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되게 아끼는 척 하지만, 분실도 자주 한다.
분실의 99%는 빌려 주었다가 소실되는 경우지만 이는 다시 몇가지의 소분류로 나눌수 있겠다.

(1) 누구에게, 언제 빌려주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 
(전혀 남이 빌려갈 법하지 않은 책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다. 불가사의할 뿐이다. 10권짜리 책에서 4권, 6권만 없어지는 경우는 대체 뭔가.)

(2) 빌려준 사람과 연락이 끊겨버린 경우
(친구의 여자친구가 빌려갔는데 둘의 사이가 잘 안된다든지.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까지 책을 빌려주는 나의 오지랖을 원망할 밖에)

(3) 빌려준 사람이 책을 잃어 버린 경우
(빌려준 사람이 그 책을 또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경우도 있다. 형의 친구의 형수님에게까지 흘러간 적도 있다. 책을 빌려가 놓고 그런적 없다고 잡아 떼는 놈들도 있다.)


이런 저런 이유든지 잃어버린 책들로 인해 나는 간혹 딜레마에 빠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이거나 시리즈나 전집에서 이가 빠져 버린 경우 그 시름 시름은 깊어만 간다. 확 다시 사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주머니 사정도 문제일 뿐더러 간혹 절판되어 버린 책들은 정말 속수무책인 것이다.
작년에 이사를 하면서 책꽂이를 새로 장만하였다. 그동안 여기 저기 쌓여 있던 책들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고 나니 집나간 자식들 생각에 더욱 마음이 아파진다. 그들의 빈자리가 나를 공허하게 한다. 94년에 샀던 완역 <서유기>(전 6권)는 1, 2, 3권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절판된 책이라서 구할수도 없는 희귀본이 되어 버렸다. (1)의 경우이다. <B급 좌파>와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3)의 사유로 내 곁을 떠나갔다.
(2)의 이유로 인해 잃어버린 셈 치고 있었던, 오랜기간 절판 상태여서 더더욱 마음이 아팠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재발간 되었다. 눈 딱감고 다시 사야겠다. 그나마 다시 나와주어서 다행이다. 으흑흑.

모질어 질지언정 책 대여는 삼가해야 할 일이다. 인생 어디로 갈지 누가 아는가.
내 품을 떠나는 순간 이미 인연은 끝날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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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10-29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책 남에게 안 빌려줍니다. 그냥 주면 모를까요. 그런데 제 책을 만순이가 친구 빌려줬다가 수없이 잃어버렸죠. 지금도 아쉬운 것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거기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빨간책들... 동생이니 뭐라할 수도 없고 참...

하얀마녀 2004-10-29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에 슬램덩크 사 모으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촌 형이 놀러와서는 그 책을 들고 나가더군요. 그러더니 친구 빌려줬다고.... 물론 단 한 권도 못 돌려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슬램덩크 사는 일을 그만 뒀지요. 또 작은 아버지는 집에 오면 꼭 화장실에 만화책을 들고 들어가서 상태 안 좋게 만들어버리고... '몬스터' 지키기 프로젝트에 돌입입니다. ㅜㅜ

oldhand 2004-10-29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저도 이제 웬만하면 안 빌려줄라구요. 저도 애거서 크리스티 빨간책은 한 10여권 소실 된것 같아요. 흑흑. 헌책방에 들를 때 마다 잃어 버린 책들을 헌책으로라도 보충할라고 한답니다.

하얀마녀님/ 저는 <몬스터> 누나에게 빌려 줬다가 책이 우글 우글 해져서 왔어요. T_T
제가 재밌다고 보라고 안겨준거라 뭐라 말도 못하고. T_T

미완성 2004-10-29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권짜리 책이 없어진 건 속상하지만 그래도 선물로 준 거라, 아님 그 책 하나로 가져간 사람 인간만드는 데 일조한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집에 이가 빠지게 생겼다뇨. 이런 통탄할 일이..! 우어, 근데도 oldhand님 글을 보고 '음, 서유기를 읽어볼까?'라고 생각하는 저는 뭔가요 ;;
험험, 지금 슈테판 츠바이크랑 하루키랑 중학교 때부터 모아온 헌책들이 친구집 옷장에서 잠자고 있을텐데..우어우어 담번에 만날 땐 꼭 찾아와야겄습니다.

