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회복의 제5원칙>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본래 마음보다 더욱 독창적인 마음을 추구하게 된다. 피상적인 측면에서 볼때, 이데올로기는 아이러니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파괴한다. 나는 이 '아이러니의 회복'이 <독서 회복의 제5원칙>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햄릿의 끊임없는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라. 그는 무언가 말할 때 언제나 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가끔 전혀 반대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아이러니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독해지라고 가르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아이러니의 상실은 독서의 죽음이며 우리 본성 속에서 문명화된 모든 것의 죽음이다.
나는 뱃전에서 바다를 향해 놓은 널빤지 위를 눈 가린 채 걷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 위로 별들이 느껴지고
발 아래는 바다가 있네.
다음 한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몰라
나는 불안하게 걸음을 옮기네.
누군가 경험이라 부른 그것을.
ㅡ 에밀리 디킨슨
여성과 남성은 걷는 모습이 다르다. 굳이 성적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으로 걷는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아이러니를 모르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그녀는 한 길만을 걷고 있다. 위험한 널빤지 위를. 그러나 그녀의 느리고 조심스러운 걸음은 '머리 위로 별들을 느끼고' '발 아래 바다가 있는' 거대함과 아이러니를 이룬다. 그 다음 한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불안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그녀는 에머슨의 수필『경험Experience』을 읽었을 것이다. 그 수필은 에머슨에게는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몽테뉴가 자신의 수필 『경험에 대하여Of Experence』에서 느꼈던 만큼 최상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묘사된 아이러니는 에머슨의 수필 첫 부분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에서 자신을 발견하는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련의 극단 속에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극단이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된다."
디킨슨에게 극단은 다음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언제 우리가 가장 현명한지 알기만 한다면!"
이렇듯 이어지는 에머슨의 공상은 기질 면에서 ㅡ 혹은 디킨슨의 말처럼 걸음걸이 면에서 ㅡ 디킨슨의 공상과는 다르다. 에머슨적 경험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들이 헤엄치고 빛난다." 에머슨의 따뜻한 아이러니는 디킨슨의 불안정한 아이러니와는 다르다. 두 사람이 공론가는 아니지만 그들은 각자의 아이러니가 발산하는 경쟁적인 힘 속에 살고 있다.
잃어버린 아이러니의 길 끝에 마지막 걸음이 있으며 그것을 넘으면 문학적 가치는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아이러니는 은유일 뿐이다. 더구나 한 시대의 아이러니는 다른 시대의 아이러니와 같을 수가 없다. 아이러니의 재생이 없다면 한때 창조적 문학이라고 불렀던 것들은 모두 상실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