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좋은 사람들이 동감하고 모든 좋은 사람들이 말하네.
좋은 사람들은 다 우리(we)이고 나머지는 다 그들(they)이라고.

- 러디어드 키플링, 『가족의 친구(A frend of the Family)』

 

 * * *

 

두 달째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는 '조국 사태'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게 정말 많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여지는 뉴스 하나를 두고도 사람들마다 어쩌면 그토록 다양한 생각들을 품을 수 있는지, 그런 관점의 차이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울 지경이다.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서로 극단적으로 상반되는 견해를 표출하는 현상들을 보노라면 사람들마다 태어날 때부터 깊이 각인된 '고유의 인쇄 회로'를 갖춘 게 틀림없어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어떤 자극이나 정보가 입력되면 그 회로를 따라 생각들을 굴린 끝에 각자에게 가장 흡족한 결과물을 자동으로 생성해 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어쩌면 이건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사실일지도 모른다.

 

『빈 서판』이라는 책을 쓴 스티븐 핑커에 따르면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게 결코 아니며, 태어나서 자라는 매 순간마다 미리 정해진 '본성'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게끔 만들어진 존재이다. 진화심리학이나 인지과학 등이 발달한 덕분에 오늘날 '마음의 작동 원리'를 이만큼이나마 과학적으로 밝혀 냈지만,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실로 다양한 견해들이 뒤죽박죽으로 혼재해 왔었다.

 

널리 알려져 있다 시피 '흰 종이'와도 같은 인간의 마음이 오로지 '경험으로부터' 채워진다고 주장한 철학자는 영국의 존 로크였다. 그가 『인간 오성론』에서 주장한 개념이 바로 타블라 라사(빈 서판)였다. 그의 경험론은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자유 민주주의의 토대를 확립하는 데 유용한 정치 철학으로 활용된다.

 

로크의 경험론은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초로도 작용했다. 토머스 홉스가 흔히 자연 상태의 인간은 서로를 증오하고 파괴하는 비합리적 충동에 사로잡힌 야만인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영향을 받아, 루소는 소위 '고상한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욕심이 없고 평화로우며, 탐욕, 근심, 폭력과 같은 병폐는 문명의 산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로크와 루소, 베이컨과 데카르트 등을 거치면서 경험적 합리주의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던 시간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어느새 찰스 다윈이 등장하여 인류의 개념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인류는 알고 보면 결국 긴꼬리원숭이에서 진화한 포유류의 일종일 뿐이었고,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온갖 다양한 성격들도 결국은 '무리 본능'과 같은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이 밝혀졌다.

 

무리 본능이 우리들의 생각과 행동을 얼마만큼 강력하게 제어하는지는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다. 우리 스스로 그 끈질긴 본능을 매번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느낌은 언제나 편안하다. 정반대로, '그들'이라는 느낌은 언제나 불편하다. 여기에 무슨 부연 설명이 필요할까.

 

그런데 '우리와 그들'로 편가르기를 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너무나 많다는 게 문제다. 인간 부류는 무한히 쪼개질 수 있다. 한 가지 부류만 놓고 봐도 그 속에서 또다른 하위 범주를 찾을 수 있고 그 하위범주들 속에서 또다시 새로운 하위 범주들을 찾을 수 있다. 인종, 국가, 종교, 언어가 모두 똑같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또다시 세분하는가. 출신지역, 출신학교, 직업, 거주지, 경제력뿐만 아니라 눈으로 살필 수조차 없는 이념까지도 범주로 작용한다.