oldhand 2004-10-29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유기는 올 초에 두군데 출판사에서 10권짜리 완역본이 새로 나왔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하고 번역을 비교해 보니 원본의 소제목이나 총 100화로 이루어 진것 등 거의 흡사한데 조금 늘려서 번역 되었나 봐요. 요즘 나오는 책들의 "글씨 커짐"과 "자간 넓어짐"도 한 몫 했겠지요. 어쨌든.. 새로 몽땅 사기도 뭐하고 해서 그냥 이러고 있습니다.
<서유기> 아주 유머러스하고 재밌어요! *_*

파란여우 2004-10-2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시리즈물 같은거 한 권중간에 이빠지면 열받죠. 더우기 그게 재출간하지 않는 책이라면 두고두고 인간을 미워하는 불상사까지 발생합니다. 아, 정말 책 때문에 인간관계를 흐트려 놓아야 하나...왜 세상엔 나만큼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건지...그러니 빌려 주면 안된다니까요...그냥 주세요..그 기념으로 저에게는 어캐 안될까요? 흐흐(아얏, 그렇다고 꿀밤까지...)^^;;;

oldhand 2004-10-30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꿀밤이라뇨??? 알라디너 여러분들이야 말로 다같이 책을 아끼는 동지들 아닌가요....
책이라는게 어찌 보면 별거 아니고 집착하는것도 부질없는 짓일수도 있는것 같아요...
이래 저래 그런데로 한세상 사는거지요 뭐.. 무소유의 삶을 추구해야 되는데 말이죠. 그게 말만큼 쉽지는 않습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 - 개정2판 창비아동문고 46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1983년 9월 어느 날,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부모님이 주신 '생일 축하금'을 들고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었다.
일단 김형배의 <20세기 기사단> 신간을 한권 고르고 '만화책만 살 순 없으니 교양 서적도 하나 골라야지'라는 마음으로 서가를 훑어 보던 중 특이한 제목의 책과 조우한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

사자왕 리처드같은 기사들이 나오는 중세 모험물인가? 아더왕 전설에 푹 빠져서 비록 아동판들이었지만 이 판본 저 판본 구해 보았던 4~5학년 시절 생각도 나고 해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동용 동화치고는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늦도록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단숨에 읽어 버리고 말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권말 해설을 통해 이 책의 작가가 바로 그 유명한 '말괄량이 삐삐'(80년대 초반 TV에서 방영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지 않은가!)의 저자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여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아.. 고수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책의 여운으로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던 나는 당시 고등학생이던 누나에게까지 이 책을 추천해 주었고 누나 역시 재미있어 하며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20년이 넘었지만 이 책은 여전히 나의 책장에 소중하게 꽂혀 있다.

<긴양말을 신은 삐삐>, <개구쟁이 에밀>, <소년 탐정 칼레>,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등 린드그렌 여사의 책들은 하나같이 현대 아동 문학의 정수라 할수 있는 명작들이지만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여사의 작품목록에서도 약간 독특한 위치에 있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그 이유는 이 책이 바로 '환타지 동화'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연쇄적으로 열려 있는 색다른 사후 세계를 배경으로 한.

형 '요나탄'과 주인공인 '나 - 스코르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는 이 책의 초반부는 아동 소설임을 감안할 때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들이 몸담았던 현실은 고루하고 쓸쓸했다.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지만 모범생이자 특출한 학생이었던 형 요나탄은 화재사고에서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목숨처럼 믿고 의지하던 형이 죽은 후 항상 몸이 아파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던 스코르빤은 마침내 찾아온 지난했던 병고의 끝에서 의연하다.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오히려 기뻐하며 받아 들이는 스코르빤이 홀로 세상에 남게 된 어머니를 걱정하는 장면은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 뭉클하다.

슬프고 힘들었던 현세를 떠난 형제는 중세 시대와 흡사한 사후 세계 낭기열라에서 다시 만나고, 낭기열라를 배경으로 벌이는 두 형제들의 목숨을 건 모험과 활극이 펼쳐진다. 평화로울 것만 같았던 사후 세계도 현실과 마찬가지로 폭력과 악이 존재하며 배신과 음모, 우정과 신뢰가 뒤섞여 있다.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과 이에 따르는 희생,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 어떠한 사람이 진짜 영웅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등의 묵직한 주제는 이 소설을 성인 독자들이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책으로 만든다.

