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도 - 김동리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7
김동리 지음, 이동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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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화랑의 후예>)의 인물들을 황진사, 나(화자), 숙부, 숙모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들은 독자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들이다. 나는 진보성 차원에서 이들을 구분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이 소설의 주제의식과 관련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화자의 시선과 위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황진사는 주인공이기에 묘사가 가장 집중된 인물이다. 그는 네 인물 가운데 단연 보수적인 사람이다. 보수성은 그를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간다. 말의 본래 뜻에서 그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이미 그 효용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지내는 공간은 어둡고 으슥한 곳이다. 여관, 거리(가짜 약을 파는 곳이기에 으슥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파출소를 전전하며 산다. 그가 소지하는 물건들은 별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주역(周易)>, 가짜 약 등으로 그는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지만, 사실 이 물건들은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나’(화자)는 젊은 지식인이다. 황진사가 한시(漢詩)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전통 학문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다. 오전부터 등산을 하고, 시골 절간으로 피서 계획을 짜는 걸 보면 직업은 없는 듯 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젊은이가 하릴없이 지내는 것을 보면 화자 역시 황진사처럼 부적응의 모습을 보인다 할 수 있다. 
  
  숙부는 광산 경영인이다. 그는 상당한 재력을 갖춘 인물이며 사회의 이모저모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조선의 심볼” 운운하며 주변부 사람들의 행태를 살피며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의 사회에 관한 깊은 관심의 일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서두에서 사회를 등지고 산을 향하려는 화자와 여관을 찾는 숙부를 대조적 위치에 두고 있다. 숙부의 피검(被檢)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더 잘 보여준다. 그는 독립운동의 한 축이 되었던 대종교 단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아무래도 운동 자금을 대준 듯 하다. 숙부는 진보적이다. 그는 네 인물 가운데서 가장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활동력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사회 정의 차원에서 옳은 일을 신념을 지니며 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숙부와 황진사는 퍽 대조적이다. 두 사람 다 신념이 투철한 인물들이나 한 쪽은 사회와 미래를 다른 한 쪽은 자신과 과거를 신념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숙모는 주부인 듯 한데 황진사 중매와 관련해 잠깐 모습을 보인다. 숙모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황진사가 열아홉살 규수와의 혼인을 원하자 “좀 나이 짐짓해두 넉넉할 걸 뭐.”라며 나무라는 기색을 보인다. 홀아비는 과부와 어울린다는 생각은 처녀와의 결혼만을 원하는 남자들의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는 의식이다. 
  
  화자는 황진사와 숙부, 숙모 중간에 위치한다. 그의 성향을 이른바 중도로 이해한다면 소설은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대를 살아간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화랑의 후예>의 화자는 황진사의 처지를 알아갈수록 그에게 큰 연민을 갖게 된다. 화자는 황진사를 도울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는 빼앗기다시피 돈을 건네기도 하며 황진사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그런데 나는 화자의 시선이 지나치게 황진사를 감싸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내가 그 동안 김동리(金東里)의 소설을 읽어가며 생각했던 바와도 연결이 된다. 1939년 작품으로 <황토기(黃土記)>가 있다. 그 시간대를 알 수 없는 신화적 공간에서 억쇠와 득보라는 두 장사(壯士)의 삶을 다루는 소설인데 두 사람 역시 사회 부적응의 모습을 보인다. 장사이나 근대적 공간 속에서는 이들의 힘이 아무 소용이 없듯 황진사 역시 그의 출신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무녀도(巫女圖)>(1936), <역마(驛馬)>(1948), <등신불(等身佛)>(1961)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등단작이 되는 <화랑의 후예>의 세계관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이다. 
 

