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부끄럽지도 않소? 아르고스인들이여, 풋내기들이여! 그래도
나는 그대들이 분전하여 우리 함선들을 구해주리라 믿었소.
만약 그대들이 참혹한 전쟁을 그만두려 한다면 이제야말로
우리가 트로이아인들에게 쓰러질 날이 다가왔소이다.
아아, 나는 이 두 눈으로 큰 기적을 보고 있소이다!
트로이아인들이 우리 함선들을 향해 진격해오다니,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소.
그들은 전에는 날랜 암사슴 떼와도 같았소. 숲 속에서
승냥이나 표범이나 이리 떼의 먹이가 될 뿐 아무런 전의도 없이
공연히 떠돌아다니는 허약한 암사슴 떼 말이오.
꼭 그처럼 트로이아인들은 전에는 감히 아카이오이족의
용기와 팔에 잠시도 맞서려 하지 않았소. 하나 지금
그들은 도시에서 멀리 나와 속이 빈 함선들 옆에서
싸우고 있소. 이는 모두 지도자의 무능과 백성들의 태만 탓인즉,
백성들은 지도자에게 불만을 품고 빨리 달리는 함선들을
지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옆에서 죽어가고 있소.
설사 넓은 땅을 통치하는 아트레우스의 아들 영웅
아가멤논이 준족인 펠레우스의 아들을 모욕하여
이 모든 불행을 초래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전쟁을 그만두어서는 아니 되오. 자, 어서
바로잡읍시다! 고상한 자의 마음은 바로잡을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대들은 모두 진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들이거늘 그대들이
열화 같은 투지를 늦춘다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오.
나는 약골이기에 전쟁을 포기하려는 그런 사람과는 다투고 싶지도
않소이다. 하나 그대들에게는 진심으로 화내지 않을 수 없소.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이 태만으로 머지않아 더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이오. 그러니 각자 마음속에 수치심과 의분을
느끼도록 하시오! 진실로 큰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이오.
목청 좋은 강력한 헥토르는 함선들 옆에서 싸우고 있고,
그는 이미 문과 긴 가로장을 부숴버렸소."
-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13권 95행 - 124행
(나의 생각)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찬찬히 다시 읽는 동안에, 이 방대한 서사시에 담긴 온갖 다양한 이야기들 속에서 오늘날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할 만한 교훈들이 너무나 많이 담겨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위에서 짧게 인용한 대목만 하더라도 그렇다. 여기서 아르고스인들(그리스인들)을 격려하는 인물은 '대지를 떠받치는 신'으로 불리는 포세이돈이다. 그는 (아킬레우스가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동안에) 트로이아 군대가 용기백배하여 그리스인들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함대 근처까지 쳐들어와 그리스 군대를 마구 도륙하는 상황을 보다 못해 기어이 전쟁에 개입하고 있다. 수세에 몰린 그리스 군대를 격려하기 위해. 이때 포세이돈이 물 흐르듯 거침없이 내뱉는 말들이 그저 까마득한 옛날에 있었던 한낱 신화 속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포세이돈의 연설 속에서 '북한 비핵화 문제 해결'과 '제재 완화'를 둘러싸고 동맹국 사이에 불거진 심각한 입장 차이뿐만 아니라, 새로운 장관 후보들의 자질 검증을 위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인물들이 저지른 온갖 편법들이나 청와대 대변인의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뻔뻔스러운 '부동산 투기에 대한 변'을 떠올리는 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포세이돈의 입에서 흘러나온 저 말들이 어쩌면 이토록 오늘날의 상황에 적확하게 들어맞는지 그게 놀라울 뿐이다.
부끄럽지도 않소?지도자의 무능
머지않아 더 큰 재앙
수치심과 의분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읽을 때마다 이 작품에 바친 숱한 인물들의 놀라운 찬사를 다시금 음미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들은 주로 몽테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다. 호메로스에 대해 그가 남긴 다음 문장들은 인류 최고의 시인에게 바친 몽테뉴의 엄청난 헌사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기와 행동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유일한 실질적인 언어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다리우스 왕의 전리품 가운데에 호화롭게 장식된 한 상자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호메로스를 넣어 두는 데에 사용하라고 명령하며, 이 시인은 자기 군사 업무에 가장 훌륭하고 충실한 고문이라고 말하였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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