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몹시 차다. 이런 날씨만큼 '따뜻한 모닥불'이 그리울 때가 또 있을까.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면서 아주 오랜 옛날에 내가 겪었던 '추운 겨울'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서 보낸 이야기들이 까마득히 잊혀진 채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되살려 놓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가 손수 월든 호숫가의 숲을 개간해서 밭을 갈고 콩을 심고 거둬들인 경험을 바탕으로 쓴「콩밭」이라는 한 장의 글만 읽어보더라도 나는 그가 쓴 분량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듯한 자신감마저 무럭무럭 솟는다. 다만 소로우의 글처럼 생생하고도 푸릇푸릇한 문장들을 엮어낼 자신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니, 소로우처럼 이야기를 힘차게 이끌어나가는 강인한 근육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마치 초여름 가뭄에 풀죽은 잡초처럼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내 헛된 욕심을 서둘러 접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콩과 나눈 교제
내가 콩과 나눈 긴 교제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수확해서 도리깨질하고 좋은 콩을 선별해서 팔았다-파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런데 콩을 맛보기도 했으니 먹어본 경험도 덧붙일 수 있겠다. 나는 콩에 대해 알아보기로 결심했다.48 ······ 나는 잡초의 미묘한 조직들을 무자비하게 깨뜨렸고, 괭이로 몹시 불공평한 차별을 하며 잡초에 속한 풀은 완전히 없애버리고 콩은 꼼꼼하게 가꾸었다. 저놈은 유럽산 쑥-저놈은 돼지풀-저놈은 괭이밥-저놈은 포아풀-덤벼들어 저놈을 잘라내라. 뿌리째 뽑아 햇볕에 던져버려라. 저놈의 수염뿌리 하나라도 그늘에 두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저놈이 반대편으로 몸을 뒤집어, 이틀 만에 부추처럼 벌떡 일어설 것이다. 그것은 긴 전쟁이었다. 두루미와의 전쟁이 아니라 잡초와의 전쟁이었다. 잡초는 태양과 비와 이슬을 자기편으로 둔 트로이 사람들이었다. 콩들은 매일 내가 괭이로 무장하고 자기들을 구하러 오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적을 솎아내며 밭고랑을 잡초의 시체더미로 채워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주위에 꽉 들어찬 전우들보다 1피트는 크고 기운차게 볏을 흔들던 수많은 헥토르49가 내 무기 앞에 속절없이 쓰러져 먼지 속에 뒹굴었다.50
주석
48. 뉴잉글랜드에서 '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은 무식함을 간접적으로 빗댄 표현이었다. 이 말을 뒤집어 사용한 것이다.
(나의 생각)
우리 말에도 '숙맥'이란 표현이 있음을 떠올리지 못할 바보가 있을까. 머나먼 북아메리카의 시골에서도 '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은 무식한 바보로 통했다니 '콩'을 너무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듯하다.
49.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의 아들로, 트로이에서 가장 용감한 전사였다.
50.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빗댄 표현이다. "마침내 그는 먼지 속에 뒹굴었다."(알렉산더 포프 번역)
소로우의 이런 글들을 읽으며 나는 '괭이로 새 흙을 긁어 이랑 쪽으로 끌어당길 때'의 그 까마득한 옛 '순간들'을 순식간에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괭이가 돌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도 다시금 들었다. 그리고 그가 밭을 일구다 발견한 '모닥불이나 햇볕에 탄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자연석들'을 나도 다시 찾아냈다. "그 순간부터 내가 괭이질하는 곳은 콩밭이 아니었고, 콩밭을 괭이질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가 콩밭의 잡초와 전쟁을 치른 얘기는 고스란히 내가 어릴 때 뜨거운 태양 아래 콩죽같은 땀을 흘리며 벌였던 '잡초와의 전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콩밭을 매던 우리 형제들이 그 때 굳이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 형제들의 가슴 속에는 소로우와 똑같은 외침을 그 콩밭에서 틀림없이 들을 수 있었던 것만 같다. "뿌리째 뽑아 햇볕에 던져 버려라. 저놈의 수염뿌리 하나라도 그늘에 두지 마라."
