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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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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공포물을 그다지 좋아하질 않는다. 직접적 이유는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장면들, 즉 서로 죽이고 난도질하고 썰어대곤 하는 모습들이 끔찍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 죽이는 일을 즐기며 볼 수 있다니! 가끔 호러 마니아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런걸 보면서 재미를 느끼고 환호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그 부정적 측면이 극대화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생생한 공포인데 굳이 따로 공포물을 찾아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나 할까. 대량해고, 산업재해, 교통사고, 빚더미에 앉아 자살로 떠밀리는 사람들, 충분히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어진 자연재해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상의 공포들이 널려 있는 사회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공포물이란 그런 일상의 공포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사람들의 눈을 가리는 수단이 아닐까 하는 혐의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 뒤늦게 <렛 미 인>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되었다. 물론 영화는 스토리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매력적이다. 늙지 않는 뱀파이어 소녀와 자신의 전 생을 바쳐 소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한 남자, 그리고 소녀에게 새롭게 선택되어 예정된 삶을 살아가게 될 소년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이 이야기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하는 스토리는 대단히 매혹적이고 긴 여운을 남긴다.

 

그러나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가 누군가의 피를 통해서만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 소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피를 짜내 소녀에게 바쳐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누군가의 피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결국 자신의 피를 내줘야하며, 금세 또 다른 제공자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며, 이것이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에 대한 하나의 은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노동자의 피로 젊음을 유지하는 부르주아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받아들면서 이런 생각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이 책은 뱀파이어 현상의 사회학적 의미를 다루기보다는 말 그대로 뱀파이어의 역사를 차곡차곡 정리한 책이었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이해는 언제나 대상의 역사에서부터 시작하는 법이다. 이 책은 고대 신화에서부터 문학, 회화, 영화, 오페라, 대중음악, 만화에 이르기까지 온갖 장르를 망라해가며 대중문화에서 뱀파이어가 다루어져왔던 방식들을 화려한 화보들과 함께 하나하나 친절하게 정리해놓음으로써 나와 같은 문외한이 쉽게 뱀파이어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렇게 뱀파이어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어 얻게 된 첫인상은, 뱀파이어란 존재는 실로 인간을 매혹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총집결한 아이콘이라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나 좀비와 같은 여타의 아이콘들과는 달리 유독 뱀파이어만이 지속적,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뱀파이어에는 죽음을 회피하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구, 흡혈과 같은 금지된 행위에의 열망, 흡혈을 함으로써 상대를 나에게 복종시키는 권능, 외딴 곳에 지어진 성이나 무덤과 같이 어두침침하고 그로테스크한 공간에 대한 생래적 두려움 등 인간이 가진 온갖 욕망과 두려움이 뒤섞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설명처럼 뱀파이어는 우리를 비추는 하나의 거울이 된다.

 

오늘날의 뱀파이어 영화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욕망을 지극히 매력적인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 이는 짐작하건대 우리가 이 상상의 존재를 우리의 불안과 갈망을 비추는 거울로 여기기 때문일 터이고, 또한 욕망과 공포가 더할 나위 없는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329)

 

비현실적 대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언제나 그들이 현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그렇다면 뱀파이어라는 이 거울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불안의 해소와 갈망의 충족일까? 아니면 새롭게 더 커진 불안과 갈망일까? 아니면 우리가 가진 불안과 갈망에 대한 반성과 성찰일까?

 

