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3_장편소설


훌륭한 소설의 등장 인물은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초상화


크게 소리내어 상대에게 책을 읽어 주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바로 우리 앞에 앉아 있다 해도 독서는 사회적인 행위로 바뀌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읽은 이유는 수많은 등장 인물들과 스토리, 작가들의 목소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소설이 사라질 운명이라면 우리 모두 그 세계의 미학과 정신적인 가치에 존경을 표해야 한다. 지난 18,9세기에 그랬듯이 눈앞에 펼쳐질 제3의 천년에는 미학적 즐거움과 영적 통찰을 위해서 우리 모두 소설을 읽어야 한다. 훌륭한 소설의 등장 인물은 페이지를 차지하는 장식물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시대 이후 인간의 실체를 보여주는 초상화다. 소설은 지금도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묘한 아이러니


조이스는 『피네건의 경야』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열렬했던 관객들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한탄했지만, 내가 볼 때는 이 새로운 영상 시대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마저도 소멸해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프루스트도 사라질 것이다. 기묘한 아이러니다. 이런 지독한 시대에 소설이 많은 독자를 확보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소설들이 암울한 이 시대 상황을 짊어진다 해도, 우리는 다시 책장을 넘겨야 한다.



미구엘 드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1547∼1616)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


소설을 읽는 방법과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할 때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모든 소설의 선두요 최고를 차지하는 이 책은 소설 그 이상이다. 바스크 혈통 작가이자 세르반테스 비평가 미구엘 드 우나무노에게 『돈 키호테』는 스페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자, 하나님 그 자체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걸핏하면 다투지만 늘 화해한다. 사랑과 충성심, 돈 키호테의 무지, 경탄할 만한 산초의 지혜들 속에서 둘은 관계를 유지한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인물들은 서로의 말을 잘 귀담아 듣지 않는다. 리어 왕도 상대방의 말에 관심을 기울인 법이 거의 없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때로는 아주 즐거운 듯 보이지만 아예 서로의 말을 들을 수조차 없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 본인의 경우는 벤 존슨과 함께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청자로서의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다. 세르반테스도 남의 말을 듣는데 역시 뒤지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


『돈 키호테』에서는 끊이지 않고 사건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산초와 돈 키호테 간에 쉴새없이 이어지는 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손길이 닿는대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도 두 사람이 대화의 늪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밑바탕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며 변덕을 부리기는 해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깔려 있다.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금방이라도 파탄 날 정도로 싸워 대다가 곧 예의바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상대가 하는 말에서 뭔가 배우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의 얘기를 들음으로써 그들은 변화한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변화, 다시 말해 자아를 심화시키고 내재화하는 작업이 서로간에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


허클베리 핀은 짐에게서 자신의 산초를 발견했기 때문에 고독으로 시들어가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허무주의적인 스비드로가일로프의 이아고적 속성 안에서 반反 산초 판자와 마주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미시킨 왕자와 돈 키호테의 고상한 "광증"은 비슷하다. 세르반테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은 세르반테스에 대한 괴테의 경외심과 프로이트의 찬사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내게 생명을 달라!"


우나무노는 『돈 키호테』가 삶의 비극적 의미를 구현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광증"은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다. 그것은 각각 다른 시대에 죽음을 예찬한 스페인적 기질에 대한 항거였다. 그는 터키와의 레판토 해전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는데, 비록 이런 상처뿐인 전사라도 세르반테스 내부에서는 언제나 폴스타프와 함께 이렇게 외친다. "내게 생명을 달라!" 나는 우나무노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작품의 즐거움은 전적으로 산초 판자의 위대성에 있으며, 산초는 폴스타프나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에 등장하는 파누지와 함께 우리 속의 죽지 않는 무엇에 대한 또 다른 예라고 볼 수 있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독자들은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로 인해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처럼 세르반테스도 독자들을 즐겁게 해 주며, 활동적인 독자들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 갇힌 사자와 마주친 돈 키호테는 사자들이 공격할지 어떨지 알고 있다.