콩이 노랗게 무르익을 무렵엔 콩서리를 마음껏 즐겼고, 도리깨질을 하며 콩타작을 즐길 때 노란 콩들이 '콩콩'거리며 마당을 튀어오르던 모습조차 아직까지도 내 눈에 선하다. 가마솥 그득 삶은 콩을 멧돌에 넣어 돌리며 두부를 만들던 그 겨울밤의 정겹기만 하던 내 고향집 안방의 모습을 어찌 까마득히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콩으로 메주를 쑤고 안방의 두 벽면을 따라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메주를 '간식'처럼 뜯어 먹기 위해 서로 등어리를 교대로 내어 주며, 우리 형제들의 보잘것 없는 겨울철 한낮의 수확량에 감질이 나던 그 때를 떠올리는 일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짐작조차 하기가 어렵다.
내 얘기가 콩밭에 너무 오래 머문 잘못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나도 서둘러 내 얘기를 이 추운 계절에 맞출 욕심을 아까부터 억누르기 힘들었다는 점을 믿어 줬으면 좋겠다.
땔감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장작더미를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 나는 창문 앞에 장작을 쌓아두는 걸 좋아한다. 나무토막이 높이 쌓일수록 내가 즐겁게 일하던 순간들이 더 잘 떠오른다. 내게는 주인이 누군지 모를 낡은 도끼 한 자루가 있었다. 겨울날이면 내 집의 양지바른 곳에서 나는 콩밭에서 캐낸 그루터기들을 그 도끼로 팼다. 내가 밭을 갈 때 소를 몰던 사람이 예언했듯이, 그루터기들은 나를 두 번이나 따뜻하게 해주었다. 한 번은 내가 그루터기들을 도끼로 쪼갤 때였고, 다른 한 번은 그루터기를 쪼개 얻은 땔감으로 불을 지필 때였다. 따라서 그루터기보다 더 많은 열을 주는 땔감은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땔감'들에 대해서조차 소로우 못지 않게 많은 이야기들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불과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 시골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었다. 유독 우리들 세대에 접어들어서 유난히 거칠게 진행된 '변화의 속도' 덕분에 이미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땔감'은 커녕 '도끼'조차 제대로 만져본 적이 드물고, 그래서 겨울철 이맘때 '장작을 패는 즐거움'조차 이미 낯선 일이 되어 버렸음은 안타까운 일임에 틀림없다.
소로우가 '그루터기'로 두 번 따뜻했다면 나는 무수히 많은 땔감들 덕분에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번 따뜻했다. 물론 좋은 화력을 뽐내는 땔감으로는 '장작'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장작을 팰 때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굵은 땀들은 웃통을 훌쩍 벗어던질 때 찬 겨울의 공기 속으로 무럭무럭 솟아나던 하얀 김으로 승화되어 얼마나 멋진 그림들을 그려냈던가.
내가 경험한 땔감들은 소로우의 그것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 고추와 담배 농사를 많이 지었던 내 고향에서는 무엇보다 고추 대궁과 담배 대궁들이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땔감들이었다. 그런 땔감들은 무엇보다 집에서 가까운 이밭 저밭에서 아주 손쉽게 거둬들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한겨울이 닥치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본격적인 난방이 개시되기 전까지는 주로 밥을 짓는데 필요한 화력으로는 충분했고, 그 땔감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 정도는 얼마든지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겨울의 기나긴 추위를 건너가기 위해선 무엇보다 굵직한 통나무에서 얻을 수 있는 소나무 장작들이 최고였다. 그 옛날 겨울철이 되면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마다 맞춤한 지게들을 하나씩 메고 줄로 잘 갈아둔 쇠톱을 숨긴 채 깊은 산속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어른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정말 믿음직스러웠으며 그들의 허리둘레만큼이나 굵은 통나무들을 두세 개씩 지게에 지고 산길을 내려왔고, 우리들은 각자 자신의 허벅지만 한 통나무들을 대여섯 개씩 지게에 지고 끙끙 거리며 오르막 내리막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자신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런 통나무들을 톱질하고 도끼로 패는 일은 겨울철에 아이들에게 부과된 가장 가벼운 의무이자 즐거운 놀이였다.