나는 그것이 우리가 어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불안과 충족되지 못하는 갈망으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가는 이라면,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더 큰 불안, 그러나 실현가능하지 않은 불안에 자신을 맡기기 쉽다. 공포물이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공포영화는 잘 된다는 세간의 통념은 바로 이런 상황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인지 나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영원히 계속될 이야기라는 저자의 단언이 달갑게만 들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하는가에 달려있다. 뱀파이어가 가져다주는 가벼운 자극에 흠칫 몸을 떨다가도 뱀파이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함의들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현실의 욕망에 굴복하여 뱀파이어가 되길 갈망하거나 혹은 현실에 대한 회피나 대리만족으로써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모습에 환호하게 될 것인지. 우리가 전자의 방식으로 뱀파이어를 즐길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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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탄생 - 캄브리아기 폭발의 수수께끼를 풀다 오파비니아 2
앤드루 파커 지음, 오숙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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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브리아기란 지금으로부터 54,300만 년 전부터 49,000만 년 전 사이의 시기를 일컫는 지질학의 용어로, 영국 웨일스의 캄브리아 구릉지에서 이 시기의 화석들이 발견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캄브리아기는 약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겨우 5천만 년 가량의 짧은 시간에 불과하지만 생명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왜냐하면 이 짧은 시기에 급격한 생명의 진화가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화석증거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단 3개만 존재하던 동물문이 갑자기 38개의 동물문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 이 사건은, 고생물학에서 캄브리아기 폭발이라고 불리며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이처럼 지구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으로 꼽히는 캄브리아기 폭발의 원인을 추리하는 책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데 있어 추리이라는 말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화석증거의 특성상 (호박이나 만년설에 보존되어 모든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겠지만) 현재까지 남겨진 부분적인 증거들을 토대로 원래의 모습을 재구성해야 하고, 다시 이렇게 재구성된 생물들을 토대로 수억 년 전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중의 재구성 과정에는 당연히 여러 가지 해석과 추론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러 경쟁이론들이 난립하게 되고, 더 나아가 여러 경쟁이론들 중에서 어느 것이 맞는지 확증하기도 매우 어렵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내기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을 제외하고 남은 것,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그 나머지 하나가 틀림없이 진실이다.”라는 셜록 홈즈의 대사를 제사로 인용하며 추리소설의 문법을 차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불경하게도 추리소설 독자에게는 범죄행위에 가까운 스포일러를 제목에 담아 놓는다. <눈의 탄생>, 범인은 바로 이었어! (물론 이는 번역판의 제목이고 원제는 눈 깜짝할 사이에를 뜻한다. ‘짧은 시기이라는 의미를 이중적으로 담고 있는 적절한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는 자신의 추리과정이 얼마나 그럴듯한지 확인해보라는 자신감의 표출로 이해할 수 있다. 저자가 이렇게 자신감을 내비칠 수 있었던 이유는 생물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들을 넘나들며 수집한 과학적 증거들을 조합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더 섬세한 퍼즐 조각들을 가지고 그림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서 활용된 과학적 증거들은 비단 생물학뿐 아니라 지질학, 물리학, 화학, 역사, 미술 등에서 추려낸 것이다. 종종 눈, , 화석, 포식자, 이집트 신상, 심해, 산호초 같은 주제들도 끼어들 것이다. 나는 캄브리아기 폭발이야말로 독자 여러분의 시간을 빌릴 만큼 중대한 일이며, 따라서 이 사건에 대한 해명을 책으로 출간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17~18)

 

저자의 장담처럼 이 책은 400여 페이지를 읽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흘러갈 만큼 상당히 재미있게 쓰여져 있다. 각각의 조각들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책을 직접 읽어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요약하기는 너무 방대하며, 또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만 언급하자면, 지적설계론자들이 진화론에 반대하며 즐겨 제시하곤 하는 눈과 같은 복잡한 구조가 진화와 같은 우연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고 상상하기 어렵다는 주장에 대해 눈이 진화적 과정으로 거쳐 만들어질 수 있음을, 그것도 역사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그런 변이가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이처럼 이 책에서는 다양한 증거들을 조합하여 멋진 결론을 내리는 훌륭한 탐정의 면모를 경험할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눈의 진화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빛 스위치설에 대한 해명이 다소 빈약하다는 점이다. 눈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빛이 중요한 선택압력으로 작용해야 하기 때문에, ‘왜 캄브리아기에 와서야 갑자기 빛이 선택압력이 될 수 있었는지를 해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몇 가지 가설들을 제시하고는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다른 부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단한 소개만으로 그치고 있는 점이 아쉽다.

 

이 책은 쉬운 설명과 친절한 삽화로 우리를 5억 년 전의 시간으로 이끌고 가 당시의 환경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새롭게 진화론이 공격받고 있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생명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더불어 같은 시리즈인 오파비니아의 책들, 즉 캄브리아기 이전 시기를 다루고 있는 <생명 최초의 30억 년>, 캄브리아기의 대표적 생물을 다루고 있는 <삼엽충>, 캄브리아기 이후의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인 페름기의 대멸종을 다루고 있는 <대멸종> 등과 함께 읽는다면 생명의 역사를 일별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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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려 해도 하루종일 더위에 지친 탓인지 금세 졸음이 쏟아진다. 역시 여름은 책읽기에 좋은 계절은 아닌 듯 싶다. 얼른 더위가 수그러들길 바라며 이번 달에는 지금 우리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중심으로 골라본다.

