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난삽하다.
개념 규정도 오락가락하며 어느 구석에선 들어맞지도 않는다.
설레발치듯 언뜻 보이는 지구촌, 인터넷의 의미 규정 정도가 주목에 값한다.
문학이, 특히 시가 몇 발 앞서 당대를 살아갔다는 확인은 의미가 있다.
Marshall McLuhan(1911-1980)
아름다운 시들이다.
김주연의 말대로 '따뜻한 시'들이다.
그는 지금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따뜻하다.
그는 그리움으로 가슴 아프다.
아버지가 그립고 고국이 그립다.
살내음이 그립다.
그리움은 때론 그 자신을 절망으로 내몬다.
하지만 매일 부대끼는 환자들과 자연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다행히도.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와 너무 닮아 있어 의심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둘이 빌어오는 용서의 근원은 너무나 먼 곳에 있다.
종교문학이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나라에 최인호 같은 작가가 있다는 건 귀한 일이지만 다듬어지지 않고 쉽게 나올 일은 아니다.
정현종의 시는 시답다.
시는 서정임을 그의 시는 뚜렷이 말한다.
요사이 시인들은 많은 공부를 한다.
그래서 말이 많고, 쓸 말은 적다.
정현종은 그렇지 않다.
그의 시어는 가볍고 날래다.
하지만 내게는 그의 전언이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모더니즘 문학은 잠언투의 말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가?
개인의 깨달음은 응당 누구에게나 옳은 소리 뿐이다.
가오싱젠의 노벨상 수상은 이 상의 판도를 가늠케 한다.
소수 민족에 대한 환기는 주목에 값한다.
그러나 역시 구경꾼의 그것이다.
중화주의를 다시금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