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죽음에 대한 두려움 12

죽은 사람이 처해 있는 환경은 어둡고 한없이 음울하다고 우리는 늘 자연스럽게 환상하는데, 그러한 생각은 그들의 신상에 일어난 변화와 그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결부시키고, 그들이 놓여 있는 처지에 우리 자신을 놓음으로써 생겨난다. 그것은 또한, 만약 이러한 표현이 허용된다면, 우리의 살아있는 영혼을 그들의 죽어있는 시신에 불어넣고 나서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끼게 될지를 생각하는 것에서 생긴다. 우리 자신의 사망에 관한 예상이 그렇게 두렵고, 사실 죽은 후의 상황은 우리들에게 아무런 고통도 줄 수 없을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죽은 후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 살아있는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상상을 통한 환상(幻想) 때문이다. 인성의 가장 중요한 원리들 중 하나가 이로부터 기인하는데, 그것은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행복에 대해서는 맹독과 같지만 인류의 부정행위를 크게 억제시키는 작용을 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한편으로는 개인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보위하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유쾌한 감정 vs 불쾌한 감정 16

우리가 친구들에게 더욱 전달하고 싶어 하는 감정은 우리 자신의 유쾌한 감정보다도 불쾌한 격정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친구들의 동감으로부터 더 큰 만족을 얻는 것은 우리의 유쾌한 감정에 대한 친구들의 동감이 아니라 우리의 불쾌한 감정에 대한 친구들의 동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불쾌한 감정에 대하여 친구들의 동감을 얻지 못했을 때 더욱 큰 충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모욕
16

불행한 사람들에 대하여 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모욕은 그들의 재난을 경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친구의 기쁨에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단지 무레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친구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야기할 때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비인간적인 행동이다.


우리는 결코 참을 수 없다
17

사랑은 일종의 유쾌한 격정이고, 분개는 일종의 불쾌한 격정이다. 따라서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의 우정을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은 그들이 우리의 분개에 동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의 절반 정도도 안 된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받을 수도 있는 호의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침해 행위에 대하여 그들이 무관심한 듯한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결코 참을 수 없다. 그들이 우리의 분개에 동감하지 않는 데 대해 우리가 느끼는 분노의 정도는 그들이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에 공감하지 않는 데 대해 느끼는 분노의 정도보다 배가 넘는다.


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
24

한 사람의 각종 감각기관의 기능, 즉 관능(官能:faculty)은 그가 다른 사람의 유사한 관능을 판단할 때의 척도가 된다. 나는 나의 시각으로써 당신의 시각을 판단하고, 나의 청각으로써 당신의 청각을 판단하며, 나의 이성으로써 당신의 이성을 판단하고, 나의 분개로써 당신의 분개를 판단하며, 나의 애정으로써 당신의 애정을 판단한다. 그것들을 판단할 이외의 다른 어떤 방법도 나에게는 없으며, 또 가질 수도 없다.
 

경이와 경악, 감탄과 갈채
26

그러나 우리 동료의 감정이 우리 자신의 감정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감정을 지도하고 지시할 때에는, 그리고 감정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동료는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많은 것들에도 주의를 기울였으며 그리고 서로 다른 정황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자신의 감정을 조정했을 때에는, 우리는 그의 감정을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감정이 특이하고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예리하고 종합적인 데 경이(驚異)와 경악(驚愕)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경우 그는 고도의 감탄과 갈채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이와 경악에 의해 강화된 시인(是認)은 감탄(感歎)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 감정을 구성하는데, 갈채(喝采)는 이것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29

사고(思考)나 추측(推測)의 문제에 관한 판단이나 취향의 문제에 관한 감정에서 당신과 내가 완전히 상반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쉽게 무시할 수 있다. 그리고 비록 내가 어느 정도 불만이 있더라도, 나는 여전히 당신과의 대화에서, 심지어는 나와 당신의 견해가 상반되는 바로 그 주제에 관한 당신과의 대화에서도, 어떤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당한 재난에 대하여 어떠한 동류의식도 가지지 않거나 또는 나를 괴롭히고 있는 슬픔을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또는 당신이 내가 당한 침해에 대해 전혀 의분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를 화나게 만드는 분개를 조금도 함께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것들을 주제로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 없다. 우리는 피차 서로를 용납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없고, 당신 역시 더 이상 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당신읜 나의 분노와 격정에 당황하게 될 것이고, 나는 당신의 얼음처럼 차가운 무감각과 감정의 결핍에 분노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
36-37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사심은 억제하고 남을 위하는 자애심(慈愛心)은 방임하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을 완미(完美)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감정(sentiments)과 격정(passions)의 조화를 이루어냄으로써 인류의 모든 행위를 고상하고 적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위대한 율법인 것처럼, 다만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또는 같은 뜻이지만, 우리 이웃이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자연계의 위대한 계율이다.


