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거기에 자기의 행복과 위대함과 슬픔과 굴욕을 예상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축도. 전 인류의 생활의 축도. 「전쟁과 평화」는 참으로 그러한 명작이다.”

 - N. N. 스뜨라호프(1828∼1895)

 

 * * *

 

(동서문화사 판『전쟁과 평화』는 1권 834쪽, 2권까지 포함하면 1,724쪽에 달한다.『전쟁의 역사』는 1,038쪽.)

 

프랑스의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는 어떻게 몽테뉴에게 접근해야 할지 궁금해 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한다. “그 책은 재미를 찾는 어린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그 책은  '살기 위해서' 읽어라.”

 

어쩌면 톨스토이에게 접근하려는 독자들에게도 이 말이 제법 훌륭하게 적용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톨스토이가 쓴 작품들 가운데 특히『전쟁과 평화』에 '어떻게' 접근할지 몰라 궁금해 하는 독자에게라면 더욱더.

 

내가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은 다 마다하고 『전쟁과 평화』부터 대뜸 붙잡고 읽기 시작한 건 최근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은 덕분이다. 사실 『율리시스』와 『전쟁과 평화』는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지 두 작품 모두 여간해서는 완독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라는 점과 무엇보다도 방대한 분량 때문에라도 선뜻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유사한 공통점을 빼고는 말이다. 아무튼 나는 『율리시스』라는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작품을 훌쩍 뛰어넘고 나니 웬만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차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괜한 걱정'으로부터 거의 해방된 느낌을 일순 받았던 모양이다. 아마도 험준한 고산준봉을 정복하고 난 뒤에 슬며시 찾아오는 까닭모를 자신감이라고나 할까.

 

좋은 책은 열심히 읽으면 그 대가가 있다. 가장 좋은 책이 가장 좋은 것을 줄 것이다. 책으로부터 받는 것은 두가지가 있다. 첫째, 어렵고 좋은 책을 붙잡고 씨름한 대가로 책을 읽는 기술을 향상시켜준다. 둘째, 좋은 책은 이 세상과 독자 자신에 대해 가르쳐준다. 이것이 훨씬 중요한 대가일 것이다. 인생을 배우는 것, 즉, 더 지혜로워진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만 제공해주는 책을 읽고 나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더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하고 위대한 진리를 보다 깊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360쪽)

 - 모티머 J. 애들러,『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中에서

 

『전쟁과 평화』는 그동안 언젠가 한 번은 꼭 읽어봐야지 하는 막연한 느낌만 가져 봤을 뿐 좀처럼 이 책을 읽을 계기를 찾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도록 강력하게 부추기는 직접적인 계기는 거의 없었을지 몰라도, 막연한 계기조차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에 심취했던 톨스토이'를 발견했던 일, 『평생독서계획』에 담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매혹적인 소개글을 만난 일, 밀란 쿤데라의 『배신당한 유언들』에 담긴 톨스토이의『전쟁과 평화』속 문장들을 둘러싼 이야기 등이 이 작품에 다가서는 희미한 계기들이었다면, 몇 년 전 어느 날(아마도 틀림없이 '재활용'이 있었던 날이었으리라) 아내가 동네 아파트에서 주워 온 묵직한 '세계문학전집' 판『전쟁과 평화』는 이 작품에 실제적으로 다가서는 '시각적 자극'으로는 더할 나위없이 강력한 것이어서 마침내 이 책을 읽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었던 듯하다.

 

('아내가 주워 온 책들'의 외관은 듬성듬성 이가 빠진 노인처럼 비록 온전치는 못하지만 그래도 위풍당당하기만 하다. 저 유명한 작품들을 굳이 '까마득한 옛날 버전'으로 읽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가끔씩 저 책의 '앞부분'에 담겨 있는 '그림들'을 살펴보는 재미만큼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아내가 주워온 책에서도 재삼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저 위대한 작품들이 대개 그저 '장식용'으로만 소비된다는 게 너무 아쉽다. 저들 가운데 그나마 내가 읽은 몇 안 되는 작품들만 하더라도 그 얼마나 심오하고 위대한 예술품이던가 말이다. 가령 호메로스, 신곡, 돈키호테, 파우스트, 적과 흑, 전쟁과 평화 등만 놓고 보더라도...)

