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블릭 에너미 - Public Enemi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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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종종 그 자체보다 어떤 상황에서 관람하느냐가 큰 영향을 미치곤 한다. 그렇기에 영화에 대한 말은 나를 돌아봄과 병행해서 행해진다. 퍼블릭 에너미는 이런저런 일로 다소 핍진한 어제 보았다. 그래서인지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과연 핍진함이 영화를 버겁게 했을까. 영화를 보고선 가열 찬 자기반성을 한다. 우선 영화의 만듦새가 아닌 내 미욱함이 영화를 읽어내지 못한 거라 여긴다.

 자신이 없어서 일 테다. 종종 누군가가 격찬하는 작품을 비뚜름하게 읽어낼 때 혼란이 찾아오곤 한다. 내 생각이 맞는 건지. 내 모자람을 감출 수 있는 기회를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놓치는 건 아닌지. 공부가 부족한건 아닌지. 아마 씨네 21의 평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대부분이 격찬을 했다. 

  
  8 차가운 도시 갱스터,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김혜리 

  5 총격전만 잘 찍는 마이클 만 박평식 

  8 세상에서 가장 쿨한 것 중 하나는 마이클 만의 범죄영화 이동진 

  10 아마도, 올해의 영화! 이용철 

  8 도둑의 순정. 이건 갱스터 로맨스 장르 이화정 

  6 ‘내겐 너무 멋진, 나쁜 남자’의 로망 충족 혹은 나르시소스 황진미 
 

  9 진정한 남자의 향기를 느낀다 김종철 

  8 역시 마이클! 편집과 촬영으로 앙상한 서사도 커버한다 유지나

 김혜리 기자를 좋아한다. 페드로 알모바도르를 좋아하는 취향도 나와 닮은 듯하다. 사람의 마음을 두루 헤아리려는 그 마음 씀씀이도 슬겁다. 한 줄 평으로 김혜리의 생각을 읽으려 한다. 그녀는 이 영화에 미만한 남성미 속에 곁가지를 이루는 따스한 사랑에 집중한 듯하다. 헌데 감성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든 해석이다. 그들의 서로에 대한 탐닉과 집착은 충분히 어필하지 못한다. 마이클 만 감독은 이런 부분에서 서툰 듯하다. 그는 남자다. 

 박평식 평론가의 정리가 내겐 맞다. 총격전은 좋았다. 헌데 이 영화가 무얼 말하려는 지 도통 알 수 없다. 말하려는 바가 없으면 즐거워야 한다. 헌데 재밌지도 않다. 조니 뎁은 갑갑해 보이고 크리스찬 베일은 너무 무겁다. 한 사람의 삶을 그냥 옮겨 놓으려 그들 각자를 우겨 넣었다. 헌데 그 삶이 무얼 말하려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마이클 만은 불친절로 관객을 밀어낸다. 그냥 누군가의 삶과 주변인에 관해 영화를 만들었을 따름이다. 

 이와 비슷한 영화가 있긴 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조디악’이다. 조디악 또한 실화를 다루었고 한 사람의 시점이 명징하다. 다소 지루하기도 하다. 헌데 조디악과 퍼블릭 에너미의 울림은 달랐다. 왜 달랐을까. 영화를 보고나서 꾸준히 제기됐던 울림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얕은 생각이나마 흩날리까 저어하며 조심스레 옮겨본다.   

 아마 시점의 차이였던 듯하다. 퍼블릭 에너미는 등장인물 개개인에 어떠한 역할을 부여한다. 그들은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개성이 영화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헌데 그 개성이 와 닿지 않는다. 그만큼 서사가 성기다. 이에 반해 조디악은 그저 묵묵히 바라본다. 제이크 질렌홀의 연기는 적절하다. 두 영화 모두 영화적 재미는 덜 하지만 조디악은 제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서사를 드러낸다. 바라보는 카메라와 좀 더 훑으려는 카메라의 차이가 두 영화의 몰입도를 결정지었다. 

 평론으로 돌아간다. 이동진 평론가는 마이클 만의 영화가 세상에서 가장 쿨하다고 했다. 그는 종종 나와 영화 보는 관점이 부딪힌다. 이번 해석도 수긍하기 힘들다. 이동진의 글을 보면 상대적으로 탐미적 성향이 강하다.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일수록 숨겨진 해석을 말로 풀어내길 즐긴다. 박쥐에 만점을 주고 과속 스캔들에 5점을 준걸 봐도 그는 무의식적인 ‘구별짓기’를 하고 있다. 그네들과 제 자신을 가르기 위한 미학적 탐닉이 부지불식간에 그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이명세 감독의 영화에 대해선 관점이 일치했다. 아예 서사를 배제해버린 그 황홀한 영상이 나또한 좋았다. 

