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그 꿈을 다시 나타나게 하려면, 단지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발베크,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이름 안에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장소들이 불러일으킨 욕망이 축적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봄에도 발베크라는 이름을 책 속에서 발견하기만 하면, 폭풍우와 노르망디의 고딕 양식에 대한 욕망을 내 마음속에 눈뜨게 하는 데 충분했고, 폭풍우가 부는 날에는 피렌체 또는 베네치아라는 이름은 내게 태양과 백합, 총독 궁전 ,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대한 욕망을 일깨웠다.(340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발베크라는 이름은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 도시엔 여태껏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다르다. 고작 반나절 아니면 하루쯤 머무른 기억밖에 없지만 그 두 도시는 단 한 번의 방문만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도시가 된다. 피렌체와 베네치아는 영화나 TV 등을 통해 영상으로도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잠깐식 스쳐가는 아름다운 영상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차분히 책을 읽는 동안에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이 두 도시에 대한 특별한 감동을 뛰어넘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만큼 이 두 도시는 문학적인 도시로도 손색이 없다.

 

 

그 두 도시가 아무리 뛰어난 역사가들, 가령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와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를 장식하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를 다채롭게 빛낸 '르네상스'의 핵심 무대였다고 하더라도, 단테의 『신곡』이나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오셀로』, 혹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문학 특유의 그윽한 향기를 더하지 못했더라면 이들 도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평범한 도시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이름들이 그 도시들에 대한 내 이미지를 영원히 흡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이미지를 변형함으로써만, 그 이미지의 출현을 내 마음속에서 이름 고유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만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름들은 이미지를 더 아름답게 만들긴 했지만, 노르망디나 토스카나 지방 같은 도시들을 실제와는 아주 다르게 만들어, 내 상상력이 주는 기쁨은 커졌으나 미래 여행에서 받을 내 실망 역시 더 크게 했다. 이름들은 내가 몇몇 지상의 장소에 대해 품고 있던 관념들을 자극하면서 그 장소들을 보다 특별한 것, 따라서 보다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도시들, 풍경들, 유적들을 동일한 질료에서 여기저기 오려 낸, 다소 마음에 드는 정경이라 상상하지 않고 그 각각을 내 영혼이 열망하고 내 영혼이 알면 유익한, 다른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알 수 없는 것이라 상상했다. 그 장소들은 그들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름, 인명과도 같은 이름으로 지칭됨으로써 얼마나 많은 개별성을 획득했던가!(340∼341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몽테뉴가 유별나게 강조하고 집착했던 대상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게 '장소'와 '이름'이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속에서 그 특이한 프랑스적 경향(?)이 고스란히 반복되는 모습이 무척 흥미롭다.

 

 

『파르마의 수도원』을 읽고 나서 내가 가장 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가 된 파르마라는 이름은 내게 조밀하고 매끄러우며 보랏빛을 띤 부드러운 이미지로 나타났고, 그리하여 내가 머무를지도 모르는 파르마의 한 저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내게는 조밀하고 매끄럽고 따뜻한 보랏빛 저택에서 지내리라고 생각하는 기쁨이 생겨났다. 그 저택은 이탈리아 어떤 도시의 저택과도 관계가 없었지만, 단지 내가 파르마-파름이라는 이름의 공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무거운 음절과, 스탕달의 부드러움과 보랏빛 반사광을 흡수한 모든 것의 도움을 받아 그 저택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마치 경이로운 향기를 풍기는 화관과도 흡사한 도시로 피렌체를 떠올렸는데, 피렌체가 백합의 도시라 불리고, 그곳 대성당 이름이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발베크의 경우, 노르망디의 옛 도자기가 그것이 발굴된 흙의 색깔을 간직하듯이, 이제는 폐지된 어떤 관습이나 봉건 제도, 고장의 옛 모습, 불규칙하게 변화하는 음절로 구성되어 옛날 식으로 발음되는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발베크에 도착해서 성당 앞 맹위를 떨치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안내받았을 때, 나는 그곳에서 카페오레를 내 앞에 가져다줄 호텔 주인으로부터 그런 말투를 다시 들으리라는 것을, 그 주인이 우화 시에 나오는 인물처럼 입씨름하기 좋아하고, 점잔 빼고, 풍모가 중세적이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341∼342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나의 생각)

 

니체가 탁월한 작가로 손꼽아 마지 않았던 스탕달의 작품을 프루스트도 무척이나 좋아했나 보다. 스탕달의 작품은 『적과 흑』 이후로는 영영 재회한 적이 없었는데, 『파르마의 수도원』을 염두해 놓아야겠다...