 

 

그런데 톨스토이는 왜 하필이면 '전쟁과 평화'라는 거대담론과도 같은 제재를 '소설 형식'에 담아내려고 했을까? '전쟁과 평화'는 오히려 역사가나 군인 또는 철학자들에게나 훨씬 더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 어쩌면 '전쟁과 평화'는 소설이나 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 형식에 훨씬 더 적합한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할 무렵에 미리 작품 해설을 꼼꼼이 살펴본 바로도 그렇고, 또 소설 속으로 직접 들어간 이후로도 나의 예상이 그리 틀렸던 건 아니었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인『전쟁과 평화』는 결코 그저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역사상으로 실제 벌어졌던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은) '거대한 전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큐멘터리'와도 닮은 데가 무척이나 많았다. 그런 결정적인 증거들은 이 책 속에 담긴 '전투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1805년의 '제1차 나폴레옹 전쟁'은 총 4편으로 구성된 이 작품 내용 가운데 제1편 주요 배경이다. '울름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뮌헨을 거쳐 빈까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쉔부른 궁전에 머물고, 오스트리아 황제는 황급히 빈을 떠나 브륀으로 천궁한다. 보헤미아 지방의 유서깊은 도시 브륀은 마침 밀란 쿤데라의 고향이자 그의 작품 『농담』의 주무대이기도 하다.(남자 주인공 루드비크가 꿈에도 잊지 못하던 루치에를 무려 15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는 곳이다) 어쨌든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패하고, 안드레이는 이 전투에서 '전사자'로 분류될 정도로 중상을 입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끝에 전쟁이 끝난 뒤에야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이른바 '삼제회전(三帝會戰, Battle of the Three Emperors)'으로도 불리는데, 프랑스에 대항해 동맹을 맺은 러시아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나폴레옹 황제가 이 전쟁터에 동시에 참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나폴레옹은 파리에 '개선문'을 세워 자신의 마음 속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카이사르를 그대로 따랐다. 아우스터리츠는 브륀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지금의 체코 모라비아 지방에 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나폴레옹'이 작품 속에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당대 유럽의 지도를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좌우할 만큼 막강한 위세를 떨치며 생생하게 우리의 눈 앞에서 되살아나 움직이는 것처럼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전쟁 소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위대한 문학 작품의 반열에 올랐을까? 『전쟁과 평화』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막연하게나마 이런 엉뚱한 의문을 늘 마음 한켠에 품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런 막연한 억측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현대판 일리아스'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라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마치 놀랍도록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대건축물 앞에 섰을 때 받게 되는 압도감을 느낄 정도였다. 무려 500명이 훨씬 넘는 숱한 인물들이 광활한 무대를 배경으로 격동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들에 대한 묘사와 서사 자체도 놀랍지만, 작가 스스로 온갖 인물들과 사건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가다듬어 길게 서술해 놓은 '역사 비판'과 '전쟁 철학' 등이 여기에 한데 녹아 있어, 일찍이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좀처럼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파노라마의 장관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는 이 소설을 쓰는데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온전히 바쳤다.(35세에 '나폴레옹 전쟁 시대'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1869년 41세 때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대전쟁'을 아주 깊이 연구하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자세히 탐구함으로써 '자신이 진실로 하고 싶은 말'을 이 작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으리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프랑스 혁명 이후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전 유럽을 정복하기로 마음 먹은 보나파르트와, 그에 맞서 자신들의 '국가의 명예'와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의 많은 국가의 황제들과 군사령관들과 외교관들과 민중들이 벌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 과연 '무엇을 위해서' 또는 '누구를 위해서' 벌어진 전쟁인지, 그토록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간 숱한 인물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영위했는지, 그러한 '행위들'은 심지어 우연이었는지 혹은 필연이었는지를 아주 진지하게 탐색해 보는 일이야말로 톨스토이가 진정으로 이 소설을 쓴 목적이었던 셈이다. 그는 그토록 지난하면서도(제1부를 완성하는데 6년이나 걸렸고, 아내는 창작에 몰두하는 남편을 위하여 일곱 번이나 원고를 정서하였다.) 진지한 성찰들을 거친 끝에 마침내 방대한 전쟁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연구자료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며 '위대한 문학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셈이다.

