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인 『황폐한 집』을 소개합니다.
많은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찰스 디킨스도 다작으로 유명한 작가이지요. 그런데 작가가 남긴 여러 작품 가운데 최고의 작품이 가장 널리 읽히는 경우는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합니다. 당장 제임스 조이스와 마르셀 프루스트만 떠올려 보더라도 그런 사정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토마스 만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의 대표작이 『마의 산』이라고 해서 토마스 만의 독자들이 그 작품을 가장 많이 읽었으리라고 짐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이 훌륭한 소설이 찰스 디킨스의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훨씬 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가볍게 받아들여야 옳지 싶습니다. 비록 이 작품이 지닌 훌륭한 가치에 비해 독자들의 독서 열정이 지나칠 정도로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좀처럼 떨치기 어렵더라도 말이지요.
찰스 디킨스의 주된 특징은 '유머와 위트와 재치와 긍정'으로 요약할 수 있지 싶습니다. 문학의 역사에서 이런 특징이 극에 달했던 작가는 누가 뭐래도 셰익스피어였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찰스 디킨스는 자주 셰익스피어에 비견되지요. 시인이자 극작가이자 배우였던 셰익스피어가 넘치는 열정과 문재(文才)를 시로 마음껏 발산했다면, 소설가이면서도 배우에 대한 열정과 기질이 넘쳤던 디킨스는 자신의 머리 속에 끊임없이 샘솟는 이야기를 소설을 통해 풀어냈지요.
그가 『황폐한 집』에서 은연 중에 발설했던 다음 대화는 바로 작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으흠! 셰익스피어처럼 말씀을 잘하시는데요!"
심지어 그는 소설 속에서조차 시인처럼 '반복되는 후렴'을 리드미컬하게 구사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등장 인물의 대화 속이든 전경이나 배경 묘사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등 뒤로는 늘상 셰익스피어가 엿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며, 때로는 그 너머로 고대 그리스 비극 시인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릴 때도 있습니다. 가령 『황폐한 집』에서 주인공 격인 에스더 서머슨 양이 마침내 자신의 생모로 밝혀진 데들록 부인을 만났을 때 나눈 대화가 그렇습니다.
"어머니, 이미 결심하셨나요?"
"결심했어. 난 지금까지 어리석음에 어리석음을 더하고, 자존심에 자존심을 더하고, 경멸에 경멸을 더하고, 자만에 자만을 더하고, 큰 허영에 더욱 큰 허영을 덧칠하며 살아왔어. 할 수 있다면 이 위기도 잘 극복해 죽을 때까지 무사할지도 몰라. 난 위험에 둘러싸여 있어. 체스니 월드가 이 깊은 숲에 둘러싸여 있듯이. 하지만 난 언제까지나 그 안을 걸을 거야. 내가 걸을 길은 오직 하나, 단 하나밖에 없단다."
찰스 디킨스는 남달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은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그가 어릴 때 겪었던 감정인 부모에게 버림받아 비천한 신분으로 떨어졌다는 절망감과 굴욕감은 그에게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비록 그 체험이 작가에게 기필코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굳은 결심과 향상심과 출세욕을 심어주긴 했지만 말이죠.
'이런 생각이 가져오는 비통함과 굴욕감이 내 성격 전체에 스며들어 버려서 나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칭송받고 행복해진 지금까지도 가끔 꿈을 꾼다. 그 꿈에서 나는 내게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생겼다는 사실, 아니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홀로 외롭게 그 시절을 헤매다가 돌아온다.'
바로 이런 작가의 경험 때문에 그가 쓴 작품에는 유독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부랑자나 비천한 신분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올리버, 『위대한 유산』의 핍,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데이비드, 『어려운 시절』의 루이자, 『황폐한 집』의 에스더 서머슨, 에이더 클레어, 리처드 카스톤, 부랑아 조 등이 대표적이지요.
몹시도 아픈 과거를 지닌 작가를 과거로부터 마침내 해방시킨 작품은 『데이비드 코퍼필드』(1849∼1850)였습니다. 주인공이 세상에 막 태어날 때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어엿한 작가로 성공할 때까지의 온갖 삶의 기억들을 '웃음과 눈물과 기쁨과 애환'을 가득 담아 그려낸,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자전적 소설이야말로 작가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의 사랑하는 자식' 같은 작품이었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데이비드 코퍼필드』야말로 작가를 끊임없이 붙들고 옭아매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뚜렷이 결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대작인『데이비드 코퍼필드』를 끝낸 작가는 곧이어 『황폐한 집』(1852∼1853)을 통해 본격적인 사회 비판에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게 됩니다. 디킨스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이보다 나중에 쓰여진 『어려운 시절』(1854년), 『리틀 도릿』(1855∼1857)과 『우리 서로의 친구』(1864∼1865) 등과 함께 묶여 '사회 비판'을 다룬 작품군을 이루는데, 이 가운데 단연 뛰어난 작품이 바로 『황폐한 집』이지요.
