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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시작되었다. 한편으론 온몸을 끈적이게 하던 더위도 잠시 주춤해졌기에 책 읽기에 좋은 시기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멍하니 떨어지는 빗방울을 쳐다보며 창 밖으로 시선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기에 그리 좋은 시기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대체로 후자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이번 장마 기간에는 전자가 되길 기대해본다.

 

 

방학을 앞둔 탓인지 관심 가는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1차로 열댓 권정도의 목록을 뽑아놓고 거기서 다시 다섯 권을 추려내야 했는데 그 일이 쉽지 않았다. 넣자니 넘치고 빼자니 아쉽고,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여차저차 다섯 권을 골라본다. 관심 가는 책들이 많았기에 일관된 주제 없이 무작위로 골라보았다.

 

 

1. <진화심리학>은 단 한 권만 고르라고 했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선택했을 책이다. 진화심리학과 관련된 이러저러한 책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 그대로 '교과서'처럼 필요할 때마다 참고할 수 있는 책이 없어 아쉬움이 있었는데 드디어 그런 책이 발간되어 기쁘다. 각 주제별로 추천도서 목록이 제시되어 있는 점도 반갑고,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인 "5장 집단 생활의 문제"와 "6장 통합 심리 과학"이 흥미롭다.

 

 

 

 

 

 

2. 과학이 다른 학문들에 비해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대상을 양화함으로써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의 성공에 고무된 탓인지 이제는 모든 것을 수치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개인의 취향이란 것이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영화나 음악, 서적에 대해서도 별점을 매겨 평가하는 일이 흔하고(알라딘도 별점을 주지 않으면 서평을 입력할 수 없다!), 행복 지수니 만족 지수니 등 온갖 수치로 한 국가나 개인의 상태를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그의 '스펙'을 검토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세상은 과연 살만한가? 이 책은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한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3.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 거의 2년에 한 번씩 한 달 가량 해외 여행을 다니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쓴다면 얼마나 편할까'라는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인간이기에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지만 언어적 장벽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져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의 그런 단순한 생각에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의 삶에서 다양한 언어가 생존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반성을 위해 읽고 싶은 책이다.

 

 

 

 

 

 

4. 일상적으로 사용하지만 막상 그 의미를 캐묻기 시작하면 벙어리가 되고마는 용어들이 있다. 혹은 같은 용어로 대화를 하고 있지만 깊이 따져보면 결국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했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대표적 용어 중 하나가 바로 '민주주의'일 것이다. 누구나 쉽고 당연하다는 듯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과연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이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전 세계 역사 속에서 함께했던 민주주의를 살펴봄으로써 민주주의가 태동할 수밖에 없었던 맥락 속에서,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수 있게 해준다"는 책소개가 반갑다.

 

 

 

 

 

 

5. 며칠 전 뉴스에서 한인회장대회에 정치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본 적이 있다. 대선을 앞두고 재외국민의 표를 얻기 위해 다양한 공약들을 제시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 뉴스를 보며 작년부터 시행된 재외선거인 투표에 대한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유학이나 출장 등으로 인해 단기적으로 해외에 나가있는 이들에게 투표기회를 보장해주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해외에서 살 목적으로 장기체류하고 있거나 영주권을 가진 이에게도 투표권을 주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그보다는 우리나라에 장기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지 하는 의문이었다. 다시 말해 투표권이란 해당 국가에 세금을 내면서 해당 국가의 정책에 영향을 받는 이들에게 주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 책이 나의 의문에 답을 줄 수 있을까. "세계화 시대 이주와 시민권 문제"라는 이 책의 부제가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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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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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 시장 사회에서 과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을까.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와 마찬가지로 샌델은 이 책에서 다양한 사례 제시를 통해 문제제기와 토론을 이끌어 낸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새치기하는 것은 정당한가. 돈을 받고 생명보험을 재판매하거나 자신의 몸에 광고를 새기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할까. 또한 시장지상주의자들의 말처럼 인센티브가 효율을 증대시키는 적절한 요인이 될 수 있을까. 이처럼 시장의 규범이 일생생활의 전반에 침투할 때 어떠한 문제가 발생할까.