 

 

 1. 우리나라만큼 남의 뒷말을 즐기는 사회가 또 있을까? 셋 이상이 모여 수다를 떠는 자리라고 하면 어김없이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주 소재로 테이블에 오르는 경험을 누구든 해보았을 것이다. 이런 습성은 인터넷과 SNS를 통해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를 친다. 몇몇이서 나누는 뒷말에 그치지 않고 온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인터넷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 비하인드 스토리라는 명목으로 떠도는 특정인에 대한 부정적 에피소드들, 신상털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현대식 인민재판 등. 정치인,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루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책은 그러한 루머의 메카니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고 소개된다. "이 책은 왜 루머가 만들어지고 확산되는지, 도대체 루머란 무엇인지, 루머가 가진 엄청난 위력과 루머를 통제하는 법에 대해 설명한다." 과연 통제가 가능할까?

 

 

 

 2. 지난달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책이다. 또래압력, 즉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고 동화되는 과정에서 이탈할 경우 발생하는 소외감과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눈높이를 맞추려는 무의식"의 긍정적 차원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남들도 이 정도 하니까 나도 그 정도 해야 되지 않겠어'라는 태도, 즉 자기 자신의 기준에 의해 살아가기보다는 타인의 눈높이에 맞춰 살아가려는 태도에 대해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진 나로서는, 이러한 또래압력이 과연 어떤 점에서 긍정적 효과를 가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3. 이 책은 그 유명한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을 다룬 책이다. 한때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두 사람은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구체적으로 당시 소련에 대한 입장-의 차이 때문에 서로 결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책 소개를 읽어보니, 이 책은 두 사상가의 철학적 기반을 분석함으로써 '두 사람의 결별'이라는 사건의 필연성을 해명해 보려는 책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과거의 에피소드를 다룬 책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지금 한국은 증오가 정치의 동력이 되는 정치 양극화 구도에 사로잡혀 있다"는 최근 강준만의 지적처럼, '진보적 폭력'과 '사회적 화합'이라는 두 사람 간의 입장 차이가 지금 우리 사회에도 유효한 설명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카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은 바로 이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때문이었다. 공산주의는 한 세기 넘게 전세계인들을 사로잡았던 이상향이었으나 결국 실패한 기획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미완성의 기획으로 변화된 현실 조건에 맞추 더욱 전시켜야할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이건 공산주의의 역사를 일별하고 있는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전자라고 한다면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무엇이 전세계인들을 그토록 사로잡을 수 있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을테고, 후자라고 한다면 미완성의 기획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공산주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새로운 사회상과 그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실제로 실행된 제도들, 그리고 그 제도가 가진 현실적 한계들을 차근차근 검토해 봄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유용한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5.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에서 이 책을 고른다. 두 시간의 공연을 보기 위해 왕복 여덟 시간이라는 교통지옥을 뚫고 지산에 갔다. 1993년 데뷔 앨범 <Pablo Honey> 이후로 20년 가까이 기다려왔던 공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한 두 시간의 황홀한 경험. '영접했다'던 누군가의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실 "~로 철학하기" 류의 책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라디오헤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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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8-0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에서 전체주의로, 와 코뮤니스트의 연결이 절묘하네요. 샤르트르와 카뮈의 논쟁 관련 책들은 많기는 한데.. 저 책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려나, 확인해봐야겠네요ㅎ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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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감상을 써야하는 일은 남감하다. 이런 종류의 책이란 나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책을 말한다. 이해 능력을 넘어서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고 물음을 던질 수도 없다. 그저 이해 안 되는 음악이나 영화,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저런 것도 있구나하고 넘겨버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저자의 지적처럼 무의식적인 자기 방어에 굴복하는 비겁한 일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걸. 마침 사사키 아타루가 어렵고 지루한 책에 대해 말하니 이 얘기를 해보자.

 

1.

나는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책은 두 종류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독자의 사유를 극단까지 몰아가는 책들이 있다. 상상 가능한 모든 논리적 근거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토함으로써 말 그대로 독자를 질리게 만드는 혹은 압도하는 책들이 그렇다. 이런 책들은 빈틈없이 촘촘하게 짜인 사유의 그물망을 저자와 함께 직조해나가고 싶다는 열망이나 열정이 없다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대개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이 비로 이러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오락으로써의 책읽기가 아니라 지적 고통으로써의 책읽기.

