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필로멜레와 프로크네,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1861, 퐁텐블로 성

 

 

 

그리고 그가 장인을 알현했을 때 두 사람은

서로 악수했고, 그들의 만남은 순조롭게 시작되는 것 같았다.

그는 찾아온 용건과 아내의 부탁을 말하며 처제를 자기와 함께

가게 해주면 빠른 시일 안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보라, 필로멜라가 화려하게 성장하고 들어왔다.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 화려했다. 물의 요정들과 나무의 요정들이

숲 속을 거닐 때의 모습이라고 우리가 들었던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도 그녀처럼 세련되고 우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소녀를 보자 테레우스는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으니,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익은 곡식이나 마른 풀이나

축사에 쌓아놓은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를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미모는 실제로 그럴 만도 했다. 하나 그의 경우 타고난

욕정에 더욱 자극 받은 데다, 원래 그 지방 사람들이 애욕에 약했다.

그렇듯 그는 자신의 부족과 지신의 악덕 탓에 타올랐던 것이다.
테레우스는 자신의 왕국을 다 거는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호위하는 시녀들과 그녀의 충성스런 유모를 매수하고

엄청난 선물로 그녀를 유혹하거나, 아니면 그녀를 납치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납치된 그녀를 지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미친 사랑의 포로가 된 만큼 감행하지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의 가슴은 그 안에서 타고 있는 불길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지체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프로크네의 부탁을

열심히 되풀이하며 그녀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 했다.

사랑은 그를 달변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요구가 지나치다 싶으면

그때마다 그것은 프로크네의 뜻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도 그녀가 그렇게 시킨 양 그는 간청에 눈물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하늘의 신들이시여, 얼마나 많은 눈먼 밤이 인간의 가슴속을 지배하는

것입니까? 테레우스는 자신의 범죄 계획 자체에 의해 경건하다는

평을 들었고 자신의 범행으로 칭찬까지 들었던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447∼474

 

 


태양신이 이륙 십이, 12궁을 모두 통과하자 일 년이 지나갔다.

필로멜라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감시자가 그녀의 도주를

막고 있고, 단단한 돌로 쌓은 외양간의 담들은 튼튼했으며,

말 못하는 입은 당한 일을 알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고통은

사람을 매우 창조적이게 하고, 역경은 약삭빠르게 하는 법이다.

그녀는 야만족의 조잡한 베틀에다 날실을 걸고는 흰 바탕에

자줏빛 글자를 짜 넣어 자신이 당한 범행을 새기고 있었다.

그것이 완성되자 그녀는 그것을 한 시녀에게 건네주며 왕비에게

갖다 주라고 손짓으로 부탁했다. 부탁 받은 여인은 자기가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프로크네에게 갖다 주었다.

야만적인 폭군의 아내는 그 천을 펼친 후 자신의 아우의

비참한 운명을 읽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고통이 그녀의 말문을 닫았고,

혀는 분한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눈물을 흘릴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정의와 불의를

가리지 않고 앞으로 내달았고, 마음속은 온통 복수의 일념뿐이었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571∼586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칼을 쓰거나,

칼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쓸 때란다.

아우야, 나는 어떤 범행이든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어.

나는 횃불로 이 왕궁을 불지르고 간악한 테레우스를

불속에 던져 넣거나, 칼로 그자의 혀를 자르고

눈을 뽑고 너에게 치욕을 안긴 사지를 절단하거나,

수천의 상처로 그자의 죄 많은 영혼을 몸에서 내쫓을 것이다!

어떤 큰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어.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될지

나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어." 프로크네가 말하고 있는 동안

이튀스가 다가왔다. 아들을 보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난 그녀는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아아, 너는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는가!" 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러 말 않고

속으로 조용히 분을 끓이며 끔찍한 범행을 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이 다가와 어머니에게 인사하며

작은 팔로 목을 껴안고 소년답게 응석을 부리며

입맞추자 어머니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분노가 한풀 꺾였고, 그녀의 두 눈은

그녀의 의사와는 달리 본의 아니게 흘러내린 눈물로 젖어 있었다.

하나 일단 지나친 모정으로 자신의 결심이 흔들린다고 느끼자

그녀는 다시 아들에게서 아우의 얼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왜 한 명은 사랑스런 말을

건넬 수 있는데, 다른 한 명은 혀를 잘리고 아무 말도 못하는 거지?

