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는 뒤늦게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내가 2013년에 히말라야 트레킹 때 하룻밤을 묵었던 '랑탕 빌리지'라는 곳이 2015년의 네팔 대지진 때 거대한 산사태로 인해 통째로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희생된 사람만 무려 197명이나 된다고 한다. 우리가 트레킹에 나섰을 당시 원정대장 역할을 맡았던 분으로부터 우연히 그런 소식을 듣고 정말인가 싶어서 유튜브를 검색해 봤더니, 엄연한 사실이었다.

 

(2013년 당시의 모습. 랑탕 빌리지는 마을 한가운데로 냇물이 졸졸 흐르는 운치 있는 마을이었다.)

 

(보도 사진에 따르면 지진 당시의 산사태로 인해 마을이 흔적도 없이 파묻혀 버렸다.)

 

2015년 4월 하순에 발생한 그 끔찍한 대지진 소식을 접했을 무렵, 나는 일부러 네팔 지진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괜히 마음만 더 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인가. 머나먼 다른 나라에서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났고, 8천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데도, 나는 차마 그 광경에 마음을 다칠까봐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니.

 

참으로,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했던 말은 얼마나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던가.

 

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저 불행한 사람들의 액운(厄運)에 대한 그의 비애를 매우 강하게 표명할 것이고,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많은 침통한 성찰을 할 것이다. ……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 정리가 끝났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인도적 감정들이 충분히 표명된 후에는, 그는 그런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기의 사업 또는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휴식과 기분전환을 취할 것이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뒤늦게 유튜브에 들어가서 '랑탕 빌리지'를 검색해 보니, 믿기지 않는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Nepal Earthquake 2015'로 검색되는 다양한 영상들이 넘쳐났다. 그 가운데서도 Nepal's Langtang Valley - Beauty and Destruction 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동영상을 보니, 끔찍하게 변해버린 현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아름답던 마을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저토록 허망하게 폭삭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https://youtu.be/AvAFb5Q_3zo?list=LLtbZg9t1yZ2THcPuf3SinHg

 

랑탕 계곡은 수만 년 동안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나, 영국의 오지 탐험가인 윌리엄 틸만(1898∼1978)에 의해 뒤늦게 발견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는 극찬을 받은 곳이다. 해마다 봄이 되면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가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을 배경으로 너무나 아름답게 피어나서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닌가' 싶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곳이 바로 랑탕 계곡이다.

 

(2013년 봄)

 

((2013년 봄)

 

그토록 아름답고 평화롭던 곳이 어떻게 한 순간에 황무지로 변했고, 그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소박한 삶을 꾸려나가던 마을 주민들이 어떻게 한 순간에 모조리 다 희생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랑탕 계곡을 따라 우거진 수목들조차 거대한 후폭풍에 휩쓸려 성냥개비처럼 모조리 쓰러져 버렸다고도 한다. 나무가 쓰러진 피해지역만 하더라도 길이가 10 km가 넘는다고 하니, 후폭풍의 규모와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우리가 트레킹을 다녀 왔던 랑탕 계곡의 피해가 네팔의 여느 피해 지역 못지 않게 극심했음에도, 나는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체로 여태까지 지내왔다. 나는 그저 네팔의 수도인 카트만두의 무슨 유명한 사원이나 오래된 왕궁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고, 산간 지방에 허술하게 지어진 숱한 학교들과 돌담으로 쌓은 허술한 가옥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무너졌을 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히말라야의 기나긴 역사를 되돌아 보면 우리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지도 모르곘다. 2015년의 네팔 대지진은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대재앙으로 느껴지지만 '히말라야의 입장'에서는 그저 소소한 사건에 불과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밝혀낸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억 4천만 년 전까지만 해도 오늘날의 인도는 곤드와나 초대륙의 일부였으나 떨어져 나가 연간 18~20㎝라는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이동해 5천만 년 전 유라시아 판과 충돌했으며 이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이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무려 5천만 년 전에는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던 셈인가. 대륙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인도판이 유라시아판 밑으로 기어들어가다가 저토록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생겨났으니 말이다. 그 때 일어났던 거대한 굉음과 땅의 뒤흔들림을 느꼈던 동식물들은 과연 얼마만큼 놀라야만 했던 것인가.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의 숲 속에서 살다가 나무에서 내려와 직립보행을 시작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만 년 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지난 400만 년 동안만 하더라도 랑탕 계곡의 지형은 얼마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온 셈인가. 또한 히말라야의 만년설을 '신들이 사는 영역'으로만 알고 감히 범접하기조차 두려워했던 시대를 뒤로 하고, 나같은 일반인조차 겁도 없이 수천 미터의 봉우리를 오를 수 있게 된 우리 세대는 얼마나 엄청난 행운아인가.

