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몽테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는 사물을 해석하기보다도 해석을 해석하는 데 더 일이 많으며, 책을 놓고 쓴 책이 다른 제목을 두고 쓴 것보다 더 많다.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주석하는 짓밖에는 하지 않는다." 나는 책에 대해 쓴 책을 볼 때마다 몽테뉴가 했던 저 말이 생각난다. 어쨌든, 몽테뉴가 뭐라고 말했든지에 상관없이, 나는 책에 대해 쓴 책은 별로 읽지 않는다. 그런 책을 읽을 시간에 한 권이라도 더 책다운 책을 읽기 위해서다. 우리는 이미 좋은 책들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좋은 책 속에 이미 얼마나 많은 다른 좋은 책들이 소개되어 있던가. 책을 몰라서 책을 못 읽는 건 아니다. 시간은 우리에게 매번 우호적이지도 않다. 그래도 가끔씩은 '대가들의 말씀'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책뿐만 아니라 책을 왜,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알려주기 때문이다. 최근에 우연히 펼친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는 다른 책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지침 몇 가지가 담겨 있어서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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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 고찰하고 숙고하기 위해 독서하라


독자로서 나의 이상이며 평생 스승인 사무엘 존슨 박사는 독서의 힘과 한계 모두를 알고 표현했다. 다른 모든 활동과 마찬가지로 존슨 박사는 독서에도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오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존슨에게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공해 주고, 독서에 대해 유명한 충고를 했다.


"논박이나 반박을 위해, 맹목적으로 믿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위해 독서하지 말라. 이야깃거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닌 고찰하고 숙고하기 위해 독서하라."


베이컨과 존슨 외에 또 한 사람의 현자로 랄프 왈도 에머슨이 있다. 역사와 모든 역사주의를 완강히 반대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책은 '하나의 본성이 글을 쓰며 바로 그 본성이 읽는다'는 확신을 우리가 느끼게 해 준다."


베이컨, 존슨, 에머슨의 생각을 종합해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하나의 공식으로 만든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찰하며 숙고하는 데 사용되는 것,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당신 자신이 작가의 본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다가서는 바로 그것을 찾도록 하라! 실용주의적인 측면으로 말하면, 먼저 셰익스피어를 찾고 이후 셰익스피어가 당신을 찾도록 하라는 의미다. 만일 리어 왕이 당신을 찾는다면 그것이 당신과 공유하는 본성, 즉 당신에 대한 그 작품의 밀접한 관계를 고찰하고 숙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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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회복의 제1원칙>


인생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가치는 특이한 것, 의미를 지닌 행위와 관련 있다. 역사주의자들 ㅡ 우리 모두가 사회사에 의해 규정된다고 믿는 비평가들 ㅡ 이 문학 작품 속의 인물들을 한낱 종이 위에 쓰여진 표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우리의 사고가 무시된다면 햄릿은 역사상 한 사례에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존슨 박사의 <독서 회복의 제1원칙>을 말하고자 한다.


"마음에서 위선의 말들을 없애라."


위선적인 말이란 엄숙하지만 진부한 뜻을 갖거나, 어떤 특정 부류에서 쓰이는 은어 등을 가리킨다. 이른바 대학에서 사용하는 젠더Gender(사회적 성), 섹슈얼리티Sexuality(생물학적 성)나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같은 말이 그것이다. 존슨의 충고를 따른다면 이렇게 고쳐 써야 한다.