미덕이란 탁월함이며, 상스럽거나 평범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비상하게 위대한 어떤 것
37

보통 수준의 지력(知力)에서는 어떤 재능도 있을 수 없듯이, 보통 수준의 도덕에서는 어떤 미덕도 있을 수 없다. 미덕이란 탁월함이며, 상스럽거나 평범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비상하게 위대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다. 상냥하고 친근함의 미덕은 정교하고 기대밖의 섬세함과 따뜻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감수성으로 이루어진다.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미덕은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제어하기 어려운 격정에 대해서까지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의 자기제어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특수한 혐오감의 진정한 원인
45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육체적 욕망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것을 볼 때 속으로 느끼게 되는 특수한 혐오감의 진정한 원인은 우리가 그것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욕망을 느꼈던 사람에게도 그 욕망이 채워지자마자 그것을 불러일으켰던 대상은 더 이상 유쾌한 것이 될 수 없고, 심지어 그 대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흔히 불쾌해질 수 있다. 그는 그 대상에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정신까지 흘렸던 매력을 이모저모 찾아보지만, 헛일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금 전의 자기 자신의 격정에 대해서도 거의 공감할 수 없게 된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식기(食器)를 치우라고 명한다. 그리고 우리는 전에는 가장 강렬하고 격정적이었던 욕망의 대상들을, 만약 이들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육체에서 기원하는 격정의 대상들이라면, 이와 똑같은 태도로 취급할 것이다.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65∼66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傲慢)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벼락부자_비애와 환희 사이의 차이점
71-73

비애와 환희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곧 우리는 통상 작은 환희와 큰 비애에 대해서 쉽게 동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운명의 급격한 변화로 그의 생활 여건이 그의 이전 생활수준보다 훨씬 높게 상승한 사람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의 축하가 전부 완전히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벼락부자는, 비록 최대의 공로를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며, 그리고 질투의 감정은 통상 우리들이 그의 환희에 충심으로 동감하는 것을 방해한다. 만약 그가 약간의 판단력만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 사실을 깨달을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행운에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가능한 한 최대로 자신의 기쁨을 억누르고 새로운 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레 들떠 있는 기분을 가라앉히기ㅣ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는 일부러 자신이 이전의 처지에 있을 때 자신에게 어울렸던 것과 같은 검소한 옷을 입고 행동도 겸손하게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옛 친구들에 대한 배려를 배가하고, 소박하고 부지런하고 공손하게 처신하려고 그 전 어느 때보다 더욱 노력할 것이다.

그의 현재 처지에서 우리가 가장 시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이러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행복에 대하여 동감하는 것보다 그가 자신의 행복에 대핸 우리의 질투와 반감에 대하여 더욱 동감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모든 방면에서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비록 그가 매사에 겸손하게 행동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겸손한 행동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며, 그 결과 그는 이런 종류의 제약에 점차 지쳐가게 된다. 따라서 얼마 못 가서 그는 통상 그의 옛 친구들 모두로부터 떠나간다. 다만 그들 중에서 가장 비열한 일부 친구들은 약간의 예외가 되는데, 그들은 아마도 창피를 무릅쓰고 그에게 의지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 또한 항상 새로운 친구들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옛 친구들이 그의 지위가 자신들보다 월등하게 변한 것에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것처럼, 그가 새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과 대등한 입장이 되어 맞먹으려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하게 된다. 이럴 때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옛 친구들과 새 친구들 양쪽에서 지위상의 변화로 느끼게 되는 굴욕감을 보상해주기 위해 가장 완강하고 끈질기게 겸손한 자세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 너무 빨리 지쳐버리고, 그가 새로 사귀려는 친구들의 시무룩하고 의심 많은 자존심과 옛 친구들의 건방진 경멸에 화가 나서, 전자는 무시하는 태도로, 후자는 노여운 마음으로 대한다. 그리고 결국은 오만에 빠져서 결국 모든 사람들의 존중을 상실하게 된다.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만약에 인간의 행복의 주요 부분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의식으로부터 온다면, 운명의 위와 같은 급격한 변화는 행복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가 자기의 높은 지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승진해 가는 매 단계들을 예견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실제로 높은 지위에 올랐을 때에도 지나치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고, 그에게 추월당한 사람들로서도 정당하게 어떤 시샘을 품을 수 없으며, 그의 뒤에 처져 있는 사람들도 어떤 질투심을 느낄 수 없다.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하여
73