 

 

내 건강이 나아져서, 비록 발베크에서 머물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한번은 노르망디나 브르타뉴 건축물과 경관을 보기 위해 그처럼 상상 속에서 여러 번 탄 적 있는 1시 22분 기차를 타는 것을 부모님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나는 우선 가장 아름다운 도시에서 내려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 번 그 도시들을 비교해 보았지만,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그 개별적인 존재들 사이에서 어떻게 더 아름다운 도시를 고를 수 있단 말인가. 불그스름하고 우아한 레이스 안에서 그렇게도 높이 솟아 있고 꼭대기가 마지막 음절의 오래된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이외(Bayeux). e 모음 위 방점이 오래된 유리창을 검정 나무 같은 마름모꼴로 나누는 비트레(Vitré). 달걀 껍질의 노란색에서 진주 빛 회색에 이르는 희끄무레하고 부드러운 랑발(Lamballe), 기름지고 노르스름한 마지막 이중모음이 버터로 만든 탑을 장식하는 노르망디의 대성당 쿠탕스(Coutances), 마을의 고요 속에 역마차의 소음과 함께 파리가 뒤따르는 라니용(Lannion),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가 강물이 흐르는 시적인 장소의 길 위에 흩어져 있는 그 우습고도 소박한 케스탕베르(Questambert)와 퐁토르송(Pontorson), 해초 한가운데로 강물을 끌어들이려는 듯 밧줄에 겨우 매인 듯한 베노데트(Benodet), 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천 모자의 옅은 분홍색 날개가 운하의 초록빛깔 물속에서 떨리며 반사되는 퐁타벵(Pont-Aven), 중세 이래로 시냇물에 보다 단단히 매어 있고 그 사이를 졸졸 노래하며 검게 그은 옷의 무딘 점으로 변한 햇살이 유리창 거미줄 너머로 그림을 그리듯 아주 섬세한 잿빛 진주 방울로 아롱지는 캥페롤레(Quimperlé).(342∼344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3부_고장의 이름ㅡ이름 

 

(역자 주)

 

문체론적으로 유명한 이 문단은 프랑스 시인 랭보의 『모음(Voyelles)』 이라는 시 못지않게 주목을 받아 왔다. 문화적, 음성학적, 문자적인 함의로 가득한 이 문단에서 우선 장식 융단으로 유명한 바이외(Bayeux)의 yeu는 고풍스러운 금색을, 마름모꼴 유리창이 연상되는 비트레(Vitré)의 é는 검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랑발(Lamballe)에는 하얀색(blanc)이란 음소가 들어 있으며, 쿠탕스(Coutances)의 an은 버터의 노란색을 환기한다. 라니용(Lannion)은 마부의 끈(laniére)과 라퐁텐의 우화에 연유하며, 케스탕베르(Questambert)는 이 고장의 카망베르 치즈에서, 이밖에도 퐁토르송(Pontorson)의 하얀 깃털과 노란 부리는 이 도시 문양이 백조인 데서, 베노데트는 수초로 불리는 이 고장 수생식물에서 비롯되었다. 퐁타뱅의 모자 날개는 고갱의 그림 『브르타뉴의 네 여인들』에 나오는 하얀 천 모자와 연결되며, 플로베르를 매혹했던 '들판과 모래톱'의 투명한 시냇물 이미지는 캥페를레(Quimperlé)의 진주 빛(perlé) 방울로 표현된다.