 

유튜브에서 영상들을 찾아 보니, 랑탕 계곡의 옛 마을들은 비록 한순간에 흙더미 속으로 사라졌지만, 어느새 그 위에 뉴빌리지가 형성되고 있었고, 트레커들은 불과 수년 전에 우리가 지나갔던 길보다 훨씬 더 높다랗게 흙더미가 쌓인 새로운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결국 저 울퉁불퉁한 길도 차츰 시간이 지나면 매끈한 길로 변할 것이다. 과거에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 2013년에 랑탕 계곡을 다녀온 <히말라야 트레킹> 기록이다. 언제쯤 또다시 그곳을 가볼까 하다가, 이번에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도, 지진 피해의 깊은 상흔이 어서 빨리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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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251

중국이란 대 제국이 그 무수한 주민과 함께 갑자기 지진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상상해 보자. 그리고 중국과는 어떠한 관계도 갖지 않았던 유럽의 어떤 인도주의자에게 이 가공할 만한 재앙의 보도가 전해졌을 때, 그가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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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251∼252

나의 상상으로는,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저 불행한 사람들의 액운(厄運)에 대한 그의 비애를 매우 강하게 표명할 것이고, 인생의 변화무쌍함과, 이렇게 일순간에 파멸되는 인류의 모든 노동의 창조물의 허망함에 대하여 많은 침통한 성찰을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투기업자라면, 그는 이 재난이 유럽의 상업에, 그리고 전 세계의 무역과 상업에 미칠지도 모를 효과들에 대한 많은 추측에 몰두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그의 생각 정리가 끝났을 때,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인도적 감정들이 충분히 표명된 후에는, 그는 그런 사고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자기의 사업 또는 쾌락을 추구할 것이고, 휴식과 기분전환을 취할 것이다.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소소한 재난이 그에게는 오히려 더욱 실질적인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가 내일 자기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오늘밤 그는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들의 파멸이 있더라도, 만약 그가 직접 그것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깊은 안도감을 가지고 코를 골며 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거대한 대중의 파멸은 분명히 그 자신의 하찮은 비운보다 관심을 끌지 못하는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인도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자신에 대한 이 사소한 비운을 방지하기 위하여 1억이나 되는 이웃 형제의 생명을, 만약 그가 그것을 결코 보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희생시킬 것인가? 인간의 본성은 이러한 생각에 공포를 느끼며, 그리고 세상은,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했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악한 사람은 결코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의 소극적인 감정들은 거의 언제나 이처럼 야비하고 이처럼 이기적일 때, 어떻게 우리의 적극적인 천성들은 흔히 그처럼 관대하고 그처럼 고귀할 수 있는가? 우리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관련된 일보다도 우리 자신에 관련된 일에 의해 훨씬 많은 영향을 받는다면, 무엇이 관대한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경우에, 그리고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그들 자신의 이익을 희생시키도록 촉구하는가? 자애(自愛: self-love)의 가장 강한 충동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인간애(humaity), 즉 인도주의의 온화한 힘이 아니며, 조물주가 인간의 마음에 밝혀준 자애(benevolence)의 약한 불꽃도 아니다. 이러한 경우에 작용하는 것은 보다 강렬한 힘이고 보다 강제력 있는 동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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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253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

많은 경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신성한 미덕을 행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아니고 인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러한 경우에 통상 생기는 것은 보다 강한 사랑, 보다 강력한 애정, 즉 명예스럽고 고귀한 것에 대한 사랑, 우리 자신의 성격의 숭고함, 존엄성, 탁월성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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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272∼273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paroxysms of distress)을 당하는 경우 가장 현명하고 단호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에는, 상당한 정도의,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 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자신의 불행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감정, 그 자신의 처지에 대한 그 자신의 자연스런 시각이 그를 강하게 압박하기 때문에, 그가 엄청나게 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주의력을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두 가지 종류의 시각, 즉 자신의 견해와 공정한 방관자의 견해가 동시에 그의 앞에 나타난다. 그의 명예감각, 그 자신의 존엄에 대한 고려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주의력을 방관자의 그것에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자연적인, 교육받지 않은, 훈련되지 않은 감정들은 계속 그의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한다.

이런 경우,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킬 수 없고, 스스로 자기 행위의 공정한 방관자가 될 수도 없다. 양자의 서로 다른 성격의 시각이 그의 마음속에 서로 분리되고 구분되어 존재하고, 각각은 그에게 서로 다른 행위를 하도록 지시한다. 그가 명예심과 자존심이 그에게 지시하는 시각에 따를 때, 사실 조물주는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는 상태로 남겨두지는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의 완전한 자기시인(自己是認)과 동시에 정직하고 공정한 모든 방관자들의 갈채를 누리게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조물주의 만고불변의 법칙에 따라서, 그는 여전히 고통을 당한다. 조물주가 수여하는 보상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이러한 법칙이 그가 당한 고통을 완전히 보상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렇다고 조물주의 보상과 그의 고통의 크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조물주의 보상이 그가 받는 고통을 완전히 보상해 준다면, 자신의 이기적인 고려에서, 그는 자기 자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효용을 필연적으로 감소시킬 우발적 사고를 회피하려는 동기를 전혀 갖지 않을 것이다(완전히 보상받는다면 사고를 피하는 것과 피하지 않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물주는 양자에 대한 부모다운 배려에서 그가 가능한 한 모든 우발적 사고들을 피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리고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 중에서도, 자신의 사내다운 모습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판단의 침착함과 냉정함을 유지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최대의 가장 고된 노력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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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274

