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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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무엇보다 편집이 좋다. 시구(詩句)가 소제목 위에 달려있다. 시를 통해 독자에게 다가간다. 다가옴이 시(詩)처럼 근사하다.

 애도(哀悼)에 관한 이야기다. 애도란 프레임으로 모든 이야기가 파헤쳐지고 분석된다. 자신의 이야기가 고갱이다. 문학에 대한 이야기가 또 하나의 골조를 이룬다. 다만 문학을 잘 읽지 않는 사람은 이 모든 사례가 다소 와 닿지 않을 듯하다. 그래도 상관없다. 꾸준히 ‘좋은 이별’을 해야만 상처가 덧나지 않고 오롯이 제 삶을 살아갈 수 있단 말을 한다. 레시피로 나오는 자잘한 이야기는 다소 사족의 느낌이 강하다. 애도에 관한 좋은 사례로도 충분히 마음을 보살필 수 있기에 그렇다.

 스스로에게 이 책을 적용시켜 보았다. 나또한 책 속 등장인물처럼 스스로를 억제한 적이 있었다. 아비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죽음도 쿨하게 맞이하기 위해, 아니 눈물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증명하는 거라 여기며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보냄을 납득하려 애쓰고 다른 이들을 다독였다. 나를 다독이는 손길은 사치라 여기고 내 마음을 애써 눅였다. 이런 것들이 책에 의하면 내게 상처가 됐을 테다. 물론 이런 억압기제가 나를 어떻게 눌렀는지는 모른다. 헌데 이 책을 읽고 지극히 공감했기에 내게도 ‘좋은 이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작가의 전작 ‘천개의 공감’이 내게 무수한 공감으로 다가왔기에 이 책에 대한 기대도 높았다. 이번 책은 전작과 다르게 커다란 하나의 공감으로 다가온다. 마음에 울림을 주고 좀 더 스스로를 드러내며 살아야 된다는 가르침을 준다. 다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리비도’는 다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많은 사례가 저자의 치밀한 분석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해준다. 저자의 말처럼 이러한 ‘고백’의 글이 범람했으면 한다. 나를 돌아봄이 가장 중요하단 걸 이 책은 기나긴 말로 사근사근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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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12-03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호하지 않는 작가와 장르인데 당신의 리뷰는 솔깃하네요 ^^
꾸준히 리뷰가 올라오니 생각의 호흡을 같이 하는듯해요.

바밤바 2009-12-04 13:25   좋아요 0 | URL
ㅎ 하루에 책 한권씩 읽으려다 보니 일상이 너무 번잡해지는 듯 하네요~
다소 느적느적 살아야겠음~^^;;

Forgettable. 2009-12-06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새들은 제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어렸을 때 인상적으로 읽어서 좋은 작가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천개의 공감]은 그저 그렇더라구요 ㅎㅎ
요즘 리뷰 정말 열심히 쓰시는군용 ^^ 전 책 권태기에요 ㅠㅠ

바밤바 2009-12-06 19:57   좋아요 0 | URL
오~ 뽀님 오랜만~ ㅎ 저도 책 권태기로 빠지려공~ 책을 너무 보면 내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읊조릴 때가 많아서리~ ㅎ
 
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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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씨가 책을 냈다. 얼마 전 백분 토론에서 인자한 모습을 보여준 유시민이다. 글 또한 그런 아취(雅趣)를 풍길지 궁금하였다. 전반적인 인상은 ‘그렇다’라고 할 수 있다. 책에 대한 분석보단 자신을 돌아보는 글이 많았고 그 고백의 언어가 마음을 따스하게 해줬다.