사실 디킨스는 알고 보면 20대에 쓴 초기 작품인 『픽윅 페이퍼스』에서부터 일찌감치 '사회정의'를 일깨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작가였지요. 이러한 디킨스의 작품 경향으로부터 자못 강렬한 인상을 받은 버나드 쇼는 『리틀 도릿』에 대해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말할 정도였고, 칼 마르크스는 『리틀 도릿』을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다고 하지요. 칼 마르크스는 심지어 "세계의 모든 정치인, 사회운동가들이 한 모든 것보다 디킨스가 세상의 핍박 받는 민중을 위해 한 일이 더 많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다시『황폐한 집』으로 되돌아 오지요. 이 작품이 다루는 주제는 얼핏 손에 빤히 잡히는 쉬운 주제들만을 다루지는 않지요. 디킨스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특정한 사회적 폐해가 개별 현상으로서 언급되고, 사회악의 책임이 특정한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반면, 후기 작품을 대표하는 『황폐한 집』에서는 각종 사회 제도나 조직 자체가 사회악의 근원으로 다뤄집니다. 의회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하릴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상류층에 대한 조롱과 풍자와 비난이 이 작품 곳곳에 담겨 있지만 그 방식이 대체로 모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건 마치 런던을 가득 덮고 있는 안개와 진창을 바라보는 것과 닮아 있지요.
어디를 둘러봐도 안개다. 템스 강 상류에도 안개가 푸른 섬과 목장 사이를 흘러간다. 강 하류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이곳에서는 수없이 정박한 배들 사이와 이 커다란(그리고 더러운) 도시의 지저분한 강기슭을 더러운 안개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지나간다. 에섹스 주 늪지 위도 안개요, 켄트 주 구릉 위도 안개다. 안개는 석탄을 운송하는 범선 상갑판 주방으로도 스멀스멀 들어 오고, 커다란 배 돛대 위에도 잠들어 있으며, 삭구 안을 돌아다니고, 거룻배도 작은 뱃전에도 웅숭그리고 있다. 그리니치 해군병원 병실 난로 옆에서 콜록거리는 노병의 눈과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공연히 성질난 선장이 비좁은 자기 방에서 피워대는 오후의 담뱃대와 재떨이에 기어들어 가고, 갑판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린 수습 선원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매몰차게 꼬집는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난간 너머로 하늘에 낮게 깔린 안개를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도 안개가 자욱해서 이들은 마치 열기구에 올라타 구름 속을 떠다니는 것만 같았다.(11∼12쪽)
안개가 가장 자욱하고 거리가 가장 진흙으로 범벅이 된 곳에 링컨 법조원의 대법관 법정이 자리잡고 있지요. 거기가 바로 소설의 주무대입니다. 해롭기 그지없는 늙은 무뢰한이나 다름없는 이 법정에 대한 묘사는 아주 길게 이어지지요.
오늘 같은 오후에야말로 대법관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지만ㅡ이 법정에 자리 잡고 앉아 안개처럼 몽롱한 후광에 싸이고 하늘거리는 붉은 천과 커튼에 둘러싸인 채, 요란한 구레나룻을 기른 거구이면서도 목소리는 개미만 한 변호사의 끝없이 장황한 설명을 들으면서,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붕의 들창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수십 명에 이르는 대법관 법정 판사들은ㅡ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듯이ㅡ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 중 수천 단계 째의 일에 막연히 매달리고, 막히기 쉬운 판례에서 서로 꼬투리를 잡고, 소소한 전문적 법률 사항에 무릎까지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산양 털이나 말 털로 만든 가발을 뒤집어쓰고는 그것으로 법률 조문의 벽을 깨부수겠다고 무모하게 머리를 갖다 박고, 연극배우 뺨치게 자못 진지한 얼굴로 공명정대한 태도를 꾸며내야 한다. 이런 오후에야말로 사건에 관계된 온갖 사무변호사는ㅡ그중에는 부모님 대부터 담당하던 일을 맡은 사람도 두서넛 있고 모두 그 사건으로 이미 부를 쌓았지만ㅡ서기 책상과 칙선변호사 비단 법복 사이에 놓인 매트 깔린 기다란 변호사석에 앉아(그러나 이 우물 바닥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저마다 눈 앞에 소장, 답변서, 재항변서, 제2답변서, 강제명령서, 선서진술서, 소송쟁점서, 법원 주사가 읽을 심사보고서, 법원 주사의 보고서, 그 밖의 온갖 값비싼 잡동사니를 쌓아놓고 있어야 한다. 다 꺼져가는 촛불이 법정을 어두침침하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안에 낮게 깔린 안개가 영원히 나가지 않겠다는 듯이 버티는 것만 같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색유리가 끼워진 창문들이 색채를 잃고 대낮의 햇빛이 통과시키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의 문외한들이 입구의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다가 내부의 올빼미 같은 광경을 보고 또 천이 깔린 윗자리에서 천장까지 우울하게 울리는 멍청한 변설을 듣고는 안으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윗자리에서는 대법관이 햇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들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그 옆에 앉은 가발 쓴 법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안개에 파묻혀 있다! 바로 여기가 대법관 법정이다. 이 법정을 위해 나라 곳곳에 다 쓰러져가는 집과 황폐한 땅이 존재한다. …… (12∼13쪽)
