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 - Solari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람은 사람 사이에서조차 언제나 고독하다. ‘내 마음 아실 이’는 언제나 그렇듯 먼 곳에 자리하거나 아예 닿지 못할 경우가 많다. 어떨 땐 내 마음 또한 헤아리기 어렵고 무엇이 나를 위한 삶인지 명쾌하지 않다.

 그럴 땐 추억에 묻히곤 한다. 누군가와도 공유하지 않는 그들 각자의 추억에 제 자신을 밀어 넣는 거다. 현실의 잗다란 고민도 미래의 끝없는 불안도 따스한 과거와 접하면 다 남의 이야기다. 다들 근사한 추억하나 만들려 애쓰는 까닭도 현실이 버거운 탓이다. 마음만 먹으면 소환할 수 있는 근사한 추억의 장에서 제 못남을 쉬이 잊으려 한다. 그러면 고독하지 않다. 제 자신과 대화하지만 누군가가 제 말을 받아주는 듯한 착각이 실재보다 또렷하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는 그런 영화다. 1972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만든 원작보다 사람 냄새나는 리메이크 작이다. 그만큼 헐겁고 이야기를 따라가기 용이하다.

 영화 속 켈빈은 고독하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한다. 아내의 자살이 제 탓이라 여기며 하루하루 숨쉬기도 버겁다. 그런 부채의식이 현실을 짓누른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딘다.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다. 친구의 영상을 보고 우주선으로 향하는 것도 사명감보단 무딘 삶의 연장선이다. 제 할 일을 하듯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삶의 목적이 없는 자가 보여주는 일종의 체념이다. 제 할 일이란 이렇듯 던적스런 삶을 버티는 거다.

 미스터리한 우주선은 실로 적적하다. 갖가지 생각에 잠기기 좋을 만큼 충분히 여유로운 장소다. 그런 공간이 만들어낸 고적함 탓인지 우주선에서 죽은 아내 레아를 만난다. 꿈이 아니다. 레아는 시각으로도 촉각으로도 실재한다. 공유하는 기억의 결도 비슷하다. 아니, 켈빈과 같다. 레아의 기억이 켈빈의 추억에 오롯이 맞물려져 있는 탓이다. 켈빈은 혼란스러워 하지만 다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견디던 삶에 마침표가 찍히려 한다.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란 기분 좋은 기대에 빠진다.

 우주선에 동행한 승무원은 레아의 존재를 부정한다. 죽은 레아가 실재한다는 건 솔라리스가 만든 일종의 ‘괴물’이기에 가능하다는 거다. 죽어도 곧잘 살아나고 우주선 밖으로 내보내도 옆자리에 누워있는 레아다. 승무원의 말이 실재보다 더 진실에 가깝다는 건 켈빈도 알 고 있다. 결국 기억을 없애지 않으면 그녀는 항상 켈빈 옆에 자리한다. 그림자보다 더 질긴 기억이고 사랑이다. 기억을 버리면 덜 아플 수 있지만 그는 계속 아파하고 싶다. 아파야지만 실존하는 듯하다. 길티플레져 같은 아픔이다. 저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놓지 않는 이유다.

 영화는 이야기 끝머리에 기억의 주체마저 의심의 대상으로 남겨둔다. 영화 속 켈빈이 첫 장면에 등장한 켈빈인지 혹은 솔라리스가 만든 생물체인가에 대한 의문을 통해서다. 이렇게 데카르트가 말했던 명제인 ‘코기토 에르고 숨’은 오롯이 부정된다.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진리는커녕 진실도 없다. 기억은 그렇게 근사하게 부정되고 삶은 그렇듯 지난하게 이어진다. 솔라리스가 실재했는지도 뚜렷하지 않다.

 사람이 힘들 때엔 추억에 몸을 뉘이며 욱신거리는 상처를 눅이곤 한다. 헌데 그런 기억마저 날조된 것이라면 그 무참함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테다. 이렇듯 솔라리스는 약한 자들의 정신적 토대인 추억마저 뒤흔드는 영화다. 나를 나로서 오롯이 서게 하는 게 추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 제기도 가능하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더더욱 알기 힘들다. 아파트인지 직업인지 공들여 만든 몸매인지 알 수 없다. 그저 나를 비참하게 하는 것만 명징하다. 추억을 그리워하고 옛것에 마음을 쏟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결국 삶을 견디기 위한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이 사치로 여겨지는 시절엔 추억은 공짜 아편이다.

 그리움을 실재화 시킨다는 솔라리스도 21세기 한국인의 그리움을 알긴 힘들 테다. 나는 무엇을 그토록 갈망하여 후덥지근한 날에 이리도 시간을 견디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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