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황동규는 긴장한다.
그리고 변화한다.
긴장은 그에게 떨림을 가져다주지만 그는 그 떨림을 이제는 즐긴다.
그 즐김이 난 부럽다.
휘황찬란한 현대문명 앞에서 차마 나는 눈을 뜰 수가 없다.
눈 뿐만이 아니다.
손도 내밀 수가 없다.
첨단문명의 이기라는 기계들은 날 자꾸 작아지게 만든다.
이러면 이기(利器)가 아닐텐데 말이다.
그 앞에 서면 손이 떨리고 눈이 부실 뿐이다.
이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일까?
없앨 수 있을까?
이청준이 아무리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더라도 결국 소설의 뼈대가 되는 정신은 서구적인 것이다.
조동일 교수가 매몰차게 비판한 <서편제> 여주인공 눈멂의 과정이 이 소설에서도 유사하게 보인다.
젊은 날, 합리주의의 세례가 그토록 큰 영향을 줬던 것일까?
차츰 이청준 소설의 한계가 보인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얻게 된 아포리즘 하나.
인생은 서커스다.
분칠한 얼굴과 알록달록한 복장을 한 채로 난 누구를 위하여 힘겨운 서커스를 하고 있나?
나의 관중이 날 보며 웃는지 난 정말 두렵다.
새빨간 모조 코만큼 얼굴이 붉어진다.
무엇이 그토록 두려운가?
무엇이 그토록 부끄러운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홀로 있는 모습이 미더운 사람이라는 저자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예수님도 외로이 기도하시고 하나님을 묵상하셨다.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들이 사람들을 혼자 지내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미더움까지 지니려면 어려움이다.
그래도 가야만 하는 게 우리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