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열대 한길그레이트북스 31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박옥줄 옮김 / 한길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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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인 풍습을 설명하는 레비-스트로스가 흥미롭다.   

 

  책에 따르면 브라질 원주민들은 같은 종족은 절대 잡아먹지 않는다고 한다. 외부인들만을 잡아 먹는다. 이유는 나와 다른 사람을 내 몸에 둠으로써 동일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잡아먹는 것이 아니란다. 외부인들을 정말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저 죽이기만 할 것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이해한다.

  앙트로페미(anthropemie)를 서구 사회의 못된 버릇이라고 말하는 레비-스트로스에게 원주민들의 이런 모습은 꽤 인상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와 푸코가 식민주의 비판까진 못 가지만, 서구 사회의 앙트로페미 비판에 관해선 같은 길을 걷는다.  

 

       Claude Lévi-Strauss(1908-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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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 전10권 세트 대산세계문학총서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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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실과 환상의 대결 
 

  오승은(吳承恩, 1500?-1582?)은 명나라 효종-세종 때 사람으로 신사(紳士)였다가 소상인으로까지 몰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숱한 낙방 끝에 나이 50이 돼서야 성시(省試)에 급제한다. 1566년 절강의 장흥현승에 부임했고, 만년에는 형왕부 기선직을 맡았으나 늘 한미한 직책이었다. 오승은에게 있어 당대 현실은 만만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 늘 현실 너머의 삶, 환상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가 소설 창작에 매진한 것은 필연적이다. 오승은은 지괴소설인 <우정지서(禹鼎志序)>를 남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현실적 요소가 다분한 지괴소설을 창작한 것만 봐도 그의 현실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소설에선 끊임없이 현실과 환상이 대결을 벌인다. 둘은 필연적으로 대결을 벌일 수밖에 없다. 왜인가? 현실은 시간이 갈수록 환상의 자리를 야금야금 빼앗는다. 환상은 무력히 그 자리를 잃어갈 수밖에 없다. 승리는 누구의 것인가?

  소설 속에 그려진 세계의 모습을 살펴보자. 인간이 상상 가능한 온갖 세계가 펼쳐져 있다. 이승과 저승, 극락과 지옥 그리고 수궁(水宮) 등 당대(當代)인들이 발 디디고 살며 관념 속에 새겨진 모든 세계를 소설은 그려내고 있다. 이들을 작가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총체성이다. 이들은 각기 분리해 있지 않고 튼실한 연결 고리를 통해 맞물려 있다. 인간인 삼장과 당태종(唐太宗)의 삶은 이승과 저승이 엇섞여 있다. 손오공은 말할 나위가 없다.

  각기의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이 있다. 황제, 옥황상제, 용왕, 염라대왕이 그들이다. 소설 속에 그려진 이들의 모습은 철저히 무력하다. 왜인가? 작가는 이들을 갸우뚱히 바라본다. 이들에게 조소를 보낼 뿐이다. 권력의 구도에 최정상에 선 자들에게 현실의 작가는 굽신거릴 테지만 소설의 공간에선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다. 환상은 현실에 승리를 거둔다. 

  소설만큼 현실과 환상의 치열한 대결을 그려낼 수 있는 또 다른 문학 갈래는 없다. 오승은이 소설을 택한 건 필연이다.

  오승은은 환상의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이 승리는 작금의 우리에겐 더욱 요원한 일이다.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양식을 두 축으로 삼는 근대의 우리에게 환상의 승리는 멀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허나 그렇기에 <서유기>는 더더욱 사랑을 받는지도 모른다.

2 전지구적 자본주의화

  <서유기>는 앞서의 장회체(章回體) 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에 비할 때 특기할 만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당대(當代)의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는 모습을 놀랍도록 적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16-7세기 명나라 무렵은 중국에서 강남을 중심으로 한 도시 경제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시기였다. 이미 남송 때부터 각종 수공업과 유통업이 발전하면서 규모가 확장되어온 남경과 소주, 항주, 양주, 무석을 비롯하여, 경덕진이라는 유명한 도자기 생산지를 끼고 오래 전부터 해운업의 중심지로 발전해온 영파 등이 이러한 도시 경제의 번성을 주도했다. 도시는 소비 및 유통 경제의 활성화로 종래 찾아보기 힘든 번성을 이룬다.

  저팔계는 본래 물욕이 많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지나치게 물질에 매달린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당대 상인 계층의 모습을 떠올린다.

  하루살이로 변한 손오공이 저팔계를 놀리는 장면이다.

  "아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그게 어디 남몰래 딴 주머니를 찬 것인 줄 아시오? 모두가 이를 악물고 푼돈 아껴서 긁어모은 거요! 돈 쓰기가 아까워서 먹고 싶은 것도 사먹지 못하고 간직해두었다가 무명이나 끊어서 옷 한 벌 해 입으려던 것을, 형님이 이렇게 공갈을 쳐서 알겨낼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형님, 기왕 빼앗긴 돈이니 더 말하지는 않겠소만, 조금이라도 떼어서 나한테 돌려주시구려."