 

시장지상주의자들은 시장이란 경제주체들의 상호 합의를 통해 자유로이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이를 통해서만 재화의 생산과 분배가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시장은 제품을 가장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는 장치일 뿐 아니라 정보를 모으고 미래를 예측하는 최고의 방법이기도 하다.”(210) 그러므로 경제주체들 간에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거래에 대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규제하거나 개입해선 안 된다. 물론 때로 어떤 거래 행위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거나 보편적 도덕 감정을 거슬러 불편하고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이나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사회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꺼이 용인되어야 한다.

 

2.

이러한 시장지상주의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샌델은 가능한 두 가지 반박을 소개한다. 하나는 그가 공정성에 관한 반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정성에 관한 반박에서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조건이나 경제적 필요성의 긴박한 정도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 때 생겨날 수 있는 불평등을 지적한다.”(157) 즉 시장지상주의자들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는 각 경제주체 간의 자발적 합의에 따른 자유로운 행위라고 하지만, 실제 극단적인 거래를 수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들로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하게 된 것이고, 이는 결국 암묵적 강요나 강압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샌델이 부패에 관한 반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패에 관한 반박은 () 시장은 가치평가와 교환이 특정 재화와 관행을 변질시킨다고 주장한다.”(157) 이는 특히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과 같은 도덕적·시민적 재화를 사고파는 경우에 분명히 나타나는데, 이처럼 우리가 공공선이라 부를 수 있는 시민적 미덕들에 시장 거래가 개입하면 그 미덕이 가진 가치가 감소하거나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재적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지급하면 그들의 내재적 흥미나 헌신을 밀어내거나그 가치를 떨어뜨려 동기유발을 악화시킬지 모른다.”(170)

 

3.

이 두 가지 반박 중 샌델은 후자를 지지한다. 오늘날 정치적 논쟁이 대부분 시장지상주의자와 공정성을 지적하는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공정성에 관한 반박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논쟁은 시장이 야기하는 진정한 문제를 회피한다.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어느 쪽 입장에 서더라도 시장 중심 사고와 시장 중심 관계가 모든 인간 활동을 침해하는 세상이 대체 왜 문제인지 알 수 없다.”(255) 다시 말해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조건만을 고려할 뿐 시장이라는 매커니즘 자체를 고려하지는 않기 때문에 핵심적 문제를 흐린다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아무리 공정한 거래가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가 남게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시장이 야기하는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란 무엇인가. 왜 시장이라는 매커니즘 자체를 고려하는 것이 중요한가. 샌델이 보기에 시장은 가치중립적인 매커니즘이 아니다. 시장은 특정 가치를 구현한다.”(159) 그렇기 때문에 시장 매커니즘의 내적 과정보다는 시장 매커니즘의 외적 효과, 즉 시장의 가치편향성이 야기하는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부패에 관한 반박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또한 변질된 가치에 대해 고민함으로써 공동체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좋은 삶(the good life)’이 무엇인지 숙고하게 만든다.

 

샌델은 도덕적·시민적 미덕를 한정된 재화, 교환가능한 재화로 여기는 시장주의자들을 반박하며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은 사용할수록 고갈되는 상품이 아니다. 오히려 운동하면 발달하고 더욱 강해지는 근육에 가깝다”(180)고 주장한다. 이러한 미덕이 더욱 강화되기 위해선 시장의 침식으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시장의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결국 시장의 문제는 사실상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가고 싶은가에 관한 문제다.”(275~276)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던 <정의란 무엇인가>의 핵심 주장과 다시 만나게 된다.

 

4.

이제 샌델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샌델이 시장을 문제 삼는 이유는 시장의 확대가 공동체의 미덕과 공공선을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회제도를 지배하는 규범을 시장이 고쳐 쓰기를 원치 않는다면, 시장의 도덕적 한계를 공론에 부칠 필요가 없다”(<정의란 무엇인가>, 367)거나 시장을 제자리에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회 관행과 재화의 의미에 관해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숙고하는 것이다”(274)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뭔가 이상하게 들린다. 시장의 확대가 공동체의 공공선을 훼손한다는 것은 공공선이란 것이 시장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그 공공선은 무엇인가. 샌델은 이타주의·관용·결속·시민정신과 같은 추상적 가치들을 언급하긴 하지만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사람들 사이에 어떤 규범이 합당한지를 놓고 서로 의견이 다르다”(274)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요점은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을 목격했다면 시장에 속한 영역은 무엇이고 시장에 속하지 않은 영역은 무엇인지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274)이었다고 짐짓 한발 물러선다.