그리고 돈 키호테, 산초와 함께 여행을 해 온 활기 넘치는 독자들은 등장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들의 지식을 공유한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소설의 2부에서 거꾸로 독자들의 지식에 파고 든다. 이는 그들이 비평가가 되어서 자신의 모험을 감상하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이 소설의 제2부에서 세르반테스의 이토록 비상한 이야기 솜씨가 숨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셰익스피어는 20여 편이 넘는 위대한 희곡 작품들에서 자기 자신을 숨기는 놀라운 기법을 사용했다. 독자와 관객은 셰익스피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셰익스피어는 여러 가지 계획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생각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 키호테』2부에서 이와 정반대되는 기법을 창안해 냈다. 그리고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을 창안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환상으로 들어가는 틈새를 잘라 버렸는데, 이는 돈 키호테와 산초가 1부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2부를 통해 다시 언급했기 때문이다. 세르반테스와 돈 키호테는 바로크적이고 지적이여서 마술사들에게 불만을 지니고 있다. 세르반테스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표절자요 사기꾼들로 자신을 대신해 소설을 끝내려는 존재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


토마스 만은 돈 키호테에 관해 말하면서 "자기 칭송에 대한 영광으로 사는" 독특한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산초는 너무나 영민한 나머지 거기까지 나갈 수는 없었다.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세르반테스라는 작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세르반테스는 새로운 종류의 이야기꾼으로서 권위를 가졌다. 그 권위의 궁극적인 상속자인 마르셀 프루스트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을 더욱 진전시켰다.


또 다른 계승자로 『율리시즈』의 제임스 조이스를 들 수 있으며, 그와 프루스트의 사도며 『몰리』,『말론 죽다』, <무명> 3부작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가 있다.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


『돈 키호테』를 읽는 일은 즐겁다. 나는 독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몇 가지 측면을 언급했다. 세르반테스는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에게 돈 키호테적인 모습과 산초척인 측면이 섞여 있다고 생각했다. 왜 『돈 키호테』를 읽는가? 모든 극작가들 가운데 셰익스피어가 최고라면,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모든 소설 중 으뜸이며 최상이다. 따라서 돈 키호테와 산초 판자를 알기 전에는 우리 자신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탕달(1783∼1842)


스탕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공범이 되고 만다.


『보바리 부인』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처럼 거대한 스케일이며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작품이다. 그러나 하워드가 지적했듯이 고정된 형식이 없는 스탕달의 작품은 다시 읽어야 한다. 아마도 스탕달보다 더욱 셰익스피어적이었을 프루스트도 스탕달을 사랑했으리라. 왜냐하면 플로베르와 달리 스탕달은 자신에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우리는 왜 스탕달을 읽는가? 내가 흠모해 마지 않는 그 어떤 작가도 우리를 공모자로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스탕달의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공범이 되고 만다.


발자크는 『파르마의 수도원』을 "단 한 페이지에 책 전체를 담고 있다"고 격찬했다. 둔감한 독자들은 적잖이 당황하겠지만, 만일 당신이 어떤 풍미를 지녔다면 그 소설은 당신을 윟나 것이다.『파르마의 수도원』은 과장된 로맨티스트에게서나 가능할 법한 광기가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폴레옹 시대의 종말과 18세기 초엽 이태리로의 복귀, 즉 메테르니히가 워털루 전쟁 이후 복구하려던 셰계의 일부를 연대기화했다.



욕망의 무의식적인 진실을 찾는 형이상학자에 더 가까운 듯


스탕달은 항상 이성애적인 사랑의 심리학을 다룬다고 평가되었지만, 내가 볼 때는 욕망의 무의식적인 진실을 찾는 형이상학자에 더 가까운 듯하다. 열정적 사랑의 중심과 사랑에 빠졌을 때 병적인 면을 제외한 전부에는 허영심뿐이라는 사실을 그는 이미 알았다. 스탕달 때문에 불안정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독자들은 사랑에 빠지면서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제인 오스틴(1775∼1817)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제인 오스틴을 능가할 작가는 없다.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서 논할 때, 단편이나 시보다는 장편소설에 비중을 둔다. 그러나 소설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사회 개혁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영어로 글을 쓴 사람 중에서 제인 오스틴을 능가할 작가는 없다.



위선의 제거라는 점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오스틴은 존슨 박사만큼 현명한 작가였다. 오스틴은 존슨 박사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마음에서 "위선"을 없애라고 충고한다. "위선적"이라는 것은 진부한 어투, 지나치게 경건한 표현과 집단적인 사고들을 가리킨다. 위선의 제거라는 점에서 그녀는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오스틴의 작품을 "정치적으로" 읽는 사람들은 그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남녀를 떠나 많은 위대한 작가들과 함께 오스틴도 여성이 창의적인 면에서 남성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했다. 셰익스피어는 햄릿, 폴스타프, 이아고 등의 남성들을 창조했고 로잘린드, 포오샤, 클레오파트라 같은 여성 인물들도 보여주었다. 따라서 나는 셰익스피어가 남녀 모두에게 영예를 나누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찰스 디킨스(1812∼1870)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