 

인간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이유에서 생기는 비교적 작은 기쁜 일들에는 더욱 쉽게 동감한다. 크게 번영하고 있는 중에도 겸손할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모든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지난밤을 함께 보낸 친구들에 대해, 우리가 함께 즐겼던 여흥(餘興)에 대해, 우리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현재 대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모든 소소한 사건들에 대해, 인간의 삶의 빈틈을 채워주는 소소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리 큰 만족을 표현하더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성격적으로 쾌활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러한 성격은 일상적인 소소한 사건들이 제공하는 모든 작은 즐거움으로부터 특별한 흥미를 느낄 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이러한 성격에 쉽게 동감하며,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기쁨을 느끼게 하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행복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이 보는 것과 동일한 모든 사소한 일들의 유쾌한 측면을 보게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청춘(靑春), 즉 모든 것에 즐거움을 느끼던 시절이 그처럼 쉽게 우리의 마음에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을 보고도 즐거워하는 이러한 성향은 심지어 꽃까지 피어나게 하고, 젊고 아름다운 눈들을 반짝거리도록 만든다. 이러한 성향은 같은 동성(同性)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이든 사람까지, 평상시 이상으로 기쁨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들은 잠시 동안 자신의 노쇠함을 잊어버리고 그들에겐 오래 전에 이미 낯 설어버린 유쾌한 생각과 정서에 자신들을 내맡긴다. 이처럼 많은 행복감을 느낌으로써 유쾌한 생각과 정서가 그들의 마음속에 다시 떠오르게 되면, 그들은 마치 오랫동안 서로 그리워하면서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시 만나서는 그 동안의 오랜 이별 때문에 더욱 진심으로 껴안을 수 있는 친구처럼, 이러한 생각과 정서는 그들의 가슴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타인의 비애에 대한 우리의 동감
82

비록 건강하고 빚도 없고 또한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는 상태에 더 추가되어야 할 것은 별로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것은 많다. 이런 상태와 인간의 최고의 순경(順境) 사이의 간격은 대단치 않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이런 상태와 비참함의 최저 밑바닥 상태 사이의 거리는 무한하고 엄청나다. 이 때문에 순경이 사람의 마음을 자연적인 상태 이상으로 고양시키는 정도보다도 역경이 사람의 마음을 자연적인 상태 이하로 저상(沮喪)시키는 정도가 훨씬 더 크다. 따라서 방관자는 환희에 완전히 공감하는 것보다 비애에 완전히 동감하고 완벽하게 보조를 맞추는 편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그리고 당사자의 마음 상태는 환희의 경우보다는 비애의 경우에 방관자 자신의 자연스럽고 통상적으로 느끼는 마음의 상태로부터 훨씬 멀어져 있음을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애에 대한 우리의 동감은 환희에 대한 우리들의 동감보다 흔히 훨씬 자극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감은 항상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의 격렬함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재부는 과시하고 빈궁은 숨기려는 경향
91

사람들은 우리의 비애(悲哀)보다는 환희에 대해 더 많이 동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부(財富)는 과시하고 빈궁(貧窮)은 숨기려는 경향이 있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우리가 겪는 빈곤과 고통이 폭로되는 것만큼 치욕적인 것은 없으며, 그리고 우리의 처지가 모든 인간들의 눈에 다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의 반만큼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것보다 더 굴욕적인 일은 없다. 우리가 재부를 추구하고 빈궁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은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러한 고려 때문이다. 


경쟁심의 기원 91∼92

이 세상 사람들이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탐욕과 야심, 부와 권력 및 최고를 추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

인류 사회의 각계각층의 사람들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경쟁심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그리고 소위 자신의 지위의 개선이라고 하는 인생의 거대한 목적을 추구하는 것은 어떤 이익이 있어서인가? 남들로부터 관찰되고 주의와 주목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그들로부터 동감과 호의와 시인(是認)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허영이다. 그러나 허영이란 항상 자신이 주위로부터 주목을 받고 시인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부유한 사람이 그의 부유함을 자랑하는 것은 그 부유함이 자연히 세간의 이목을 끈다는 것, 그리고 부유함이 그에게 제공한 모든 유쾌한 감정에 인간들이 쉽게 공감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 그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부유함이 가져다주는 다른 어떤 이익보다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
데일 카네기가 말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갈망'이 떠오른다.