 

그러나 문제가 됐던 것은 단순히 시장과 상업이 재화의 성질을 바꾸는 상황이 아니라 기존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 부정적으로 바뀌는 상황이었다. 이는 이미 어떤 기준, 아마 샌델 자신의 기준에 따라 이전의 소중한 것과 현재의 부정적인 것으로 가치가 구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솔직하게 자신의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함께 토론하며 찾아보자는 식으로 얼버무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샌델은 어떤 재화나 행위에 공적으로 합의된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가 내재되어 있고, 이러한 규범이나 가치가 침해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특정한 시기에 합의되었던 가치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어떤 가치도 후대에 얼마든지 쓸모없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노예제 시대에 살고 있다면 노예해방을 주장하는 이들을 심각한 공공선 파괴자로 여겼을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노예옹호론자를 그렇게 여기듯이. 공공선이란 상대적이며 조건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즉 침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공공선 자체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다. 공공선이란 과연 무엇인가. 샌델은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가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할 가치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공적인 토론과 합의를 거치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모든 이들의 동의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아니면 다수결로도 충분한가. 혹은 공동선이란 그 자체가 절대적 가치이기에 모든 사람이 합리적으로 토론하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공공선은 신과 같은 어떤 절대자가 부여한 것인가. 공공선은 어떻게 현실화되는가. 합의한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공공선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것인가. 어쩌다 공공선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과 형벌 같은 제도를 통해 강제해야 하는가.

 

5.

이처럼 샌델의 책은 쉽게 읽히면서도 또한 쉽게 답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들을 풀어놓는다. 어쩌면 이것이 샌델의 책이 가진 매력일 수도 있다. 다양한 사례를 통해 깔끔하게 정리된 각각의 입장을 비교하는 참고서가 될 수도 있으며, 여러 입장들을 비교하며 은근슬쩍 드러나는 샌델의 주장을 찾아보는 책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샌델의 한계와 반론을 고민하며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어떤 방식으로 읽건 샌델을 읽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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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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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이전에 저자의 다른 책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 대한 감상을 적으며 다작하는 철학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편견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또 다른 편견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감상적인 철학자 또한 신뢰하지 않는다. 감상주의는 이성적 판단을 방해한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객관적 시선을 가지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감상주의 철학의 대표적 사례가 흔히 인생철학이라 불리는 것들이다. 물론 인생철학에도 분명 주목할 만한 삶에 대한 지침이나 어떤 통찰들이 담겨있고, 또한 이것이 우리 삶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다만 그러한 사유와 통찰이 도출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은 버려진 채 인생철학이 보여주는 아포리즘이나 경구의 감동에만 매몰되어 여기저기 맥락 없이 적용되는 현실을 경계하는 것이다. 철학과와 철학관에 대한 사람들의 혼동이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니었을까.

 

철학이란, 하나의 학문으로서 철학이란, 그것이 설령 인생에 대한 지침이나 통찰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감탄/느낌표의 학문이 아니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물음표의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거칠게 말하자면, 모든 철학자는 회의주의자다. 나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

 

2.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가 김수영을 떠나보내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한다. 저자에 의하면 젊은 시절, 타인의 오해와 갈등 그리고 그로부터 야기된 고독감에 힘겨워할 때 저자를 위로해준 이가, 그래서 스스로 정신적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가 바로 김수영이었다고 한다. 그런 김수영을 왜 떠나보내야 하는가. 이제는 더 이상 위로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김수영에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겨낼 힘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홀로 설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의 표출. 그러니까 결국 이 책은 저자 강신주의 독립선언인 셈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독립의 조건을 제시한다. 바로 대상에 대한 거리두기다. “사실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아니면 누구든 김수영에게 거리를 두었을 때에만,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34) 거리두기란 무엇인가. 아버지의 후광 안에 있을 땐 눈부심으로 인해 대상을 분명하게 쳐다볼 수 없다. 거리두기란 그와 같은 후광에서 벗어나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까지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거리두기란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이해해보겠다는 결심이며, 나아가 그 이해를 토대로 대상을 넘어서보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과연 이 시도는 성공했을까.

