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읽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펼쳐 든 지도 시간이 꽤나 흘렀다. 워낙에 거대한 장편소설이라 여러 날을 읽어도 좀처럼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내가 읽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의 경우,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면 무려 1,724쪽에 이르는데 이제 고작 백여 쪽만 남겨두고 있으니 이번 대장정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셈이다. 그런데 마침 오늘 문학동네 판『전쟁과 평화』가 박형규 교수님의 새로운 번역으로 드디어(?) 나온 모양이다. 그래서 읽는 중간에 밑줄긋기라도 하나 올려볼까 싶어서 페이퍼를 열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전쟁과 평화』을 읽고 있는 대목 또한 마침 '조국 전쟁'의 마무리 국면인 '1812년 10월'이어서 오늘이 가기 전에 어떤 기록을 슬쩍 남겨보고도 싶다. 따지고 보면 내가 머물고 있는 '소설 속 시대 배경'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05년 전 이맘때인 셈이다.

 

책을 읽는 내내 '톨스토이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책 속에 담긴 '지도'까지 거듭 들춰보며 온갖 전쟁터를 하나도 빠짐없이 졸졸 따라다닌 끝에 마침내 대단원의 막이 저만치서 준비되고 있다는 걸 문득 알아차린 게 마침 또 오늘이다.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무려 수천 km를 진군한 끝에 텅빈 모스크바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였지만 정작 그곳에서 '더이상 마땅히 할 일'을 제대로 찾지 못한 나폴레옹은 치명상을 입은 짐승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침내 모스크바를 빠져 나가는 중이고, 러시아군 총사령관 꾸뚜조프는 실로 오랜 기다림끝에 (웅크리고 있던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를 빠져나와 퇴각을 위해 머나먼 행군길에 올랐음을 확신하고 나서) 조국이 구원받았음을 처음으로 확신하면서 감격에 겨운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그 대목들을 묘사한 톨스토이의 글들은 마치 철학자의 심오한 얘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고도 매혹적이다.(마침 톨스토이가 이 소설을 쓸 무렵엔 쇼펜하우어에 너무나 심취해 있었다. 몇몇 대목에서는 '쇼펜하우어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대목조차 보인다. 톨스토이는 온갖 인상적이고도 기억할 만한 대목에 이를 때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 위해 독자들을 오래도록 붙잡아 두는 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기어이 다 쏟아놓고 나서야 간신히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제 막『전쟁과 평화』라는 이 거대한 소설을 앞에 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머나먼 장도'에 오르기 위해 첫 발을 내딛고 싶어 하는 독자들에게도 다음 몇몇 대목들은 충분히 흥미롭지 않을까 싶어서 (다른 인상적인 숱한 대목들은 다 제쳐두고 이 문장들 만이라도 살짝) 여기에 옮겨 본다. 마침 이 대목들은 묘하게도 이 위대한 작품을 끝까지 다 읽기 위해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작가와 마주해야 좋을지에 대해서도 얼마쯤 도움이 되어 줄 듯한 느낌마저 갖게 만든다. 참고로, 이번에 새로 나온 문학동네 판『전쟁과 평화』는 내 짐작으로는 아마도 전4권 구성으로 나오지 않을까 싶다. 원작 구성이 '총 4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오늘 나온 1권의 분량으로 미뤄보아 그렇다. 이번 번역본 또한 완역되기까지는 얼마간의 '인내와 시간'이 필요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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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인내와 시간,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용사다

 

'공격을 하면 우리는 질 뿐이라는 것쯤은 그들은 깨달아야 한다. 인내와 시간,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용사다.' 꾸뚜조프는 생각했다. 사과는 아직 파랄 때 따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과는 익으면 저절로 떨어지는데, 파랄 때 따면 사과도 나무도 상하게 되고, 먹어도 이가 시릴 뿐이다. 그는 노련한 사냥꾼처럼 짐승이 부상당했다는 것, 러시아가 전력을 다하여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치명상인지 아닌지는 아직 분명치 않은 문제였다. 지금은 로리스똔과 베르젤레미(나폴레옹의 사자)가 파견되어 왔다는 점이나, 유격대의 보고에 의해서 꾸뚜조프는 적이 치명상을 받고 있다는 것은 거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확증이 더 필요했다.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인 짐승을 달려가서 보고 싶어하고 있다. 기다려라,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항상 행동, 항상 공격 타령이다!' 그는 생각했다.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건가, 항상 눈에 띌 생각만 하다니. 마치 싸우는 데에 무엇인가 즐거운 일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마치 어린이 같아서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조리 있게 말하지도 못한다. 모두 자기는 싸움을 잘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면밀한, 훌륭한 작전을 제안한다! 그들은 두서너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내면(그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보내온 종합 계획을 상기했다), 그것으로 모든 가능성을 생각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가능성은 무수히 있는 법이다.' (1398-13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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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의 경험으로

