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처럼 그는 주변인(out of place)의 삶을 살았다.
중심에 설 수 없었기에, 또한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기에 그는 겉돈 것이다.
이 매력 넘치는 주변인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가 없는 이 세상에서 남겨진 그의 글을 진득하게 읽고 열정적으로 행동하는 게 우리의 몫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상
인성과 물성의 같고 다름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 것 또한 조선이 근대를 맞이하는 고민의 한 모습이리라.
이들의 언어가 관념적이라고 탓하나?
똥부스러기에서도 배울 게 있다는 연암 박지원의 고민도 이들과 다르지 않다.
기독교 변증이 주가 되어선 안된다.
성령만이 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께서도 한 사람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말을 건네셨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셨다.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분명 소중한 일이다.
시인 황동규는 긴장한다.
그리고 변화한다.
긴장은 그에게 떨림을 가져다주지만 그는 그 떨림을 이제는 즐긴다.
그 즐김이 난 부럽다.
휘황찬란한 현대문명 앞에서 차마 나는 눈을 뜰 수가 없다.
눈 뿐만이 아니다.
손도 내밀 수가 없다.
첨단문명의 이기라는 기계들은 날 자꾸 작아지게 만든다.
이러면 이기(利器)가 아닐텐데 말이다.
그 앞에 서면 손이 떨리고 눈이 부실 뿐이다.
이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일까?
없앨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