왜 그는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그녀는 언니라고 부르지 못하지?

판디온의 딸이여, 대체 어떤 남편과 결혼했는가? 너는 못난 자식이야!

테레우스 같은 남편에게 성실하다는 것은 범죄야!"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611∼635

 

 

그러고도 그녀는 얼굴조차 돌리지 않았다. 소년에게는 이 한 번의

가격으로도 충분했을 터인데 필로멜라가 칼로 그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의 사지를 해체했다.

이어서 그 중 일부는 청동 솥에서 부글부글 끓었고,

일부는 꼬챙이에 꿰여 지글지글 소리를 냈다.

방 안에는 피가 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아내가 아무 영문도 모르는 테레우스를 이 잔치에 초대하며,

자기 고국의 풍속에 따른 신성한 잔치로 남편만이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시종들과 하인들을 따돌렸던 것이다.

테레우스는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왕좌 위에 높다랗게 앉아

혼자 식사를 하며 제 살로 제 뱃속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마음이 눈멀어 "이튀스를 이리 불러주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로크네는 자신의 잔인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안겨준 파국을 맨 먼저 알리고 싶어서

"그대가 찾는 사람은 안에 있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가 재차 묻고 부르자 필로멜라가 자신이 미쳐서

살해한 소년의 피를 머리에 뒤집어쓴 그대로 튀어나오더니

핏방울이 뚝뚝 듣는 이튀스의 머리를 그의 아버지의 얼굴에다

내던졌다. 그녀는 이때처럼 자신의 혀가 말할 수 있기를, 알맞은 말로

자신의 희열을 표현할 수 있기를 더 바란 적은 없었을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642∼660


 

아들 이튀스의 머리를 마주한 테레우스, 루벤스, 1636~1638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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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4-08-19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변신이야기> 문장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으시는가 보군요. ㅎㅎ 저는 예전에 이윤기님 번역본으로 읽다가 (아마도 바쁜 일 생기면서) 마무리 못한 상태에서 그냥 멈췄는데요. Oren님께서 다시 한 번 재도전의 동기부여를 해주시네요. ^^

oren 2014-08-19 01:50   좋아요 0 | URL
야클 님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정말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다고 올 봄과 여름에 걸쳐 깔끔하게 다 읽었답니다. 그런데 그 로마 시인이 그 책 속에서 기가 막히게 펼쳐놓은 문장들이 자꾸만 저를 잡아 당기는 듯하고, 또 '이야기' 하나 하나 마다에 얽힌 그림들도 좀 더 찾아보고 싶어서 이러고 있답니다.

이윤기 님이 번역한 다섯 권짜리는 작가님이 손수 찾아가 보고 카메라에 담아 온 사진들이 많아서 여러모로 유익하더군요. 다만, '원전'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들도 많고, '원전'에 나오는 이야기들 가운데 빼먹은 부분도 많아서 제게는 많이 아쉽더라구요. 야클 님께서도 이윤기 님이 쓰신 다섯 권짜리를 다 읽으신 후에는 오비디우스의 원전을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한 이 책을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ㅎㅎ

야클 2014-08-19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윤기님 다섯 권 짜리 <그리스 로마 신화 > 말고 민음사에서 나온 < 변신이야기 1,2> 두 권 짜리가 있거든요. 천병희님 과는 조금 달리 산문식으로 번역해 놓아 또 다른 느낌을 준답니다. ^^

oren 2014-08-19 11:40   좋아요 0 | URL
아아.. 이윤기 님께서 번역하신 <변신 이야기>를 말씀하셨던 거로군요. 그 책이 있다는 걸 제가 깜빡했군요. 이윤기 님께서 번역하신 <변신 이야기>는 또다른 읽는 맛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신화'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를 지니신 분이고 또 번역하시는 글솜씨도 훌륭하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오비디우스가 지은 시를 그분께서 굳이 산문으로 옮겨 번역하신 걸 보면 번역하실 때 나름 상당한 고민을 하셨겠다 싶은데, (천병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책들이 지닌 '특유의 꼼꼼한 주석'과 비교하여) 그분께서 달아놓으신 '주석'은 어떤지 문득 궁금하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