 

(집필하는 톨스토이_레닌그라드 러시아 미술관 소장. 이 그림 역시 주워 온 '학원세계문학전집' 앞부분에 담겨 있다.)

 

 

작품은 그저 단순한 역사소설에만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쟁이 아무리 치열하게 벌어지는 와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전쟁터에서 비켜나 있었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기 마련이었고, 사실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이 숱한 사람들이 어디선가 매번 태어나고 또 죽기 마련인 법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엔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 이야기 말고도 주로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대저택에서 생활하는 당대의 명문 귀족 집안 사람들이 소설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면서, 그들의 희망과 즐거움과 행복, 좌절과 괴로움과 불행, 사랑과 배신, 소박과 탐욕을 놀랍도록 섬세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그러한 점들이 이 소설을 전쟁소설만이 아니라 가정소설 혹은 연애소설이나 심지어 성장소설처럼 읽히게 만든다. 전쟁의 와중에도 수시로 대저택에서 열리는 숱한 무도회와 파티와 만찬 테이블 주위에서 보고 듣는 화려한 무곡을 곁들인 왈츠와 떠들썩한 대화와 몸짓들을 통해 우리는 당대 러시아 귀족들의 온갖 허영과 위선과 허위에 찬 모습까지도 더없이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로스또프 백작 집안'의 '눈이 부시도록 맑게 빛나는 한 때'를 담은 그림. 톨스토이가 소설 속에서 이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 너무나 인상적이고 생생해서 책을 읽으면서 절로 '한 폭의 그림'을 떠올렸었는데, 뒤늦게 주워 온 '세계문학전집' 속 『전쟁과 평화』에 마침 이토록 환한 그림이 담겨 있었다. 겨우 열두엇 남짓한 나따샤와 그의 어릴 적 남자 친구인 보리스, 꼬마 남동생인 뻬쨔, 사촌자매인 쏘냐와 그의 남자 친구이자 나따샤의 친오빠인 니꼴라이의 1805년 무렵의 그저 순수하고도 천진난만하기만 한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들 앞에 놓인 생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어디론가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게 된다.)

 

 

(로스또프 가문의 둘째 딸 나따샤는 이 작품의 여주인공이다. 그녀 곁에는 사촌자매인 쏘냐가 '서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 것처럼' 언제나 단짝으로 더불어 지낸다.)

 

 

(사진 옆에 붙은 설명은 '파스테르나크의 그림'이다. 아마도 톨스토이의 『부활』삽화를 그린 화가 '레오니트 파스테르나크'를 말하는 듯싶다.『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화가 파스테르나크의 장남이다. 뻬쩨르부르그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할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지닌 '엘렌'은 바씰리 공작의 딸이자, 약혼한 나따샤를 파혼에 이르도록 유혹한 아나똘리와 남매지간이다. 정략결혼을 한 삐에르와 엘렌은 서로 별거하다시피 지낸다.)

 

전쟁이 터지면서 숱한 젊은이들이 집안의 권유나 자신의 입신 출세를 위해서, 혹은 국가에 대한 막연한 의무감으로 고국을 떠나 '머나먼 전선'으로 바삐 이동하고  각자 낯선 군부대에 배치된다. 그들은 마침내 난생 처음으로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 적병과 맞닥뜨리고, 각자 자신의 열망에 부응할 정도의 영웅적인 공을 세우거나 혹은 어리석은 만용 때문에 큰 부상을 당해 쓰러진다. 전쟁터의 실전 상황은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전투' 경험이 더해져 놀랍도록 사실적이면서도 생생하다.

