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작가들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서운 불문율이다.
허나 진정 좋은 작품은 침묵을 이야기 해야 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항변 하셨다.
우리의 비겁함이다.
엔도 슈사쿠는 의미가 있다.
遠藤周作(1923-1996)
개화기 많은 문인들이 고소설을 부정하고 서양의 문학을 이식하기에 바빴던 것은 고소설의 '환상성' 때문이리라.
<구운몽>은 그 사상 면에서는 값진 작품이다.
허나 취할 것이 너무도 적다.
감싸기만 할 문제가 아니다.
소설의 풍부함을 보여주었기에 이 작가들은 '위대한 전통'이란 게 이책의 요지일 것이다.
이방인인 제임스, 콘라드에게도 자리를 내준 건 그 때문일테고.
그런데 이들 작가가 풍부히 담아낸 세계 속에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우리는 뼈 아프게 질문해야 한다.
Frank Raymond Leavis(1895-1978)
소설가가 성인(聖人)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마냥 구경하고 미워해서만은 안 된다.
이것은 필요 조건이지 충분 조건은 아니다.
이윤기 소설이 별다른 감동이나 비전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의 한 문학이 이렇듯 값진 또 다른 문학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는 건 기쁜 일이다.
상호보족적인 두 갈래가 다시금 화합하는 모습이다.
동아시아의 여성만큼 근대를 숨가쁘게 겪은 이 또 있을까?
다는 아닐테지만 이 곳에서 심청의 적극성이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