윌리엄 해즐릿이 말한 것처럼 오래된 작품들을 다시 읽는 일은 가장 높은 수준의 즐거움이면서 독자 자신의 열망 깊은 곳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준다. 나는 디킨스의 『픽위크 페이퍼즈』를 일 년에 두 번씩 읽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권의 책이 닳아 없어지기도 했다. 그게 도피라면 난 기꺼이 그 도피에 참여하리라. 비록 『픽위크 페이퍼즈』에 등장하는 누구도 내게 동일화의 즐거움을 주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디킨스의 애독자들은 『위대한 유산』을 그의 소설 중 제1로 치지는 않는다. 대중적 인기로 치자면 『올리버 트위스트』보다 뒤진다. 디킨스 본인은 『코퍼필드』를 더 우위에 두었지만, 나를 포함해서 많은 비평가들은 『황량한 집』을 첫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러나 『두 도시 이야기』처럼 『위대한 유산』은 대단히 대중적이라는 면에서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수십 편의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 비견될 만하다. 왜냐하면 영화나 텔레비전이 아닌 모습으로 이 정보화 시대에 살아남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햄릿』과 『맥베드』를 읽듯이 우리는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읽을 것이다.
















 



표도르 미카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영웅ㅡ악당의 살인에 우리가 공모하도록


도스토예프스키는 셰익스피어처럼 영웅ㅡ악당의 살인에 우리가 공모하도록 만들었다. 『맥베드』와 『죄와 벌』은 공포와 연민의 정마저도 없애 주지 못하는 전율적인 비극이다. 셰익스피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회를 전도시켜서 음침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다. 우리는 맥베드의 이 끔찍한 숭고함을 공유하기 때문에 악몽 같은 환영이 현실이 되는 음습한 페테르스부르그의 여름을 겪으면서도 『죄와 벌』을 읽으며 절망을 초월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벽들은 추악한 노란색이며 현대 대도시의 공포는 보들레르나 디킨스에 필적하는 강렬함으로 묘사된다. 마치 맥베드의 마녀들이 사는 스코틀랜드에서처럼 라스콜리니코프의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우리 역시 살인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죄와 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무엇이 라스콜리니코프를 살인자가 되도록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성품의 젊은이로 근본적으로 품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탈리아의 뛰어난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라스콜리니코프는 남을 억누르기로 잘 알려진 스탈린 시대의 인민 위원들의 전례"라고 말한 사실에 감탄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악마적 패러디인 스비드리가일로프처럼 자기 처벌자이지만, 그의 매저키즘은 나폴레옹이 되고 싶다는 공언된 욕망과 일치하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가보다는 날카로운 예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


『죄와 벌』은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결함, 즉 어떤 특정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당파심이 강해서 맹렬한 관점이 언제나 글에 두드러지게 묘사된다. 그의 계획은 나자로처럼 허무와 회의에서 독자들을 일으켜 세워 러시아 정교로 개종시키려는 것이다.


체호프나 나보코프 같이 뛰어난 작가들도 그의 그런 태토를 참을 수 없어했다. 그들이 볼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예술가보다는 날카로운 예언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죄와 벌』을 매번 읽을 때마다 강력하고 사악한 시련을 발견한다. 마치 맥베드 자신이 쓴 『맥베드』같은 느낌이다.


















헨리 제임스(1843∼1916)


정치적 인식은 더욱 보잘것없는 소득일 뿐


왜 『여인의 초상』을 읽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는데, 무엇보다 독서를 통해 소득이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의 의식을 육성하는 일은 독서의 주요한 이유다.


특히 정독은 주된 소득이 될 것이다. 독서에서 열정과 통찰은 독자들이 얻는 고양된 의식의 속성이다. 사회적인 정보는 과거나 현재에 상관없이 독서의 부차적인 문제다. 그리고 정치적 인식은 더욱 보잘것없는 소득일 뿐이다.



너무 귀중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의식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여인의 초상』은 우리가 면밀히 읽고 그것과 교감해 주길 원한다. 우리는 이사벨의 선택에 대해 만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가 왜 읽는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즉 너무 귀중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의식들을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다.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고전의 최종적인 빛


"소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물음은 고전의 최종적인 빛이라고 말할 수 있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의미와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드러난 절대적인 창의성과 마주친다면 어떨까?