 이용철 씨는 아마도 올 해의 영화가 될 거라 했다. 비록 작년에 딱히 기억나는 영화가 없다고 해도 너무 자신만만한 확신이다. 이 또한 자의식 과잉이 낳은 언어적 독단이 표출된 게 아닐까 한다. 이용철 씨의 글을 풀어내는 내 말 또한 어렵긴 하다. 허나 어려운 말은 종종 언어를 간결하게 해준다. 쉽게 풀어내기엔 손품 판지가 오래되어 그냥 저리 내버려 두련다.   

 평론가 한 명 한 명에 대한 품평을 하다 보니 글이 거칠다. 수많은 수사(修辭)가 남발된 이 글 또한 자의식 과잉과 타인을 쉽게 규정짓는 오만을 범하고 있다. 그런 것 까지 세세히 신경 쓰며 글을 쓰다보면 공리(公理)만 이야기할 듯하여 내 자신에게 아량을 베풀기로 한다. 말을 마무리하자면 퍼블릭 에너미는 스타일은 좋지만 공허한 영화다. 그 스타일 또한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기에 쉬이 몰입하기 힘들다. ‘생각의 속도로 실행하라’는 책에 관한 중앙일보 서평 중 내 불민함을 지적하는 문구를 본 듯하여 그 글을 옮긴다. 두고두고 나를 살필 일이다. 

 -저자들은 똑똑하게 말하는 것과 똑똑한 것을 혼동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회의에서 남의 아이디어를 지적(知的)으로 비판하는 사람, 비관론을 펴는 사람이 똑똑하다고 인정받고 점수를 올리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용기를 내 실질적인 제안을 내놓는 사람들은 점차 도태되고, 조직은 영리한 반박꾼들로 채워져 행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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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2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어느순간부터 평론가들의 평가를 안읽기 시작했다는....영화를 봤음에도 대체 뭔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바밤바 2010-01-25 14:25   좋아요 0 | URL
ㅎ 평론가가 가진 순기능도 있겠지만 대중이 평론가가 된 시대엔 그들의 말에 후한 평을 해주기 힘든 것 같네요~ 좋은 하루 되시옵소서~ㅋㅋ^^
 
파주 (2 Disc) - 아웃케이스 없음
박찬옥 감독, 서우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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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둘에 봤던 그녀의 영화는 그냥 그랬다. 단편 소설을 보는 듯하여 적당히 지겨웠다. 다만 시간을 들인 값은 한 영화 정도였다. 작년 여름, 티비에서 그녀의 영화를 다시 봤다. 놀라웠다. 대사나 장면의 분위기가 일찍이 내가 지향하던 모습이었다. 지난 몇 년간의 삶과 되새김이 영화를 겹으로 보게 한 덕이다. 박해일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한 듯하여 멈칫하기도 했다. 조금은 비겁하고 다소 삶이 버거운 그의 모습이 가여우면서 안타까웠다. 박해일의 선하고 유약한 눈빛이 가장 빛났던 영화였던 듯하다. 기형도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질투는 나의 힘’ 말이다.

파주를 봤다. 6년 전의 작품보다 더 보편타당한 이야기를 하려 애쓴다. 전작은 나약한 지식인이 기성세대의 힘을 동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파주에선 사랑이란 단어로 규정짓기 힘든 절절함과 애틋함이 드러난다. 언론에서 말하듯 불륜이란 카테고리로 묶기에는 그 언어가 헐겁다. 그저 사랑이란 다습고 너른 품새를 보여주는 언어만이 영화 속 인물들과 짝지을 수 있겠다. 결국 이 영화는 무엇을 이야기하려기보다는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래서 혼동스럽고 서사를 따라잡기 쉽지 않다.