  "자네한테 나눠주라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네!"

  "그럼 좋소. 내 목숨과도 같은 돈을 다 드렸으니, 그 대신에 날 구해주기나 하시오."(제8권 228, 29면)

  그런데 물욕이 전혀 없을 것만 같으며 없어야 하는 인물들도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감추지 않는다. 그들이 바로 아난과 가섭이다. 이 두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의 수제자이다. 이 두 사람이 힘겹게 서방에 도착한 삼장에게 선물을 요구한다.

  "성승께서는 동녘 땅에서 여기까지 오셨으니, 무엇인가 저희한테  인사조로 선물해주실 것을 가져오셨겠지요? 경전을 잘 골라드릴테니까, 어서 그 선물을 내놓으십쇼."(제10권 256면) 

  이것은 강요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이마를 '탁' 쳤다. '세상에나, 내가 알던 아난과 가섭이 아니다!' 스탕달(Stendhal)이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명제를 인정할 때, 이처럼 <서유기>는 당대 사회를 명징한 거울로 여실히 비추고 있는 것이다.

3 <서유기>의 자민족 중심주의

  이제 <서유기>를 비판해 보자. 보통 <서유기>를 그 소재면에서 신마 혹은 환상 소설로 분류한다. '동양의 환상 문학을 대표한다'는 것이 서양인들의 이 소설에 대한 상식적인 앎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소설은 분명 환상 세계가 현실 세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것은 이 소설 역시 어느 소설 못지 않게 중국, 중국인, 중국 문화 위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것을 자민족 중심주의라 이름 붙인다. 우선 소설의 한 대목을 살핀다.

  도사(道士)인 불운수는 삼장을 꾸짖는다.

  그대는 범어(梵語)를 근거로 집착하고 있소. 도라 함은 본디 중국에서생긴 것인데, 도리어 그 증거를 서방 세계에서 구하려고 짚신이 닳도록 헤매 다니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찾으려 하는지 모르겠소. ······ 근본을 잊어버리고 참선하며, 부처의 증과(證果)를 망령되이 구하다니, 이는 모두 우리 형극령에 얽히고 설킨 칡넝쿨과 같은 수수께끼요. 덩굴처럼 뒤죽박죽 얽힌 잡답이나 다를 바 없소. ······모름지기 눈앞의 면목을 새롭게 점검해야만, 고요한 가운데 생애(生涯) 있게 마련이오. 영보봉(靈寶峯, 도교) 높은 정상에 발을 굳게 디뎌보고, 돌아와서 용화회(龍華會, 불교) 성대한 자리에 참석하오. 이 소리를 듣더니, 삼장은 머리 숙여 사례했다. (제7권 134, 35면)

  삼장이 도사 몇 사람과 만나는 장면이다. 근본이 이 곳 중국에 있는데 무얼 그렇게 헤매느냐는 꾸중이다. 흥미로운 것은 말 잘하는 삼장이 묵묵부답이라는 사실이다. 이 것은 어찌된 것인가? 
 

  나는 그 이유를 <서유기>의 통속성에서 찾아보려 한다. <서유기>는 화본(話本)소설로서 현장에서 구연(口演)된다. 현장성이란 예술성의 절감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어찌됐든 관중의 반응에 따라 소설은 끊임없이 수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관중들의 기호란 다종다양할 테지만 자신의 고장, 민족에 대한 집착은 으레히 있었을 것이다. 타고장, 타민족의 종교인 불교보다는 도교를 비롯한 자생적인 종교를 그들은 더욱 높이 쳤을 것이다. 이러한 구절이 삽입돼야만 하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원저자의 생각은 달랐을 것이다. 소설 전체에서 받는 인상은 현실보다는 환상을, 중국보다는 서역을 더욱 그리워함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승은의 삶을 돌아볼 때 더욱 그러하다.

  이젠 같은 불교 승려이지만 이민족인 티벳인을 괴상스레 서술자는 그리고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떼어 산문 안으로 성큼 들어서니, 웬 승려 하나가 마주 걸어 나오는데 그 모습과 차림새가 유별나다. 머리에는 모자 깃을 왼편으로 여민 비단 승모를 쓰고, 구리로 만든 고리 한 쌍을 양쪽 귀에 늘어뜨렸다. 몸에는 파라(頗羅) 털실로 짠 옷을 걸치고, 한 쌍의 흰 눈동자가 은빛으로 반짝인다. 손으로는 파랑고(播郞鼓) 흔들어 "딸랑딸랑" 소리내며, 입으로는 중얼중얼 번족(番族) 언어로 불경을 외우는데 알아듣기 어렵다. 삼장법사야 애당초 알아볼 수 없으니, 이분은 서방 세계 가는 길에 라마승이시다. (제8권 372, 73면)