이 광대한 소설은 마르셀이라는 인물이 1인칭으로 서술하고 있다. 마르셀은 젊은 시절 프루스트의 초상으로, 19세기 마지막 10년부터 프루스트가 죽은 1922년까지 프랑스 사회의 미로 같은 회고담을 들려 준다. 이 소설의 주제는 다양하다.


미학과 아름다움, 매춘굴, 산 사람에게 들러붙은 죽은 자, 의상, 반유태주의에 몰두한 드레퓌스 사건을 비롯하여 우정, 습관, 남녀의 동성애적 도착, 질투, 문학, 그리고 서술자의 소설가로의 점진적 진화, 성적 질투심만큼이나 널리 퍼진 기억, 사디즘적 마조키즘, 바다, 잠, 그리고 시간 …



성적 질투심을 극화시키는 데 뛰어난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


니체는 가장 햄릿적인 진술의 하나로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말을 찾아 내면 그것은 이미 우리 마음 속에서 죽어 있는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말하는 행위에는 일종의 경멸감이 들어 있다. 프루스트는 셰익스피어와 달리 이 경멸감에서 자유로웠다. 주요 인물들은 프루스트의 관대함을 나타낸다. 이기적 에고이즘은 셰익스피어만큼이나 프루스트의 성적인 질투심으로 표출하는 강한 관심이다.


감히 말하건대, 소설을 읽으면 질투가 완화된다. 그 가운데 성적 질투심이 가장 독성이 강하다. 이런 성적 질투심을 극화시키는 데 뛰어난 작가가 셰익스피어와 프루스트였다. 따라서 소설이란 '성적 질투심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고 축소해 볼 수 있다.



소설로부터의 탈피는 지혜의 문학에 대한 거부


프루스트는 우정이란 "육체적 탈진과 정신적 권태로움의 중간"에 있다고 정의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에게 현실이 얼마나 작은가를 보여 주는 두드러진 예"라고 말했다. 니체는 거짓을 소모적이라고 경고한 반면, 프루스트는 "완벽한 거짓말"은 새로움을 여는 것이라고 찬양했다.


앞에서 진지한 소설 독자가 점차 줄어든다고 말했는데, 나는 프루스트를 다시 읽으면서 소설로부터의 탈피는 지혜의 문학에 대한 거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지혜를 찾을 수 있을까?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프루스트는 그 인물들을 시간의 신성들로 간주하며 우리에게 회고적 신성과 질투심을 보여 주는데, 이 두 감정은 실은 하나다. 프루스트의 남녀 주인공들은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성적 질투심과 투쟁에 사로잡힌 신들이다.


프루스트의 치유 능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읽은 글 안에서 길을 잃곤 했던, 50년 전 방식대로 읽을 수는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토마스 하디의 『숲속의 사람들』에 나오는 메리 사우츠와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을 때 나는 지독한 슬픔에 잠겼다. 작품 속의 여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현실은 어떤 경험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프루스트의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소설을 읽을 것인가?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시간과 장소에서 한계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되면서도, 프루스트적인 삶의 축복을 보여준다면 질투에 사로잡혀 읽게 된다.



















토마스 만(1875∼1955)


우리에게는 보다 더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


『아이러니의 개념』을 쓴 덴마크의 종교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논쟁의 여지없이 셰익스피어를 아이러니의 대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고의 아이러니스트라 일컫는 세익스피어조차 햄릿이라는 인물 속에서 진실하면서도 이상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우리에게는 보다 더 친밀한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전혀 없을 수도 있으리라. 독자들은 『마의 산』을 읽고 난 뒤에 카스토르프라는 인물에 대해 알 것이다. 그는 분명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마의 산』을 다시 읽으면서 만의 위대한 아이러니는 그가 카스토르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자들은 카스토르프가 매력적인 젊은이긴 하지만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장편소설 1부_요약


주요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가?


조만간 그 형태마저 사라질지도 모르는 소설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어떤 통렬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뛰어난 소설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잠재적으로 가치 있는 이러한 교훈은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주요 등장 인물들은 변화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을 변하게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자기-엿듣기를 통한 셰익스피어적 변화의 패턴이 지배하지만, 만의 『마의 산』에서 카스토르프는 세르반테스의 계획을 따르며 자유주의 철학자 세템브리니는 그러한 카스토르프에게 지적인 산초 역할을 한다.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 변화란 로마 시인 오비드보다 중세의 영국 시인 초서의 뒤를 잇는 위대한 발명이다. 오비드는 초서, 크리스토프 말로와 함께 셰익스피어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햄릿, 리어 왕, 안토니, 클레오파트라 같은 인물들이 변화한 것은 남의 말을 읏듣듯이 자신의 얘기를 엿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안토니는 자신의 갑옥솨 투구를 들고 다니는 에로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에로스, 그대는 내가 보이는가?"