각자는 깊은 슬픔을 안은 눈빛을 한다. 장률 감독의 ‘이리’에서처럼 그 슬픔은 지극히 온당하지만 감당해내기 버겁다. 그저 그들이 슬퍼 보이기에 슬픈 무안함 때문이다. 왜 슬픈지는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이유는 공감을 하기 위해서이고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배우의 눈으로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관객으로선 그런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서사보다 미세한 장면에 마음을 쏟게 한다. 헐거운 서사 덕에 영화를 가슴에 아로새기기 힘든 탓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심상하다. 일상처럼 내지르고 버릇처럼 미소 짓는다. 자연광을 쓴 듯한 장면의 밝음이 씁쓸한 각자의 삶을 더 외롭게 한다. 그 눈부심이 지나쳐, 빛보단 그림자에 눈이 간다. 햇살이 따스하기 보단 인물들을 방기하는 인상마저 준다. 용산 참사를 되새기게 하는 재건축 현장 또한 정치적이라기 보단 일상적이다. 이야기를 잘 녹여낸 감독 덕이다.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어 영화 시장에서 축출되었던 이경영의 등장 신 경우 여러 해석을 낳게 한다. 대사는 없고 눈빛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뛰어난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규정짓는 콘텍스트들의 미묘함 덕이다. 그 불편함이 영화를 읽는 데 도움이 된다.

다만 너무 불친절하다. 서사는 미친년 널뛰듯 왔다 갔다 하고 인물의 감정선을 헤아리기엔 삶의 포개짐이 얇다. 발신 번호 서비스가 생기기 전인 시기에, 부재중 전화에 응답하는 이선균의 모습은 의아하다. 주어진 인물들의 삶도 잠시 훑고 지나갈 뿐이다. 주어진 콘텍스트가 미진하니 텍스트를 읽기에 버겁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릴만 하다.

영화는 ‘이리’와도 닮았고 ‘초록 물고기’와도 닮았다. 물론 이러한 몇 개의 교집합이 그녀를 작가주의 감독으로 추어올리는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관객의 능동성을 이끌어내는 화면의 깊이와 불친절함이 그녀의 이름을 드높일 것이다. 삶을 살아가기도 힘겨운 세상에 그것을 반추하란 말은 지식인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수한 오만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 정도의 오만은 감내해 줄 법하다. 하물며 근사한 풍경과 투박함을 가장한 세련됨으로 말을 붙이는 박찬옥이기에, 마음을 기울일만하다. 나 또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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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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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 논어(論語) ‘이인편(里仁篇)’에서 유래한 성어(成語)다. 이 말이 사무치는 근자다. 로쟈님 서재에도 이 말을 남겼기에 이젠 나만의 성어도 아닐 테다. 근래에 이런저런 일에 섭슬리면서 많은 나무람과 조언을 들었다. 아직 덜 여문 ‘말의 기억’이 책 속 고산자와 접하며 가슴에 여울졌다. 말 잘하는 자란 무릇 진실로 필요할 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말을 깊이 생각했다. 고산자의 벗들이 제 안위와 자존심과 앞가림에 바빠 그를 저버릴 때엔 그리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구나 하는 걸 느꼈다. 나 또한 손에 꼽히는 지인들을 헤아리며 내 행동준거를 살폈으나 그들의 매정함을 쉬이 탓하진 못할 듯하다. 그런 나약함이 슬펐고 책의 무게를 더 튼실하게 했다.

‘덕불고필유린’에서 중요한 건 ‘덕’이란 말을 해준 이도 있다. 기실 알라딘 서재에 애정을 쏟게끔 글로써 나를 이끌어준 분의 말이기에 꾸준히 고민하고 살폈다. 책 속 고산자는 제 덕으로 언제나 외롭지 않았으나 생의 의지가 잡초처럼 흔들릴 때 햇살처럼 외로웠다. 그의 덕이 모자람이 아니라 덕을 헐겁게 하는 세상의 이치가 그리 했을 터이다. 결국 나는 ‘덕(德)’은 증명할 수 없고 이웃의 정이란 제 마음으로 실재하는 것이기에 ‘린(隣)’이란 말에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아직 공부가 덜 되어 그럴 수도 있으니 이러한 정의내림은 다시 바뀔지 모른다.

