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분야의 명저(名著)도 동영상으로 소개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다만 그 작품을 소개하는데 필요한 이미지들을 찾는 게 조금 어려울 뿐. 그런데, 우리가 어릴 때 유난히 자주 들어 왔던 참신한 학습 방법 가운데 하나가 '시청각 수업'이었고, 시청각 도구를 활용한 수업의 대표적인 과목이 '과학'이었는데, 과학 명저를 설명하는 동영상을 만들기 어렵다는 건 묘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라는 작품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책은 아니지만, '과학 분야의 10대 명저'로 손꼽힐 만큼 탁월한 작품이다.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다는 오랜 믿음을 마침내 무너뜨리는 '최후의 일격'이 그 책 속에 너무나 절묘하고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 『대화』의 표지

 

이 책은 갈릴레오가 직접 교황으로부터 책을 써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나서 쓰기 시작했고, 교황청의 엄격한 사전 검열을 거친 끝에 1632년에 출간되었다. 그렇지만 갈릴레오는 끝내 이 책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고, 차마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부끄러운 참회 성사를 하고 나서야 재판정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로마에서 종교재판을 받는 갈릴레오

 

 

로마 교황청은 차마 갈릴레오를 화형으로 단죄하지는 못했지만, 갈릴레오의 저서를 1822년까지 오래도록 금서 목록에서 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교황청도 불변의 진실 앞에서 마냥 침묵할 수는 없었던지, 1992년에 정식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갈릴레오를 복권시켰다.

 

 

피사에서 태어난 갈릴레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으나 곧바로 수학에 흥미를 느껴 수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피사 대학에서 수학 교수로 지내던 갈릴레오는 천문학에 뛰어들기 전부터 물체의 온갖 운동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느껴 온갖 실험과 관찰에 몰두하게 된다.

 

 -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피사의 사탑에서 무게가 다른 쇠공을 떨어트린 실험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그 실험을 통해 물체의 자유낙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2,000년 가까이 인정받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 틀렸음을 증명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도리어 피사 대학에서 쫒겨나게 된다. 1592년에 베네치아 공국의 파도바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거기서 18년 동안 수학과 천문학을 강의하면서 물리학 연구에 온전히 매진할 수 있었다.

 

갈릴레오의 삶을 획기적으로 뒤바꾼 사건은 파도바 대학으로 옮긴지 18년째 되던 해인 1609년에 일어났다. 1600년대 초부터 네덜란드의 안경 제작자들이 발명한 망원경을 손에 넣은 그는 무려 30배나 성능이 확대된 망원경을 손수 제작하는데 성공한다. 이 망원경을 통해 갈릴레오는 말 그대로 인류 최초로 우주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광경들을 생생히 목격하게 된다.

 

갈릴레오는 이 놀라운 발견들을 정리해서 1610년에 『별들의 소식』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유럽의 지식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2,000년 가까이 금과옥조처럼 여겨왔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과는 모든 게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오의 책은 불티나게 팔렸으며,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을 제작하기 바빴고, 갈릴레오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 태양의 흑점

 

갈릴레오는 태양의 흑점들을 관찰한 결과들에 대해서도 책으로 출판했다. 갈릴레오가 점점 더 지동설을 주장하기 시작하자 로마 교황청의 입장을 옹호하는 여러 성직자들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갈릴레오는 직접 로마를 방문하게 된다. 교황청으로부터 지동설을 승인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616년에 로마 교황청의 종교 재판소에서는 도리어 갈릴레오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지 말라는 선고를 내린다.

 

판결문이 전달된 이후 교황을 알현하게 된 갈릴레오는 다행히 교황으로부터 신병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간신히 화를 면한 갈릴레오는 천문 관측을 통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온갖 증거들을 무수히 발견했지만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책으로 출판할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공식적으로 논쟁할 수도 없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620년대가 되면서 로마의 분위기가 호의적으로 바뀌었다고 판단한 갈릴레오는 『시금저울』이라는 책을 출판해서 새로운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헌정했다. 그 책은 주로 천체들의 움직임, 고체와 유체의 회전 등을 다루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의 천문학자나 철학자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해학이 들어 있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교황은 갈릴레오의 탁월한 글솜씨에 감탄했고, 갈릴레오는 1624년에 다시 로마로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코페르니쿠스 이론에 대한 금지를 해제해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한다.

 

 - 『별들의 소식』 표지

     이번에야 알게 되었지만 국내에서도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나와 있다.