 책은 그의 젊은 시절을 견디게 했던 14권에 대한 소회(所懷)와 현재를 되돌아봄이 주 내용이다. 헌데 이 책에서 언급하는 책 중 읽어 본 것은 2권 밖에 없다. 사기(史記)와 광장. 그렇다고 내 불민함을 탓하기엔 과거의 책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유시민이 이야기한 세 편의 러시아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러시아 역사가 응축된 그 날것의 어휘와 호흡하고픈 마음에서다. 이와 달리 베블런이나 헨리 조지의 책은 중간 과정과 결론만 알면 될 듯하다. 맬서스와 다윈의 책은 결론만 파악해도 된다고 본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란 책에서 말했듯 세상엔 읽지 않아도 되는 책이 참 많다.

 이 중 리영희씨의 책을 선택한건 잘못된 거라며 조선일보가 유시민씨를 한번 깐 적이 있다. 지나친 좌편향은 옳지 않다며 지면으로 불편함을 내비친 것이다. 그 불편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유시민 본인이 영향을 받았다는데 그리 민감할 필요가 있었나 싶다. 아니면 그들에게 리영희란 역린(逆鱗) 같은 민감한 대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유시민은 14권의 책 중 에리히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최고의 책으로 꼽았다. 이 책은 유시민에게 역사와 사회에 대한 개안(開眼)의 기적을 일으켰고, 어느 정도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한다. 역사뿐 아니라 사람의 언어나 행동을 살필 때도 그 상황과 콘텍스트를 살펴야 한다는 가르침도 부가적으로 가르쳐 준 듯 보인다. 헌데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 책은 묘하게 유시민이 정치를 하던 시절을 옹호하고 있다.

 우선 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이야기하며 참여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에 대한 면죄부를 주려 한다. 토지에만 세금을 매기는 이상적 세제(稅制)안을 내놓았던 헨리조지였다. 이런 몽상가적 기질을 옹호하며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허나 예일대 로버트 실러 교수의 말마따나 경제에 상존해있는 투기적 경향과 경제 참가자의 심리를 간과한 참여정부의 실책 탓이 크다 할 수 있다. 종의 기원에 대한 회고에서도 지난 세월을 옹호하는 듯 보인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의 필요악(必要惡)적 성격을 말하며, 신자유주의를 통해 경쟁을 심화 시켰던 지난 정부의 선의(善意)를 주장하는 듯하다. 헌데 적자생존이란 말은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적 진화론에서 말한 개념이지 다윈이 주창한 개념이 아니다. 이 책의 인용구에서도 이 부분은 드러난다. 유시민은 사회적 진화론과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모호한 경계 설정을 통해 의미를 확대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즉 이러한 과잉 경쟁 사회는 다윈이 말하던 세상과는 다른 양태라는 거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을 통한 말은 더 직접적이다. 이런 노골적 옹호를 한데는 분명 제 글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일 테다. 유시민은 이 부분에서 보수언론에 대한 불편함을 명확히 드러낸다. 소설 속 사례와 현재의 사례의 교점을 잘 찾아 스스로의 말에 설득력을 배가시키는 영리함도 보여준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과 카타리나 블룸을 병치시키는 부분에선 독자를 빨아들이는 강한 흡인력도 보인다. 좀 더 처절하고 집요하게 자신의 울분을 표할수도 있었겠지만 침착한 말투로 제 주군을 옹호하고 시대의 야만을 증오한다. 이런 침착함이 글의 설득력을 배가 시켰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게 했다.