가난한 사람들이 굴욕을 느끼는 이유
92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것에 치욕을 느낀다. 그는 가난 때문에 사람들의 시야 밖에 놓여 있다고 느끼고, 그리고 비록 자신이 주목을 받더라도 사람들이 그가 당하고 있는 비참함과 고통에 대한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굴욕을 느낀다. 비록 무시당하는 것과 부인당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무명의 처지에 있기 때문에 명예와 칭찬의 밝은 빛이 가려져서 이웃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 본성 중에서 가장 유쾌한 희망을 좌절시키고 가장 치열한 욕망을 버리는 것이 된다. 가난한 사람들은 들어오건 나가건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리고 군중의 한가운데 있을 때에도 오두막집에 갇혀 있을 때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지위가 높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잃어버리는 것
 93-94

지위가 높고 신분이 고귀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고자 갈망하고, 그가 처한 상황으로 인해 그가 자연히 느끼게 되는 환희와 기쁨을 느껴보기를, 최소한 동감이라도 해보기를, 갈망한다. 그의 모든 행위는 대중들의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말 한 마디, 몸짓 한 가지조차 다른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무시되는 일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그에게 집중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줄지도 모르는 감동과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격정과 기대감을 가지고 그를 고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만일 그의 행동이 아주 부적절하지만 않다면, 그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 기회,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찰과 동류의식의 대상이 될 기회를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그가 어느 정도의 제약을 받게 됨으로써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점이 그를 선마으이 대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고생, 근심과 굴욕을 보상해 준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는 반드시 모든 여유, 모든 안일과, 모든 근심걱정 없는 안전함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성과 철학의 원리 vs 조물주의 뜻
96

국왕은 백성들의 공복(公僕)이고 공공의 이익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복종하고, 저항도 받고, 바뀌고, 처벌될 수 있다는 것은 이성과 철학의 원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물주의 뜻(doctrine of Nature)은 아니다. 조물주는 우리에게 그들을 위해 그에게 복종하도록, 그의 높은 지위 앞에 벌벌 떨면서 머리를 조아리도록, 그의 한 번의 미소를 자신의 어떤 수고도 보상해 주기를 충분한 보답으로 간주하도록, 그리고 그의 불쾌감을, 설령 다른 어떤 불행이 뒤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낙담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으로 간주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기백(氣魄
) 97

모든 면에서 국왕을 한 사람의 보통 인간으로 간주한다거나 또는 보통의 경우 그와 더불어 논리를 따져가면서 논쟁을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기백(氣魄)이 필요하다. 국왕과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하고 막역한 사이가 아닌 한, 국왕 앞에서 감히 그렇게 할 기백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가장 강렬한 동기(動機)들, 가장 격렬한 격정(激情)들, 즉 공포, 증오, 분개도 국왕에 대한 그들의 자연스런 존경의 경향을 상쇄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국왕의 행위가 정당하건 또는 부당하건 간에, 그의 행위가 인민들의 마음속의 이러한 격정들을 최고도로 격발(激發)시켰을 때에만 비로소 대다수 인민들은 폭력을 써가면서 그에게 반대하거나 또는 그가 처벌되거나 폐위되는 것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만약 그가 자신을 두드러지게 나태내려고 한다면
100-101

가장 완미한 겸손(謙遜)과 소박(素朴), 동석자에 대한 적절한 존경과 이와 어울릴 정도의 무관심의 결합은 평범한 인간의 행동에 있어서 가장 주요한 특징이어야 한다. 만약 그가 자신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려고 한다면, 그는 보다 중요한 미덕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큰 인물들의 추종자에 상응하는 만큼의 추종자들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 대해 지불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자신의 육체노동과 지적 활동뿐이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함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자신의 전문분야에서의 탁월한 지식과 이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의 최대의 근면성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육체적 노동을 참고 견디며, 위험에 결연하게 대처하고, 고통에 대해 굳건해야 한다. 그의 이러한 재능이 그의 업무의 어려움과 중요함에 의해, 또한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뛰어난 판단력과 엄격하고 단호한 노력을 통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한다. 성실함과 신중함, 관대함과 솔직함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의 행동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적정하게 행동하기 위해서 최대의 재능과 미덕을 필요로 하는 일에, 그러나 그 일을 영광스럽게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최대의 찬탄이 주어지는 그런 일에, 스스로 자진해서 종사해야 한다.