 

3.

저자가 보기에 김수영은 진정한 인문정신의 구현자이다. 진정한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인문정신이란 바로 단독성의 추구. “인문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고유명사의 학문이다”(18)라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문정신이란 단순히 일반성에 포섭된 특수성, 다른 것과 얼마든지 교환 가능한 특수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유성을 확보하는 일, 즉 자기 스스로 우뚝 서려는 태도이다. 그리고 김수영은 그 누구보다도 단독성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단독성이란 다른 그 무엇과도 교환될 수 없으며,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다는 점에서 고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독성은 남과 비슷해지라는 내적, 외적 압력이나 강요, 혹은 스스로 서려는 자에게 가해지는 온갖 억압에 저항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결국 단독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외적 억압과 내적 태만에 끊임없이 온몸으로 저항한다는 것(자유)이고, 이러한 저항을 통해서만 스스로 도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저자가 김수영에서 읽은 것, 저자가 김수영에게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오해와 갈등, 고독감에 힘겨워할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게 바른 길이라고 큰 소리로 격려해 주니 말이다. 저자가 김수영을 정신적 아버지라고까지 부르며 열광했던 이유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4.

그렇다면 김수영의 시와 산문 그리고 그의 삶이 단독성의 추구라는 말로 모두 해명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온전히 이러한 해명으로 채워져 있다. 저자에겐 단독성과 이로부터 파생된 자유’, ‘스스로 도는 힘’, ‘온몸으로 밀고 나가기등의 키워드가 김수영의 글과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실제로 4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 중 무작위로 아무 페이지나 펼친다고 해도 바로 저 단어들을 만날 수 있다.

 

이는 저자가 철학적 시 읽기에서 보여준 모습, 즉 문득 건져 올린 하나의 통찰 혹은 직관으로 철학자나 시인의 모든 것을 해명하려는 시도와 매우 유사하다. 전작에서 그것이 하나의 강의로 압축되었다면, 이 책에서는 열 개의 강의로 넓게 펼쳐놓은 느낌이다. 물론 단독성이라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열 개의 다양한 변주의 형식으로.

 

김수영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적절한가? 즉 저자는 자신이 목표한 거리두기의 첫 번째 목표를 이루었는가? 나로선 이에 답할 능력이 없기에 수많은 김수영 연구자들에게 책임을 미루고 싶다. 다만 개인적으로 하나의 개념이나 용어로 한 사람 혹은 한 사상을 관통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은 강조하고 싶다. 저자가 이 책에서 풀어내는 김수영을 보면서도 그의 시와 그의 현실이 매우 모순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아내를 때린 날을 언급한 시인 <죄와 벌>을 다루는 부분을 보자. 이 시를 통해 저자는 김수영에게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약함과 아내보다 우산을 아까워하는 이기심을 극복하려는 의지”(303)를 읽어낸다. 그러나 그 사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아내에 대한 사랑과 용서도 결국 타인의 시선 때문이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면 왜 그 즉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았는가. 왜 아내와 헤어지지 못한 채 복수하듯 오입질(<>)을 하거나 술집 여급과의 사랑(<김영태에게 보내는 편지>)에 애타하는가. 나는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 혹시 김수영에게는 시가 현실에서 살지 못하는 이상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한없이 나약한 삶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토록 시에서는 엄격하려했던 게 아닐까. 모르겠다. 어쨌건 애매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5.

두 번째 목표는 어떨까. 저자는 김수영을 넘어서고 있는가. 이 점은 아쉽다. 책 곳곳에서 짙게 느껴지는 정서는 김수영이라는 거대한 존재 혹은 김수영으로 표상되는 어떤 인문정신에 대한 극복이라기보다는 재확인과 추종이다. 물론 거장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속속들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앉기 위해선 거인의 발밑에서부터 차근차근 기어올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저자는 김수영의 어깨를 딛고 서기보다는 품에 안겨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김수영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하기보다는 단독성이라는 통찰을 반복해서 곱씹고만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으로부터 단독자가 돼라는 일갈을 들었다면 그 다음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단독성을 지향해야만 하는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단독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와 같은 구체적 물음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이유와 방법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혹은 온몸으로 밀고 나가라거나 모든 억압에 저항하라와 같은 추상적 답변만 제시할 뿐이다. 어쩌면 그 대답 역시 누구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하기 때문일까.