땔감 가운데 특별히 기억나는 건 단연 '물거리'였다. 나는 이게 지금까지도 내 고향 주변에서만 쓰는 순수한 경상도 사투리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촌스럽고도 독특한 땔감의 이름이 표준말이라는 걸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알았다. 물거리라는 이름은 아마도 내가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말이 아닐까 싶다. 이게 다 오래 전에 멀리 떨어진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이 쓴 책 한 권을 읽다가 우연히 얻어낸 수확이라니 나는 그게 더 놀랍다. 물거리는 주로 밭둑이나 강둑이 아니면 산자락 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는데, 주로 어른들이 '조선낫' 하나를 들고 익숙한 솜씨로 낫질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다소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땔감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와 같은 조무래기들한테는 '물거리'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땔감이었다.
이밖에도 겨울의 땔감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다. 갈구리로 긁어 모은 뒤 싸리나무로 밑받침을 대고 칡넝쿨로 요령있게 묶어야만 무사히 지게에 꾸려 집에까지 옮겨올 수 있었던 마른 솔잎들은 불쏘시개로는 단연 최고였다. 마른 솔잎들은 가장 푹신하고도 부드러운 땔감이었던 데다가 아주 쉽게 불이 붙었고, 아궁이 속에서 활활 타오를 때 내뿜는 솔향기는 언제나 향기로웠다. 솔잎과 함께 따라온 싸리나무들은 아궁이 속에 들어가면 특이하게도 뜨거운 김을 쉭쉭 내뿜을 때도 있었다. 가끔씩은 그들의 단단한 몸 속에 숨겨진 수액들만 부글부글 끓을 때도 있었다. 싸리나무가 마치 회초리가 되지 못해 분풀이라도 하는 듯했다.
겨울의 아궁이는 단지 가마솥 엉덩이를 뜨겁게 달구는 데 그치지는 않았다. 아궁이 스스로가 '화덕'이 되어 요리를 만들어 낼 줄도 알았다. 그들이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한겨울엔 가끔씩 미지근한 잿불의 온기로 무우도 뭉긋하게 구워낼 줄 알았다. 엄마가 홍두깨로 국시를 만들 땐 '썰다 남긴 국시 꼬랑지'가 아궁이를 들락거렸고, 아주 가끔씩은 마당에 뛰어놀던 암탉의 닭똥집을 구워 내기도 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모닥불을 떠올리자면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의 겨울철 기나긴 시간들을 아낌없이 바쳤던 '썰매 타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모닥불의 진정한 효용은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몸을 뜨뜻하게 녹여주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오늘처럼 몹시도 추운 겨울날 내 고향 마을을 둘러싸며 흐르던 강들이 두꺼운 얼음으로 꽝꽝 얼어붙었던 풍경과, 우리가 약속이나 한 듯이 썰매를 챙겨오는 일 말고도 부엌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성냥'을 훔쳐 나오는 걸 잊지 않았던 그 옛날의 이야기를 마저 꺼내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어렵다.
쌩쌩 부는 찬바람을 마치 친구인 양 두툼한 겨울 외투의 뒷덜미에 업고 다니며 손발이 얼얼하도록 썰매를 즐기고 나면 우리들은 서둘러 강가에 널린 땔감나무들을 주워 모아서 모닥불을 피웠다. 아아, 그 때 그 모닥불은 얼마나 아낌없이 제 몸을 불태워 뜨겁게 타올랐던가! 그때 우리의 그 차갑던 손발과 얼어붙은 뺨과 가슴은 얼마나 따뜻하게 녹아 내렸던가. 그런 '모닥불'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추운 겨울을 도대체 어떻게 견녀낼 수 있었을까.
소로우의 글을 읽으며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니, 어느덧 나는 내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대장간의 모습까지도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 못하겠다. 초여름의 그 무덥던 농번기에도 대장간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장작불을 지피고 바쁘게 풀무질을 하면서 시뻘건 쇠붙이들을 연신 두드려대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들이 윗저고리조차 벗어 놓은 채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의 듬직한 등줄기에서는 언제나 굵은 땀방울이 시원스레 흘러내리던 모습조차 내 눈에 아른거린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은 내가 중학교에 다녔던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옛 모습들을 제법 많이 간직했던 듯하다. 비록 시골이긴 했지만 마을이 제법 컸던 덕분에 동구밖 잔디밭 한켠에는 아이들이 모여 미끄럼틀처럼 오르내리며 뛰어놀았던 커다란 '연자방아'도 있었고, 오래 전에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 큰 공을 세우신 조상님 덕분에 종가(宗家)에서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는 까닭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고 적힌 하마비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으며, 지금은 어떻게 사라진지 까닭조차 알 수 없지만 우리 마을 입구에 있던 친구네 밭 한가운데엔 커다란 '고인돌'까지도 남아 있었다.
