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이다. 어떤 인간도 내게 낯설지 않다.(Homo sum, nihil humani a me alienum puto)
- 테렌스(T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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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자위적 조치'로 진행중이라고 주장하는 '핵 실험과 미사일 실험'이 일파만파를 일으키고 있다. UN 안보리가 대북 결의안을 몇 차례나 통과시켰는지는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비록 UN에서는 매번 '만장일치'를 이끌어 내지만 정작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해법은 나라마다 서로 다르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이 '대화냐 압박이냐'를 두고 매번 서로 충돌을 빚고, 한국은 그런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늘 우왕좌왕이다.
사드 배치만 해도 그렇다. 이건 애시당초부터 우리만의 독자적인 결정도 아니었다.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한 '대응 차원'이었다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파생된 문제에 가깝다. 임시 배치와 추가 배치와 확대 배치를 사이에 두고 우리가 겪은 갈등만 해도 이미 산더미같다. 사드 배치를 트집잡아 중국이 우리에게 가한 보복도 엄청났다. 그걸 해결하겠다고 다소 성급하게 추진한 '한중 정상회담'은 또다른 온갖 문제들을 파생시켰다. 이른바 홀대 외교와 혼밥 외교와 굴욕 외교 논란이다. 거기서 파생된 '기자 폭행 사건'은 급기야 '문빠는 미쳤다'는 데까지 번졌다. 이 모든 게 '북한 핵실험'에서 파생되었지만, 어느새 문제의 발생 원인은 온데간데 시야에서 다 사라지고, 코앞에서 터져나온 '문빠에 대한 비난글'을 두고 서로 갑론을박에 여념이 없다. 사정이 이쯤되니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는 귀신이고, 남들과 싸우는 데는 등신'이라는 우스개가 허투루 들리지도 않는다.
북한 핵문제가 파생시킨 수많은 연쇄 효과 가운데 가장 최신의 버전격인 '서민 교수의 도발적인 글과 그에 대한 반응'은 너무나 뜨거워서 함부로 가까이 다가서기가 두려울 정도다. 어느 한쪽을 편들었다가는 곧바로 그 사람에게 내리찍힐 '낙인'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문빠로 자칭하면서 서민 교수의 글을 격렬하게 반박하는 글도 수없이 올라 오고, 도리어 서민 교수의 글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들도 적잖이 있는 듯하다. 그들이 벌이는 갑론을박을 보노라면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싶은 생각은 쉽게 들지 않는다. '문빠는 미쳤다' 글에도 내용이나 표현상의 문제점이 분명 있지만, 서민 교수의 주장에도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을 읽는 동안에 내가 떠올린 생각은 애초부터 '범주 설정'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서민 교수의 주장 가운데 하나는 '문빠'가 너무 열성적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한 나머지 '수행 기자단 일부가 중국인들에 의해 폭행을 당했는데도' 정작 '사태의 본질'은 외면한 채 '기레기들이 맞을 짓을 했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 있었다. 이런 열성적이면서도 몰지각한 반응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해악' 가운데 하나요, 문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도리어 갉아먹는 역작용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도 드러냈다. 이에 대한 반론 가운데 가장 주목을 끄는 대목은 바로 '그동안 저질러온 기자들의 행태가 도리어 문제'였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오랫동안 누적되다 보니 '외국에 나가서 엊어맞아도 그리 동정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여기서 바로 '범주화'의 문제가 등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열성적인 지지자들은 '기자들'을 곱게 보아줄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러니 그들이 아무리 '국빈 방중 수행 기자단'에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그들 편을 들어줄 생각이 별로 없는 것이다. 심지어 뼈가 부러질 정도의 중상을 당했는데도 그런 반응을 보였으니 '기레기들'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고도 남을 정도다.
그런데 서민 교수는 이런 '문빠들의 심리상태'를 약간은 과소평가했던 듯하다. 서민 교수가 보기엔 기자 폭행 사건만 하더라도 놀라운데, 그 사건에 대한 문빠들의 반응이 더더욱 놀라웠던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라는 마음부터 앞서지 않았을까 싶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이진 않을 텐데? 그래서 서민 교수는 '문빠들이 미쳤다'는 자극적인 글까지 쓸 수 있었던 듯하다. 이미 과거에 문빠들이 일으킨 몇몇 부정적인 사례들도 글 속에 덧붙여졌다. 일단 '문빠'라는 범주에 포함되면 그들은 순식간에 온갖 '해악질'로 덧씌워진다. 기자들이 '기레기들'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는 순간 파렴치한으로 내몰리는 경우와 비슷한 경로를 밟는 셈이다.