박범신의 글을 처음 읽었다. 김훈보다 문장이 더 예스러웠으며 옛말과 토착어의 어울림이 글에 깊이를 더한다. 많은 공부를 했으리란 추측을 하게하는 그 꼼꼼한 설명 또한 글을 한번 더 새기며 읽게 했다. 다만 우산도를 이야기하며 국토에 대한 시대관을 드러낸 장면은 다소 교조주의적이라 적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서사만으로 불충분하다 여겨 설명을 넣는다면 소설로서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고산자가 제 삶에 회의를 느끼며 훌훌 떠나는 장면은 슬펐다. 그 슬픔은 세상의 모짊에 대한 원망 보다는 ‘위버멘쉬’란 단어가 주는 그 닿을 수 없는 깊이가 지나치게 심원했기 때문이다. 고산자 또한 세상의 비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제 과거를 오롯이 부정하고서야 마음을 놓았던 것이다. 니체를 잘 알지 못하나 그가 ‘권력의지’에 집착한건 이런 비루함이 못내 못마땅해서일 테다. 지도를 만들며 자신을 내던졌던 사내의 회한(悔恨) 같은 눈물이 아직 유효한 현실도 마뜩치 않았다. 실로 그랬다.

책은 어제 하루 동안 다 읽었으나 실로 많은 일들이 마음을 훑고 지나갔다. 내 마음을 번잡스럽게 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다시금 나는 외로웠다. 공자님의 말이 맞다면 나는 ‘덕’을 제대로 쌓지 못해서일 테다. 부덕함에서 비롯된 외로움이 마음을 해치려 하기에 실로 밤이 깊을 듯하다. 간만에 집에 내려왔는데 남부는 적이 따스하다. 서울엔 눈이 쌓였다며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후배의 문자가 마음을 적잖이 푼푼케 했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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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5 11: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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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5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입] 브람스 : 피아노 협주곡 Op.15, Op.83, 7개의 판타지 Op. 116 [2CD] - DG Originals
브람스 (Johannes Brahms) 작곡, 유진 요훔 (Eugen Jochum) 지휘, / DG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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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난 포노그래프 고객이었다. 포노가 해피몰닷컴으로 넘어갔을 때 회사는 이벤트를 했다. 리뷰를 작성하면 리뷰 당 100원의 적립금을 준다는 거였다. 당시 복학을 기다리던 나는 시간이 많았다. 리뷰를 쓰기 시작했다. 전부 음반 리뷰였다. 음악은 잘 듣지 않은 채 표피적 이미지만 가지고 리뷰를 썼다. 그러다보니 양은 많지만 내용은 조악했다.

브람스 피협 음반 리뷰도 그 때 썼다. 강철 타건의 에밀 길레스니 연주도 그러할 거라 보았다. 연주를 제대로 듣지 않았으니 레토릭의 향연이었다. 헌데 몇 달이 지나 내 리뷰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나타났다. 길레스는 서정적이게 연주했으며 리뷰가 피상적이라며 제대로 알고 쓰란 나무람이었다. 그 나무람은 리뷰라는 공개석상에서 이뤄졌고 나는 낯이 붉어졌다. 그래서 그 리뷰를 지웠다. 치졸한 비겁함이 부른 회피일수도 있으나 즉자적인 반응이었기에 자기반성의 틈도 없었다. 덕분에 길레스의 브람스 음반은 상처가 되었다.

엊그제 이 음반을 다시 들었다. 4년 전과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다르니 그때의 트라우마를 잊을 수 있단 자신감이 작용했는지 모른다. 오이겐 요훔의 반주는 묵직했다. 3분이 넘도록 피아노 독주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교향곡 같았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관현악은 부수적인 것이듯, 브람스의 피협 1번에서 피아노는 관현악을 위한 치장이었다.

원래 이 곡은 브람스가 21살 때 만든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작품이 마음에 안든 브람스는 이 곡의 1악장을 교향곡으로 쓰려 한다. 그러다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으로 쓰기로 한다. 클라라와 요아킴의 충고를 바탕으로 개작을 거듭하다 25살에 이 곡을 완성하게 된다. 교향곡으로 만들려던 애초의 계획 탓인지 이곡은 관현악이 중심이다. 당시에도 피아노가 있는 교향곡이라 불리었고 피아노 독주의 기교적 과시는 없지만 진득한 멋이 있다.

이런 탓인지 길레스의 타건은 그닥 빛나지 않는다. 다만 스비아토슬라브 리흐테르와는 결이 다른 묵직함으로 피아노를 누른다. 서정적이라기 보단 묵묵히 자기 할일을 하는 구도자와 같은 연주다. 황홀하지도 세련되지도 않다. 요훔의 묵직한 관현악이 더 깊게 울린다. 다만 피아노를 잡아먹을 듯한 오케스트라의 두터움에 대한 호불호는 듣는 이의 취향에 따라 갈리겠다.

