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탈근대의 구축 위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근대의 종언에 대해 이야기할 시기이다.
근대에 모두들 사정없이 포화를 퍼붓는다.
그런데 사람의 방향은 옳지 않다고 본다.
조급함도 함께 느낀다.
일반론을 이야기 하기에는 이른 감이 없지 않다.
섣부르지만 그의 소설들을 '상실'로 풀어가 보는 건 어떨까?
잃는다는 것에 민감한 사람은 필시 찾는 것에도 민감할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상실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다.
이것이 채영주가 이해한 인간, 세계관이 아닐까?
채영주(1962-2002)
남과 북이다.
빈곤과 부유, 사회주의와 자유자본주의, 자연과 인공 등이 그 대립 요소들이다.
도르프만은 이들을 겪어내어야만 했다.
이 겪음들이 그를 주변인, 방외인으로 몰아갔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가?
늘 버려진 주변에 아쉬운 게 내버려져 있다.
그것을 누가 줍느냐 말이다.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소설이 폭넓은 공감을 얻는 이유는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미국의 꿈'에 갇히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은 갇히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나 갇히고야 마는 것이 요새의 꿈이다.
하지만 삶의 소소함을 찾는 것 따위로 해결될 것이 아니다.
Richard Brautigan(1935-1984)
근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어떤 위상을 갖게 될 것인가?
중세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말 그대로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다른 - 실은 동일한 - 근대를 겪었다.
이제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위상과 과정을 살피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