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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평점 :
하루키 소설은 처음이다. 그의 수필은 읽은 적은 있다. 음악에 관한 에세이였는데 좋았다는 느낌이 먼저 떠오른다. 음악에 대한 고상한 취향과 너른 배경 지식이 섬세한 문장을 만나 알싸한 느낌을 줬었다. 루돌프 제르킨과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에 관한 고찰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제르킨의 베토벤 후기 소나타를 다시 듣기 시작한 건 하루키의 문장 덕이었다.
소설은 그의 에세이와 달리 오히려 더 사변적이다. 그의 문장은 사람을 샅샅이 훑는 듯 했고 등장인물들은 그의 페르소나 같다. 제 자신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선 이렇듯 정교할 수 없다는 인상 때문일지도 모른다. 구성도 특이하다.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총 24곡의 이 곡집은 피아노 음악의 구약성서라 불린다. 참고로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이다. 즉 이 두 작품만 있으면 세상 모든 음악이 소멸한다 하여도 인류의 음악적 성취를 재생하는데 무리가 없다는 거다. 이런 위대한 작품을 모티브로 이야기는 두 개의 겹을 이룬다. 한 여자가 전주곡을 연주하고 한 남자는 푸가로 이어 받는 식이다. 둘은 초등학교 동창이랑 이음매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가 같은 시간대인지도 불확실하다. 불확실하지만 데카르트의 명제처럼 본인의 실존만은 확실한 세상 위에서 둘은 다른 음악을 들려준다. 다만 이 음악은 또 다른 현실(1Q84)이란 틀을 벗어나진 못한다.
소설은 꾸준히 궁금증을 유발 시킨다. 남자의 세계에서도 달이 두 개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소설 속 소녀의 글이 그녀의 세상이 새롭게 태어나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른다. 헌데 두 개의 다른 이야기는 미세하게 이어져 있기에 언제 그 교점이 드러날지가 1권의 감상 포인트다. 추억의 끈으로만 이어져 있는 둘의 옅은 공통분모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터워져 간다. 이런 두터움은 각자가 푸가와 전주곡을 연주해 내는 데 열심이었기에 가능하다.
재미있는 부분은 성행위에 대한 묘사다. 하루키의 소설이 섹스를 통해 허무주의를 드러냈다는 평(評)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러한 허무주의는 감당하지 못할 세상의 무게를 가벼이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섹스라는 능동적 행위로 스트레스라는 지극히 일방향적인 공격을 이겨낸다. 남자의 정기적이지만 비윤리적 행위와 여자의 간헐적이지만 방만한 행위가 등장인물들이 느낄 억압 기제를 완화해 준다. 허무주의가 아니라도 성교(性交)는 비워진 마음을 채우는 데 매우 이로운 행위이기에 어떠하든 등장인물에게 도움이 된다. 섹스에 관한 간헐적 묘사는 독자의 마음도 위로해 준다. 등장인물들이 섹스로 제 정신적 긴장을 해소하듯 독자가 독서 중 느낄 여백 또한 성애로 미만해진다. 성감(性感)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아마 하루키의 특징인 듯하다. 건조하지만 자극적인 묘사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소설에선 클래식 음악도 꽤나 등장한다. 우선 야니체크의 ‘신포니에타’가 고갱이를 이룬다. 바흐의 평균율이 간간이 귓가에 울리듯 삽입되고 마태 수난곡이 독일어로 읊조려진다. 야니체크의 곡은 워쇼스키 남매가 감독한 ‘브이포 벤데타’ 속 차이코프스키의 ‘1812 서곡’처럼 후반부에 웅장한 울림을 줄 듯하다. 바흐의 구조적 형식을 차용했다면 서두와 결말 부분을 이 음악으로 이어 붙이리란 건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가끔 언급되는 평균율에 대한 이야기는 서사가 무엇에 기반 하는지를 일깨운다. 이야기의 맞물림을 어색해 할 때면 구조적 미학을 중시하는 바흐를 추종한 하루키의 고집이라 여기며 무던히 넘어간다. 마태 수난곡 또한 중요 모티브로 보인다. 마태 수난곡 속 예수가 고난을 당하며 기독교를 일으켜 세우듯 소설 속 밀교 또한 ‘리더’의 수난으로 제 믿음을 증명할지 모른다. 다만 오움진리교의 지하철 테러가 모티브가 되었으므로 수난의 주체가 리더가 아닐 수도 있겠다. 하루키만이 답을 알겠다. 무엇보다 클래식 마니아인 하루키니 등장하는 음악을 허투루 고르지는 않았을 테다.
이 책은 어젯밤 11시부터 오늘 아침 7시 까지 읽었더랬다. 이 책을 읽으며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의 평균율 연주를 들으려 했다. 이 책처럼 4개의 음반으로 되어있고 각 시디 하나에는 12개의 곡이 들어있다.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으면 매 책마다 12개의 이야기가 나열되므로 그 맞물림이 수학(數學)처럼 명징했다. 헌데 너무 작위적인 음악 선택 같았다. 평균율을 모티브로한 소설을 평균율을 들으며 읽는다는 건 창의성이 개입할 구석을 말살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이어지다 종국엔 말러가 끌렸다. 항상 죽음에 대한 걱정을 달고 살았던 이 작곡가의 번뇌가 소설이 묘사하는 우울한 세계와 맞닿을 듯했다. 지휘자는 번스타인이었다. 로얄 콘서트 헤보우 오케스트라, 뉴욕필, 빈필의 연주가 섞여 있었다. 라이브 레코딩이다. 그의 교향곡 1번, 2번, 3번, 4번,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르가 한 세트인 도이치 그라모폰의 음반이었다. 오늘 새벽의 말러는 다른 때와 달랐다. 소설이란 자양분이 내 몸에 자리 잡아서 그런지 모른다.
소설은 서사가 중심이다 보니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보는 게 가능했다. 능동적이지 않아도 쉬이 읽혀서 그럴 테다. 미스터리 구조는 뒤로 갈수록 흡입력을 더해갔고 책 속 오밀조밀한 인물 묘사는 하루키의 직관과 통찰력에 대한 자기 과시로도 읽혔다. 물론 하루키의 소설이 처음이었지만 ‘시바 료타료’처럼 명쾌한 인물 분석 덕에 낯설지 않았더랬다. 이제 그 남자의 세계와 그 여자의 세계가 어떻게 포개지는 지 확인할 차례다. 두 세계는 충돌이 아닌 매력적인 콘체르토를 들려 줄 테다. 이야기를 변주하는 능력처럼 음악을 듣는 귀가 발달한 하루키의 섬세함은 그러한 이야기 구조에서 빛을 발할 테니. 2권 또한 오늘 밤을 새워 읽을 듯하다. 하루키가 내 삶을 지나치게 앗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옅은 바람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