 

이런 책들을 끝까지 견뎌내었을 때 결국 남는 것은 직조된 그물이 아니라 그물을 짜는 법이다. 저자의 결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결론에 도달한 과정을 배울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번 그물 짜는 법을 배우게 되면 이제 우리는 그 어떤 실을 가지고도 새 그물을 짤 수 있으며, 그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창적 생각을 덧붙여 새로운 방식의 그물을 짜는 것도 가능해진다. ‘철학이 아니라 철학함을 배운다는 칸트의 조언을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쉽게 요약 정리된 입문서보다 고전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어려운 책들도 있다. ‘뭔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어.’라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에 대해 어떤 이들은 저자 스스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지껄인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이는 저자의 속내를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이상 과도한 말이라고 생각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책들이 대부분 독자에 대해 설득보다는 공감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쓰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이런 책들은 제가 하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가 아니라 제가 무얼 말하고 싶은 건지 느껴지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니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이런 느낌이 드는 책은 모순과 역설 혹은 비약으로 점철된 책일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들이 은유의 차원에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좋은 은유는 컨텍스트 안에서 나름의 정합성이 있기에 설득력을 가진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문장만 따로 떨어뜨려놓고 본다면 뜬금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대 노 저어 오오라는 문장과 결합하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다 모순이나 역설 혹은 비약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단순히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치부하기보다는 그것이 어떤 컨텍스트 안에 위치하고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독창적으로 어떤 개념을 새로 정의하여 사용할 수도 있고, 독자에겐 낯설지만 저자에겐 당연한 문화적 배경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그러나 이러 시도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건 나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포기하는 수밖에,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필요해 보이는 말을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사사키 아타루의 책에 대해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

사사키 아타루는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39)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무의식과 독자의 무의식이 직접 접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무의식에 직접 침투하기에 독자의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자기 방어를 하게 된다. ‘지루하고 어려워. 그러니 읽지 마.’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읽는다면 독자의 무의식은 외부의 침투로 인해 점차 변화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사사키 아타루는 이런 무의식의 변화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미쳐버리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더 나아가 그는 읽는다는 것이 바로 혁명이라고 말한다.읽는 것, 다시 읽는 것, 쓰는 것, 다시 쓰는 것, 이것이야말로 세계를 변혁하는 힘의 근원”(171~172)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42~43) 즉 읽는다는 것은 미친다는 것이고, 미친다는 것은 나의 삶이 이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읽어버린 이상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더 이상 기존의 가치와 믿음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 것입니다. 즉 고쳐 쓰는 것, 쓰는 것이었습니다. ()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은 읽고 있는 자신과 세계가 동시에 믿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쓴다는 것에 대해서도 신앙은 사라집니다.”(216) 이처럼 읽고 쓴다는 것은 기존의 가치와 믿음을 끊임없이 갱신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단지 한 개인의 경우로 국한되지 않는다.읽는 것 그리고 쓰는 것. 이것이 정보를 둘러싼 착취의 구도를 파괴하고, 모든 분야에 걸친 답답한 닫힌 영역을 답파하여 현 상황을 추인하는 조치를 거절한 끝에 인류사적 규모의 중요성을 갖게”(62)되는 식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이다.

 

우리의 현재를 규정하는 위대한 두 혁명,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과 16세기의 대혁명이 바로 읽기, 다시 읽기, 쓰기, 다시 쓰기의 결과였다. 중세 해석자 혁명은 로마법을 읽고 다시 씀으로써 현대 사회의 모든 기틀을 마련해 놓았고, 루터의 대혁명은 성서를 읽고 다시 씀으로써 종교개혁과 근대적 법체계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을 읽고 쓰는 한 혁명은 지속된다. 문학이 끝났다, 예술이 끝났다, 역사가 끝났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게으른 이들의 허언에 지나지 않는다. 읽고 쓴다는 것은 영원한 혁명의 시간에 놓인다는 것이다.

 

3.