자기가 한 그 말을 스스로 엿듣게 된 안토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자신이 의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우리가 아주 좋은 책에 귀 기울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독자들도 본인에 대해 엿듣고 놀란 후에, 자신이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인식하고 반성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영어나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좋은 친구와의 밀접한 대화를 통해 쉽게 자기 반성으로 이어지며 결국 정신적 변화를 초래하는 세르반테스적 양식에 의해서 더 많이 변한다.


스탕달, 제인 오스틴, 도스토예프스키, 헨리 제임스, 프루스트 등은 셰익스피어의 패러다임을 좇았던 반면, 디킨스나 토마스 만의 경우는 모파상, 칼비노와 함께 세르반테스적 양식에 더 가까운 작가들이다.


앞서 언급했던 투르게네프, 체호프, 헤밍웨이, 보르헤스 등은 셰익스피어에게 더 큰 영향을 받은 단편 소설의 대가들이다. 또 마지막 장에서 이야기할 미국 작가들도 토마스 핀천을 제외하고는 모두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았다.


훌륭한 독서가 세르반테스의 양식처럼 우리에게 서로의 얘기에 귀 기울이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인가? 감히 말하건대, 우리가 아주 좋은 책에 귀 기울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얘기를 경청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최상의 서정시도 남에게 말하는 법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깊고 꾸준한 독서만이 자율성 있는 자아를 세워 주고 확대시켜 준다는 것


외로운 독자는 사라져가는 족속이다. 또한 더할 나위없는 고독의 즐거움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깊고 꾸준한 독서만이 자율성 있는 자아를 세워 주고 확대시켜 준다는 것이다. 당신이 당신 자신이 되지 못하면 남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나는 고대 랍비들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었던 힐렐의 충고를 늘 기억한다.


"만일 내가 날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날 위해 줄 것인가? 그리고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또 그 언제인가?"



플로베르는 "내가 보바리 부인이다"라고 고백했다.


『보바리 부인』을 쓴 플로베르나 『율리시즈』의 조이스 같은 소설가는 등장 인물의 뒤에 있는 '수수께끼의 저수지'에 몸을 담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묘하게도 산초와 돈 키호테를 창조한 것을 드러내 놓고 찬양하는 세르반테스보다 더 깊이 인물과 동일시되어 있다. 플로베르는 "내가 보바리 부인이다"라고 고백했다. 조이스 역시 레오폴드 블룸(『율리시즈』의 주인공 이름)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고도의 기법을 구사했지만 결국에는 꿋꿋하고 인간적인 폴디와 하나가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돈 키호테』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작품은 구성을 찾으려고 읽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물의 발전 과정과 작가의 비전이 펼쳐지고 밝혀지는 것을 보려고 읽어야 한다. 따라서 산초 판자와 돈 키호테, 스완과 알베르틴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친밀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된다. 나는 스탕달과 디킨스에 관해서 다시 읽는다는 개념에 대해 주창한 바 있는데, 이는 제인 오스틴이나 세르반테스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다.

소설을 처음 읽으면 단순한 즐거움을 느끼지만 『위대한 유산』이나 『파르마의 수도원』같은 작품을 다시 읽게 되면 전혀 다른, 혹은 보다 나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 전에는 불가능했던 전망 속으로 들어서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즐거움은 첫 번째 독서보다 더 다양하고 계몽적인 요소가 된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아도 어떻게 , 왜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일은 새로운 인식이다. 무엇이든 한 번 더 본 것에 다가가기가 쉽다.

누구나 젊은 날 열정적으로 반복해서 책을 읽고, 소설 속의 마음에 드는 인물과 동질성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만의 『마의 산』은 그러한 동일화의 즐거움이 나이에 관계없이 독서라는 경험의 합법적 일부라고 앞서 내 경험을 통해 이야기했다. 그러한 즐거움이 비록 중년 이후에는 단순한 것에서 감상적인 것으로 될지라도 말이다.