 

교황은 그 요청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이론을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이론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책을 써도 좋다고 친히 허락했다. 그러나 지구가 자전이나 공전을 한다는 게 사실인 것처럼 보여서는 절대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피렌체로 돌아온 갈릴레오는 일생일대의 위대한 작품을 쓰기로 즉시 계획을 세웠고, 그렇게 해서 로마 교황청의 검열을 거쳐 출판을 허락받은 책이 『대화』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탄생한 이 유명한 책은 1632년 2월에 피렌체에서 1,000권이 인쇄되어 나왔다.

 

 - 눈이 덮힌 피렌체

이 책이 출판되자 갈릴레오의 친구들은 경탄을 쏟아 냈고, 갈릴레오와 격렬한 논쟁을 벌여 왔던 숱한 적대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갈릴레오가 책을 쓰도록 허락했던 교황 우르바누스 8세마저 『대화』를 읽고 나서 격노한다. 지동설을 하나의 가설로서 다룬다는 조건으로 책의 출판을 허락했지만, 책의 내용은 아무리 좋게 봐주더라도 지동설이 실제 사실이라는 점을 너무나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교황이 스스로 강조했던 말이 책 속의 등장 인물인 머리 나쁜 심플리치오의 입을 통해 버젓이 발설된 점을 특히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건 마치 교황 자신을 천동설을 믿는 어리석은 심플리치오에 직접 빗댄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자신의 이상한 상상을 갖고 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제한하려 하는 것은 참람한 짓이다."

 

교황은 갈릴레오를 로마로 압송해 종교 재판에 회부하도록 명령했고, 종교 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으며, 갈릴레오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기나긴 참회 성사를 읽어 내려갔다. 이 재판이 끝나고 나서 갈릴레오가 재판정을 나서는 동안에 삼척동자도 다 아는 그 유명한 일화가 탄생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말을 갈릴레오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는 것이다.

 

 - 로마 교황청의 심문을 받는 갈릴레오

 

이 유명한 종교 재판에서 갈릴레오가 남긴 참회 성사는 참으로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도그마에 갖힌 종교적 세계관과 엄밀한 관찰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세계관과의 충돌 문제뿐 아니라, 천재 과학자가 발견한 새로운 진리가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기까지 얼마나 격렬한 저항과 맞닥뜨려야 하는지도 새삼 깨닫게 된다.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이 끝나고 나서 죽을 때까지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사람들과의 교유는 허용되었다. 그러자 차츰 동료 학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하고, 유럽의 먼 나라에서 일부러 갈릴레오를 만나려고 찾아오는 학자들도 있었다. 아마도 그럴 때 갈릴레오는 동료 학자들에게 나지막하게 중얼거렸을 듯하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이다. 왜냐하면 갈릴레이의 명언은 훗날에 일부러 지어낸 게 아니라, 갈릴레오가 생존해 있을 당시에 이미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갈릴레오의 『대화』는 출판된 후 200년 가까이 금서로 묶였지만, 과학자 갈릴레오가 공식으로 복권되는 데에는 그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필요했다. 1979년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갈릴레이에게 유죄를 선고한 것이 실수였다는 견해를 밝히면서 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1992년에 이르러 마침내 갈릴레오는 복권됐다. 그가 로마의 미네르바 교회에서 참회성사를 한지 359년 만이었고, 그가 죽은지 350년 만이었다.

 

(제작 후기)

 

하나의 동영상을 제작하다 보면 뜻하지 않게 (남들의 눈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별의별 짓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갈릴레오의 『대화』를 소개할려고 마음 먹은 순간부터 내가 피렌체에서 직접 겪었던 짤막한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은 욕심을 억누르기 어려웠지만, 내내 참았었다. 그때의 에피소드를 소개하자면 무려(!) 2001년에 찍었던 사진들을 뒤지고 찾아서 그걸 다시 디지털화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요란을 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랴. 동영상을 만드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기어코 그 사진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한참을 뒤진 끝에 몇 장의 사진들을 동영상에 담을 수 있었다. 그 누가 알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일지?

 

 - 베네치아 가는 길, 이 당시 아들 녀석은 초1, 딸이아는 유치원생이었다.

 

 - 햇살이 장난이 아니었던 로마의 스페인 계단.

    어린 녀석들을 데리고 뙤약볕 아래 온종일 도보로 강행군을 하느라 유럽 여행은 몹시 힘들었다.

 

 - 두 녀석들은 이름난 장소와 건축물들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비둘기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 사진을 찍는 건 특히 싫어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 앞에서 겨우겨우 찍은 사진이 이렇다.