 

그는 60년의 경험으로, 소문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두면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는 인간은, 바라고 있는 것을 마치 뒷받침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든 정보를 정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그런 경우, 모순되는 것은 모두 자진해서 간과해 버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꾸뚜조프는 그것을 바라면 바랄수록 더욱더 그것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1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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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적인 분해조건


그러나 나폴레옹이 이들 풍요한 남부 지방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러시아군은 그에게 길을 열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군은 그때 자신의 내부에 이미 피할 수 없는 파멸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역사가들은 잊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풍부한 식량을 발견하면서도 그것을 유지하지 못하고 발밑에 짓밟아버린 이 군대가, 또 스몰렌스크에 침입했을 떄도 식량을 정리, 분배하지 않고 약탈한 이 군대가, 어찌 깔루가 현에서 대세를 만회할 수 있었으랴!


이 군대는 어디서도 태세를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보로지노 전투와 모스크바의 약탈 이래 이 군대는 이미 자기 자신 안에, 말하자면 화학적인 분해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1402쪽)


 * * *

 

1000km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인간은 운동 속에 있을 때는 항상 그 운동의 목적을 자기를 위해 생각해내려고 한다. 1000km의 길을 걷기 위해서, 인간은 그 1000km 저편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운동하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희망의 땅을 그려낼 필요가 있다.

 

프랑스군이 공격하고 있을 때의 희망의 땅은 모스크바였고 퇴각 때에는 조국이었다. 그러나 조국은 너무나 멀었다. 1000km의 길을 가는 사람은 그 거리가 너무 멀어 아무래도 최종적인 목적을 잊은 채 자기에게 이렇게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나는 40km를 걸어가면 휴식과 숙박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한다.' 그리고 처음 행정(行程)을 가는 동안에는 이 휴식지가 궁극의 목적지를 가리고, 모든 희망과 기대를 그 자체에 집중시킨다. 각 개인 속에 나타나는 갈망은 항상 군중 속에서는 증폭된다. (14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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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덩어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녹일 수는 없는 것

 

눈 덩어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녹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일정한 시간의 한도라는 것이 있어서 그 어떤 열의 힘도 그보다 빨리 녹일 수는 없다. 반대로 열을 가하면 가할수록 남은 눈은 더욱 굳어진다.

 

러시아군 지휘관 중에서 꾸뚜조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것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군이 스몰렌스크 가도를 따라서 퇴각한다는 방향이 정해졌을 때, 꼬노비니찐이 10월 11일 밤에 예상하고 있던 일이 현실로 되기 시작했다. 군의 수뇌들은 모두 전공을 세우려고 프랑스군을 분단하고, 붙잡아 포로로 하고, 패주시키려고 공격을 요구했다.

 

오직 꾸뚜조프 한 사람만이 자기의 온갖 힘을 (어떠한 총사령관의 경우도 그러한 힘은 그다지 큰 것은 아니다) 공격을 반대하는 데에 쏟고 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모두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전투를 하고, 도로를 차단하고, 아군의 장병을 읽고, 불행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힐 까닭이 어디 있는가? 그러한 일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투도 하지 않고 모스크바에서 뱌지마까지의 사이에서 그 군대의 3분의 1이 사라져버렸는데……. 그러한 일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노인다운 지혜로 모두가 이해할 만한 것을 끌어내서 말하였다. 그는 황금의 다리를 놓아 적을 계속 도망하게 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그를 비웃기도 하고 중상하기도 하고 피살된 짐승을 찢고 내던져 창피를 주었다. (1404 ∼14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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