 말을 날카롭게 벼리고 무사처럼 휘두르던 유시민이었다. 임을 보내었지만 한층 웅숭깊어진 그의 마음이 이 책을 통해 한층 강하게 다가왔다. 그 살가운 다가옴에 대한 반응이 독서로 드러나려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시작으로 말이다. 일주일 전 로쟈님 서재에 가서 어느 판본이 좋은 지 물어 본 뒤 이 책을 지인에게 선물했었다. 친한 지인이니 그가 다 읽으면 내가 읽을 것이다. 이렇듯 이 한권의 책은 다른 책 14권을 한 번에 읽는 효과를 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책에서 언급한 9권 정도의 다른 책을 직접 읽고 싶게끔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유시민이 가진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예전 글을 읽고 다른 글을 풀어내면서 마음을 눅이고 스스로를 달랬을 테다. 그는 참 좋은 필자고 지식인이다. 그의 정치 행보도 이 책처럼 따스하고 겸손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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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생각들 - 유가에서 실학, 사회주의까지 지식의 거장들은 세계를 어떻게 설계했을까?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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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턴가 세상은 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자본주의는 전 세계 공통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영어는 교통어(交通語)로써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 법 또한 영미법과 대륙법으로 나누어진다. 삼권분립의 원리는 몽테스키외의 사상에서 출발하였고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터넷의 공용어는 영어고 서양 중심의 노벨상엔 동양이 더 환호를 보낸다. 오리엔탈리즘이니 옥시덴탈리즘과 같은 말이 난무하지만 이게 현재의 판세다. 선덕여왕의 김춘추가 이야기 했듯 판세를 읽는 건 어떤 선택을 내리는 것보다 수월하고 또 명징하다.

 이 책은 동양과 서양의 배분을 5:5로 하였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는 시도였는지,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인지는 필자만 알 테다. 이러한 중립성 덕에 책은 소구(訴求)력을 갖지 못한다. 기계적 중립성은 세상을 올바로 갈무리 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알기 위해선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기우뚱한 세상에서 치우침이 아닌 올바른 균형이다.

 무엇보다 동양 사상들은 고루(固陋)한 과거의 것이거나 그 영향력이 지엽적이다. 유가와 도가, 법가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결과물이고 이러한 사상은 오롯이 도그마가 되어 동양의 근대를 지배했다. 서양과 달리 도그마가 타파되거나 새로운 사상이 이어 나가지 못했다. 오히려 도그마에 대한 해석만 달라지고 과거에 대한 희원(希願)만 강해졌다. 맹자에게서 민주주의를 읽고 법가에서 현재의 법치를 읽는다 하나 다 견강부회(牽强附會)다. 현실과 닿지 않는 과거 이야기가 너울대다 보니 책의 긴장감이 현저히 떨어진다.

 이건 서술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필자는 과거 사상을 소개할 때 왕과 신하 중심의 프레임을 차용한다. 대중은 없고 위정자(爲政者)와 지식인만 난립한다. 개인중심의 사상 서술이 갖는 한계일수도 있지만 사상은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때 그 힘을 발휘한다. 대중이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필요가 아닌 위정자의 정치적 목적이 강제한 측면이 강하기에 현 세계를 이해하자는 필자의 의도와 참으로 사맛디 아니하다. 그러한 사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부가적 설명이 따르나 미진하다는 데서 별 차이가 없다.

 서양의 사상을 논할 때도 너무 훑고 지나친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설명을 위해선 책 한권 분량을 다 써도 모자랄 판이다. 헌데 배분의 공정성에 집착한 탓인지 10분의 1만 사용했다. 좀 더 깊은 지식을 얻으려는 사람에겐 수박 겉핥기식 미진함을 남겨 줄 뿐이다. 역사라는 큰 줄기를 사상사로 읽어내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교과서 수준의 원론적 이야기가 난무하여 딱히 재미가 없다.

 고민을 덜한 느낌도 든다. 잔다르크가 말했다는 ‘프랑스를 구하라’라는 말에서 민족주의의 발현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 너무 나이브하다. 서양에선 30년 전쟁 전까지 영토 국가의 개념은 부재했다고 보아야 하며 민족주의도 나폴레옹 전쟁 이후 대두했다는 게 정설이다(물론 이러한 설명이 간단히 나오긴 한다). 오히려 후세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프레임으로 잔다르크의 언어를 변용(變容)게 아닌지 살필 일이다. 무엇보다 잔다르크가 활동했던 중세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활발했다. 그녀가 하느님의 계시(啓示)를 받고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녀의 행동 동기가 국가가 아닌 신이 내려준 소명 때문이라 보았을 때, ‘프랑스를 구하라’라는 말은 후세의 창조물일 결과가 높다.