 

(나의 생각)

 

프루스트의 문장이 얼마나 경이로운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 같다.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비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문장들은 얼마나 괴벽스럽지 않으면서도 매혹적인가. 『댈러웨이 부인』의 버지니아 울프가 이런 문장들을 읽고 어찌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을 두고 <실패작, 천재성은 있지만 질이 낮다. 산만하고 찝찔하고 젠체하며 상스럽다>고 개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으며, 마르셀 프루스트를 두고 <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다.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 * *

 

책을 무려 여덟 권이나 사 놓고 여태껏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않았던 책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그런데 1권을 슬슬 읽어 나가다가 특별한 문장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루스트의 소설을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는 느낌이 불쑥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 문장이란 이 기나긴 소설의 첫 문장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은 다음 대목에서였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짦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86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1부_콩브레

 

이런 독특한 느낌들이야말로 프루스트를 읽는 독자들만이 맛보는 경이로운 체험이 아닐까 싶다. 프루스트의 소설엔 문학이 우리의 의식을 얼마만큼 폭넓고도 깊숙하게 자극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시험한다. 그런 수단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화자의 지나간 기억만이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는 건 아니다. 도처에 널려 있는 그림과 음악, 연극과 오페라도 중요한 매개체다. 그밖에도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화창한 날씨, 비, 바람, 브리오슈빵, 마로니에 그늘, 라일락 향기, 시냇물, 저녁놀, 구름, 빗방울 등등등. 그렇게 다소 어리둥절하게 '우리의 의식을 자극하는 수많은 덩어리들'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장편 소설의 제1권이 뚝딱 끝난다.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 콩브레>의 배경이 전원풍의 시골이었다면, <2부 스완의 사랑>의 주된 배경은 프랑스 사교계 인물들이 밤마다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는 파리의 화려한 살롱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에서도 프랑스에서 손꼽히는 최고급의 귀족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서 묘사했던 것처럼 대저택의 현관을 가득 메울 만큼 화려한 마차들이 잇따라 등장하는 식은 아니다. 극히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소수의 핵심 멤버들이 거의 매일 저녁에 삼삼오오 만나 고급 만찬과 음악 연주와 이야기를 즐기는 식이다. 거기서 우리의 주인공 스완은 '과거가 의심되지만' 보티첼리의 그림 속 미녀를 연상시키는 오데트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2부 스완의 사랑>에서는 <1부 콩브레>에서 이야기를 이끌던 화자는 아주 가끔씩 어쩌다가 등장하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가 이끄는 '스완의 사랑'에만 집중된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오데트를 만났으며, 그 두 사람이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어떻게 '금전적으로' 얽히게 되었고, 어떻게 질투 때문에 괴로워하는지가 숨막히게(?) 펼쳐진다. 스완의 사랑은 어느날 저녁 살롱에서 연주되는 뱅퇴유의 피아노 소나타에서 갑자기 솟아오른다.

 

처음에 그는 악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의 물질적인 질감밖에 음미하지 못했다. 그러다 가느다랗고 끈질기고 조밀하며 곡을 끌어가는 바이올린의 가냘픈 선율 아래서, 갑자기 피아노의 거대한 물결이 출렁거리며 마치 달빛에 홀려 반음을 내린 연보랏빛 물결처럼, 다양한 형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잔잔하게 부딪치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을 때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윤곽을 분명히 구별하지도 못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갑자기 매혹된 그는, 마치 저녁나절 습기찬 공기 속을 감도는 장미 냄새가 우리 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듯이, 지나는 길에 그의 영혼을 크게 열어 준 악절 또는 화음을 ㅡ 그는 어느 것인지 알지 못했다. ㅡ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처럼 스완이 어떤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았던 것은 아마도 음악을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인상은 오로지 유일하게 음악적이고 내적인, 다른 어떤 인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런 인상이란 잠시 후면 사라져 버릴, 말하자면 '시네 마테리아'인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듣는 음은 그 높이와 부피에 따라 우리 눈앞에 있는 다양한 차원의 표면을 감싸고 아라베스크 무늬를 그리며 우리에게 넓이, 미묘함, 안정감, 변화에 대한 감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은 뒤이어 또는 동시에 나타나는 음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이들 감각이 우리 마음속에 충분히 형성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린다. 절들의 복사본을 만들어 그것들을 다음에 오는 악절들과 대조하고 구별하게 하도록 해 주지 않는다면, 그 '액체성'과 '뒤섞임'으로 계속 모티프들을 감쌀 것이고 그리하여 모티프들은 거의 식별할 수 없는 상태로 이따금 솟아오르다 이내 가라앉고 사라지면서 그것이 주는 특별한 기쁨에 의해서만 지각될 뿐 묘사할 수도 기억할 수도 명명할 수도 없는, 즉 '말로 펴현할 수 업는 것'이 된다. 이처럼 스완이 느꼈던 감미로운 감각이 사라지자 마자 그의 기억은 곧 그 감각에 대해 간략하고도 일시적인 복사본을 마련해 주었지만, 악절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지나치게 그 복사본에 눈을 던지고 있었으므로, 똑같은 인상이 갑자기 되돌아왔을 때에 이미 그 인상은 포착할 수 없어지고 말았다. 스완은 그 인상의 넓이와 대칭적인 배열, 문자, 표현적인 가치를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그러자 그는 자기 앞에 이미 순수 음악이 아닌 데생이나 건축, 사상과도 흡사한 그런 것을 보았다. 이제야 그는 음향의 파도 위로 잠시 솟아오른 악절을 뚜렷이 식별할 수 있었다. 악절은 금방 그에게 특별한 쾌락을, 그것을 듣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쾌락을 주었는데, 악절 외 다른 어떤 것도 그런 쾌락을 맛보게 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악절에 대해 미지의 사랑과도 같은 그 무엇을 느꼈다.((44∼47쪽)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2』, <스완네 집 쪽으로 2>, 2부_스완의 사랑​  