 

            김동리(1913-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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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2013-10-2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김동리 선생님의 작품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 좋은 공연 알려드리고 가요.
김동리 탄생 100주년 기념 뮤지컬 <무녀도동리>입니다.
경주 發 공연인 뮤지컬<무녀도동리>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공연 중입니다.
김선경, 노현희, 김수용, 홍희원, 문가영 등 휼륭한 배우들이 출연하며
10.11.~11.3.까지 공연됩니다.
김동리의 소설<무녀도>는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고 고등교과서에도 수록되어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훌륭한 작품을 처음 뮤지컬로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훌륭한 작품에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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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트리아 출신의 예술사가 아르놀트 하우저의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화는 '협동작업에 의한 예술활동'이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4>, 창작과비평사, 1999, 310면.) 여타의 예술 장르, 예컨대 시나 소설 등은 개인적인 고투에 의해 창작이 이루어지지만 영화는 작가, 감독, 각색가, 카메라맨, 미술감독, 각종 기술자 등의 공동작업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영화를 이야기할 때 관중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유럽의 근대 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불특정의 집단적 군중으로서의 관중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한 최초의 기도이다.(같은 책, 314면.) 종합하자면 창작 주체 안에서의 호환(互換), 창작 주체와 관중간의 호환을 통해 영화는 예술의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는 내겐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그의 인생이 시작된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을 기실 난 잘 모른다. 그저 제목만, 그저 배우 이름만 얼핏 들었을 뿐이다. 딴에는 영화를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하지만 자괴감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름만 그저 알았던 그들이 대화를 건네 와 즐겁다. 전혀 면식도 없던 그들이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친절한 소개로 금새 친해진 듯 싶다. 

  사실 난 외국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인생이 저런 건 아닐텐데'란 씁쓸한 생각이 자꾸 든다. 앞서 아르놀트 하우저를 인용했지만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 작업에 의해 만들어지듯이 영화란 당대인들의 삶을 충실히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자면 지금의 내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비감이 든다. 그리고 난 좋은 영화란 관중을 괴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냥 재미있게만 한다거나, 헛웃음만 짓게 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인생의 아픔에 함께 괴로워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일 테다. 
 

  서양 영화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게 몇 있다.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아스테릭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독일 작가 막스 프리쉬 원작의 <사랑과 슬픔의 여로>(원제: Homer Faber)등이 여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로베르토 베니니의 의뭉스런 표정과 몸짓, 줄리 델피의 귀여운 모습은 기억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에서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만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며 적어도 시오노 나나미가 젊은 시절을 함께 한 영화는 지금 내가 보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많이 다르단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아울러 내게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편견이라 이름할 것도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책을 읽어가며 영화를 통해 인생을 배워갔던 시오노 나나미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은 '영화 세대'는 아니다. 요즘은 영화를 보러 구태여 영화관을 찾을 필요가 없다. 집에서도 PC 앞에 앉아 얼마든지 편하게 영화를 본다. 좋아하던 배우가 나오는 신작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 앞에서 줄서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모습이 상상된다.   

  이 책을 덮고 나니 꼭 봐야 할 영화 목록이 수두룩히 쌓였다. 이젠 구하기도 쉽지 않을 영화들일텐데. 한 편, 한 편 영화를 보고 나서 그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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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영감 한길 헤르메스 7
장 그르니에 지음, 함유선 옮김 / 한길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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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그르니에의 이름을 들었던 게 언제던가? 실존주의 철학에 기웃거릴 때인 것 같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어가며 로캉탱에 공감하기도 하고, 까뮈의 <시지프의 신화>가 우리들의 삶이라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당시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라는 아포리즘만큼 내 마음을 두드린 말은 없었다. 까뮈를 통해 장 그르니에를 알게 됐다. 까뮈의 스승이라니? 서둘러 그의 책들을 읽어갔다. 
  
  "마침내 나는 생각한다. 익명의 인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일, 나의 직업, 나의 가족, 심지어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를 곧 잊을 수 있을 것이며, 나를 잘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맡아야 할 역할도 없고, 더 이상 일부러 꾸며서 해야 할 어떤 태도도 이제는 없다.(<지중해의 영감> 35, 6면)" 
  
  여행을 하는 이유는 무얼까? 장 그르니에는 '익명의 인간'이 되고 싶어서라 이야기한다. 나의 얼굴, 나이, 직업을 모르는 공간에 서고 싶어서다. 융은 사회적 자아를 '페르소나'라 했던가? 그래,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산다. 가면을 쓰고 이런 저런 역할 놀이를 한다. 여행이란 그 가면을 벗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모래의 여자>라는 소설이 있다. 일본 작가 아베 코보(安部公房)의 장편이다. 내용은 이렇다. 평범한 셀러리 맨인 한 남자가 어느 날 실종된다. 그는 일상에서 피하기 위해 모래 땅으로 곤충 채집을 나선 것이다. 그 곳에서 기이한 일을 하는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모래 구덩이 속에 있는 집에서 흘러내리는 모래에 집이 파묻혀 버리지 않도록 쉬지 않고 삽질을 한다. 어이 없어 하는 남자에게 여자는 모래로 인해 한 집이 붕괴되면 사구에 자리 잡은 마을 전체가 붕괴되기 때문에 작업을 멈출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남자는 이런 일이야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지 않냐고 하며 모래 구덩이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에 성공하지만 이내 마을 사람들에 의해 모래 구덩이로 돌려 보내진다. 
  