세밑이라 술자리가 많다. 어제도 한껏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이 곡을 들었다. 익숙한 3악장이 나왔을 때 ‘브람스 음악도 가끔은 진취적이고 활달하구나‘ 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다만 당분간 음악을 잘 못들을 듯하다. 제일 친한 친구가 미국에서 대학원 휴가에 맞춰 잠시 귀국을 하기 때문이다. 내 방에서 며칠을 머물 테다. 지음(知音)의 친구는 아니지만 가장 편하고 살가운 친구다. 브람스보다 더 따스한 며칠이 될 듯하다. 음악은 삶을 살찌우지만 친구만큼 좋지는 않다.

이제 브람스 피협 1번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치기어린 시절에 썼던 리뷰의 조약함도 이제 다 따스히 감쌀 수 있다. 다만 자기 과시적 욕망으로 타인의 불민함을 나무라며 수치심을 자극하는 말은 삼갔으면 한다. 음악이 계층의 차이를 드러내는 ‘구별짓기’의 수단이 아닌 바에야 그런 공격성은 실로 무용하다. 오늘도 누군가와 올 한해를 돌이키며 따스한 술잔을 기울일 듯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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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3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음반에 이런 사연이 얽혀 있군요^^

제겐 길렐스의 조심스러운 연주라는 생각이 드는 음반입니다. 요훔의 중후한 반주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지휘자와 연주자간의 합의에 의한 것일지도요. 함께 어쩌면 터치가 엷게 느껴지는 것은 녹음탓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대학 다닐때 3명이 사는 기숙사에 살았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좀 별나지만, 새벽에 시끄럽게 굴면 도서관에 가서 음반들으며 총보 보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은 관현악에 피아노 하나 살짝 덧붙인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요? (2번은 더 그렇구요..)

총보를 보며 음악을 들을때면 오케스트라와 가장 맞추기 힘든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가 어느정도 수긍이 갑니다. 1번, 2번 오케스트라, 피아노 독주 모두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바다 한가운데에 내던져져 안정적으로 항해해야 하는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점에 포인트를 잡을때 이 음반의 가치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꿈같은 2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구요. 끝으로 길렐스가 표현해내는 섬세함은 강한 힘(터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연말 잘 보내시고, 복 많이 받으시는 2010년 되세요. 바밤바님 :D

바밤바 2010-01-02 20:56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도 꾸준히 행복하세요.^^
겨울바람이 시린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상처받지 않을 권리 - 욕망에 흔들리는 삶을 위한 인문학적 보고서
강신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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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날이 차다. 싸락눈은 손끝마저 시리게 한다. 다들 연휴라 먼데로 갔나보다. 간만에 주위에 아무도 없다. 독서로 소일하는 일도 지겨워 쇼핑을 가려 했으나 눈이 길을 막는다. 뽀드득 소리가 싫지는 않으나 살에 부딪히는 새알 같은 눈은 옷을 여미게 한다. 남쪽에선 겨울이 싫지 않았다. 그리 춥지도 않고 집은 언제나 따뜻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겨울은 유달리 춥다. 방한이 잘 되지 않는 방에, 가끔 내리는 눈 때문일 테다.

 강신주 씨의 책을 읽었다. 제목은 연서(戀書)마냥 낯간지럽다. 다만 사랑이 아닌 자본에 상처 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자본주의의 도저한 폭력을 직시하고 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라 한다. 라캉의 말처럼 우리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에 불과한 것이니 중심을 찾으란 말이다. 많은 사회학자와 철학자 그리고 시인이 나온다. 타자화된 욕망의 실체를 알기 위해선 이렇게 많은 담론이 필요하다.

 이상의 이야기로 글을 풀어낸다. 김연수는 ‘여행할 권리’와 ‘꾿빠이 이상’에서 김해경의 삶을 뒤쫓는다. 강신주의 글도 그와 비슷하다. 동경이란 제국의 수도 앞에서, 초라해지는 자신을 추스르는 이상의 모습이 나온다. 허장성세를 부리는 이상의 모습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열패감과 동경을 느끼긴 어렵지 않다. 나스메 소세키의 작품 ‘소시로’에서처럼 이상은 자본주의에서 초탈하려는 원심력과 자본주의의 추종자가 되려는 구심력 사이에서 자아를 잃어간다. 27세에 요절했던 이유엔 이러한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허약한 정신이 작용했을지 모른다. 강신주는 짐멜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계속 전개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해 한번쯤 고민을 해봤던 이라면 새로운 내용은 없다. 4악장으로 이뤄진 이 책의 서두는 매우 쉽다.

