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아니면 읽고 읽고 또 읽든가요."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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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들은 단번에 사람을 매료시킨다. 처음부터 주인공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그려지고, 목소리나 말투마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그런 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그린 1984년의 세계가 너무나 숨이 막힐 듯하고 암울하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의 생김새나 목소리를 상상할 여유조차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이 소설은 몹시 재미있다. 그러면서도 충격적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소설로부터 받은 둔중한 충격'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을 정도다. 도대체 오웰은 어떻게 해서 이토록 암울한 미래를 그토록 잘 그려낼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자 말자 다시금 소설의 맨 처음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이 소설은 단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그저 '소설의 껍데기'만 읽은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으니까.

 

이 소설을 다시 읽어야 할 이유는 사실 그런 느낌 말고도 여럿 더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오브라이언에 대해 찬찬히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가 작품의 초반부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윈스턴에게 다가왔는지, 그가 왜 작품의 후반부로 갈수록 진짜 주인공처럼 부각되는지, 그가 왜 반체제 영웅이었던 골드스타인이 쓴 이념 서적인 《과두적 집단주의의 이론과 실제》의 실질적인 저자였음을 윈스턴에게 고백하는지 등등이 단번에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을 처음부터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나서야 '윈스턴과 오브라이언의 관계'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또한 오브라이언이 어떤 존재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어쨌든 소설 『1984』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오브라이언이었다. 그 이유는 그가 소설의 말미에서 윈스턴으로 하여금 결국 무의식 중에라도 '2 + 2 = 5' 라는 황당한 산식을 테이블 위에 쓰게 만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윈스턴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을 때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고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사상범으로 체포된 윈스턴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쏟아내는 수많은 질문과 대답들이 본질적이고도 궁극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개인이 그가 속한 체제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당의 정당성에 반항하는 개인이 궁극적으로 처한 운명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 것인지, 더 나아가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오브라이언만큼 명쾌한 이론을 갖춘 인물도 드물다. 그런 까닭에 윈스턴은 그토록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틈틈이 오브라이언에게 도리어 존경심마저 품게 된다.

 

 

(조지 오웰, 출처 : 위키피디아)

 

 

(조지 오웰이 상상한 1984년의 세계, 3대 초국가가 세계를 분할 지배하는 형국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책의 말미에 적은 메모. 이상하게도 처음 읽을 때보다 두 번째로 읽을 때 메모한 내용들이 훨씬 많았다.)

 

체포된 윈스턴을 심문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오브라이언과 윈스턴이 주고 받는 '고문실의 대화'는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감동적이다. 일부 비평가들이 이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두고 심지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대화처럼 감동적'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리뷰에 담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몇몇 인상적인 대목들을 뒤늦게나마 여기에 덧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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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는 순교가 없다는 점이네

"자네가 첫 번째로 알아두어야 할 건 이곳에서는 순교가 없다는 점이네. 자네는 과거의 종교 박해 사건에 관해 읽어봤을 걸세. 자네도 알다시피 중세에는 종교재판이 있었네. 그런데 그건 실패작이지. 이단자를 뿌리 뽑기 위해 시작된 그 종교재판은 오히려 이단을 영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네. 모든 이단자들에 대한 본보기로 이단자 한 사람을 화형에 처할 때마다 다른 수천 명이 들고 일어났는데, 왜 그랬겠는가? 그것은 종교재판이 그들의 적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회개를 받아내지 못한 채 죽였기 때문일세. 사실은 회개하지 않는다고 죽였던 거지.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진실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걸세. 따라서 모든 영광은 그 희생자들에게 돌아갔고, 그들에게 화형을 선고한 재판관에게는 비난만 퍼부어졌지. 그 후 20세기에 이르러 소위 전체주의자라는 게 나타났네.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이지. 소련은 종교재판 때보다 더 참혹하게 이단자들을 처형했네. 그들은 과거의 실책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순교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네. 그들은 그 희생자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기 전에 용의주도하게 그들의 위엄을 완전히 제거해 놨지. 그 희생자들은 고문과 감금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야비하게 굽실거리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했네. 그들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무엇이든 다 털어놓고, 자기들끼리 서로 욕하고 고자질하며 자기만 살기 위해 살려달라고 애원했지. 그런데 이번에도 몇 년이 지나자 그와 똑같은 결과가 나타난 걸세. 죽은 자들은 순교자가 됐고, 그들에 대한 경멸도 잊혀져 버렸네.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나? 첫째로 그들의 자백이 강제에 의한 것이었고,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일세. 우리는 그런 식의 실수는 저지르지 않네. 여기서 얻은 자백은 모두 진실이네. 우리가 진실로 만드는 거지. 무엇보다 우리는 죽은 자들이 다시 우리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네. 윈스턴, 자네는 후손들이 자네를 옹호해 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후손들은 자네에 대한 얘기를 전혀 들을 수 없을 걸세. 자네는 역사의 흐름에서 깨끗이 지워져 버린다네. 공기로 변해 먼 하늘로 사라져버리는 거지. 자네에 대해서 남는 건 아무것도 없네. 기록된 자네의 이름도 없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기억 속에도 자네는 없네. 자네는 미래에서처럼 과거 속에서도 완전히 소멸될 걸세. 결국 자네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네."(353∼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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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윈스턴, 자네는 견본에 난 흠과 같군. 한마디로 씻어버려야 할 오점이지. 우리는 과거의 처형자들과 다르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나? 우리는 소극적인 복종이나 비굴한 굴복으로는 만족 못하네. 자네가 우리한테 항복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자네의 자유 의지에 의해서여야만 하네. 이단자들이 우리한테 반항한다고 해서 그들을 처형하는 게 아닐세. 우리는 그들을 전향시켜 속마음을 장악함으로써 새사람으로 만든다네. 그들이 지닌 모든 악과 환상을 불태워버리고, 외양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영혼까지 우리 편으로 만드는 거지. 그들을 죽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만든단 말일세. 비록 알려지지도 않고 그 영향력 또한 없다 하더라도 그릇된 사상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니까. 죽는 순간까지 우리는 그 어떤 탈선도 용납하지 않네. 옛날에는 이단자들이 여전히 이단자인 채 스스로 이단자임을 자처하며 화형장으로 끌려감으로써 모종의 희열을 느끼기도 했지. 소련에서 숙청당한 희생자들도 사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머릿속에 반항 의식을 갖고 있었네. 그런데 우리는 처치하기 전에 두뇌를 완전히 개조시키지.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었고,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식이네. 우리가 여기에 끌고 온 사람치고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없었네. 모두 완전히 세뇌되었지. ……"(355∼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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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을 상상해 보게.