 글을 쓰다 보니 대중적 이야기를 지향한 필자의 의도가 내 까칠함 때문에 지나치게 폄하되는 듯하다.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다보니 정치(精緻)하지 못한 해설이 눈에 걸려서 일 테다. 무엇보다 황광우 씨는 시인 황지우 씨의 동생으로서 세상과 부딪히며 공부에 매진하신 분이다. 황광우 씨를 좋아하는 지인이 빌려 준 책을 빌려 읽었는데도 이런 선소리나 해대는 거 보면 난 참 많이 부족한가 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글을 쓰다 보니 문장도 섞갈렸다. 시간의 세례를 받아 정치한 문장이 밀려 나와야 하는데 급한 마음이 성긴 글을 남기고 말았다. 그래도 황광우씨가 조금 더 고민해서 글을 썼으면 한다는 사족(蛇足)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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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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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키 소설은 처음이다. 그의 수필은 읽은 적은 있다. 음악에 관한 에세이였는데 좋았다는 느낌이 먼저 떠오른다. 음악에 대한 고상한 취향과 너른 배경 지식이 섬세한 문장을 만나 알싸한 느낌을 줬었다. 루돌프 제르킨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에 관한 고찰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제르킨의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다시 듣기 시작한 건 하루키의 문장 덕이었다.

 소설은 그의 에세이와 달리 오히려 더 사변적이다. 그의 문장은 사람을 샅샅이 훑는 듯 했고 등장인물들은 그의 페르소나 같다. 제 자신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선 이렇듯 정교할 수 없다는 인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구성도 특이하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총 24곡의 이 곡집은 피아노 음악의 구약성서라 불린다. 참고로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이다. 즉 이 두 작품만 있으면 세상 모든 음악이 소멸한다 하여도 인류의 음악적 성취를 재생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거다. 이런 위대한 작품을 모티브로 이야기는 두 개의 겹을 이룬다. 한 여자가 전주곡을 연주하고 한 남자는 푸가로 이어 받는 식이다. 둘은 초등학교 동창이랑 이음매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가 같은 시간대인지도 불확실하다. 불확실하지만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본인의 실존만은 확실한 세상 위에서 둘은 다른 음악을 들려준다. 다만 이 음악은 또 다른 현실(1Q84)이란 틀을 벗어나진 못한다.

 소설은 꾸준히 궁금증을 유발 시킨다. 남자의 세계에서도 달이 두 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설 속 소녀의 글이 그녀의 세상이 새롭게 태어나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헌데 두 개의 다른 이야기는 미세하게 이어져 있기에 언제 그 교점이 드러날지가 1권의 감상 포인트다. 추억의 끈으로만 이어져 있는 둘의 옅은 공통분모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터워져 간다. 이런 두터움은 각자가 푸가와 전주곡을 연주해 내는 데 열심이었기에 가능하다.