읽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해나가는 일이고 그런 행위들이 계속 누적되어 세상을 바꾸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속 읽어나갈 때 또 다른 혁명이 도래하게 될 것이다. 뭔가 그럴듯하고 매력적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따져보자. 사사키 아타루는 어려운 책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저자와 독자의 무의식적 접속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책을 읽었을 때 어렵고 지루하다는 느낌, ‘무의식적 자기 방어가 느껴지면 무의식적 접속이 이루어진 것인가? 그렇다면 어떤 책을 읽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면 포기하지 말고 읽고, 또 읽고 해야 한다는 것인가? 이와 같은 반복적 읽기는 대단히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활동이 아닌가? 그런 의지적이고 의식적 활동 자체가 바로 무의식적 접속의 결과인가? 그렇다면 누구나 그렇게 책을 읽고 있을 것이므로 굳이 읽는다는 것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가 쓰는 혁명이란 개념은 어떠한가? 일상적 의미의 급진적 변화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점진적 변화까지 포괄하는 개념인가?우리는 혁명으로부터 왔습니다.”(63)라고 할 때, 그 혁명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세 해석자 혁명인가 루터의 대혁명인가, 아니면 그 모든 혁명을 모두 총칭하는 것인가? 현대 사회의 모든 기본이, 이것저것 다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왔다”(193)고 하면서 루터가 살았던 16세기는 12세기의 중세 해석자 혁명, 즉 교황 혁명의 성과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71)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해석자 혁명의 여러 성과들 중 특정한 성과만 루터의 혁명에 의해 새롭게 되었다는 의미인가? 루터의 혁명도 법의 혁명”(91)이었고 중세 해석자 혁명도 법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법”(176)을 낳은 혁명이었다면, 12세기 이전-중세 해석자 혁명 이후-대혁명 이후 각각의 법체계는 어떻게 바뀌게 된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계속 뒤적이게 된다. (혹시 이것이 그가 말한 다시 읽는다는 것일까?) 그러나 여러 번 뒤적여 봐도 여기저기서 산만하게 끌어다놓은 전거들만 보일 뿐 논리적 구조를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적게 반복해서 읽으라더니, 이 많은 사상가들이란!) 얼핏 보기엔 멋진 그물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뒤죽박죽 얽혀있는 실타래와 마주한 느낌이랄까. 결국 그가 말하고 있는 읽는다는 것은 혁명한다는 것이다라는 진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0.

물론 이는 내가 가진 이해 능력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내가 처했던 이 어려움을 사시키 아타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지막까지 읽고 돌아오지 않으면 사실상 납득이 가지 않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것을 입에 담아버렸으므로, 이대로는 약간 되풀이해서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이 되고 말 것 같습니다.”(43) 그래서 몇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러나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반복해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 나의 무의식과 사사키 아타루의 무의식은 만나지 못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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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1.

내가 전기나 자서전을 읽는 이유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익히 알고 있던 인물에 대한 더 세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한 인간의 사고란 것이 그가 자라온 환경이나 경험들과 무관할 수 없기에 그 인물을 둘러싼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전기나 자서전은 그의 생각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다른 하나는 위와 똑같은 이유로 앞으로 알고 싶은 인물에 대한 흥미유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책을 접하기 전에 전기나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대강의 배경지식뿐만 아니라 어려운 책도 더더욱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사상에 대한 흥미가 그 사상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기도 하지만, 한 개인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사상으로 확장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 사회학자의 지적 편력을 펼쳐 보여준다는 이 책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후자의 입장이었다. 오래 전에 <사회학에의 초대>, 작년에 <의심에 대한 옹호>를 읽었을 뿐 그의 사상에 대해 무지했기에 이 책을 통해 현존하는 20세기 사회사상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는 피터 버거에 대해 흥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지루했다. 물론 곳곳에 박혀 있는 유머 코드와 대가의 여유 같은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최소한 나에게 흡입력을 가진 책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읽었던 그의 두 책, <사회학에의 초대><의심에 대한 옹호>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것과 마찬가지였다.

 

2.

왜 그렇게 지루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아마도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두 가치, 종교와 보수주의라는 두 토양에 저자가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와 신학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먼저 미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우연히 사회학 수업을 듣고 사회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사회학자가 되었다고 해서 종교적 신념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에 종교적 관점이 자신의 사회학 전반에 녹아들어 있다.