 

전쟁의 와중에도 젊은 장교들은 틈나는 대로 휴가 명령를 받아 그리운 가족들이 살고 있는 빼쩨르부르그 혹은 모스크바로 돌아와 잠시나마 '안온한 일상의 행복'으로 더러 복귀한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 서로 몰라보게 훌쩍 커버린 '어릴 적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의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기도 하고 쑥쓰러워하면서도 어느새 '예전에는 결코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랑의 감정에 일순 휩싸이고 번민하고 남모를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또다시 긴 이별과 짧은 만남을 반복한다. 그 가운데 갓 결혼한 안드레이 공작의 '군입대 장면'과 니꼴라이의 '첫 휴가 장면'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도 감동적이어서 그 장면을 읽노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자신의 '입영 전야'와 '첫 번째 휴가'를 떠올리지 않고는 배겨날 수 없을 정도다. 심지어 자신의  아들을 이미 군대에 보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나이를 먹은 나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자식을 군에 들여보내던 그 때 그 가슴이 아리도록 먹먹한 이별의 순간들과 첫 휴가를 나온 아들을 맞이하던 가슴 벅찬 재회의 순간들을 잠시나마 넋을 잃고 한참이나 회상할 지도 모르겠다.(『전쟁과 평화』가 유례없이 방대한 규모와 웅장한 스케일 때문에 곧잘 현대판 『일리아스』에 비견되곤 하는데,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지 못하도록 자신의 아들을 궁녀들 틈에 숨겼던 아킬레우스의 어머니나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놀라운 '병역기피 꼼수'를 부리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함께 떠올려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두 작품 사이에 놓인 거대한 시공간적 간극 때문에 그 작품들이 다루는 전쟁의 원인이나 전개 양상이 서로 너무나 다르다고 미리부터 충분히 수긍하고 보더라도 사정이 별반 달라지지는 않는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절대적인 영웅 숭배'인데 비해 톨스토이의 작품이 '민중의 힘'을 지극히 긍정하는 작품이라는 점도 서로 완전히 정반대이다.)

 

'전쟁'과 '평화'를 사이에 두고 광할한 시공간적 배경 위에 벌어지는 온갖 인물들에 대한 놀랍도록 섬세한 심리 묘사와 온갖 연령대와 인물들, 온갖 서로 다른 지위와 재산과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겪게 되는 '인생 유전'을 읽노라면 독자들은 절로 톨스토이가 평생토록 고민했던 문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게 된다. 톨스토이는 그만큼 충분히 많은 인물들을 적재적소에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배치해 놓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뿐만 아니라 그들의 내면 속으로 아주 수월하게 파고 들어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과 표정과 생각들을 마치 우리 눈앞에 금방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듯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한 섬세한 묘사 능력들이 바로 이 걸작을 자주 '영화화'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재삼 말할 필요가 없다. 나 또한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가장 놀랐던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점이었다. 톨스토이는 어쩌면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도 이토록 놀라우리만치 사실적으로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행동과 내면의 심리를 어쩌면 그토록 잘 그려내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전쟁과 평화』가 지닌 장점이자 단점은 무엇보다도 작품의 규모가 너무나 방대하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숫자가 무려 559명에 달한다는 걸 어디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만큼 이 작품 속엔 온갖 다양한 인물들이 얼키고 설켜 있다. 물론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이상한 이름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이런 방대함에 너무 곤혹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신기하게도 이 인물들은 '느린 호흡으로' 이 소설을 천천히 읽어나가는 동안 자연스레 그들의 용모와 성격을 보다 뚜렷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명문 귀족가문 출신들이 대부분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이 점은 흔히『까라마조프 형제들』로 대표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가령『까라마조프 형제들』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라는 인물은 온갖 비열함과 추악함과 어두움을 상징하지만,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사생아인 삐에르 베주호프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농노가 딸린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갑부이긴 하지만 선량함과 박애주의와 진리탐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귀족 중심의 인물 구성은 작가인 톨스토이 스스로 거대한 영지를 물려받은 명문 귀족가문 출신이었던 데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지만, 그보다 먼저 이 소설을 집필한 배경 자체가 1825년에 일어났던 (명문 귀족가문 출신 젊은이들이 주도한)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근본 원인'을 찾고자 하는 의도에 있었다는 점과, 그 탐구 노력이 결국은 거기서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까지 닿았고, 결국 그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 가운데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한 인물들이 아무래도 귀족 출신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도 당연했다.

 

 

(그림 위_야스나야 폴랴나의 톨스토이 저택 일부.  그림 아래_톨스토이 집의 깨끗하고 밝은 객실.)