그러나 인성(人性)의 구조적 특성상, 고통은 결코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그는 곧 크게 어렵지 않게 일상의 평정을 즐기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서, 틀림없이 자신의 남은 전 생애 동안 매우 큰 불편을 계속 겪어야만 할 것으로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의족을 한 자신의 모습을 모든 공정한 방관자가 그것을 보는 것과 정확히 동일하게 보게 된다. 즉, 그는 이 불편함을, 그런 중에서도 혼자서 혹은 여럿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모든 통상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는 곧 자신을 자기 가슴 속의 가상의 인간과 일치시키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공정한 방관자로 된다. 약한 사람들은 처음에 때때로 그렇게 하듯이, 그는 울거나 탄식하거나 그것에 대해 비관하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는 공정한 방관자의 시각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더 이상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어떤 몸부림도 치지 않고, 자신의 불행을 다른 어떤 시각에서 관찰하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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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
275∼276

인간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貪慾: 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野心: 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虛榮: vain-glory)은 무명(無名)의 상태와 유명(有名)한 상태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런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해 있는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흔히 그가 어리석게도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교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러한 통상의 여러 가지 상황들 중에서 어떤 상황은 다른 상황보다 더욱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신중(愼重: prudence) 또는 정의 (正義: justice)의 법칙들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격정적인 열의를 가지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는 후에 가서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회상할 때 느끼게 될 수치심과, 자신의 부정한 행위에 대한 두려움에서 오는 회한(悔恨)으로 마음의 장래의 평정까지 파괴해 가면서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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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
278∼279

다음의 관찰은 특별한 상황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것은 올바른 결론이라고 믿는다. 즉, 다소라도 구제(救濟)의 여지가 있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제의 여지가 전혀 없는 불행 중에 처해 있는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그렇게 쉽게 자신들의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평정을 회복하지 못한다.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구제의 여지가 없는 불행에 처한 사람들의 경우, 총명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와 연약한 사람의 감정 및 행위 사이에 어떤 눈에 띄는 차이점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발작처럼 돌연히 발생한 불행의 경우 또는 불행이 최초에 엄습한 때이다. 그러나 최후에 가서는 시간(時間)이라는 위대하고 보편적인 위안자(慰安者)가 점차 저 연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한 사람이 최초에 자존심과 사내다운 기개의 교도(敎導)에 의해 도달하였던 그런 수준의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게 된다.

나무 의족(義足)을 한 사람의 경우가 이런 사정에 대한 분명한 예이다. 자식의 죽음, 친구나 친척의 죽음 등처럼 회복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경우에는 총명한 사람이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슬픔에 빠질 수 있다. 다정다감하고 연약한 여성은 그런 경우 흔히 거의 완전히 미쳐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길든 짧든 시간이 지나면 예외 없이 이런 가장 연약한 여성까지도 가장 강인한 남성과 같이 어느 정도의 평정을 회복하게 된다. 그 자신에게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모든 회복 불가능한 재난 가운데서도, 총명한 사람은 몇 달 또는 몇 년 후에는 결국 회복될 것이 틀림없는 마음의 평정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그것을 미리 즐기려고 노력한다.


 * * *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284

당신은 역경에 처해 있는가? 고독의 어둠 속에서 탄식하지 말고, 당신의 친한 친구들의 관대한 동감에 맞추어 당신의 슬픔을 조정하지 말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세상과 사회의 일광(日光) 속으로 돌아가라. 그리고는 낯선 사람들, 당신의 불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적들과 사귀는 것조차 회피하지 말고, 당신의 적들로 하여금 당신이 당신의 재난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적게 받았는지, 얼마나 그것을 초월해 있는지를 느끼도록 하고, 당신의 불행을 보고 기뻐하는 그들의 악의(惡意)에 굴욕감을 안겨줌으로써 당신 스스로 기뻐하라.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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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11-27 2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아름다운 곳인데 지진으로 저렇게 변했으니 갔다오신 입장에서 상당히 마음이 아프시겠네요ㅜ.ㅜ

oren 2019-11-27 20:5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아직까지 히말라야를 가 보지 못한 친구들한테도 ˝우리 언제 꼭 한번 히말라야 같이 가 보자. 랑탕계곡이라고 있는데, 그렇게 힘들지도 않고,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라고 말할 정도로, 저로서는 정말 좋은 기억들이 많은 곳이었지요.

이번에 랑탕계곡이 저렇게 망가진 걸 알고 이런 저런 뉴스를 찾아보니, 저처럼 가슴아파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구요. 10년 혹은 20년째 랑탕 계곡을 찾곤 했던 사람들이 일부러 ‘추모‘를 위해 다시 그곳을 찾는 경우도 많고요.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 차츰 아픔은 잊혀지고, 과거의 아름다움을 되찾으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