 

"윈스턴,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자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겠나?"

 

윈스턴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 있을 겁니다."

 

"맞았네. 권력은 타인을 괴롭힘으로써 행사할 수가 있지. 복종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괴롭히지 않고, 어떻게 권력자의 의사에 복종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있겠는가? 권력은 고통과 모욕을 주는 가운데 존재하는 걸세. 그리고 권력은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서 권력자가 원하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뜯어 맞추는 거라네. 자네는 우리가 어떤 세계를 창조하려는지 이제 좀 알 것 같나? 이건 옛날의 개혁자들이 상상했던 어리석은 쾌락주의적 유토피아와는 정반대의 것이네. 공포와 반역과 고뇌의 세계이지. 짓밟고 짓밟히는 세계이며, 세련될수록 더욱더 무자비해지는 세계이네. 우리가 만드는 세계에서의 진전이란 고통을 향한 진전일 뿐이네. 옛날의 문명들은 사랑과 정의 위에 세워졌다고들 주장했었지. 우리의 문명은 증오 위에 세워져 있네. 우리의 세계에서는 공포, 분노, 승리감, 자기 비하 등의 감정을 빼놓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네. 그 나머지는 우리가 몽땅 때려 부술 걸세. 우리는 이미 혁명 전부터 내려오던 사고의 습관을 부수고 있지. 우리는 부모와 자식, 인간과 인간, 남자와 여자간의 유대를 끊어버렸네. …… 충성심도 당에 대한 것 이외에는 모두 없애버릴 걸세. 사랑도 빅 브라더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네. 웃음도 적을 패배시키고 승리감에 취해 웃는 웃음만 있게 될 것이고, 미술, 문학, 과학도 없어질 걸세.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함의 구별도 없어지고, 호기심이라든가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즐거움 따위도 없어질 것이네. 한마디로 말해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은 파괴되어 버리는 거지. 그런데 이걸 잊지 말게, 윈스턴. 언제나 끊임없이 커가고 끊임없이 미묘해지는 권력에 대한 도취감만 맛보게 되리라는 점을 말일세. 언제나 어느 순간에나 승리감이 주는 전율과 무력한 적을 짓밟는 쾌감을 얻게 될 것이네. 만약 미래의 모습이 보고 싶으면, 인간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구둣발을 상상해 보게."(373∼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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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과거는 바꿀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는 절대로 바뀐 적이 없다. …… 윈스턴은 그들의 죄를 부인할 수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은 있지도 않은, 그 자신이 꾸며낸 것이다. 그는 상반되는 일을 기억하고 있다고 기억했지만 그런 것은 모두 틀린 기억이고 자기기만의 산물이었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쉬운가! 항복만 하라. 그러면 모든 일은 저절로 해결된다. 이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뒤로만 밀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것과도 같다. 오직 자신의 자세만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어떤 경우에든 예정된 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는 왜 자신이 지금까지 반항해 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쉽다. 다만…….(388∼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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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에 따르면, 1989년 집계 당시 《1984년》은 65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사 당시 다른 어떤 영국 소설 보다 많은 숫자이다. 국내에서도 아주 다양한 판본들이 나와 있는 건 결코 이상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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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6-0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님 페이퍼에서˝ 이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뒤로만 밀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물결을 따라서 헤엄치는 것과도 같다.˝ 라는 구절을 읽으니, 화이트헤드가 물리적 현상은 끊임없이 확산되어 가지만, 생명력은 거슬러 올라간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대강의 내용은 위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만... <1984> 속의 문장을 통해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8-06-07 09:21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저 대목을 읽고 화이트헤드의 말들을 떠올리셨군요. 저는 엉뚱하게도 쇼펜하우어가 남긴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사람만이 물결의 세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을 떠올렸는데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