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던 형과 누나를 둔 막내인 덕분에 나는 책에 관한 한 참 좋은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우리 집은 비교적 많은 책이 있었고, 나는 형과 누나가 보던 책들을 자연스럽게 따라 읽으며 독서 습관을 익히게 되었다. 부모님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동 교양 월간지(우리는 어깨동무를 구독하였다)도 달마다 사 주셨으며, 집집마다 돌아다니던 출판사 영업사원들의 유혹에도 종종 기꺼이 넘어가 주셨다. 학구적이지도 않고 감성지수도 낮은 내가 나이가 든 지금까지 그나마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지경에 이르지 않은것은 어린 시절의 이러한 천혜의 환경 탓이리라.
나 어릴적 초등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는 서점이 없었다.
간혹 책을 사려면 버스로 1정거장 반 정도 되는 길을 걸어 나가야 했다.
8~9살 때 형을 따라 처음 가 보았던 내 어릴적 삶의 터전이었던 K시의 '돌고개'에 위치해 있던 '샛별서점'이라는 조그마한 동네 서점은 이 후 어린 시절 나의 동경의 장소 중 하나가 되었다. 크지 않은 공간에 쌓여 있는 책들이 어찌나 많아 보였는지.
책을 사기 위해 시내의 큰 서점까지 가기에 당시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모처럼 이런 저런 이유로 책값의 여유가 손에 들어올 때면 늘 '샛별 서점'으로 달려갔다.
(물론 돈이 생길 때 마다 책을 샀다는건 아니다. 어린 아이가 그럴리가 없잖은가? -_-; 군것질도 많이 하고 장난감도 많이 샀겠지. 책을 사라고 받았던 돈의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학교 등교 거리보다 두 배는 먼 거리에 위치해 있던 '샛별 서점'까지 걸어가는 길은 항상 '오늘은 무슨 책을 살까?'하는 두근 두근한 기대감이 동반되는 즐거운 행로로 기억된다.
지금은 매니아들의 수집 대상으로 고가에 거래된다고 하는 우리 나라 단행본 만화의 시조격인 클로버 문고나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열심히 사서 모았던 권당 300원 짜리 셜록 홈즈 단편 문고,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 <아더왕 이야기>, <날으는 교실>, <벤허>, <80일간의 세계일주>등 집에 있는 전집에 빠져있던 명작들을 나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걸어가서 걸어 온 시간의 두 배만큼 이 책 저 책 고민하다가 한 권씩 골라서 소중히 얼싸안고 오곤 했었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들에 밀려서 동네 서점들은 거의 살아 남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동네마다 조그마한 서점이 있던 자리에는 비디오와 만화책, 잡지류를 대여해주는 도서 대여점이 자리를 잡았다.
대형 서점은 쇼핑센터인지 책방인지 구분이 가지 않으며, 도서 대여점에서는 과자 한 봉지 값에 책 한권을 빌려 주고, 인터넷에서 모니터를 바라 보며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원하는 책을 주문해 버리는 요즈음, 햇살이 뿌옇게 들어오는 작은 서점에 쭈그려 앉아 한참동안 이 책 저 책 뽑아보고 고민 고민 심사 숙고하여 마침내 낙점 받은 책을 소중히 품에 안고 집에 돌아오던 그 시절의 뿌듯함을 후일 나의 자녀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