 

단지 그가 주전공으로 종교사회학을 선택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학문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책이라 평가하는 <성스러운 천개>에서 저자는 종교를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결정적 요인”(130)으로 제시한다. 또한 이후 세속화에 대한 입장을 수정하면서 현대사회는 세속화된 사회라기보다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사회라고 분석한다. 혹은 동아시아의 발전모델을 검토하며 후기 유교 가설을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손꼽는다. 이처럼 피터 버거에게 있어 종교는 한 사회를 이해하는 핵심적 프레임이 된다. 물론 학자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기에 다소 낡아 보이는 종교적 프레임을 가졌다는 것이 크게 문제될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자신의 학문적 여정에서 특정 가치가 개입되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한 학자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신학자이면서도 방법론적 무신론이라는 접근 방식을 취한다든가 사회학적 분석에 있어 가치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야 함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회학을 단지 사회에 대한 객관적 서술의 역할로 한정짓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의 분석적인 부분은 당연히 가치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그 실제 적용은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도덕적으로 정당하다”(84~85)거나 사회학은 인간을 환상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100)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좀 더 인간적인 사회라는 특정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학이 사회적 현실을 폭로함으로써 좀 더 인간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가교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3.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좀 더 인간적인 사회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명확한 사회상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러저러한 언급들을 통해 추측해보건대, 저자 자신이 미국적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광범위하게 보장된 사회, 그리고 이를 위한 기초로써 절대적 빈곤과 같은 물질적 제약이 극복된 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즉 다소 과도한 단정일 수도 있지만 그가 말하는 좀 더 인간적인 사회란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발전해가는 사회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공화당원으로 가입한 사실이나 자본주의적 성장의 신화를 승인하는 부분을 읽다보면 이러한 혐의가 짙어진다.

 

그는 자신의 사회학적 입장이 단지 책상물림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학적 관광이라고 부르는 전세계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회적 상황을 이해한 결과라고 강조한다. 남아메리카와 동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저개발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며 도출한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전세계를 몇 바퀴나 돌아다니는데 필요한 경비는 과연 누가 댔을까. 당연히 거대 자본을 가진 기업이나 정부일 것이다. 그가 이 책에서 회고하는 대부분의 미팅들이 기업의 CEO들이거나 정부기구의 관계자인 것은 그의 연구를 누가 지원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며, 그의 사회에 대한 시선에 어떤 이들의 입장이 녹아들어 있을지 추측하게 해준다.

 

그렇기에 수용할 만한 발전 모델이라면 사회변화가 야기할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하며, 또한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전통적 가치들을 존중해야 한다”(176)거나 사회학은 모든 제도가 깨지 쉽다는 것을, 그리고 제도가 급격히 해체되면 독재나 무질서라는 이중의 위험에 봉착한다는 것을 알려준다”(242)라며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고 제도적 안정을 추구하며 최소한의 점진적 개혁만을 승인하는 그의 보수주의적 입장이 어디서부터 기원했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자신이 우파와 좌파 양쪽에서 비판받는다는 사실을 계속 언급하며 중도적 입장에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하지만 그가 좌파를 언급할 때는 명백히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정치적 좌파를 말하는 반면 우파를 언급할 때는 정치적 우파라기보다는 기독교 근본주의에 가깝기에 이것이 적절한 범주화를 통한 비교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이는 미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일 수도 있다. 수정헌법 1조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분명히 하지만 저자 스스로 인정하듯이 강력한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정치적 우파들이 자신의 동지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손잡는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낙태와 동성애 논쟁이 대선의 주요 이슈이자 민주당과 공화당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라는 사실을 보면 좌우파의 범주가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정치 체제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4.

결국 종교라는 프레임을 통한 사회적 안정과 자본주의라는 프레임을 통한 경제적 발전이 그의 학문적 입장을 지탱하고 있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스스로도 이러한 두 기둥이 전형적인 우파의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이중 시민권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이다. 사회학은 이데올로기의 수단이 되면 안 된다. 사회학자는 반드시 객관적인 관찰자와 사회 구성원의 입장에서 도덕적인 참여자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아내야만 한다.”(273) 자신이 바라는 사회상이 있지만 학문 연구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치우치지 않도록 끊임없이 채찍질하는 학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러한 모습의 학자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론 억지스런 중립의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편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때도 있다. 복지국가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 극단의 투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듯이, 중도라는 것은 극단적 편향들의 투쟁을 통해 도출되는 결과일 뿐이지 미리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농담을 좋아하는 피터 버거에게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오라는 어떤 이의 말에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우파란 말이오!’라고 답했다는 프랑스의 농담을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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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11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도 만원권 수상하시겠는데요? 피터버거 할아버지 책보다 더 재미있는 서평 잘 읽었습니다.

nunc 2012-07-11 13:26   좋아요 0 | URL
지난 달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글,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2-07-28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28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