 

어떤 인간 부류는 인간이 아닌 것까지도 포함한다. 예컨대 당신의 가족이라는 부류에는 머나먼 타지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개나 고양이가 포함될 수도 있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우리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한 마리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굳이 나무랄 필요는 없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부적절한' 부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이기까지 한다. 9.11 사태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다. 한때의 미국인들은 전세계 곳곳에 사는 아무런 죄 없는 선량한 아랍인들 대부분을 테러리스트로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자세히 알고 보면 '우리'라는 개념이 단지 마음이 만드는 산물일 뿐이며,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선이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옮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늘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일하는 사회에서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공유하는 인간 부류의 상징을 다루는 일이다. 같은 출신 대학, 같은 영화 취향, 당신이 사는 곳에 내가 살았다는 사실 등 어떤 공통점이라도 좋다. 당신을 배제하는 어떤 선 긋기(“서부 영화를 좋아하세요? 나는 못 보겠던데”)도 고난을 예견하는 작은 먹구름이다. ‘우리’를 느끼는 인간의 능력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에 속한다는 감정적 안정은 쉽게 얻어지는 만큼 쉽게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이 단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음을 여행자라면 알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의 감정은 경종을 울린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개인이 어느 한 부류로 규정되지 않고 처한 상황과 마음에 따라 수시로 쉽게 합치고 갈라서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상할 게 조금도 없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의 광팬들이 경기장에서 격렬하게 고함을 지르고 상대편을 욕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 우연히 상대팀의 유니폼을 입은 '대학 동기'와 마주친다면 금방이라도 웃고 떠들며 학창 시절의 옛 이야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게 사람 사는 방식이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마음 속의 분류 기준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우리'라는 느낌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상태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들'을 만들어 내고 구분짓기 위해 애쓴다. 인간의 마음 속에 면면히 흐르는 '무리 본능'이 그걸 자극하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의 원시 부족들에겐 우리 마을을 벗어난 다른 마을 종족들은 오로지 '적'일 뿐이었다.

 

먹는 것과 못 먹는 것

······ 사람들의 도덕적 범위에는 모든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친족, 마을, 부족의 구성원들만 포함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 모순을 이해할 수 있다. 그 범위 안에 포함된 사람들은 공감의 대상이고, 범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돌이나 강이나 음식물처럼 취급된다. 이전의 한 책에서 나는 아마존에 사는 와리 부족의 언어에는 먹는 것과 못 먹는 것을 구별하는 일련의 명사 분류사가 있는데, 그 부족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은 누구나 먹는 것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언급한 적이 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은 이토록 다양한 범주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어떨 땐 나의 일상과는 별로 상관없는 일에서조차 '그들'이 '우리'를 흥분시킨다. 이번 <조국 사태>가 그랬다. 어떤 사람들은 조국 후보자에게 쏟아진 수많은 의혹들에 대해 맹렬하게 분노했지만, 또다른 사람들은 후보자 가족과 그 주변인물들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과 검찰의 수사에 대해 도리어 거센 비난을 쏟아붓는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선'이 이토록 극명하게 어긋나는 경우도 보기 드물다.

 

이번 사태에서 '진영 논리'를 가장 크게 자극한 인물들은 뜻밖에도 <조국 편> 사람들이었다. 논란의 최선봉에 선 사람은 유시민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침묵을 굳게 지키던 그는 조국 후보자에 대한 의혹이 급속도로 확산될 무렵 마침내 거의 맨 처음으로 총대를 매고 나섰다. 조국에 대해 의혹만 갖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향해 '다 헛소리'라고 일축하고 나선 것이다. 경희대의 모 교수는 ‘조국을 먹잇감으로 넘기겠다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지 이제 적’이라 주장했고, 안도현 시인은 ‘조국을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승냥이들이 더 안쓰럽다’며 '무리 본능'을 한껏 자극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 유명 인사들의 '조국 옹호론'을 여기에 일일이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이쯤되면 충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만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인물들이 끝끝내 침묵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지, 집권여당에 속한 어떤 의원이 '오버하지 말라'는 식으로 아군을 향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가 얼마만큼 호되게 곤욕을 치렀는지도 자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번 사태의 주인공을 옹호하는 논리가 거의 대부분 '진영 논리'에만 기댄 억지와 궤변으로 점철된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공격하는 쪽에서도 '진영 논리'로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홍준표가 대표적이다. 거칠기 짝이 없는 그의 말 속에 늘상 빠지지 않는 핵심 단어가 하나 있다면 그게 바로 '그들' 혹은 '니들'이었다.