 재미있는 부분은 성행위에 대한 묘사다. 하루키의 소설이 섹스를 통해 허무주의를 드러냈다는 평(評)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감당하지 못할 세상의 무게를 가벼이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섹스라는 능동적 행위로 스트레스라는 지극히 일방향적인 공격을 이겨낸다. 남자의 정기적이지만 비윤리적 행위와 여자의 간헐적이지만 방만한 행위가 등장인물들이 느낄 억압 기제를 완화해 준다. 허무주의가 아니라도 성교(性交)는 비워진 마음을 채우는 데 매우 이로운 행위이기에 어떠하든 등장인물에게 도움이 된다. 섹스에 관한 간헐적 묘사는 독자의 마음도 위로해 준다. 등장인물들이 섹스로 제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듯 독자가 독서 중 느낄 여백 또한 성애로 미만해진다. 성감(性感)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마 하루키의 특징인 듯하다. 건조하지만 자극적인 묘사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소설에선 클래식 음악도 꽤나 등장한다. 우선 야니체크의 ‘신포니에타’가 고갱이를 이룬다. 바흐의 평균율이 간간이 귓가에 울리듯 삽입되고 마태 수난곡이 독일어로 읊조려진다. 야니체크의 곡은 워쇼스키 남매가 감독한 ‘브이포 벤데타’ 속 차이코프스키의 ‘1812 서곡’처럼 후반부에 웅장한 울림을 줄 듯하다. 바흐의 구조적 형식을 차용했다면 서두와 결말 부분을 이 음악으로 이어 붙이리란 건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가끔 언급되는 평균율에 대한 이야기는 서사가 무엇에 기반 하는지를 일깨운다. 이야기의 맞물림을 어색해 할 때면 구조적 미학을 중시하는 바흐를 추종한 하루키의 고집이라 여기며 무던히 넘어간다. 마태 수난곡 또한 중요 모티브로 보인다. 마태 수난곡 속 예수가 고난을 당하며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듯 소설 속 밀교 또한 ‘리더’의 수난으로 제 믿음을 증명할지 모른다. 다만 오움진리교의 지하철 테러가 모티브가 되었으므로 수난의 주체가 리더가 아닐 수도 있겠다. 하루키만이 답을 알겠다. 무엇보다 클래식 마니아인 하루키니 등장하는 음악을 허투루 고르지는 않았을 테다.

 이 책은 어젯밤 11시부터 오늘 아침 7시 까지 읽었더랬다. 이 책을 읽으며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의 평균율 연주를 들으려 했다. 이 책처럼 4개의 음반으로 되어있고 각 시디 하나에는 12개의 곡이 들어있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으면 매 책마다 12개의 이야기가 나열되므로 그 맞물림이 수학(數學)처럼 명징했다. 헌데 너무 작위적인 음악 선택 같았다. 평균율을 모티브로한 소설을 평균율을 들으며 읽는다는 건 창의성이 개입할 구석을 말살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 종국엔 말러가 끌렸다. 항상 죽음에 대한 걱정을 달고 살았던 이 작곡가의 번뇌가 소설이 묘사하는 우울한 세계와 맞닿을 듯했다. 지휘자는 번스타인이었다. 로얄 콘서트 헤보우 오케스트라, 뉴욕필, 빈필의 연주가 섞여 있었다. 라이브 레코딩이다. 그의 교향곡 1번, 2번, 3번, 4번,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르가 한 세트인 도이치 그라모폰의 음반이었다. 오늘 새벽의 말러는 다른 때와 달랐다. 소설이란 자양분이 내 몸에 자리 잡아서 그런지 모른다.

 소설은 서사가 중심이다 보니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보는 게 가능했다. 능동적이지 않아도 쉬이 읽혀서 그럴 테다. 미스터리 구조는 뒤로 갈수록 흡입력을 더해갔고 책 속 오밀조밀한 인물 묘사는 하루키의 직관과 통찰력에 대한 자기 과시로도 읽혔다. 물론 하루키의 소설이 처음이었지만 ‘시바 료타료’처럼 명쾌한 인물 분석 덕에 낯설지 않았더랬다. 이제 그 남자의 세계와 그 여자의 세계가 어떻게 포개지는 지 확인할 차례다. 두 세계는 충돌이 아닌 매력적인 콘체르토를 들려 줄 테다. 이야기를 변주하는 능력처럼 음악을 듣는 귀가 발달한 하루키의 섬세함은 그러한 이야기 구조에서 빛을 발할 테니. 2권 또한 오늘 밤을 새워 읽을 듯하다. 하루키가 내 삶을 지나치게 앗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옅은 바람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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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미술관 - 그림이 즐거워지는 이주헌의 미술 키워드 30 이주헌 미술관 시리즈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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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막걸리를 마셨다. 급하게 마시고 많이 마셨더니 스스로를 주체 못하기 시작했다. 여투어 둔 개념어가 튀어나오고 같잖은 애드립이 남발했다. 그건 함께한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전까지 분위기는 괜찮았다. 후배 한명과 철학 박사 한명, 이렇게 셋이서 먹었기에 그제 있었던 대통령과의 대화나 시국에 대한 말로 꽤 생산적이 말이 오갔다. 박사님은 진중권과 강준만을 개인적 연분으로 안다 하였으며 진중권의 공격성에 대한 찬사와 예의 없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나또한 평소 진중권의 언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말을 이어 붙였다. 또 그의 ‘미학 오디세이’와 같은 책은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하는 일종의 ‘구별짓기’식 언어의 성찬이며 과한 레토릭으로 존재증명하려는 지식인의 인정 투쟁이란 사견(私見)을 덧붙였다.