소설 『황폐한 집』의 <제1장_대법관 법정>은 오로지 '런던의 안개'와 그 가운데 자리잡은 '대법관 법정'을 묘사하는 데 온전히 할애하는데, 위에서 인용한 두 단락은 제1장 전체 분량에 비하면 고작 1/8 정도에 불과하다. 그만큼 이 소설의 '서주' 부분이 자못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셈인데, 디킨스의 여느 작품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무게 와 깊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총 67장으로 구성된 이 방대한 장편소설은 '여러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대체로 재미있으면서도 술술 읽힌다는 평가'를 받는 디킨스의 여느 소설과는 궤를 달리하는 소설이지요. 음악에 비유하자면 제1주제와 제2주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의 부차 주제(副次主題)들까지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으며, 그런 주제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여러 악장들 속에서 때로는 단조로, 때로는 장조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되고 전개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구성 때문에 처음에는 따로 떨어져 서로 낯설게만 들리는 여러 소소한 이야기들이 차츰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다가 나중에 마침내 하나로 합쳐져 장중한 피날레를 향해 숨가쁘게 내달릴 때에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에 휩싸이게 되지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런던 대법관 법정과 그 주변, 레스터 데들록 경과 데들록 부인이 살고 있는 링컨셔의 대저택, 잔다이스 씨가 살고 있는 '황폐한 집' 등입니다. 공간이 생각보다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의 방대한 규모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많습니다. 제1의 주인공은 에스더 서머슨 양이지요. 소설의 절반 정도는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갑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두 장 혹은 세 장쯤 이어지고 나면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을 바꿔 두 장 혹은 세 장 정도 분량으로 다른 이야기를 전개합니다.(이런 방식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가 극대화된 작품으로는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작품에서는 매 장마다 등장 인물의 이름이 장의 제목으로 달려 있는데, 바로 그 인물이 '1인칭 화자'로 나서서 이야기를 이끌지요. 윌리엄 포크너는 바로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 전개방식을 모방한 셈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에스더가 '나'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끄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에스더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어릴 때부터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로 대모의 손에서 자란 에스더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는 철저히 베일에 가려진 채 '복종과 극기와 부지런함'을 강요받으며 자랍니다. 열네 살 때 대모마저 사망하면서 외톨이 신세가 된 에스더는 예기치 못한 후원자의 손길 덕분에 기숙사가 딸린 학교에 들어가고, 나중에는 잔다이스 씨의 '황폐한 집'으로 이주해서 그 집의 살림살이를 도맡게 되고, 점차 주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얻게 되지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전개는 에스더 서머슨 양의 주변을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맴돌긴 하지만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벌써 수십 년째 해결될 기미조차 없이 지리하게 이어지고 있는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거기에 더해 상류 사회를 대변하는 레스터 데들록 집안의 거대한 저택에 머무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보태집니다. 다채롭고도 흥미로운 인물들은 대법관 법정 주변에 가장 많이 모여 있지요. 대서인, 문방구점 주인, 변호사, 하숙인 등등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몰두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끝없이 전개됩니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한참이나 읽어도 여전히 '안개에 휩싸인 듯한 기분'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에스더 서머슨 양의 이야기가 이제 막 흥미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겠구나 싶으면 어김없이 거기서 이야기는 중단되고, 다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로 전환되면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른 이야기'로 뒤바뀌고 마는데, 그들 두 이야기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을 때 끊임없이 '화자'가 뒤바뀌면서 '이게 도대체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는 당혹감을 맛보는 경우와 몹시 닮았지요. 이런 수법이야말로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교묘한 이야기 전달 방식'의 핵심 장치이지요.
