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함이 합법적으로 되고, 관청의 허가를 얻어서 도덕의 망토를 입는 꼴보다 더 괴악한 사태를 상상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이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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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사안을 두고 정반대의 해석이나 판단을 내리는 일은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움직임을 보고도 오랫동안 정반대의 해석을 내렸다. 갈릴레오는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사실을 확신했지만 교황청이 엄금하는 지동설을 대놓고 함부로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먼저 『시금저울』이라는 책을 써서 교황에게 헌정했다. 기존의 천문학자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담아서 '잘못된 우주관'을 깨트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갈릴레오의 탁월한 글솜씨에 감탄했고, 자신감을 얻은 갈릴레오는 직접 로마 교황청을 방문하여 '지동설 이론에 대한 금지'를 풀어 달라고 간청했다. 교황은 그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천동설과 지동설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책을 써도 좋다고 윤허했다. 그러나 지구가 자전이나 공전을 한다는 게 사실인 것처럼 보여서는 절대 안 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책이 『대화』였다. 책이 출판되자 독자들의 반응은 격렬하게 찬반으로 갈렸다. 숱한 적대자들이 그 책이 담고 있는 주장에 경악했고, 신앙심이 깊은 천문학자는 『대화』를 비판하는 책을 따로 저술할 정도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마저 그 책을 읽고 격노했다.
교황이 특히 격노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황이 평소에 누누이 강조했던 말이 그 책 속의 등장 인물의 입을 통해 버젓이 발설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교황은 『대화』속에서 '천동설'을 믿는 어리석은 인물을 대표하고 있었던 셈이다. 문제가 된 표현은 이랬다.
"누구든 자신의 이상한 상상을 갖고 신의 전지전능하심을 제한하려 하는 것은 참람한 짓이다."
교황은 갈릴레오를 로마로 압송해 종교 재판에 회부하도록 명령했고, 종교 재판소는 갈릴레오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으며, 갈릴레오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서 기나긴 참회 성사를 읽어 내려갔다. 1633년의 일이었다.
갈릴레오가 쓴 『대화』에는 꽤나 복잡한 수학 공식도 여럿 담겨 있지만 요즘 사람들이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대화들도 많다. 그런 대화들 가운데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목들은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이유와 그런 편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까닭을 밝히는 대목들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화들이 그렇다.
살비아티
내가 오랜 시간 관찰해 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앞뒤가 뒤바뀌게 추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먼저 마음속으로 어떤 결론을 내려.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고, 또는 그들이 전적으로 믿는 사람의 결론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어. 그 결론을 뼛속 깊이 새겨 놓아서, 도저히 제거할 수 없어.
그들이 내린 결론을 지지하는 논리는, 어떤 것이든 무조건 손뼉 치고 환영을 하지. 그들이 스스로 발견했든 남이 제기했든, 아무리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논리라도 말일세. 반면에 그들의 결론에 어긋나는 것이면, 아무리 정교하고 확실한 것일지라도, 경멸을 하고 화를 벌컥 내. 덤벼들지 않으면 다행이지. 어떤 사람들은 화가 나서 제정신을 잃어버리고, 상대방을 억눌러 침묵을 강요하려고 음모를 꾸미기를 서슴지 않아. 나는 이미 여러 번 당했네.
사그레도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런 사람들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거나, 추론을 통해 결론을 확립하는 게 아니고, 이미 확고하게 내려놓은 결론에다 전제와 추론을 꿰어 맞추고 있어. 그러니 전제와 추론이 뒤틀리게 될 수밖에 없어.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 봐야 득이 될 게 없네.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 불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위태롭게 될 수도 있어.(430∼431쪽)
- 갈릴레오 갈릴레이, 『대화』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 판단을 하게 마련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존재이다. 기울어진 어느 한 쪽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나중에야 판명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까닭이 꼭 진영 논리 때문만은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이라는 책에서 아주 중요한 통찰을 하나 얻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구별의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간파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어쨌든 도저히 나눌 수 없는 단계까지도 기어이 나누고 쪼개고 분할해 보려는 강렬한 본성을 지녔다는 말이다. 이 욕망이 얼마나 지독한지는 다른 책에서도 거듭 지적되었다. '지속'의 개념을 주창한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 단위인 1초와 2초 사이의 무한한 간극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일 초의 공간