내 인생의 소중한 책을 꼽는 다면 그 중 한 자리를 나는 주저없이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할애 할 것이다.

아 참, 정갈하고도 아름다운 삽화는 이 책의 백미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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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29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일축하금을 들고 서점에 간 어린이......
제 딸이 그렇게 자라주면 좋으련만......

oldhand 2004-10-29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자 새끼는 고양이가 되지 않는 법이랍니다. 로드무비님의 도러임에랴..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주하는 너무 너무 예뻐서.. 미모로 다 해결할듯. >_<

인터라겐 2007-04-09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조카 학급문고로 제출하라고 해서요... 주문하다가 반갑게 인사드립고 갑니다.

oldhand 2007-04-11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학급문고란게 아직도 있군요. 어릴적에 학급문고로 내버린 아까운 책들이 왜그리 많은지.. 지금 같으면 당연히 그냥 새책을 한권 사서 낼거 같아요.
 

책을 좋아하던 형과 누나를 둔 막내인 덕분에 나는 책에 관한 한 참 좋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우리 집은 비교적 많은 책이 있었고, 나는 형과 누나가 보던 책들을 자연스럽게 따라 읽으며 독서 습관을 익히게 되었다. 부모님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동 교양 월간지(우리는 어깨동무를 구독하였다)도 달마다 사 주셨으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던 출판사 영업사원들의 유혹에도 종종 기꺼이 넘어가 주셨다. 학구적이지도 않고 감성지수도 낮은 내가 나이가 든 지금까지 그나마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것은 어린 시절의 이러한 천혜의 환경 탓이리라.

나 어릴적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는 서점이 없었다.
간혹 책을 사려면 버스로 1정거장 반 정도 되는 길을 걸어 나가야 했다.
8~9살 때 형을 따라 처음 가 보았던 내 어릴적 삶의 터전이었던 K시의 '돌고개'에 위치해 있던 '샛별서점'이라는 조그마한 동네 서점은 이 후 어린 시절 나의 동경의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 쌓여 있는 책들이 어찌나 많아 보였는지.

책을 사기 위해 시내의 큰 서점까지 가기에 당시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모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책값의 여유가 손에 들어올 때면 늘 '샛별 서점'으로 달려갔다.
(물론 돈이 생길 때 마다 책을 샀다는건 아니다. 어린 아이가 그럴리가 없잖은가? -_-; 군것질도 많이 하고 장난감도 많이 샀겠지. 책을 사라고 받았던 돈의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학교 등교 거리보다 두 배는 먼 거리에 위치해 있던 '샛별 서점'까지 걸어가는 길은 항상 '오늘은 무슨 책을 살까?'하는 두근 두근한 기대감이 동반되는 즐거운 행로로 기억된다.

지금은 매니아들의 수집 대상으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하는 우리 나라 단행본 만화의 시조격인 클로버 문고나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열심히 사서 모았던 권당 300원 짜리 셜록 홈즈 단편 문고,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아더왕 이야기>, <날으는 교실>, <벤허>, <80일간의 세계일주>등 집에 있는 전집에 빠져있던 명작들을 나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걸어가서 걸어 온 시간의 두 배만큼 이 책 저 책 고민하다가 한 권씩 골라서 소중히 얼싸안고 오곤 했었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들에 밀려서 동네 서점들은 거의 살아 남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동네마다 조그마한 서점이 있던 자리에는 비디오와 만화책, 잡지류를 대여해주는 도서 대여점이 자리를 잡았다.
대형 서점은 쇼핑센터인지 책방인지 구분이 가지 않으며, 도서 대여점에서는 과자 한 봉지 값에 책 한권을 빌려 주고, 인터넷에서 모니터를 바라 보며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원하는 책을 주문해 버리는 요즈음, 햇살이 뿌옇게 들어오는 작은 서점에 쭈그려 앉아 한참동안 이 책 저 책 뽑아보고 고민 고민 심사 숙고하여 마침내 낙점 받은 책을 소중히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오던 그 시절의 뿌듯함을 후일 나의 자녀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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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0-22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한서림','중앙서관''아벨'을 자주 이용했지요. 지금은 방안에 앉아서 컴퓨터로 이용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책을 가슴팍에 안고 오는 기분은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낯선 여행지에 가면 제일먼저 근처 서점이 떠오르더군요