자욱한 안개 속에 휩싸인 사람은 자주 길을 잃게 마련이고, 여기 저기 안개 속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때문에 적이 놀라기 마련입니다. 또한 안개 속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또 앞으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지요. 『황폐한 집』에 등장하는 여러 배경들이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 장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새로운 배경과 인물들이 끝없이 펼쳐지기만 할 뿐 좀처럼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처음부터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길을 잃기 쉽습니다. 어떤 인물들이 어떤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를 무심코 지나치다 보면 한참 후에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그 사람이 불쑥 다시 나타났을 때 왜 그 사람이 거기서 다시 나타났는지 그 까닭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교묘한 장치들이 잔뜩 숨겨져 있지요.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을 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그 사람의 이름과 특징과 해당 쪽수를 함께 적어둘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기나긴 장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아마도 백 명 가까이는 될 듯한데, 나중에 이야기 전개가 차츰 '안개가 걷히듯'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때쯤이면,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잔다이스 대 잔다이스 소송 사건'과 서로 연관을 맺고 있거나, 혹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인 에스더 서머슨 양과 데들록 부인 혹은 잔다이스 씨와 깊은 연관 관계를 맺고 있음이 뚜렷이 드러나지요.
에스더의 이야기와 전지적 작가의 이야기가 팽팽하게 평행선을 달리듯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이끌다가 마침내 서로 맞닿는 지점은 언제쯤일까요. 그 해답을 찾을 때쯤이면 이 소설은 어느새 클라이맥스에 가까이 다가가 있을 테지요. '미모와 자존심과 야심과 교만한 고집'으로 똘똘뭉친 데들록 부인이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장' 딸랑 남기고 느닷없이 가출한 사실이 발견되고, 그 소식을 들은 잔다이스 씨가 한밤중에 에스더 서머슨 양을 깨우는 장면이 '마침내'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려 1,000쪽에 가까운 소설이 바로 여기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고 빠르게 전개되는데, 이 극적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하기 위한 연결 다리는 866쪽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됩니다.
『황폐한 집』을 읽고 나면 작가로서의 찰스 디킨스가 얼마만큼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를 깨닫고 새삼 놀라게 됩니다. 그가 꾸며내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놀랍고 초정밀 시계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치밀하고도 교묘합니다. 또한 찰스 디킨스의 여느 다른 작품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그만의 '심오한 경지'를 발견하게 되지요. 찰스 디킨스가 도스토옙스키의 스승으로 불리우고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심지어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디킨스는 오로지 소설만 쓴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연재할 주간지도 20년이나 계속해서 발행했고, 잡지에 게재되는 원고를 일일이 검토했고, 자신의 소설뿐만 아니라 잡지 기사도 직접 작성했지요. 그뿐만 아니라 자선사업과 사회사업, 곳곳에서 열리는 강연과 사교 모임에도 활발히 참석했습니다. 그가 남긴 편지만 하더라도 한 권이 700쪽이 넘는 스물두 권짜리로 간행되어 있다고 합니다. 작가의 넘치는 에너지와 활력을 보고 랄프 왈도 에머슨이 "그토록 왕성한 창작력과 다채로운 재능을 지닌 한 예술가에 대해서, 또한 한 인간으로서 그가 가진 복합적인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던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지요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국내에 여럿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아직도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지요. 그가 20대 중반에 '불꽃처럼' 드높은 명성을 얻은 끝에 그 인기를 한평생 동안 누리게 만들어 주었던 출세작인 『픽윅 클럽 여행기』만 하더라도 올해 들어서야 겨우 번역되어 나왔으니까 말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버나드 쇼가 "『자본론』 보다도 더 폭동을 유발하는 책"이라고 격찬했고, 그 자본론의 저자인 칼 마르크스가 최초의 자본주의 공격 소설로 평가했던 <리틀 도릿>이나 <우리 서로의 친구>, <니콜라스 니클비>, <마틴 처즐위트>, <돔비와 아들> 같은 작품들은 아직까지도 우리말 번역본을 찾기가 힘든 형편이지요. 사실 그의 방대한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그의 대표작인 『올리버 트위스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에 이르는 네 작품만 하더라도 다 읽기에도 벅찬 게 사실이지요.
마침 올해는 찰스 디킨스 사후 15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더군요. 소설계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이 탁월한 이야기꾼의 작품들이 앞으로도 더욱 다양하게 번역되어 나오고, 그의 작품들을 찾는 독자들이 더욱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의 사후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그의 또다른 대표작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소개할 수 있기를 바라며 『황폐한 집』에 대한 작품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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