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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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시대를 겪고 나면 사람들은 각성하기 마련이다. 각성의 모양새는 이 세상에 뛰고 있는 심장의 개수만큼 다양하다.

각성 후 자신에 대한 반성을 통해 조금 더 푼푼하면서 겸손한 삶을 살려는 이가 있을 테다. 비루한 삶을 돌파하기 위해 제 성장 동기를 강화하여 나르시시즘에 탐닉하는 이도 있을 테다. 잔약한 신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전자에 해당할 것이고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이들이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파시즘은 결국 후자에 해당하는 이에게 동조하는 무리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차 대전의 잔혹함은 2차 대전만큼 역겹지 않았고 반성을 하기엔 울분도 지나치게 많았다. 아울러 이전 전쟁이 덜 잔인했기에 이후 전쟁은 더욱 잔혹해졌다. 

2차 대전이후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돌아봐야만 했다. 아우슈비츠라는 극단의 역겨움을 겪고 나서도 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건 삶을 ‘영위’가 아닌 ‘견딤’의 형태로 가져가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1차 대전의 결과 각개약진이라는 삶의 모토가 강화되었고 결국 차별과 반목을 낳아 더 큰 황폐화를 낳았다. 2차 대전의 결과 세계는 아우름이란 가치에 집중하고 현재의 삶이 다소 풍성해졌으니 지옥이 낳은 아이러니다.

2차 대전의 역설은 그 후의 세상사를 돌아봐도 알 수 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쓸 수 없다고 했으나 다양한 문사들에 의해 더 섬세해진 언어와 감각이 결합된 글이 태어나며 세상을 풍요롭게 했다. 영화는 영상이란 매체로 삶의 어두움과 밝음을 일상처럼 잘 담아냈고 음악은 제3세계 음악의 약진으로 다채로운 형태를 보이며 아름다운 앙상블을 보여줬다.

지나친 혁신으로 제 지위를 위태롭게 한 분야도 있다. 클래식은 ‘존케이지’ 나 ‘쇤베르크’ 등이 혁신을 시도했으나 그저 제 잘남을 드러내기 위한 과한 레토릭으로 점철되어 대중과 멀어졌다. 미술은 원근법이나 고유의 색채를 무시하는 등 점점 작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나름의 복잡계를 이뤄가며 사회와 멀어져갔다. 결국 2차 대전 이후 무거움은 가벼움으로 진중함은 발랄함으로 전이되어 개인은 이전시대보다 덜 잔혹하고 풍요로운 현실을 누리며 대중문화를 향유하게 된다.

전쟁의 상처가 다소간 아물었을 70,80년대엔 다국적 기업이 강세를 띄며 개인 간의 경쟁은 격화됐고 삶의 여유는 차츰 무뎌져 갔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이 유행하는 현 시대에 벨에포크(La belle époque)는 이제 와 닿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하지만 기존의 벨에포크와는 다른 사회적 담론이 너울대며 세상은 그 이전보다 분명히 살만한 것이 되었다.

서경식은 글을 통해 충분히 아프고 고민한 이가 던져줄 수 있는 문장을 드러낸다. 육체가 욱신거리는 듯한 자지레한 고민의 선홍빛은 빛 뒤에 항상 그림자가 자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뿐만 아니라 담담하게 진술하는 시대의 잔혹함이 그림과 어우러져 또 하나의 추상화를 그려낸다. 고흐를 알기 위해, 오토 딕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만큼 던적스러움을 견뎌야 한다는 것을 글로 들려준다. 그러기 위해 이전 시대를 자꾸 일깨우며 적당한 풍요와 지나친 긴장에 휩싸인 이들의 영혼을 꾸짖는다.

책을 읽으며 충족된 자신의 지적허영을 만족스러워하고 잗다란 고통을 느꼈다 기뻐하며 제 마음 씀씀이에 감탄하는 이는 얼마나 비루한가. 펠릭스 누스바움의 그림이 그려진 겉면표지마냥 책을 통해 삶을 읽어내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초라한가.

다들 조금 더 살만한 세상을 살자고 애쓰는 시기에 현재의 고뇌는 얇지만 나름의 색깔과 두터움을 보여준다. 다만 책 한권으로 그 모든 투터움을 아우르기엔 삶은 그리 녹록지 않다. 서경식의 책을 읽고 허무함을 느꼈다면 그건 삶의 바닥을 추체험 했기에 가능한 일일 테다. 이러한 삶의 허무를 이겨내기 위해 수많은 종교가 난립하고 또 사라졌지만 허무는 이겨내기 보다는 그저 덤덤히 받아들이는 거다. 그 허무를 받아들여야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다. 다만 삶의 고통을 먹고 자라는 예술가들에게 그러한 허무는 독(毒)일 테다. 달콤한 독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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