 

또한 김수영의 외침은 자기 성찰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가르침을 줄지 모르지만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혹은 김수영에게 타자란 단지 자기 성찰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김수영이나 저자나 모두가 시인이어서 시가 필요 없는 세상’,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를 꿈꾸지만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은 구성원 각자의 자기 성찰뿐이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타인과의 관계를 버려둔 채 자신에 몰두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일종의 자폐적 철학이 아닐까.

 

6.

물론 저자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김수영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는 것일 테다. 저자가 느끼기에 김수영 이후 반세기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지적했던 현실에서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기에 김수영 정신의 회복은 더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저자의 독립선언임에도 불구하고 <강신주를 위하여>가 아니라 <김수영을 위하여>인지도 이해된다.

 

그러나 우리가 김수영 철학의 추종자나 아류로 남지 않고 마침내 넘어서기 위해서는 그의 철학으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질문되지 않는 철학은 단지 종교일 뿐이다. 김수영 정신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김수영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저자의 다음 책이 그러한 질문과 대답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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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6-07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주곡이라는 단어 이번 서평에 꼭 넣고 싶었는데 먼저 사용하셨군요...솔찍히 이렇게 길게 쓸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동어반복적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편으로는 우상을 대치한 그 자리에 또 다른 우상이 자리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뭐 비평하자면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진정성이랄까 뭐랄까 독립된 개인으로 열심히 살아보려는 저자의 노력이 엿보여서 아쉬운대로 긍정적인 평가로 리뷰를 마무리 하고 있는데...(다들) 너무 잘 써놓으셔서 부담되네요ㅋ 여튼 훌륭한 리뷰 잘보고, 감탄하고 갑니다.

nunc 2012-06-07 05:04   좋아요 0 | URL
앞에서 밝혔듯이 다소 편견을 가진 데다 호평 일색이라 이런 감상도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올렸네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얘기가 더 많았지만 정리도 잘 안 되고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멈췄지만, 다시 읽어보니 여기저기 고치고 싶은 부분이 많네요. 부족한 글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개미님께서 쓰실 좋은 리뷰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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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를 매우 비예술적 인간이라 생각한다. 여지껏 살아오면서 예술작품이라 불리는 것으로부터 '뒷통수를 내리친다'든지 '온몸이 찌릿하다'든지 하는 감동이나 감탄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들은 오히려 딱딱하다고 하는 이론서들이나 과학서적에서 자주 느끼는 편이다. 이런 구분이 유효할런지 모르겠지만, 만일 인간이 감성적 인간과 이성적 인간으로 구분될 수 있다면 나는 분명 후자에 속할 거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다.

 

당연히 이와 같은 예술에의 무지 혹은 무감각의 상태로 머무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유효한 구분일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만일 이 세계가 이성적 세계와 감성적 세계로 구분될 수 있다면 한쪽 절반의 세계를 놓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기회 닿는 대로 이러저러한 작품들, 관련 서적들, 평론들을 접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관심사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기회로 삼기 위해 6월의 관심도서는 '예술'을 주제로 골라 본다.

 

 

      

 

 