물만두 2004-10-2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시골에 가면 제일 먼저 찾던 곳이 서점이었는데 이젠 인터넷만 하니... 책 고르는 재미가 좋았고 무엇보다 사람들 구경하는게 참 좋았었어요. 저도 여우성님처럼...

oldhand 2004-10-22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는 그나마 헌책방에 가면 그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더군요. 그 순진했던 시절 같기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인터넷 서점일지라도 알라딘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분들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

아영엄마 2004-10-2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용돈 생기면 서점에 달려가서 이 책 저 책 살펴보고 살려고 마음 먹은 책 사고 그럴 때가 참 좋았는데.. 요즘은 서점이 워낙 대형화되어 있으니 가면 아이를 잃어버릴 지경입니다.^^;; 서점에 가서 책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는 것도 좋다 싶어 그래도 가끔은 아이들과 서점 나들이를 합니다.

oldhand 2004-10-2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의 아이들은 정말 멋진 엄마를 둔 덕분에 행복할거에요. 어머니와 함께 어린 시절 고르고 읽었던 책들은 평생 기억에 남겠죠? 아영이 혜영이 둘다 책 벌레가 될것 같습니다. ^^

2004-10-28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04-10-28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은퇴하면 책방 하려고 해요. 그때도 책방이 살아남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형제자매들 때문에 책을 어려서부터 가까이하신 님이 부럽군요...

oldhand 2004-10-29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방.. 혹은 만화방.. 저도 이게 꿈이에요!!! 이룰 수 있을지 심히 의문이지만요. 흑흑.

아..그리고 속삭이신 님, 뭐 괘념치 마세요. 어차피 저야 날나리 서재 주인인걸요. 이제 약간 기대는 해 볼랍니다. 하핫.
 

국가 보안법에 대한 찬반 논란은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개인적으로 국가 보안법의 폐지에 "광화문 깃발론" 운운하며 반대하는 자들의 논리를 전혀 수긍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 논의의 중심에는 이념과 사고, 가치관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정 수도 이전을 놓고 벌이는 논의의 찬반 진영이 국가 보안법에 대한 찬반 진영과 거의 겹쳐진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갖은 이유를 들이댄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겹쳐지는 행정 수도 이전 반대자들의 반대는 내게 단지 반대를 위한 반대, 내가 반대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반대로 밖엔 이해 되지 않는다. 찬성을 위한 찬성도 없지 않아 있을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수도권의 과밀 현상과 서울의 포화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는 반대론자들의 주장이 "내가 싫어하는 정권의 정책에는 절대 찬동할 수 없다. 그럴 바엔 지방 분권을 포기하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헌법 재판소의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에 대한 위헌 판결이 내려지자 마자 뉴스 사이트에 댓글을 달아대는 수많은 네티즌들의 모습에서 나는 이성적 국가 정책 판단 능력의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곳에는 단지 정치적 정파의 다름으로 인해 벌어지는 흑백 논리가 있을 뿐이다.

정치를 혐오하고 싸잡아서 정치권을 욕하다가도 정책적 사안에 있어서는 지극히 정파적이고 당파적인 판단을 내리는 유권자들이 많을 수록, 그리고 정책적 사안을 정파적이고 당파적으로 해석하고 대중을 쇄뇌하는 수구 언론이 있는한, 이땅의 정치권에서 정상적인 정치개혁과 건전한 정책대결은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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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10-21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퍼가요. 너무 좋은 글이네요

노부후사 2004-10-21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

oldhand 2004-10-21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이런.. 뭡니까 이 추천의 물결(?)은.. 민망스럽구만요.