고귀한 지위로부터의 몰락을 몹시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
102-103


고귀한 지위로부터의 몰락을 몹시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감정에 대한 이처럼 손쉬운 절대적 지배권을 상실해 버렸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패한 마케도니아 국왕 일가가 정복자 파울루스 아에밀리우스(Paulus Aemilius)에 이끌려 개선행렬에서 걸어갈 때, 역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불행해진 모습을 본 로마 민중의 관심은 양분되어 일부는 그 정복자에게서 멀어졌다고 한다. 나이가 어려서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왕실 자제들의 모습이 구경꾼들에게는 충격적이었고, 승리를 축하하는 환호의 함성 한가운데서도 그들은 극히 예민한 비애와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행렬의 두 번째 줄에서 걸어가고 있었는데, 너무나 큰 재난으로 그는 경황실조(驚惶失措)하여 모든 감정을 상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친지들과 대신들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지나가면서 몰락한 자신들의 국왕에게 자주 시선을 던지고는 그의 모습에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자기 자신들의 불행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더 큰 불행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기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결한 로마인들은 이와 반대로 그를 경멸과 분개의 시선으로 바라 보았으며, 그와 같은 불행을 감내하면서 구차한 삶을 이어가겠다고 마음먹을 정도로 비루한 인간은 어떤 동정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재난은 결국 어떤 것인가? 대다수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그는 여생을 강력하고 인정 많은 사람들의 보호 아래서, 그 자체가 시기의 대상이 될 만한 상태에서, 즉 풍요하고 안락하고 여유롭고 안전한 상태에서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아무리 어리석은 짓을 하더라도, 그가 거기서 다시 더 추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자신의 모든 행동에 주목하고 감탄하는 바보같은 군중들, 아첨배들, 추종자들에 둘러싸일 수는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도 않았고, 더 이상 그들의 존경과 감사와 사랑 그리고 감탄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모든 국민의 격정은 이미 그의 뜻대로 형성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그 국왕으로부터 모든 감정을 빼앗은, 견디기 어려운 재난이었고, 이 재난이야말로 국왕의 친구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비운을 잊어버리게 하였으며, 그리고 로마인들의 고결함은 이런 처지까지 참고 살아갈 정도로 비루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생각하게 했던 것이다.


되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는 그곳 104-105

"사랑에는 보통 야심(ambition)이 뒤따르지만, 그러나 야심에 사랑이 뒤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라고 나의 로슈포코 경(Lord Rochfaucault)은 말했다. 야심과 같은 격정에 일단 마음이 완전히 사로잡혀 버리면 경쟁자도 후계자도 용납을 하지 않는다. 대중의 감탄을 한 몸에 받는 데 익숙해 있거나 혹은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다른 모든 쾌락은 혐오스럽거나 시들해진다. 실각한 모든 정치가들이 스스로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야심을 극복하고, 이제는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명예심을 멸시할 것을 배우지만, 그러나 실제로 이에 성공한 사람은 얼마나 극소수에 불과하였던가? 그들 대부분은 맥 빠지고, 무미건조한, 나태한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들의 존재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처지에 놓여 있음을 생각하고 분노하고, 개인적인 생활의 거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질 수도 없고, 자신들의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이야기할 때 외에는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어떤 허망한 계획을 꾸미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떤 만족감도 느끼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의 자유를 궁정의 화려한 노예생활과 바꾸지 않고 오로지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는 진지한 결의에 차 있는가? 이 유덕(有德)한 결의를 견지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는 것 같다. 아니, 오로지 이 방법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곧 되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는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야심의 영역 속에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미 당신보다 앞서 전 인류의 반의 관심을 차지해 버린 이 세상의 지배자들과 자신을 비교해서도 절대 안 된다.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이 추구하는 목표 105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보편적인 동감과 주목을 가장 잘 맡을 수 있는 지위에 있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라고 상상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자리 또는 지위(地位: place)는, 고관 부인들의 사이를 갈라놓는 위대한 목표로서, 인간생활의 노동의 반은 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서이며, 그리고 이것은 탐욕과 야심이 이 세상에 끌어들인 모든 소란과 소동, 모든 강탈과 부정의 원인이 되고 있다.