 

 

평생에 한 번 읽기도 벅찬 이 거대한 스토리를 '세 번씩이나' 읽은 어느 독자가 칭찬한 이 소설의 세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포괄성이고 둘째, 자연스러움이며 셋째, 무시간성이다." 그 독자가 세 번째로 다시 읽고서 느낀 이 소설의 미덕은 "톨스토이는 진실을 말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인생이나 예술이나, 단 한 가지 필수적인 사항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 번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말대로, 인생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 그것이 『전쟁과 평화』의 주제이다. 이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좀 괴상하고 시대가 좀 멀어서 그렇지 결국 따지고 보면 우리들의 얘기에 다름아닌 만큼, 누구라도 제대로 붙잡기만 하면 힘들이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게 나의 결론이다. 당장에 너무 빨리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손 치더라도 언젠가 적당한 계기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서 아주 적당한 시간들이 찾아오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유해 본다. 그저 장식용으로 바라만 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탁월한 예술작품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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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몽고메리 장군(1887∼1976) 이 쓴『전쟁의 역사』에는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유명한 전투'들이 총망라되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톨스토이가『전쟁과 평화』에서 다뤘던 '나폴레옹 전쟁'에 관련된 몇몇 대목들만 적당히 골라 담아봤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1805년의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 유럽 곳곳이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였다.)

 

 

(『전쟁의 역사』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 병력 배치도. 이 책에 서술된 내용과 톨스토이가 쓴『전쟁과 평화』속 묘사 내용이 세세한 부분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가령 전투 당일의 날씨라든가, 아주 우연하게 일어난 야릇한 사건-우연히 밀짚에 불이 붙었는데,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불꽃놀이가 벌어진 것으로 생각한 프랑스 병사들이 더 큰 불을 놓았고, 이 불길이 맹렬하게 불타오르자 감정에 북받친 3만 병사들이 맹렬히 나폴레옹의 이름을 연호한 일-까지도 '너무나 똑같이' 그대로 묘사해 놓았다.)

 

 

(『전쟁의 역사』 에 담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묘사한 그림. 오스트리아군 수석 참모인 바이로더는 잘못된 '작전계획'을 세우는 바람에 역사적인 대참패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되고, 나폴레옹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전쟁의 역사』앞부분에 담긴 컬러판 '보로디노 전투'. 나폴레옹 군대에서 수훈을 세운 장군이자 화가인 르죈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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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밑줄긋기_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from Value Investing 2016-10-10 20:14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펼쳐 든지도 시간이 꽤나 흘렀다. 내가 읽고 있는 동서문화사 판의 경우, '작품 해설'까지 포함하면 무려 1,724쪽에 이르는데 이제 고작 백여 쪽만 남겨두고 있으니 이번 대장정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셈이다. 그런데 마침 오늘 문학동네 판 『전쟁과 평화』가 박형규 교수님의 새로운 번역으로 드디어(?) 나온 모양이다.(그래서 짤막한 글이라도 하나 쓰고 싶어 이러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판본인 1993년에 나온 '학
 
 
붉은돼지 2016-10-01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대하소설이군요 저도 한번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았다 합니다 ㅋ
그런데 이 전쟁과 평화는 왜 민음사, 문동이나 열린책들 혹은 펭귄 세계문학전집 목록에는 없는지 전에도 궁금해한 적이 있는 것 같아요^^

oren 2016-10-02 00:09   좋아요 0 | URL
정말 대하소설이라는 말에 썩 잘 어울리는 소설이지요. ˝지금까지 씌어진 가장 위대한 장편소설˝이라는 평가도 자주 받는 작품이구요. 너무 길다는 게 단점이면서도 정말 장점인 그런 소설인 듯해요. 격류처럼 요동치는 세월 속에서 온갖 등장 인물들이 저마다 성장하고 변모하고 혹은 늙어가면서 제각각 `나이에 따라 변해 가는 선명한 특징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해 놓은 걸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높다란 언덕 위에 서서 유유히 굽이치며 흐르는 대하(大河)를 바라보며 `지난 세월에 내가 겪고 보았던 온갖 사건과 인물들`을 길게 회상하면서 깊은 상념에 젖게 되는 듯한, 그런 느낌도 갖게 되더라구요. 유명한 작품 치고는 번역본이 별로 많지 않은 게 좀 이상하긴 하더군요. 앞으로 좋은 판본들이 차츰 새로 나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