"마음에서 학문적 위선의 말들을 없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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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회복의 제2칙>


<독서 회복의 제2원칙>은 "독서를 통해 이웃이나 주변을 개선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개선은 정신과 영혼을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독서의 사회적 윤리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원초적 무지를 없애 버릴 때까지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미숙한 행동주의로의 일탈은 그 자체로는 매력있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우리에게 독서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든 과거든 시간을 역사화하는 일은 일종의 우상으로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강박적인 숭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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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회복의 제3원칙>


존 밀턴이 찬양하고 에머슨이 제시했던 대로 "내적인 빛으로 독서하라." 이는 <독서 회복의 제3원칙>인데 "학자는 모든 사람의 사랑과 욕망이 불을 붙이는 촛볼"이기 때문이다. 월러스 스티븐스는 자신의 근원을 망각한 채 그러한 은유에 관한 놀라운 변주곡들을 쓰고 있지만, 독창적인 에머슨의 구절이 <독서 회복의 제3원칙>에 대해 보다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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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회복의 제4원칙>


사회는 교양 있는 남녀 없이 유지될 수 없다고 에머슨은 말했다. 그는 예언적으로 "작가의 고향은 대학이 아니라 사람들이다"라고 덧붙였다. 에머슨이 말한 의미는 남의 대표성에 종속된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를 대표하는 강력한 작가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정치학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대학 교육의 기능은 에머슨이 쓴 「미국의 학자」라는 글에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학자의 의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학자들은 모두 자기 신뢰로 구성되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에머슨의 이 표현을 빌어 <독서 회복의 제4원칙>을 정하고자 한다 :


"우리는 잘 읽기 위해서 발명가가 되어야 한다."


에머슨이 말한 '창조적 글읽기'를 나는 한때 '그릇된 글읽기'라고 명명한 적이 있었는데, 이 말 때문에 경쟁자들은 내가 의도적인 읽기 장애를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보는 폐허나 여백은 이미 그들 안에 있는 것이다. 자기 신뢰는 선천적인 게 아니고 오랜 시간의 심도 깊은 독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미학에는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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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회복의 제5원칙>


우리는 독서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본래 마음보다 더욱 독창적인 마음을 추구하게 된다. 피상적인 측면에서 볼때, 이데올로기는 아이러니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파괴한다. 나는 이 '아이러니의 회복'이 <독서 회복의 제5원칙>이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햄릿의 끊임없는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라. 그는 무언가 말할 때 언제나 다른 의미를 내포하며 가끔 전혀 반대의 의미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누군가에게 아이러니를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고독해지라고 가르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아이러니의 상실은 독서의 죽음이며 우리 본성 속에서 문명화된 모든 것의 죽음이다.



나는 뱃전에서 바다를 향해 놓은 널빤지 위를 눈 가린 채 걷네.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 위로 별들이 느껴지고

발 아래는 바다가 있네.

다음 한 걸음이

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몰라

나는 불안하게 걸음을 옮기네.

누군가 경험이라 부른 그것을.


   ㅡ 에밀리 디킨슨



여성과 남성은 걷는 모습이 다르다. 굳이 성적으로 구분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으로 걷는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아이러니를 모르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


그녀는 한 길만을 걷고 있다. 위험한 널빤지 위를. 그러나 그녀의 느리고 조심스러운 걸음은 '머리 위로 별들을 느끼고' '발 아래 바다가 있는' 거대함과 아이러니를 이룬다. 그 다음 한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녀는 불안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경험이라 불렀다고 말한다.


그녀는 에머슨의 수필『경험Experience』을 읽었을 것이다. 그 수필은 에머슨에게는 그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몽테뉴가 자신의 수필 『경험에 대하여Of Experence』에서 느꼈던 만큼 최상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작품 속에 묘사된 아이러니는 에머슨의 수필 첫 부분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디에서 자신을 발견하는가? 우리가 알 수 없는 일련의 극단 속에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극단이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된다."


디킨슨에게 극단은 다음 걸음이 마지막 걸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언제 우리가 가장 현명한지 알기만 한다면!"


이렇듯 이어지는 에머슨의 공상은 기질 면에서 ㅡ 혹은 디킨슨의 말처럼 걸음걸이 면에서 ㅡ 디킨슨의 공상과는 다르다. 에머슨적 경험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들이 헤엄치고 빛난다." 에머슨의 따뜻한 아이러니는 디킨슨의 불안정한 아이러니와는 다르다. 두 사람이 공론가는 아니지만 그들은 각자의 아이러니가 발산하는 경쟁적인 힘 속에 살고 있다.


