삶은 해체하기 어렵다. 제 아무리 세상이 매트릭스라 외쳐봤자 네오와 같은 힘이 없다면 다 부질없을 뿐이다. 고미숙의 글은 재미있지만 그래서 공허하다. 깊은 사유가 두터운 벽을 뚫지 못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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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하는 에디터 - 고경태 기자의 색깔 있는 편집 노하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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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가 김중혁은 이 책에 대해 “글 쓰는 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고경태가 편집장으로 있는 씨네 21의 한 지면에서 말이다. 김중혁의 선의(善意)를 십분 이해한다 해도 다소 의심이 가는 구석이다. 그래서 책을 직접 읽었다. 글 쓰는 이가 반드시 읽어야할 필독서는 아닌 듯하다. 그냥 읽어봄 직한 좋은 책이다.

 책을 읽다 비문 하나랑 비표준어 하나를 발견 했으나 줄을 그어놓지 않아 기억이 안 난다. 편집 기자의 책에도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편집을 다루는 책에선 그럴 순 없다. 그렇다고 책의 진정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사진과 재미있는 예화는 글을 쉽게 읽히게 한다. 다만 사진과 사진을 설명하는 글이 한 페이지에 있지 않고 다른 페이지에 있는 것은 가독성을 떨어트린다. 편집기자로서 좀 더 신경을 썼으면 하는 부분이다.

 기자들이나 블로그를 색깔 있게 꾸미려는 사람에겐 좋은 책이다. 다만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고백이 아닌 객관화로 포장한 건 온당치 못하다. 유혹하는 자가 스스로에게 반해야 하는 건 맞다. 허나 글로 풀어낸 나르시시즘과 자기 정당화는 매력이 떨어진다. 글과 편집으로 누군가를 유혹하는 건 이렇듯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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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15 0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필독서는 아니라는데 동의합니다.. 약간은 어딘가 치우쳐 있다는 느낌도 들고요. 계속 손에 들고, 또 시간날때 들어야 하는가는 의문입니다.

저런 광고구나 소개글은 어쩌면 소비의 사회에서는 오히려 당연한 것일까요..?

바밤바 2009-12-15 20:22   좋아요 0 | URL
책은 재밌어요~ ㅎ 저런 고아고구나 소개글에 대해 고경태 씨는 긍정하는 입장이더군요^^ 논리는 빈약하지만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는 말이었음~ㅎ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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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석영의 세상은 달랐다. 그는 말로 회자되기만 하던 부분을 다룬다. 닿지 못할 세상을 글로 증명하고 몽환적으로 풀어낸다. 이 몽환 속에서 ‘바리’는 치유의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난다. 샤먼과 같이 사람의 영혼을 살필 줄 아는 바리이기에 이 ‘잔혹동화’가 생살 찢기듯 아프지는 않다.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고 내 누이 같은 바리에 대한 연민으로 현실이 사치로 여겨질 따름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회상 장면마냥 정겹고 따스하다. 잗다란 다툼이 곰비임비 일어나지만 그걸 다 넉넉히 안을 수 있는 가족이 있다. 신발을 두고 다투는 언니들은 그득 각자의 절박함을 감안하더라도 흐뭇하다. 70년 대 한국이 연상됐다. 물론 군사 독재와 같은 시대적 문제는 다 훑어내고 전원의 아름다움만 남은 70년 대 말이다. 바리네 가족 또한 북한의 모순적 실상을 걷어 낸 그저 단란한 모둠체일 뿐이다.

 삼촌이 어딘가로 사라진 후 그들의 전원은 지옥이 된다. 아비는 초주검이 되도록 일을 해야 하고 그 던적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도망가 버린다. 어미와 언니들은 다들 흩어지고 바리와 말 못하는 언니, 그리고 할미만 남는다. 고난의 행군이란 역사적 사례가 가족을 유대인마냥 떠돌게 한다. 여기서부터 삶은 스스로 개척할 수 없는 시대의 벽에 부닥치기 시작한다. 고난의 역사가 바리의 삶을 옮아 맨다.

 도강(渡江)하여 제 삶을 찾더라도 삶은 더욱 잔인해진다. 할미가 저세상으로 가고 칠성이의 육체가 땅으로 스민다. 독자가 가장 아파할 부분이다. 바리의 어린 나이가 이러한 아픔을 배가시킨다. 바리는 김기림의 시처럼 공주처럼 지쳐서 허우적댈 뿐이다.

 그래도 바리의 삶엔 구원이 등장한다. 미꾸리 아저씨 덕이다. 요즘 잔인한 이야기를 많이 봐서 그 또한 바리의 삶을 더 비루하게 할까 저어했었다. 허나 그는 속 깊은 사내였고 바리를 자식처럼 아꼈다. 나 또한 내 자랑 같은 친구의 자식이라면 저보다 더 따스히 대하리라 마음먹기도 했다. 가끔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며 책을 읽는다.

 그 후의 삶은 꿈과 현실이 다 성기다. 배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는 처참하지만 견딜만해 보인다. 견딜 수밖에 없기에 제 자신과 현실을 분리해 버린 바리 때문일 테다. 샹 언니가 강간을 당하는 것도 누군가가 배 밖으로 내버려질 때도 그 모습은 비참하기 보단 그럴 수도 있단 생각이 들게 한다. 독자와 사건의 거리를 멀게 하여 잔인한 삶을 그저 하나의 다른 이야기로 비치게 한 의도 덕분일 테다. 한국 고유의 구비문학과 샤머니즘이 섞인 밀항 장면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황석영의 애도로도 보인다. 초경을 늦게 치르고 가슴도 빈약한 바리이지만 짐승 같은 손에 유린당하지 않은 건 차마 그렇게까지 바리를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황석영의 보살핌이다. 리얼리즘 추구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설핏 드러난다.

 그 후에도 바리의 삶은 쉽지 않다. 행복하다가 불행하고 웃다가도 눈물짓는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이 개인의 삶에 이처럼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드물 테다. 물론 소설이기에 가능했을 테지만.

 책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다. 큰 따옴표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즉 이 대화가 소설 속 화자가 발화한 건지 마음으로 말한 건지 바리가 상상한 건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책은 현실에 빗댄 또 하나의 신화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현실과 접점이 많은 또 하나의 신화다. 황구라는 바리데기의 신화를 차용하여 또 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신화가 뻔한 아포리즘으로 맺어지듯 황석영 또한 삶의 희망을 강조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그 진부함이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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