거대한 위험 vs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위험
108

"거대한 위험에는 그 자신의 매력이 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경우에도 얻게 될 어떤 영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위험에는 두려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에 실패했을 때에는 항상 명예의 상실이 따르기 때문이다"라고 레츠 추기경(Cardinal de Retz)은 말했다.


모든 시대의 도덕철학자들이 품어 온 불만
109

부자와 권세가에 대해서는 감탄하고 또 거의 숭배하기까지 하는 성향(性向), 그리고 가난하고 비천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시하는 성향은 계급차별과 사회질서의 확립 및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도덕감정을 타락시키는 가장 크고 가장 보편적인 원인이다. 지혜와 미덕에만 바쳐져야 할 존경과 감탄으로 부와 권세를 대하는 것, 그리고 부도덕한 행위와 우둔함만이 그 대상이 되어야 할 멸시(蔑視)가 극히 부당하게도 흔히 빈궁과 연약함에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모든 시대의 도덕철학자들은 불만을 품어 왔다.

한 쪽으로 통하는 길과 다른 쪽으로 통하는 길 115

부러움의 대상인 이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재부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흔히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길을 포기한다. 왜냐하면, 불행하게도 한 쪽으로 통하는 길과 다른 쪽으로 통하는 길은 때로는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기만한다. 즉, 자신이 목표하는 높은 지위에 도달하기만 하면 사람들의 존경과 감탄을 획득할 대단히 많은 수단들을 갖게 될 것이고, 또한 자신은 대단히 뛰어난 도덕적 적정성과 품위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의 장래의 행위들이 발산하는 광채가 그가 그 지위로 올라가기까지의 모든 단계에서 저지르게 될 부정한 행위의 자취를 완전히 숨기거나 지워줄 것이라고.


지위를 얻는 과정에 사용된 수단의 비열함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 116

야심에 찬 사람이 진실로 추구하는 것은 안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비록 매우 잘못 이해되고 있지만, 항상 이런 저런 종류의 영예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얻은 높은 지위와 영예는, 자신의 눈으로 보건 타인의 눈으로 보건 간에, 그가 그 지위를 얻는 과정에 사용된 수단의 비열함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대로 지출하는 낭비에 의해서, 타락한 인간들의 파멸적 성격이 통상 그렇듯이 각종 방탕한 쾌락에의 극도의 몰입에 의해서, 그리고 바쁜 공적 업무에 의해서, 또는 보다 자랑스럽고 보다 소란스러운 전쟁에 의해서, 그는 자신의 기억과 타인들이 기억으로부터 자신이 과거에 행하였던 추행(醜行)들의 기억을 지워 버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억들은 끝까지 그를 쫓아다닌다. 그는 건망증과 망각이라는 어둡고 우울한 힘에 호소해 보지만 실패한다. 그는 스스로 행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의 기억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가 행했던 바를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 준다.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
116

가장 그럴 듯한 상류사회의 모든 화려한 허식 속에서도, 돈에 매수된 고위 인사들과 저명한 학자들의 비열한 아첨 속에서도, 일반 민중들의 어리석지만 천진난만한 환호 속에서도, 그리고 모든 정복과 전쟁에서의 승리로 교만해진 가운데서도, 내심에서 은밀하게 솟아나는 수치심과 양심의 가책이란 보복의 화염은 그를 휩싸서 놓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영예가 사방팔방으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그 자신은 자신의 상상 속에서 어둡고 추악한 불명예가 그를 바짝 뒤쫓고 있으며 언제라도 그를 덮치려고 하는 것처럼 느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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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3-01-29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이렇게 귀한 수고를 나누어 주시니.. 대단하십니다 ^^

oren 2013-01-29 14:02   좋아요 0 | URL
저야 그저 책을 읽은 독자의 한 명일 뿐이고 이 책 내용에 감명받아 '요약분'만 필사해 봤을 뿐인걸요. 좀 묵혀둔 건데 이번에 우연찮게 공개하게 되는군요. 어쨌든 몇 번씩 다시 읽어봐도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 책을 평생 동안 '다듬고 또 다듬은' 글쓴이 애덤 스미스야말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찰스 다윈조차도 이 책 속에 숨어있는 '진화 심리학'을 꿰뚫어 보고 그 내용들을 『종의 기원』과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등에 담아낼 정도였으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