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시기는 참 경기가 좋던 때 였다. 물론 김영삼 정부의 단기 경기 부흥책의 산물이었지만 대기업들은 사람을 뽑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고 서로 몸집 불리기에 경쟁하던 때다. 임금 인상도 당연한 일인듯 해마다 단행되어 직장인들도 국민 소득 10000불 시대를 실감케 하였다.
당시 대기업에서 앞다퉈 많은 인력을 채용하던 전자계산학-컴퓨터공학 전공자였던 나를 비롯한 나의 동기, 선배들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이미 대기업에 입도선매되어 취업이 확정되었고, 학력고사 치르듯이 같은 날 일제히 실시하던 대기업의 공채 시험날에는 이탈하는 사람이 있을까봐 소집 대상이 되어 호텔에서 융숭한 식사와 두둑한 교통비등을 지급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하였던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경기는 악화되기 시작했고, 외환 위기가 닥치더니 결국 IMF 시대가 개막하게 된다. 대기업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고 인원을 감축하고 생존을 위한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4년여 직장 생활을 의미없이 이어가던 나는 험한 세상을 역류해 보자는 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갔다. 대기업의 매너리즘과 불투명한 전망, 상사와의 불편한 관계 등이 그 이유였다.
2년을 학교에서 보낸 후에 다시 취업을 했고, 그 이후 세번째 회사가 나의 현 직장이다. 작년에 선배가 새로 설립한 법인인 이 회사 역시 IT 회사이다. 돌이켜 보면 대학원 시절을 빼더라도 어느덧 회사 생활 8년여의 경력이 나의 이력에 덧 대어져 있다. 대기업이었던 첫 직장과는 달리 그 이후의 나의 직장들은 인력을 자본으로 하는 회사들이었다. 프로젝트를 수주해서 그 일을 떠맡아 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단기적으로 인력을 필요로 하는 회사에 일정기간 파견 근무를 하기도 한다.
이 바닥에서는 이런 일을 '앵벌이'라고 한다. 올 4월부터 나는 1년간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제 6개월이 지나 반환점을 돌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나려면 아직도 까마득하다. 8월 말부터는 파견 나온 회사에서 다시 파견나오는 신세가 되어 지금은 L전자의 연구소로 출근을 하고 있는데, 이 곳은 출근시간이 8시로다. 업종의 특성상 야근도 잦다 보니 8시 출근은 조금 치명적이다.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자 마자 씻고 30분 내로 잠자리에 들어도 6시간 자고 바로 일어나 출근해야 한다.
게다가 회사 위치도 집과 멀어 통근 시간이 1시간 반에 육박하다보니 이래 저래 심신이 지치게 된다. 원래 나의 모토는 '회사는 집에서 30분 거리 이내일 것'인데 말이다. 이래서야 무슨 '웰빙'이 되겠는가. 선진국 수준의 노동 조건은 우리에게 아직 요원한 것일까.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문득 문득 들 때가 있다.
애초에 내가 직종 선택을 잘 못 한걸까? 라는 생각도 가끔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 말고 더 잘할 수 있고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아주 가끔 한다.
내가 그렇다고 이 분야에서 앞으로 몇 년을 더 일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도 한다.
무엇이든 해답은 없다.
잉여 자본이 없는 나로서는 이 험악한 자본주의 세상에서 죽지 않고 살아 가려면 그저 노동해야 하는 방법 이외엔 없으니까. 나의 노동력과 나의 기술이 나의 유일한 자본인 것이다.
경제에 무지하고, 재테크에 대해 무관심하며, 부자가 될 생각도 없는, 그저 노동을 통해 얻어지는 자본이 가장 순수하다는 철없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는, 그래서 로또 복권 한 번 사본 적이 없는 나는 어쩌면 온갖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넘쳐나는 이 곳 대한민국에서 속절없이 낙오할 지도 모른다.
교육 문제마저도 자본의 논리로 결정되는 이 나라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