하얀마녀 2004-10-21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손님 안녕하세요. 저도 이 글 보고 찾아 왔습니다. 정말 명쾌하게 잘 정리해주셨네요.

oldhand 2004-10-22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하얀마녀님 반갑습니다. 마녀님의 서재는 제가 몰래 몰래 즐겨 가는 서재중 하나랍니다. ^_^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는 참 경기가 좋던 때 였다. 물론 김영삼 정부의 단기 경기 부흥책의 산물이었지만 대기업들은 사람을 뽑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고 서로 몸집 불리기에 경쟁하던 때다. 임금 인상도 당연한 일인듯 해마다 단행되어 직장인들도 국민 소득 10000불 시대를 실감케 하였다.
당시 대기업에서 앞다퉈 많은 인력을 채용하던 전자계산학-컴퓨터공학 전공자였던 나를 비롯한 나의 동기, 선배들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이미 대기업에 입도선매되어 취업이 확정되었고, 학력고사 치르듯이 같은 날 일제히 실시하던 대기업의 공채 시험날에는 이탈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소집 대상이 되어 호텔에서 융숭한 식사와 두둑한 교통비등을 지급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하였던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경기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외환 위기가 닥치더니 결국 IMF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대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고 인원을 감축하고 생존을 위한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4년여 직장 생활을 의미없이 이어가던 나는 험한 세상을 역류해 보자는 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갔다. 대기업의 매너리즘과 불투명한 전망, 상사와의 불편한 관계 등이 그 이유였다.

2년을 학교에서 보낸 후에 다시 취업을 했고, 그 이후 세번째 회사가 나의 현 직장이다. 작년에 선배가 새로 설립한 법인인 이 회사 역시 IT 회사이다. 돌이켜 보면 대학원 시절을 빼더라도 어느덧 회사 생활 8년여의 경력이 나의 이력에 덧 대어져 있다. 대기업이었던 첫 직장과는 달리 그 이후의 나의 직장들은 인력을 자본으로 하는 회사들이었다.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그 일을 떠맡아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단기적으로 인력을 필요로 하는 회사에 일정기간 파견 근무를 하기도 한다.

이 바닥에서는 이런 일을 '앵벌이'라고 한다. 올 4월부터 나는 1년간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제 6개월이 지나 반환점을 돌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나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다. 8월 말부터는 파견 나온 회사에서 다시 파견나오는 신세가 되어 지금은  L전자의 연구소로 출근을 하고 있는데, 이 곳은 출근시간이 8시로다. 업종의 특성상 야근도 잦다 보니 8시 출근은 조금 치명적이다.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자 마자 씻고 30분 내로 잠자리에 들어도 6시간 자고 바로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
게다가 회사 위치도 집과 멀어 통근 시간이 1시간 반에 육박하다보니 이래 저래 심신이 지치게 된다. 원래 나의 모토는 '회사는 집에서 30분 거리 이내일 것'인데 말이다. 이래서야 무슨 '웰빙'이 되겠는가. 선진국 수준의 노동 조건은 우리에게 아직 요원한 것일까.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문득 문득 들 때가 있다.
애초에 내가 직종 선택을 잘 못 한걸까? 라는 생각도 가끔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 말고 더 잘할 수 있고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아주 가끔 한다.
내가 그렇다고 이 분야에서 앞으로 몇 년을 더 일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도 한다.

무엇이든 해답은 없다.
잉여 자본이 없는 나로서는 이 험악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 가려면 그저 노동해야 하는 방법 이외엔 없으니까. 나의 노동력과 나의 기술이 나의 유일한 자본인 것이다.

경제에 무지하고, 재테크에 대해 무관심하며, 부자가 될 생각도 없는, 그저 노동을 통해 얻어지는 자본이 가장 순수하다는 철없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는, 그래서 로또 복권 한 번 사본 적이 없는 나는 어쩌면 온갖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넘쳐나는 이 곳 대한민국에서 속절없이 낙오할 지도 모른다.
교육 문제마저도 자본의 논리로 결정되는 이 나라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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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0-19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무십일홍...가을이 가기전에 여행이나 한번 다녀오려구요.그나마 제가 가진 얼마 안되는 자본을 방탕하게 사용하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이쯤되면 저도 인생의 가치에 투자하는 재태크를 알고는 있기나 한 걸까요? ^^-뜬금없는 소리 하고 갑니다.어쨌든 돈은 많아야 한다니까요!!

oldhand 2004-10-20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 여행... 좋지요. 가을엔 어딜 가도 좋아요. 단, 단풍놀이의 인파만 피한다면. 한적한 어디로 훌쩍 떠나고 싶네요.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