 후배는 ‘구별짓기’나 ‘존재증명’과 같은 언어 또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정 투쟁의 하나로 비친다며 내 미욱함을 탓했다. 선배 또한 나나 진중권이나 별 차이가 없다며 장난 섞인 타박을 가했다. 후배는 기실 내가 자주 쓰는 이러한 어휘가 종종 불편했었다는 고백도 덧붙였다. 내 불민함을 알기에 스스로를 벼리기 위해 이런 말을 쓴다며 되받아치니 그는 정도가 지나치다며 다시금 내 언어를 짓눌렀다. 취기가 올라와 있는 상태인데다 감정싸움을 하기 싫었기에 나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헌데 그 아이의 언어가 밤새 내 머리를 맴돌았다. 덕분에 잠은 오지 않았고 책을 읽었다. 이 책 ‘지식의 미술관’ 말이다.

 이주헌의 글은 쉽다. 기자출신답지 않게 문장은 다소 길지만 섬세하고 꼼꼼하다. 진중권의 ‘이매진’이란 책에서 느꼈던 불친절함은 없다. 이야기는 하나의 키워드에 대한 해설로 시작해 그와 관련된 그림에 대한 설명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상술로 이뤄진다. 한겨레신문에서 기고했던 내용과 교집합도 많았지만 여집합의 푼푼함이 그 교집합을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했다. 신문에 쓴 글이 책으로 묶여 나오려면 이 정도 손봄은 거쳐야 한다고 본다.

 책에서 나오는 키워드들 중 인상 깊은 것은 다음과 같다. 데페이즈망, 트롱프뢰유, 게슈탈트 전환, 왜상, 키아로스쿠로, 쿤스트카머, 베두타, 빅토리안 페인팅. 단지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상징어가 이주헌의 손을 빌려 살아있는 언어가 된다. 역사와 사회적 상황에 대한 충실한 설명은 그림을 더 가까이 느끼게 만든다. 예전 루브르를 가기 전에 미술 관련 서적을 스무 권정도 읽은 적이 있는 데다 후에도 꾸준히 이 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이 책이 가장 많고 유익한 이야기를 담은 듯하다. 다만 상당히 밀도 있는 어휘를 많이 쓰기에 이 분야에 관심이 덜한 사람에겐 보충 공부가 필요해 보인다.    

 어제 술자리 덕에 나는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다. 결론은 지금의 내 부족함이 과거의 어떤 내 모습보다 사랑스럽다는 거다. 현학적 어휘와 잔망스러움이 묘하게 공존하는 게 지금의 나다. 부족함을 채우기 보단 나를 죄고 있던 구접스런 구속들을 버리며 지금의 내가 된 듯하다. 이주헌의 글 또한 그렇다. 지금의 글이 과거 이주헌의 어떠한 글보다 더 좋은 글일 테다. 이주헌의 지금 글은 제 자신을 살찌우기 위한 노력이 누적된 결정(結晶)이다. 이 책은 그가 시간을 허랑히 보내지 않았음을 오롯이 증명한다. 나또한 다사다난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신성우의 ‘내일을 향해’가 아닌 들국화의 ‘행진’처럼 나는 나의 과거를 사랑하며 오롯이 내리는 비를 맞을 테다. 그렇다면 내 인생 또한 이주헌의 책처럼 자랑스레 읽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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