가장 먼저 고른 책은 <미학 편지>(프리드리히 실러, 휴먼아트)이다.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실러의 미학 이론'이라는 부제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비예술적 인간이 된 데에는 '어린 시절 학교에서의 재미 없던 예술 교육 때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원망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인간의 미적 형성'을 다루고 있다는 소개글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누구든지 공교육 13년을 마치면 악기 하나쯤은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회라는 이상에 격하게 공감하는 입장에서, 처음 예술을 접하는 초등학생의 자세로 차근차근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에릭 부스, 에코의서재)이라는 책인데, 누구나 가지고 있는 예술적 잠재력을 일상생활에서 펼쳐놓는 방법들을 소개하며 삶이 곧 예술이 될 수 있도록 살아가길 권유하는 책이다. 이 책의 연장선에서 <삶의 미학>(리처드 슈스터만, 이학사)이 눈에 띈다. 책소개를 읽어보건데 두 책 모두 '삶이 곧 예술'이라는 전제를 공유하하고 있는 듯하며, 전자가 그 구체적 방법론을 소개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이론적 근거들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고른 책은 현대예술에 관한 책이다. 많은 이들이 공감할 거라 생각하는데, 예술과의 거리감은 현대예술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물론 현대예술이 직관적 이해보다는 문제제기와 성찰을 더욱 중시한다는 점에서 작품에서 느껴지는 낯섦은 그들의 의도가 충분히 실현된 것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나처럼 낯가림이 심한 인간들은 낯선 상황에 부닥쳤을 때 맞서기보다는 도망가기 일쑤이다. 그러므로 일단 안면을 트는 게 중요하다. <현대 예술>(조중걸, 지혜정원)이 그 주선자가 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 해명'이라는 부제에서 약간 멈칫하긴 하지만 일단 골라본다.

 

앞의 책으로 현대예술을 개괄했다면 다음은 구체적으로 현대 작가와 작품을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 마침 베이컨에 관한 책이 있다. 물론 이 책은 베이컨에 대한 친절한 해설서라고 하긴 어렵다.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듯이, 들뢰즈는 철학자든 예술가든 다른 이들을 다루면서 이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는 방식의 철학하기로 유명하다. 책소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저서인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 대해 "우리를 베이컨의 예술 세계로 인도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들뢰즈 존재론의 핵심에 다가가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며 오히려 뒷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오래전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어렵게 읽었고, 베이컨의 인터뷰집인 <화가의 잔인한 손>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기에 선뜻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미의 기원>(요제프 라이히홀프, 플래닛)이다. 평소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인간 사회와 생물 세계의 진화 과정에서 미가 차지하는 역할을 규명한 역작"이라는 설명당연히 손이 갈 수밖에 없다. 책소개를 차근차근 읽어보면 미의 기원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시도하면서 자연선택설을 넘어서는 입장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논증을 펼칠지 궁금해진다.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예술적 삶을 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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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2-06-06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현대예술, 형이상학적 해명을 추천하기는 했는데.. 막상 되면 좀 당황할 것 같네요. 내용이 만만치 않아 보여서 말이죠.

nunc 2012-06-07 04:42   좋아요 0 | URL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읽어보겠나' 하는 그런 심정도 있었습니다. 막상 된다면 숙제하듯 읽게 되겠죠.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 - 안철수에 대한 발칙한 보고서
한윤형.이재훈.김완.김민하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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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총선은 많은 이들의 예상 혹은 기대와 달리 여당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야권 단일화 열풍으로 인해 지난 18대보다 약간 줄긴 했지만 여전히 단독 과반수를 확보함으로써 기존 야권이 현 여권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의미한 대안이 되기 어려움을 확인했다. 이와 더불어 다소 잠잠해지고 있던 박근혜 대세론도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권 지지자들이 작년 9월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20119월은 한국 정치의 역동성을 재확인할 수 있는 한 달이었다. 비유하자면 안철수라는 소행성이 한국의 정치판에 충돌하여 대규모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한 달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 이후 4년 내내 철옹성처럼 지켜오던 박근혜 대세론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무상급식 시행 여부를 둘러싸고 촉발된 논쟁이 이러한 거대한 충격을 야기할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은 20119월에 벌어진 대규모 지각변동을 네 명의 젊은 논객들이 분석한 책이다.