일 초의 공간 속에서 적색 빛ㅡ가장 긴 파장을 가지며 따라서 파동vibration의 빈도가 가장 적은 빛ㅡ은 400조(兆)의 잇따르는 파동들을 완성한다. 이 수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자 하는가? 우리 의식이 그것을 세기 위해서는 또는 적어도 그것들의 순차성succession을 명시적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그 파동들을 서로간에 충분히 벌려 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잇따름이 며칠, 몇 달 또는 몇 년을 점유하는지를 탐구할 것이다. 그런데 엑스너Exner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은 천분의 이(2/1,000) 초와 동등하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짧은 여러 간격들을 연이어 지각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우리가 무한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인정해 보자. 한마디로 아주 순간적인 400조의 파동들의 행렬을 목격하는 어떤 의식을 상상해 보자. 이 파동들은 단지 그것들을 구별하기 위해 필요한 2/1,000초에 의해서만 서로 분리된다. 단순 계산으로도 이 작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2만 5000년이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일초 동안 우리에게 체험된 이 적색 빛의 감각이 우리 지속 속에서 가능한 가장 경제적인 시간으로 펼쳐진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우리 역사의 250세기 이상을 점유할 현상들의 잇따름에 상응한다. 그것이 생각할 수 있는 일인가? 여기서 우리의 고유한 지속과 시간 일반을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 의식이 지각하는 지속, 우리의 지속 속에 주어진 한 간격은 제한된 수의 의식적 현상들만을 포함할 수 있다. 이 [지속의] 내용이 증가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가 무한히 가분적인 시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지속인가? (343∼349쪽)
- 앙리 베르그송, 『물질과 기억』, <제4장 이미지들의 한정과 고정에 관하여>
앙리 베르그송은 말한다. 채워지지 않을 구별의 욕망에 뒤틀려 의식은 실재를 상징으로 대체시키거나 또는 상징을 통해서만 실재를 본다고. 또한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통찰했다.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
우리가 어떤 문제들에 대해 한쪽 편을 들 때 가지는 무반성적 열정은, 우리의 지성도 자신의 본능을 가진다는 것을 족히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관념들에 공통되는 충동, 즉 그들의 상호 침투에 의해서라 아니라면, 어떻게 그러한 본능을 표상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갖는 의견은 표현하기가 가장 어려운 의견이며, 우리가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이유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 의견을 취하도록 결정케 한 이유일 경우는 드물다.127)
127) 우리가 어떤 의견을 취하게 된 진정한 이유는, 애착을 가진 것일수록 더욱더 우리 자아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그만큼 더 객관화하기 어렵고, 따라서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내부로 들어가면 갈수록 사물들은 엉켜서 불가분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로 표현하는 이유들은 대부분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간혹 <정곡을 찌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이유와 일치할 경우가 드물다.(171쪽)
- 앙리 베르그송,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
서서히 종점으로 다가가는 듯하지만 언제쯤 마무리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해 보이는 <조국 사태>는 시나브로 클라이막스를 저만치 앞두고 이런 저런 사소한 변주들을 울리는 단계로 접어든 듯한 느낌마저 받는다. 이런 국면에서도 거듭 깨달은 게 있다면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아주 쉽게 극명하게 엇갈릴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매일 쏟아지는 새로운 뉴스들에 대한 극단적으로 상반된 사람들의 반응들이 그런 증거들이다.
그런데, 이번의 <조국 사태>가 3년 전의 <최순실 사태>와 뚜렷이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사태의 핵심 당사자들이 갖고 있는 모종의 특별한 지위가 아닐까 싶다. <최순실 사태> 때에는 핵심 당사자들이 거의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조국 사태>의 핵심 당사자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그들을 보호해 주는 강력한 우군들이 아주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집권 여당이 진실 규명을 위해 범죄 피의자들을 열심히 불러 수사하는 검찰을 향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집권 여당이 사태의 핵심 당사자를 대신해서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을 도리어 고발하고, 정권에 우호적인 진보단체의 간부가 '문제가 심각하다'고 내부 고발을 해도 도리어 같은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는 모습들이 대표적이다. 물론 한 마디쯤 거들어도 수긍할 만한 인사들이 여태껏 꾹꾹 눌러참으며 호위무사 대열에 결단코 가담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대놓고 정권의 나팔수를 자임하며 온갖 억지와 궤변을 동원하여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려 애쓰는 아첨꾼들의 노력만큼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된다. 그들에게도 언젠가는 반대 진영을 향해 '묘한 진실'이 담긴 말을 자기도 모르게 크게 외치는 순간이 올 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호위무사를 자처하던 어느 의원이 반대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마침내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외친 다음 말처럼.
"내가 조국이야?"
누구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의견을 가질 수는 있다. 나에게 동조하는 숫자가 적다고 해서 그게 꼭 틀린 의견도 아니고, 반대로 그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게 꼭 옳은 의견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의견이 부디 '부정의를 정의로 간주하는 최악의 행위'를 편드는 쪽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누구에게나 똑같다고 믿는다. <조국 사태>는 아무리 생각해 보더라도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 진영 싸움은 아니지 싶다. 싸움에 너무 매몰되어 부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만큼은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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