현명한 수동성

거대한 문학을 접했을 때, 이를테면 단테의 『신곡』이나 헨리 제임스의 『비둘기의 날개』같은 작품에 미리 위축되거나 두려워하면 우리의 이해와 즐거움은 파괴되고 만다. 책을 펴는 순간 권력에의 의지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의지는 우리가 독서에 몰두하고 작가에게 관심을 빼앗긴 후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물론 잘 읽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방법에는 관심의 수용이 관련되어 있다.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워즈워스가 말한 "현명한 수동성"이 좋은 독서가 요구하는 관심과 최상의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허먼 멜빌(1819∼1891)

에이허브는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 버금갈 만한 미국적 영웅

에이허브는 분명한 셰익스피어적 인물이다. 그는 리어 왕이나 맥베드와 비슷한데,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 맥베드의 영웅-악당의 모습을 동시에 지녔다. 아홉 살 때 처음 이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에이허브는 시인 월트 휘트먼이나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에 버금갈 만한 미국적 영웅이었다. 그는 자신과 모든 선원들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했다. 물론 소설을 이끌고 있는 화자는 유일한 생존자인 이스마엘이지만 말이다.


이후의 어떤 작가도 필적할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적 저항의 틀을 만들었다

에이허브는 자신의 신성한 자아를 주장하고 불을 숭배하는 일이 옳은 것이었다. 에이허브는 "만일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부셔 버리고 말겠다!" 라고 외치며 이후의 어떤 작가도 필적할 수 없는 프로메테우스적 저항의 틀을 만들었다.

에이허브 선장에 댛나 짧은 분석으로 『백경』을 다룬 것은 이후 논의하게 될 모든 미국 작가들의 등장 인물 가운데 선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의 마음을 깊이 품었던 멜빌의 서사에 대해서 열정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토마스 핀천(1937∼2004 현재)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

독자로서 내 경험에 따르면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첫 번째 독서 어딘가에서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 그 의미를 재조립할 수 있었다. 웨스트의 『미스 론리하트』는 그 멋진 부패함에 이끌려 읽자마자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때는 우러르고 사모하는 마음에 이해를 덧붙일 수 있었다.

반면『49호 품목의 경매』를 처음 읽었을 때 분노 자체였다. 그러나 두 번째 읽으면서 순식간에 그것에 사로잡혔는데 그 감정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런고로 나는 독자들이 이 작품을 두 번 정도는 읽었으면 한다. 처음 짜증나게 했던 것이 '놀라움'이 된다.




















코맥 매카시(1933∼2004 현재)


『피의 오후』는 진정한 의미의 계시적 미국 소설


『피의 오후』는 진정한 의미의 계시적 미국 소설이다. 이 작품은 발표되었던 15년 전보다 오히려 2000년에 더 적합해 보인다. 코맥 매카시는 멜빌과 포크너의 뛰어난 사도라서 『백경』이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명성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감히 말하건대, 핀천을 포함해 살아 있는 미국의 어떤 소설가도 『피의 오후』만큼 강력하고 기념비적인 소설을 남기지 못했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인내해야 한다.

나는 독자로서 『피의 오후』를 완독하는 데 두 번이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자 한다. 매카시가 그려 내는 잔혹한 학살이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폭력은 열다섯 살의 소년이 등과 심장 아래 총을 맞는 두 번째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 순간, 그러니까 30년 뒤 홀든 판사가 옥외 화장실에서 키드를 살해하는 순간까지 잔혹함이 이어진다. 『피의 오후』에서 보여 주는 살인과 살육은 1999년 코소보의 폭력에 대한 유엔 보고서 같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인내해야 한다. 『피의 오후』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보편적인 '피의 비극에 대한 정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창의적인 성취를 이루어 냈기 때문이다. 홀든 판사는 셰익스피어의 이아고처럼 교활하며 악마적인 전쟁 이론가다. 이 작품은 뛰어난 언어, 풍경, 인간과 개념들이 폭력을 넘어 멜빌이나 포크너의 셰술에 견줄 만한 잔인한 공포의 미학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랠프 월도 엘리슨(1914∼1994)


의미있는 산문은 큰 소리 내며 읽을 필요가 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그 질감에서 『백경』이나 『내가 죽어 누어 있을 때』만큼이나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읽어야 한다. 의미있는 산문은 큰 소리 내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 보상은 엄청나다. 이 소설은 정치와 이념을 초월하고 보이지 않는 사람의 의무를 피하지 않는다. 그 의무란 미국이 아프리카 계열 아메리칸의 노예제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현대의 니네베라 할 수 있는 미국의 파괴를 예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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