 

먼저 책 제목을 살펴보자. 아이폰 사용자에게 익숙한 용어인 밀어서 잠금해제란 대기 상태에 있는 시스템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전원이 꺼진 상태에서 새롭게 시스템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작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작동 상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출발선에서 긴장하며 자세를 갖춰 기다리는 주자들에게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안철수 밀어서 잠금해제란 우리 사회의 기저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어떤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이고, 안철수가 가진 무엇으로 인해 그 긴장이 활성화되어 표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던 긴장이란 무엇인가? 한 가지는 아마도 갑자기 등장한 안철수에 대한 높은 지지와 이를 받아 안고 시장에 당선된 박원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 정치권에 대한 높은 불신과 혐오일 것이다. 사실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주의를 기울여 왔던 사람들이라면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의 모습에서 실망과 좌절을 느낀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망과 좌절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의미한 정치 세력이 부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이지지를 보내거나 아예 정치에 관심을 끊게 되었다. 각종 미디어에서 자주 회자되는 비판적 지지’, ‘선거란 차악을 고르는 일’, ‘정치적 무관심같은 말들을 떠올려 보자.

 

이러한 현실에서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이미지에, 안정적인 기반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결단력과 그 도전을 결국 성공으로 이끌어 내는 현실적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엄친아안철수가 서울시장 출마의사를 밝히며 정치에 관심을 표명하자 많은 이들이 열광하고 지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책의 네 저자는 이 열광과 지지의 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길 권한다. 무엇보다 저자들은 안철수 개인에 대한 단순한 지지와 반대를 넘어 안철수 현상을 하나의 사회적 징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했듯 안철수 이전에 흐르고 있던 긴장과 안철수가 가진 무엇이 그 긴장을 활성화시켜 표출되도록 만들었는지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네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대중의 욕망(이재훈), SNS의 등장으로 인한 매체 지형의 변화(김완), 정치공학적 관점에서의 안철수와 같은 존재가 할 수 있는 역할(한윤형, 김민하) 등 다양한 분야로 역할을 분담하여 분석을 시도한다.

 

먼저 한윤형의 글은 안철수 현상에 대한 각종 비평들을 재비평하는 메타비평의 형식을 취한다. 특히 안철수의 등장에 대한 부정적 시선, 즉 정당 정치를 파괴한다거나 신자유주의적 성공 신화의 다른 일면이라는 지적에 반대하며 안철수 현상이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활용방안을 모색할 것을 주문한다.

 

이재훈은 각종 매체에 나타난 안철수의 발언들을 심층 해부함으로써 안철수의 열광하는 대중이 안철수를 통해 무엇을 욕망하고 있었는지를 역으로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안철수에 대한 열광은 결국 중간계급의 엄친아에 대한 욕망에 다름 아니며, 이러한 성찰을 통해 거꾸로 그동안 배제되어왔던 다수 노동자의 정치를 복원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완은 안철수 현상이 한국 사회 매체 지형의 변화를 예고하는 전조라고 진단한다. 그는 그간 대선에 있어서 언론의 역할을 꼼꼼하게 짚어보고 이러한 언론이 안철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또한 역으로 SNS라는 새로운 언론 환경으로 대변되는 안철수가 기존 언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김민하는 정치권 내부의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 안철수를 대입해 봄으로써 대선에 이르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려본다. 6개월 전의 예측임에도 불구하고 총선 이후 정치지형에 커다란 변화가 없는 현실에서 이 시나리오는 여전히 흥미롭게 읽힌다.

 

물론 이 책에 실린 네 저자의 분석이 안철수에 대한 지지 혹은 반대를 판단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며, 저자들 역시 그럴 의도로 저술한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열광과 분노로 대변되는 무조건적 지지와 비판이 횡행하는 정치 과잉의 분위기에 매몰되지 않고 한 걸음 떨어져 사태를 차근차근 읽어보려는 시도로서 자신의 역할을 한정짓고 있으며, 그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편집의 실수가 자주 눈에 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안철수라는 충격파의 진앙이 채 식기도 전인 1025일 초판이 인쇄되었다. ‘안철수 현상이 가져온 첫 가시적 결과물인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채 보기도 전에 출판된 것이다. 이는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현실을 포착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성에 너무 치중한 미처 잡아내지 못한 편집의 실수가 독서에 대한 집중력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선 이후 선거 결과에 실망하여 안철수를 다시 호출하는 대중의 요구가 거세질 이 시점에서 저자들이 건네는 충고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 여기에 이번 총선을 통해 드러난 대중들의 요구, SNS의 영향력, 정당들 사이의 정치 역학의 변화 등 지난 6개월 동안 추가된 사실들을 덧붙여가며 책을 읽는다면 그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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