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전윈을 읽으면서도 생각한 거지만 근래의 중국 소설은 재미나다.
그들의 선배들이 소설의 의미에 골몰했다면 후배들은 모른 척 딴 데를 보고 있다.
왕멍처럼 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래 나오는 일본 소설이 끝 간데 없이 재미만을 추구하는 것에 난 진저리가 난다.
저러진 말자는 것이다.
저자는 내내 링컨이 별 게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가진 별 거 중 하나는 자신이 별 게 없는 사람이란 걸 안다는 것이다.
별 게 없으니 빈 자리를 채우려 뛰며 사람을 얻었다.
별 게 있는 대통령 오바마는 링컨을 어떻게 읽고 있을까?
백낙청 번역의 <목사의 딸들>에선 민중성에 대한 옹호가 많이 보이던데 여기엔 잘 보이지 않는다.
문명 전체를 비판의 과녁으로 삼으니 당파성이 현저히 떨어지지 않나 싶다.
리비스의 눈에 그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영국 소설의 위대한 전통>에선 잘 안 보여서 하는 말이다.
David Herbert Richards Lawrence(1885–1930)
역자는 리비스를 줄곧 얘기하던데 월러스틴이 말하는 문화연구와 리비스가 별 상관이 없으니 그를 인용하지 않았다해서 그리 서운해 할 일도 아닌 듯 싶다.
사회과학의 제 자리 잡기를 말하는 책인데 본래 사회과학은 제 자리가 없다.
근대에 잠시 왕자 노릇을 할 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번역의 폭이 꽤 넓다.
중역까지 욕심내서 하니 번역 수가 많다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직역을 잘 하는 나라도 아니지 않은가?
김석희가 문학 교수가 안 된 것이 다행이다.
'번역은 배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자위하며 손도 대지 않은 그들보다 김석희가 내게는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