 2악장엔 보들레르와 벤야민이 나온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바탕으로 환락의 도시가 전해주는 자본의 폭력을 말한다. 이 폭력을 수용하는 이들이 워낙 자발적이라 속에만 멍을 들이지 외상을 입히진 않는다. 벤야민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혼란스럽다. 그래도 얼마 전 읽은 황석영의 ‘심청’이란 작품과 매춘의 메커니즘을 연계시켜 이해하였더니 그리 어렵진 않았다. 다만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는 고담준론(高談峻論)과 같은 허황됨이 느껴졌다. 자본주의와 20세기를 비판하는 날이 무뎌서가 아니라 칼질이 너무 빈번하고 명쾌하지 않아서일 테다.

 3악장은 투르니에와 부르디외다. 3악장은 전체 악장 중 가장 통일성이 있으며 이야기도 단단하다. 투르니에는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한 ‘방드리드, 태평양의 끝’이란 작품을 썼다. 그러면서 피에르 부르디외가 이야기한 ‘아비투스’에 대한 개념이 나온다. 로빈슨 크루소는 자본주의적이며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충실한 아비투스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무인도에서 만난 ‘방드리드(금요일)’에게 자신의 윤리를 강요한다. 허나 화재로 인해 ‘구별짓기’가 훼손당하고 로빈슨은 자신의 아비투스를 버리고 새로운 아비투스를 세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변용은 베르그송이 이야기한 ‘체험된 시간’의 개념을 차용하여 로빈슨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한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부수적 언급으로 ’구조화된 구조이면서 구조화하는 구조‘인 아비투스를 비판하고 존재의 심연에 다가서려 한다. 밀도 높은 이야기다 보니 정리가 명징치 못하다.

 종결악장은 유하와 보드리야르다. 영화 감독으로도 유명한 유하는 자신의 시를 통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욕망과 개인의 주체성 상실을 노래했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스승격인 바타유의 ‘과잉 에너지’개념을 도입하여 과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유하의 시가 부분적으로 등장하여 서울이란 공간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미래의 목적을 위해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니체의 영원회귀설도 나온다.

 이외에도 가라타니 고진과 좀바르트, 라파르그, 예링, 마사치, 사르트르, 리오타르의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책이 이야기하는 바가 단순하지만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이다. 다소 연성화된 사유도 보이지만 개인의 욕망을 찾아주기 위한 저자의 노력은 이런 지난한 과정 끝에 완성된다. 이야기는 3악장에서 정점을 이루며 뒤로 갈수록 다소 난해한 모습을 띈다. 하지만 평소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다. 주석 없이 언급되는 인물들에 대한 공부만 병행된다면 좋은 기억으로 남을 책이다.

 글을 쓰는데도 손이 시리다. 난방이 잘되는 곳으로 이사하고 싶다. 겨울은 가난한 이에게 더 잔인한 듯하다. 밀실에 갇혀 있으려 해도 찬 공기는 몸의 표면적을 최대한 줄이라 강요한다. 세밑에 불어 닥친 한파 덕에 책은 많이 읽겠다. 나름 진지한 사유의 끝이 겨울바람 속에서도 따스한 봄노래를 가져다주길 바란다. 헌데 멘델스존의 ‘무언가’ 앨범은 없고 쇼팽의 에뛰드 앨범만 있으니 마음을 더 추슬러야겠다. 내일은 영하 10도란다. 낼부터 약속이 하나씩 줄을 잇는데 머플러를 둘러야겠다. 내게 머플러를 직접 짜준 그 아이도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으면 한다. 괜히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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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2-27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미셀 투르니에..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이름이네요~ [예찬]은 마치 첫사랑마냥 꼭 품고 다니던 책인데 ^^ 함께 [방드르디...] 을 읽고는 그는 참 재밌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지요. 말씀하신 내용가운데 3악장 부분은 왠지 흥미롭군요!!

눈다운 눈이 온 저녁이네요. 내일은 포근하길 빕니다.

바밤바 2009-12-28 16:14   좋아요 0 | URL
오늘은 포근하네요^^ㅋ
바람결님 말엔 항상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