 

스완의 사랑은 가파른 호흡으로 숨가쁘게 진행되다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결여와 공백 때문에 갑작스레 방황하다가, 느닷없는 의심과 질투와 이별의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또다시 마주친 뱅퇴유의 소나타에서 '사랑이 끝났음'을 절감하는 식으로 마무리된다. 거기서 이어지는 대목이 앞서 일부 문장들을 인용했던 <3부 고장의 이름 ㅡ 이름>이다.

 

여기까지 읽고 보니, 문득 뒤늦게 붙잡고 읽기 시작한 프루스트의 엄청나게 긴 소설에 뜻밖에도 빨리 적응된 느낌이 든다. 전체 <7편 13권>으로 구성된 책 가운데 현재로서는 (민음사판 기준으로) <4편 8권>까지 번역되어 나와 있어서, 틈틈이 읽다 보면 8권까지는 충분히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거기까지 읽고 나서도 여전히 후속 번역판이 출간되지 않는다면 그땐 과연 어떤 느낌이 찾아들까. 오래도록 이어지다가 갑자기 뚝 멈춰버린 음악 같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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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10-13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뜬금없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지리산을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산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리산을 오르는 길이 하나가 아니듯, 그리고 각자 길이 서로 다른 매력을 준다는 면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디에 초점을 두고 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다르게 보이는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 호흡으로 읽어야 할텐데 좀처럼 진득하게 한 작품만 파는 편이 아니라, 볼 때마다 새로워집니다. oren님께서는 그런 면에서 같은 시선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바라보실 수 있기에 oren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oren 2019-10-13 14:30   좋아요 2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오솔길을 선택하고,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물들과 상념들에 따라 콧노래를 부르거나, 또는 힘에 겨워 잠시 땀을 닦으며 바위 위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쉬어 가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독자들마다 무수히 다른 산행 경험과 다리의 감각과 삶의 다양한 기억들을 서로 다르게 지녔을 테니까요.

저는 뜻밖에도 산행을 하는 느낌과는 전혀 다르게, 마치 하나의 미술 작품이나 음악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이렇게도 해석하거나 저렇게도 달리 해석하는 예술가적 취향에서 프루스트를 읽는 재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어차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이 ‘서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작가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전달하고자 애쓰는 ‘작가의 의식‘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이 작품을 읽게 되면서 느끼게 된 안도감은, 10년 전이나 20년 전과는 달리, 생소한 작가나 작품들이나 이야기들이 과거보다 적잖이 줄어들어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 * *
프루스트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고 알아가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소설을 읽을 것인가? 사랑을 담아서 보여 주면 사랑스럽게, 시간과 장소에서 한계를 나타내는 이미지가 되면서도, 프루스트적인 삶의 축복을 준다면 질투에 사로잡혀 읽게 된다.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 읽기』 중에서

2019-10-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3 15: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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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22: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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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22: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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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3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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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4 0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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