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는 책을 지금에사 읽으니 많은 생각이 든다.
노무현의 검찰 수사 기사를 보고 <한겨레>를 내동댕이 쳤다는 유시민의 일화가 <한겨레>의 현재 모습을 잘 보여주는 듯 싶다.
'자뻑'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면 누구라도 내동댕이 칠 수 있다.
이 책에 녹아있는 치기 혹은 객기가 그립기도 하다.
나쓰메 소세키가 인간과 문명에 대해 투철한 고민은 했겠지만 천황제 중심의 근대 일본에 대해 안이한 인식을 했던 것도 분명하다.
자이니치 강상중은 이걸 정말 모를까?
그가 고발하는 자이니치의 문제가 나쓰메의 안이함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른단 말인가?
4인칭 '나'는 이 소설 속에서 언제나 죽음과 함께 등장한다.
아이누인의 무가 역시 죽음과 관계되고 말이다.
작가가 인식하는 근대 일본은 끊임없이 개인과 가족에게 죽음을 가져다주는 존재이다.
때론 아이누라는 민족 전체에게 죽음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내가 이 소설에 공명하는 건 우리 역시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판소리 소설 갈래의 특성일테지만 특히 성춘향과 이몽룡에게서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2세기 앞선 <구운몽>의 주인공들이 미적대고 있다면 이젠 그같은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민중문화의 생동감이기도 하려니와 '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또 한 가지!
그들은 늘 현장에 있었다.
이론과 실기가 저만치 분리되어 있다는 게 근대 학문의 병폐이다.
하여 인간과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너무 부족하다.
꼭 자연과학만의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