 

총성 없는 전쟁이나 다름없는 '정치적 투쟁'에서 '진영 논리'가 배제될 수는 없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선명한 이분법만큼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쉬운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진영 논리에만 기댄 억지스러운 주장들을 마냥 옹호하고 권장할 수는 없다. 진영 논리가 횡행할 수록 진실은 호도되고, 감정적인 대립과 거친 충돌만 자극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번 조국 사태가 극한으로 치달은 과정도 아주(!) 넓게 보자면 결국 '우리 사회'를 보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로 만들자는 데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런 암묵적 합의가 전제된 긍정적 갈등이라면 얼마든지 더 세게 충돌하고 부딪쳐도 좋다. 그러나 과연 이토록 너그러운 시선으로 이번 사태를 바라볼 여지가 얼마쯤이나 있을까. 오로지 '니들은 그르고 우리가 옳다'는 식의 원시적인 진영 논리만 앞세운 야만스러운 갈등만으로 가득찼던 게 사실이니 말이다.

 

진영 논리에 기댄 무비판적인 억지와 궤변은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이번 사태의 본질은 결국 <정의, 평등, 공정>의 가치가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그 어떤 정부보다도 절박하게 <정의, 평등, 공정>의 가치를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워온 대통령과 핵심 실세의 합작으로 이뤄졌다는 게 진짜 문제다. 촛불로 탄생된 정권이 촛불 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 사태를 '진영 논리'를 배제한 채 순수하고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2016년 겨울에 광화문을 그토록 뜨겁게 달궜던 '촛불'은 단지 부당한 권력자를 향한 분노의 표출 수단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서 올바르게 행사되어야 마땅할 권력이 권력자의 입맛대로 행사되는 데 대한 분노를 넘어서서, 그 촛불은 우리 모두에게 좀 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갈등과 분열을 넘어 다 함께 '정의로운 나라'에서 더 멋지게 어울려 살 수 있다는 공감을 느꼈다. 그토록 연약한 촛불이 한겨울의 추위마저 녹여낼 듯한 뜨거운 온기로 느껴진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 우리 모두 함께 한다는 느낌이 가져다주는 '삶의 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삶의 온기

 

이처럼 내용 없는 '우리라는 느낌(we-feeling)'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 수단의 소설가 타옙 살리(Tayeb Salih)는 7년 만에 고향 마을로 돌아와 그러한 감정에 사로잡힌 한 남자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치 내 안에서 한 덩이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기분, 마치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 있는 꽁꽁 언 물체가 된 기분이었다." 자신이 되찾은 것은 "부족이 주는 삶의 온기"라고 남자는 말한다.

 

삶의 온기, 우리라는 느낌은 음식이나 거리의 소음, 어린 시절 창 밖으로 보이던 불빛들이 주는 친숙함과 쉽게 결부된다. 그러나 냄새와 광경은 느낌의 '표현'일 뿐,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에 관한 것이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느낌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당신이 아는 것이 적절하며, 따라서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고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하며 당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 부류 속에 있다는 느낌이며, 버지니아 울프의 묘사에 따르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고, 함께한다는 편안한 느낌이며, 친밀함과 온전함과 신속한 상호협력을 지향하는 공통 가치를 느끼는 것"이다.

 

 - 데이비드 베레비,『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조국 사태>는 아직까지도 그 결말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디론가 계속 굴러가고 있다. 우리가 조국 사태를 통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들은 비단 '진영 논리'에만 갇힌 채 온갖 억지와 궤변으로 무조건적인 지지와 옹호만을 부르짖는 사람들 때문에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도리어 조국 후보자의 '언행 불일치'와 '공감 능력 부재'에 분노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청문회때 자신의 제자였던 여당 국회의원으로부터 핀잔에 가까운 질책까지 받았다. "후보자의 언행 불일치에 대한 젊은이들의 정당한 분노에 동문서답식 답변을 해서 그들의 상처를 깊게 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은 것이다. 그 제자는 과거 조 후보자의 SNS 발언을 지적하며 "우리 편을 대할 때와 다른 편을 대할 때 기준이 다르면 편 가르기다. 법무부 장관으로 큰 흠"이라고도 말했고, "후보자의 단점은 공감 능력이 없다는 점"이라면서 인격 모독에 가까운 지적까지도 불사했다. 그만큼 품성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본 것이다. 그가 자신을 향해 철벽을 두른 듯한 모습을 바라 보노라면 그는 마치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처럼 비쳐진다.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