  남자의 비아냥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원숭이가 하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한 남자였지만 그를 맞은 건 역시 반복되는 삽질 뿐이었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하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가면을 벗을 수 있단 말인가? 
  
  장 그르니에는 여행을 하며 그 무거운 가면을 벗어 던지고 있다. 그의 글은 내밀한 고백으로 가득 차 있다. 가면을 벗지 않으면 토해낼 수 없는 고백들이다. 
  
  <모래의 여자>에서 탈출에 실패한 남자를 여자는 위로한다. 그런데 돌연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서로 상처를 핥아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영원히 핥고만 있는다면, 끝내는 혓바닥이 마모되어 버리지 않을까?" 작가는 비관한다. 그러나 닳아 없어져 버릴 일상 속의 혀이지만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그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것 역시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Jean Grenier(1898-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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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 Gandhi
요게시 차다 지음, 정영목 옮김 / 한길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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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하트마 간디>는 정말 많은 것을 고민케 하는 책이다. 아니 간디 자체가 그런 것 같다. “나는 인도에서가 아니라면 이 세상의 삶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도의 성스러운 땅으로 가야 한다. 다른 모두가 마찬가지이지만 나에게는 인도 땅이 ‘고통받는 자들의 피난처’이다.”(357쪽) 
      

  우리는 누구나 이상(理想)을 꿈꾸고 산다. 하지만 그 이상을 꿈꾸고만 살기에는 우리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간디의 위의 말에서 난 이상과 현실의 절묘한 조화를 본다. 신앙을 갖고, 또 나름의 꿈을 갖게 되면서 현실은 자꾸만 소홀히 하는 버릇이 생겼다. 머나먼 미래에 대한 설레임은 있지만, 하루 하루에 대한 긴장감은 지니질 못했었다. 많은 이들이 간디는 종교적이고 감상적이라 말하지만 내가 읽었던 간디는 진정한 ‘리얼리스트’이다. 구원은 저 머나먼 곳에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이 곳에 있다. 

  이 책을 읽어가며 기독교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다. 351-2쪽을 걸쳐 드러나는 당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많은 실망을 갖게 한다. 백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설교단에 간디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자 친구인 찰리 앤드루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가 그 교회에 가셨다면 그 분 역시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났을 것이다.” 
   
  이 상황과 비슷한 장면을 소설 속에서 본 적이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에는 <대심문관 이야기>라는 조시마 장로가 들려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중세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재림한다. 그는 수도원을 찾는다. 그리고 대심문관을 만난다. 심문관은 그의 앞에 있는 분이 그리스도인 것을 눈치 챈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쫓아버린다. 왜일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장 반겨야할 그가 납득이 되질 않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대심문관 그는 현재 너무 행복하다. 권력으로나, 부(富)로나 어느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따라서 그에겐 그리스도의 재림이 전혀 반갑지가 않다. 현재가 행복할 뿐이다. 간디가 살던 시절의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존재 이유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어느 것에도 소홀함을 둘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에 기울어 버릴 때 그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게 된다. 대심문관이 애처로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지탱하는 세 가지 열정은 사랑의 갈구, 진리 추구,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누구보다 많은 열정을 쏟아 붇고 살았던 사람이다. 폭력과 불의가 난무한 이 시대에 그가 더욱 읽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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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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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쟈를 김현에 비견하는 게 상술이 묻어나는 말이지만 문학판에서 그만한 역할을 해준다면야 반가운 일이다.  

 

  블로거들 사이에서야 이미 김현 이상이겠지만.  

 

  글 속에 숨어있는 슬픔들을 모두 알지는 못 하겠으나 김현의 원죄의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겐 반가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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