고인돌까지 떠올리다니... 내 얘기가 정말 너무 멀리까지 온 게 이제 확실해졌다. 아무튼 나는 이번에『월든』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맨처음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숱한 보물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얻었다.『월든』을 처음 읽었을 때도 나름대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감동은 이번과는 확실히 다른 듯하다. 왜 내가 처음으로 그 책을 읽었을 땐 까마득한 옛 추억들을 이번처럼 생생하게 떠올리지 못했을까. 내가 혹시『월든』이라는 책을 그저 읽어 내기에 급급했던 것은 아닐까.
이 추운 겨울에도 나는『월든』을 읽으면 그 순간부터 곧장 월든 호숫가의 숲속 오두막으로 달려가 소로우와 함께 얘기를 나누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며 그가 이끄는 대로 계절이 마구 뒤바뀐다. 그가 들려주는 여름철 '콩밭' 이야기와 겨울철 '난방' 이야기가 이토록 오래 묻혀둔 내 어릴 적 기억들을 거침없이 끌어낼 줄은 미처 몰랐다.『월든』은 내게 참 놀라운 책이다.
이 추운 겨울날, 아늑한 고향집이 다시금 그립고, 온갖 땔감들을 태우던 아궁이와 그 속에서 익혀져 나오던 구운 고구마와 감자가 그립고, 그 아궁이에서 타닥타닥 불타던 솔잎 냄새가 더욱 그립다. 그리고 제 몸을 아낌없이 불태워 우리의 얼어붙은 몸을 따뜻하게 덥혀주던 그 모닥불이 그립다.
* * *
이제 화로의 시대가 되면서, 우리가 과거에는 인디언의 방식을 따라 감자를 재에 넣어 구웠다는 사실은 곧 잊히고 말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친구 하나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불에서는 언제나 어떤 얼굴이 보인다. 노동자는 저녁이면 불을 들여다보며, 낮 동안 쌓인 무가치한 것과 불순물을 생각에서 지워내지만, 나는 이제 불 앞에 앉아 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 때문인지 한 시인이 적절히 표현한 시구가 새로운 힘을 얻어 내 기억에 되살아났다.
밝은 불꽃이여, 삶의 모습을 비춰주는
그대의 사랑스럽고 친근한 공감을 내게 거절하지 마소서.
내 희망이 아니면 무엇이 그처럼 밝게 치솟아 올라가겠는가?
내 운명이 아니면 무엇이 밤에 그처럼 낮게 가라앉았겠는가?
왜 그대는 우리의 벽난로와 응접실에서 추방당했는가?
모두에게 환영받고 사랑받던 그대였는데,
이제 우리 삶에서 흐릿하기 그지없는 흔한 빛에 비하면
당시 그대의 존재는 얼마나 환상적이었던가?
그대의 밝은 불빛은 우리 영혼과 마음에 맺는다고
신비로운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가?
너무나 대담하게 비밀까지도?
그래, 우리는 이제 희미한 그림자조차 흔들리지 않고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저 불기운이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주는
난롯가에 앉아 있어 안전하고 안정되기는 했지만
더 큰 열망을 품지 못한다.
아담하고 실용적인 난로 옆에서
현재라는 시간은 자리 잡고 앉아
잠에 빠져들기도 하겠지만,
어둑한 과거에서 걸어나와 모닥불의 휘청대는 불꽃 옆에
우리와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유령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73
- 후퍼 부인
주석
73. 미국 시인인 앨런 스터기스 후퍼(Ellen Stergis Hooper, 1812∼1848)의 「모닥불」을 인용한 것으로 구두점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이 시는 《다이얼》제2호(1840년 10월)에 처음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