 

자기 자신을 조절하는 일도 그러한 예다. 어른과 어린아이의 감정의 차이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른들은 진지하고 비극적인 경험에 울지만 어린아이들은 놀이터를 떠나야 할 때도 운다. 어른들은 우스운 것을 보고 웃지만 어린아이들은 멍청한 행동이나 난처한 상황을 보고도 키득거린다. 아이들도 태어난 첫날부터 슬픔과 기쁨을 느낄 줄은 알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에 '대해' 슬퍼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쓰러져 통곡하는 행동이 국가적 참사에는 어울려도 초콜릿 바를 갖지 못했을 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배워야 한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기분에 맞추는 법을 배운다. 이는 '우리 부류'가 따르는 규칙을 배운다는 의미다. 그런 규칙을 익히지 못한 아이는 어떤 감정이 적절한지 알려주는 지침 없이 강렬한 감정들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자기 자신이라는 작은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갈 것이다.(258쪽)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중에서

 

 

나는 이번 조국 사태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명장면이 하나 있다면 그게 바로 조국 제자의 가차없는 스승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제자야말로 '진영 논리'를 훌쩍 뛰어넘어 주권자인 국민이 진정으로 바라마지 않는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에게 허물이 있다면 사제지간의 인연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중시한 것뿐이다. 그토록 바람직스러운 의원을 비판한 사람들이 내세울 수 있는 근거가 '진영 논리' 혹은 '무리 본능' 말고 또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 '그들'을 구분짓는 예민한 본능을 몸 속에 지니고 타고났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그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이타적인 도덕감정 또한 오래도록 진화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인간에게 <정의, 평등, 공정>과 같은 도덕감정이 발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무리 본능에 의지한 채 살벌하게 상대방을 공격하고 물어뜯기 바쁠 지 모를 테니 말이다.

 

다윈주의는 일찌감치 인간 부류의 수수께끼를 다루었다. 자연선택의 원리에 따르면,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만이 자손을 갖고 그들의 특성을 전파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다윈에게는 생물들이 때때로 남을 위해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킨다는 사실도 분명해 보였다. 꿀벌이 적에게 침을 쏘면, 벌집을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침을 쏜 자신은 죽는다. 다가오는 고양이를 조심하라고 경계음을 내는 새는 다른 새들에게 도움이 되지만 정작 자신은 고양이의 주의를 끌게 된다. 남을 돕는 방식으로 자신의 적응도를 감소시키는 이런 행동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타주의다. 실제로 도덕적 코드들의 거의 대부분이 다윈의 표현대로, 적응도를 극대화하려는 충동의 억제와 관련된다. 도덕적 행동은 공정성, 친절, 타인의 권리를 위해 개인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다. 다윈은 자연선택의 법칙이 개체뿐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작용한다고 추론했다.

 

 - 데이비드 베레비,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중에서

 

 

새로운 법무장관 후보자가 지명된 이래로 지금까지 진행된 격렬한 찬반 논쟁이 상당 부분 <진영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법무장관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불의와 불평등과 불공정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마땅하며, 그런 자리에 합당한 인물일수록 '진영 논리'에서도 가장 멀치감치 떨어져 있어야 마땅할 터인데, 그런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이 바로 법무장관이니 이런 기묘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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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19-09-12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정의, 공정,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를 바랍니다~^^

oren 2019-09-14 15:09   좋아요 0 | URL
아무쪼록 이번 사태가 보다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사줘 2019-10-04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당한 논리네요

oren 2019-10-04 20:31   좋아요 0 | URL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