  통속문학의 이같은 자민족 중심주의는 지금도 여전하다. 무협소설을 통속문학의 범주에 놓고 볼 때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실제 무협소설을 <삼국연의>, <수호전>에서 <홍루몽(紅樓夢)>에 이르는 명청의 통속소설 전통과의 계승적 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중국 학계의 무협소설에 대한 주류적 입장이라는 것을 한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대표적 무협소설 작가인 진융(金庸)의<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을 살펴보자. 주인공 곽정(郭靖)은 이민족 사이에 서 자랐고 배움도 없다. 그러나 그는 뿌리깊은 유가인이자 중화주의자다. 이 소설에서 도가와 불가는 곁다리에 불과하다. 이는 왜인가? 진융은 중국을 비롯해 중화권의 폭발적인 인기를 떠 안고 있다. 사람들은 유가적 세계, 중화를 그리워한다. 무협소설은 연재마다 독자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이들의 향수를 진융도 모른 체 할 수 없다. 작가론을 제쳐두고 이는 무협소설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진융의 소설도 이러한 측면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사실 중국문학의 서술 태도 역시 자민족 중심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혹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TV 드라마를 예술로 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매회 마다 시청자의 반응을 살피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고쳐야만 하는 드라마의 숙명 때문일 것이다. 영국 좌파로부터 연원한 문화 연구(cultural study)가 주목을 받고 있다. '문학을 예술이 아닌 문화 차원에서 살펴보자'는 것이 이들 주장의 큰 줄기일 것이다. 이 입장은 통속 문학에 더욱 잘 적용됨은 물론이다. 실제 많은 문화 연구가들이 진융의 소설에 주목하며 연구 결과를 내고 있다.

4 多卽一 一卽多

  <서유기>의 가장 귀중한 전언은 무엇일까? 마음에 와닿는 소설의 한 구절이 있다. 관세음보살이 요괴를 죽인 손오공을 꾸짖는다. "오공아, 보살이든 요정이든 결국은 일념에서 나올 따름이다. 그 근본으로 따진다면 모두가 무(無)에 속하는 것이다."(제2권 264면) 이 전언은 <서유기>의 핵심이다. 불교의 용어를 빌리자면 화엄(華嚴)의 사상인 '多卽一 一卽多'가 되지 않을까?

  화염산의 산불을 우마왕이 지른 걸로 알던 손오공에게 토지신은 놀라운 사실을 말해준다.

  "대성께서는 팔괘로 바깥으로 뛰쳐나와 화로를 발길로 걷어차셨습니다. 그때 벽돌 몇 장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 중 뜨거운 불씨가 붙어 있던 것들이 하계로 떨어져 내려 이 곳 화염산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제6권 316, 17면)

  문제의 근원은 다름 아닌 손오공에게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원인이 다른 곳에 많이 있다〔多〕 했으나 결국은 나 홀로〔一〕에게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후 손오공은 많이 겸손해진다. 문학은 나를 찾고, 나에 대해 깨닫는 것이기에 이 것은 참으로 소중한 가르침이다.

  중국문학에 있어 나를 찾아가는 여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가오싱젠(高行建)의 <영산(靈山)>은 좋은 예이다. "나는 여행을 하고 있다. 삶은 싫건 좋건 하나의 여행이다. 나는 여행 중에 내 상상세계 속에 침잠해 나의 그림자인 당신과 함께 나의 내면을 여행한다."(<영혼의 산> 52면.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북스, 2001)

  우리가 사는 한은 환상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으며, 시원(始原)을 찾을 수밖에 없다. <서유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귀중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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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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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에게 노벨상이 주어진 것은 노벨위원회의 간만의 탁견이 아닌가 한다.
 

  중세의 풍요로운 유산을 작가는 아기자기한 이야기 속에 풀어 놓는다.

 

  이 작가는 이야기의 힘을 알고 그 이야기를 제대로 다룰 줄 안다.

 

  어디까지 펼쳐져 있을 지 살펴 보리라.   

 

                 Ferit Orhan Pamuk(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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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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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코의 이 같은 작업은 결국 근대 국가의 의미를 묻는 것이 된다.   

 

  감옥과 학교, 군대와 병원은 결국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도 이 부분에서 공감을 한 듯 하다. 

 

  푸코의 작업이 식민주의까지 가지 못한 것은 아쉽다.  

 

  물론 사이드가 그것을 해내지만 말이다.   

  

             Michel Foucault(1926-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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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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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선명성이다.  

 

  이 책에서도 이 같은 특징은 여실한데 적군과 아군이 확실히 나뉜다.  

 

  이 선명성이 김태권의 만화에 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쉽게 질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출판사의 상술이 묻어나는 말이지만 '교양만화'가 쉽게 질리는 건 작가도 원치 않을테고.  

 

  독자인 나도 원치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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