잃어버린 아이러니의 길 끝에 마지막 걸음이 있으며 그것을 넘으면 문학적 가치는 다시 회복될 수 없다. 아이러니는 은유일 뿐이다. 더구나 한 시대의 아이러니는 다른 시대의 아이러니와 같을 수가 없다. 아이러니의 재생이 없다면 한때 창조적 문학이라고 불렀던 것들은 모두 상실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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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코 평범함에는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는 것


그릇된 독서를 하는 것은 그릇된 삶을 사는 것과 같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시간은 그다지 자비롭지 않은 듯하다. 우리가 신이나 자연에 죽음을 빚지고 사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결코 평범함에는 아무런 빚을 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전되거나 적어도 대표하고자 의도하는 집합성이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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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우리는 셰익스피어, 단테, 초서를 비롯하여 세르반테스, 디킨스, 프루스트 그외에도 많은 작가의 작품을 읽는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 우리의 삶은 더할 수 없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실용적인 면에서 그것들은 '무한한 시간 속으로 이어지는 보다 많은 삶'이라는 진정으로 야훼(히브리인의 신)적인 의미의 축복이다.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독서를 한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너무 잘 아는 것들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잘 알고 자아와 타인뿐 아니라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도 책을 읽는다. 그러나 오늘날 남용된 전통적 정전에 대해서 깊이 독서하려는 이유는 가장 강력하고 진실한 쾌락을 찾기 위한 것이다.


나는 독자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래서 비교하고 숙고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 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믿지 말고, 받아들이지 말고, 논박하지 말고, 읽고 쓰는 하나의 본성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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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4-1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 회복 제2원칙이 독서에 대한 저의 가치관과 조금 비슷합니다. 웬만하면 책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책 추천을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은 책’의 의미가 불분명합니다. 제가 생각한 ‘좋은 책’이 다른 분들에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일 수도 있어요. 추천 도서가 ‘누구나 읽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범한 독자들은 명사의 추천 도서에 관심을 가져요. 그런데 꼭 그 책들을 무조건 읽을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명사의 추천 도서 목록이 개인의 독서 취향을 변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상대방이 소설만 읽는 것을 ‘편식 독서‘로 규정해서 인문 도서도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일은 독서 회복의 제2원칙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인용한 문장 마지막 말처럼 독자 스스로 책들에 다가서고, 자유롭게 고르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oren 2017-04-19 19:39   좋아요 1 | URL
cyrus 님께서 길게 피력해 주신 댓글 잘 읽었습니다. 에머슨의 <독서 회복의 제2원칙>은 제가 인용한 문장이 전부입니다. 앞뒤로 생략된 문단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제가 인용한 저 짧은 문장만으로 ‘독자 스스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2원칙‘이 문장 그대로 ˝독서를 통해 이웃이나 주변을 개선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었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자기 개선은 정신과 영혼을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독서의 사회적 윤리란 있을 수 없다.‘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로 읽었구요. 제가 해석한 바로는 ‘독서‘가 마치 ‘이웃이나 주변을 개선할 수 있다‘는 듯이 너무 ‘계몽적 목적‘을 강조하는 일부의 경향을 헤럴드 블룸이 비판하는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독서의 사회적 윤리‘를 언급한 것도 그 연장선이겠구요. 헤럴드 블룸이 말한 ‘미숙한 행동주의로의 일탈‘도 그런 뜻이 일부 포함되어 있다고 봤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장의 마지막 부분인 ‘나는 독자들이 자기 스스로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것, 그래서 비교하고 숙고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 내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깊이 읽도록 하라.‘ 라는 문장도 ‘자기 스스로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과 ‘깊이 읽도록 하라‘ 두 곳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읽었더랬습니다. 헤럴드 블룸의 문장은 함축적인 표현들이 많아서 꽤나 ‘다의적으로‘ 읽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헤럴드 블룸의 생각을 자주 접해보지 못해서 제가 저 문장을 오독한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똑같은 글을 읽고도 이렇게나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