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이 곳, 저 곳으로 찾다가 침묵은 놓쳐 버리고 만다.
임은 왜 침묵하는가?
침묵하지 않는 임은 진정 임이 아니다.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에.
만해는 고되지만 이미 임의 침묵을 받아들이며 즐거워하고 있다.
만해의 탁월함이다.
한용운(1879-1944)
또다른 이중어 글쓰기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강압이 더 무서운 것일지도 모른다.
일제에 비할 때 지금의 보편어가 갖는 위상이 더욱 크다.
민족어가, 국가어가 깨져나간다.
이것 또한 근대 이후의 한 징조가 아닐까?
전편을 가르치진 못했지만 이만한 글을 함께 읽고 공감한 건 고마운 일이다.
입시를 앞두고 있는 그 친구들에겐 그 시간이 어떻게 기억될까?
기억에라도 남아 있을까?
내겐 그 소중함이 오롯하다.
부담스럴테지만 작가는 사상가여야 한다.
고민과 아픔으로 머리를 감싸 안아야 사상이 나온다.
중국의 근대는 루쉰의 고민이자 아픔이다.
또한 소설 역시 그리했을 것이다.
루쉰과 소세키, 이광수는 지금 어디 있는가?
魯迅(1881-1936)
폐인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
작품 속의 남자는 별 문제 없이 보이지만 자신은 폐인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폐인이다.
그의 마음은 철저히 닫혀 있다.
그의 마음은 허물어져 있다.
그는 자신이 폐인이란 걸 알기에 이 소설은 더욱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