 

 - 도대체 사진을 왜 찍느냐, 우린 놀러 왔으니 제발 놀게 해주라는 식이다.

 

 - 그러다가, 딱 한번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갈릴레오의 무덤 앞에서였다.

    "아빠! 사진 한장 찍어줘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여행 중에 들었던 가장 놀라운 말이었다.

 

  - 갈릴레오의 무덤은 사진 한 가운데 보이는 '산타클로체 성당' 안에 있다.

     여기에는 갈릴레오 말고도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단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묻혀 있다.

     왜 나는 이들 거장들의 무덤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어놓지 못했을까, 싶은 생각이 이제서야 들었다.   

     그렇게나 사진을 찍기 싫어하던 아들 녀석도 떡 하니 사진 한 장 남겼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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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 주소는 ☞ https://youtu.be/5J5YwgJcA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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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d 2020-03-01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oren 님, 좋아요 한 백만 개쯤 드리고 싶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갈릴레오의 ‘드라마틱한’ 삶과 진리 추구를 간결하고 생생하게 묘사해준 것도 좋지만, 저는 oren 님의 개인적 에피소드가 더 좋습니다. 지금은 개인의 시대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개인의 삶에 큰 흥미를 느끼지요. 올려주신 꼬맹이들(이라 하기엔 좀 큰가?) 사진 정말 너무 좋아요. 엄마 아빠 다 웃고 있는데 “제발 놀게 해주라”며 토라진 따님 좀 보세요. 그 포즈가 정말 대박~^^* 앞으로 oren 님 개인적 일화를 살짝살짝 곁들이면 더욱더 좋을 것 같습니다. You made my day~ ^^*

oren 2020-03-01 13:29   좋아요 1 | URL
**** 님으로부터 간만에(!) 칭찬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힘이 나고 기분이 좋습니다.^^

저도 유튜브 영상을 만들 때 항상 생각하는 부분이, 누구한테서나 들을 수 있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세상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나한테서만 들을 수 있는 나만의 독창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을까를 항상 고민한답니다. 그래서 어떤 작품을 소개하든, 나만의 개인적인 스토리를 집어넣기 위해 애쓰는 편이구요. <월든>, <몽테뉴 수상록>, <로마제국 쇠망사>와 같은 작품을 소개할 때에도 그런 시도를 했더랬는데, **** 님께서 그런 부분을 특별히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저는 아직도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끊임없이 시도해 봐야 하는 그런 쌩초보 중의 쌩초보에 불과한데, 유튜브 이용자들의 반응은 생각보다는 ‘초보자들한테‘ 다소 냉정한 듯하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수천 명 또는 수만 명의 구독자들을 거느린 북튜버들의 책 소개 동영상을 보면 (제 기준으로는) 딱히 새롭거나 유익하다고 느껴지는 동영상들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일반 대중들은 왜 그런 영상들에 대해서 그토록 열심히 구독하고 조회하는지 의아할 때도 좀 있습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나 취향이나 유튜브 이용 목적 등등이 다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진정성 있는 독창적인 컨텐츠를 꾸준히 만들다 보면, 결국 대중들도 언젠가는(!) 또는 어느 정도는 알아줄 날이 오리라 믿고 천천히 뚜벅뚜벅 저만의 컨텐츠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늘 관심 가져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거나 아무리 쓴 소리라도 아끼지 말고 댓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Mind 2020-03-01 13:22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답글 감사합니다. 한데 답글이 안 보여요. 제가 알라딘에 ‘비로그인’한 채 댓글을 작성했기 때문에 제 댓글에 비밀 댓글을 달면 저는 볼 수가 없답니다. 어떡하죠?

2020-03-01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20-03-10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로마 스페인 광장 앞 사진에선 손가락 브이 하고 방긋 웃고 있네요. 아이들 너무 귀여워요. 저때즈음의 사진들 보면 어찌나 풋풋한지요 ㅎㅎ 가족사진이 참 보기 좋습니다. 오렌님 이 컨텐츠 참 훌륭합니다. 누적되면 굉장한 아카이브가 될 듯해요.
응원합니다. 주욱~!!

oren 2020-03-10 17:09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 님께서 늘 좋게 봐주셔서 참으로 고맙고, 큰 힘이 됩니다!
저 당시에 투정부리던 모습들은 제가 지금 다시 봐도 너무 우낍니다!
갈릴레오 무덤 앞에서 사진 찍어 달라던 녀석이 다 큰 어른이 된 모습을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영상에 담지 못했는데, 그게 좀 아쉽더라구요. 영상도 오래오래 남을 텐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