우리는 이처럼 '남'에 대해서는 곧잘 '범주에 의거해' 그들의 행동을 판단하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상황에 의거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판단 경향'이야말로 이번 문제에 숨은 본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처지가 무척이나 억울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수행 기자들이 처한 상황'은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고 온통 '기레기들'이라는 나쁜 범주로 몰아서 '얻어맞아도 싸다'고 몰아세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민 교수의 입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기자들이 폭행당한 '상황'만 보고 있으면 '문빠'라는 나쁜 범주에 든 사람들의 댓글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문재인 지지자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문빠'들이 충분히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의 '상황'이었는데도, 서민 교수는 오로지 '문빠'라는 나쁜 범주만 들이대면서 자신들을 심지어 '치료가 필요한 환자 취급'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평소에 내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용어다. 어떤 대상이든 우리가 일단 그들을 '어떤 범주'에 포함시키고 나서 판단하려는 자세는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너무나 자주 저지르는 흔한 실수 가운데 하나다. 그들 각자가 처한 '상황'까지 찬찬히 살피는 것보다는 일단 그들을 '범주화' 하는 일이 매번 앞서기 때문이다.
근본 속성의 오류(fundamental attribute error)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상황에 의거해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남'에 대한 이해는 범주에 의거한다. 나는 일이 고되어서 늦잠을 잤지만 당신은 지중해식 문화 때문에(혹은 게으른 세대여서, 혹은 성격이 무사태평이어서) 늦잠을 잔 것이다. 이것이 사회심리학자인 리 로스가 '근본 속성의 오류(fundamental attribute error: 남의 행동을 설명할 때 불변의 속성으로 여겨지는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반면 상황적 요인은 지나치게 간과함)'라고 일컬은 인지적 차이다. 누구나 스스로에게는 결코 그와 같은 일반화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오류임을 알 것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중에서
그런데 '범주화'가 우리에게 가장 발달된 감각 가운데 하나가 된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인간 종족에게 오래전부터 내재된 '무리짓기의 본성'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태생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끊임없이 구별하도록 교육받고 훈련받고 진화해 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라는 느낌이 그만큼 우리의 삶에 소중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음을 앞둔 순간조차도.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감정
죽을 때조차도 '그들'보다는 '우리'에 속하는 편이 더 낫다. 1795년 런던의 켄싱턴 공원에서 루이스 에버쇼라는 사람이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사람들이 전하는 것처럼, 그는 교수대로 끌려가는 동안 지나치는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입에 꽃을 문 채로 최후까지 당당하게 죽었다.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가 목매달린 장소를 마치 영웅의 무덤인 양 방문했다. 그는 영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받으며 죽었다. 공개 교수형에 익숙했던 영국인들은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도 1759년 《도덕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교수대로 향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지하는 구경꾼들의 동정을 받으며 …… 수치심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고통이 혼자만의 것이라는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감정으로부터 벗어난다."(303쪽)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중에서
이번 '국빈 방중 행사'를 둘러싸고 여러 사람들이 보여준 극단적으로 엇갈린 반응들을 통해 느끼는 게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마음'이야말로 참으로 복잡미묘하고도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하기야 '1000억개의 뉴런들 사이에 놓인 1조 개의 시냅스들을 가로지르는 신호 체계'가 처리하는 그 수많은 코드들에 비한다면 겉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마음은 도리어 너무 단순하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방중 정상 외교'를 둘러싸고 서로 극명하게 엇갈렸던 '범주들'에 대한 반응들이 단지 '범주화'에만 국한된 문제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에 드러난 '우리'와 '그들' 사이의 견해 차이가 어쩌면 어른과 어린아이의 감정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과장일까.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
자기 자신을 조절하는 일도 그러한 예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감정의 차이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른들은 진지하고 비극적인 경험에 울지만 어린아이들은 놀이터를 떠나야 할 때도 운다. 어른들은 우스운 것을 보고 웃지만 어린아이들은 멍청한 행동이나 난처한 상황을 보고도 키득거린다. 아이들도 태어난 첫날부터 슬픔과 기쁨을 느낄 줄은 알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 슬퍼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쓰러져 통곡하는 행동이 국가적 참사에는 어울려도 초콜릿 바를 갖지 못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배워야 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기분에 맞추는 법을 배운다. 이는 '우리 부류'가 따르는 규칙을 배운다는 의미다. 그런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는 어떤 감정이 적절한지 알려주는 지침 없이 강렬한 감정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자기 자신이라는 작은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갈 것이다.(258쪽)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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