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
제럴드 N. 캘러헌 지음, 강병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간혹 환경 관련 서적들에서 지구상 존재하는 가장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인간을 꼽는 경우가 있다. 이는 일종의 은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산업혁명 이후 지난 200년간 인간이 지구 가용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해버렸다는 몇몇 과학자들의 주장은 인간이 지구라는 공동체에 가장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설명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이야기는 결국 세균 이야기이다.”(13)라는 저자의 주장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평균적인 인간의 몸속에서 오직 10퍼센트의 세포만이 ‘인간 세포’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90퍼센트, 절대 다수의 세포는 세균이다. […] 인간은 기껏해야 10퍼센트만 인간”(23)이기 때문이다. 평균적인 인간의 몸속에는 1.1×10^14개에 달하는 세포가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인간 세포의 10배에 달하는 세균 세포도 함께 존재한다. 

세균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의 몸속에 들어온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 속에, 어머니의 질을 통해 세상에 처음 나오는 순간, 엄마의 젖을 마시는 순간, 가족들과 대화하고 함께 음식을 먹는 순간 등등 지극히 평범하고 필수적인 일상생활의 와중에 수많은 세균들이 다양한 경로로 우리 몸속에 침투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물론 세균 감염의 결과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진화는 도처에 널려 있는 세균들과 효과적으로 공생하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지구 상에 번성했던 모든 존재는 감염을 피했기 때문이 아니라, 감염을 발판으로 삼아 풍요롭게 사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번성할 수 있었다.”(36) 실제로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무균 생쥐나 무균 토끼는 정상 상태의 개체보다 신진대사 효율이 떨어지고 각종 질병에 매우 취약하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지저분한 환경에서 자란 어린이일수록 천식과 알레르기가 적게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시 말해, 적당한 세균 감염은 장기가 적절하게 기능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면역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적당한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공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흑사병, 천연두, 홍역, 말라리아처럼 현재 우리에게 크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인류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끼쳤던 병들 뿐만 아니라, 에이즈, 사스(SARS), 구제역, 조류 독감, 신종 플루 등 최근 우리를 위협하는 전염병까지, 이 모든 것이 바로 세균 감염의 결과로 벌어진 일이다.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E. 풀러 토리/로버트 H. 욜켄 지음, 박종윤 옮김, 이음, 2010)가 동물원성 미생물들, 즉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의 발생 및 진화 과정과 이로 인해 야기되는 질병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실제의 혹은 가상의 구체적 사례들을 인용하며 그러한 질병의 치명적인 효과에 보다 주목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저자가 다루는 여러 사례 중 한 가지만 소개해 보자. 역학자들이 ‘대학살자’라고 부르는 독감의 경우, “제트기도, 통근 열차도, 크루즈도 여객선도,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도 없던 시절”인 1918년에 세계 인구의 거의 절반을 감염시키면서 4천만 명을 살해했다. 독감의 치사율은 일반적으로 3퍼센트 정도지만 2003년 유행했던 홍콩 독감(H5N1 독감)과 같이 일부 치명적인 독감의 경우 치사율이 50퍼센트에 이른다고 한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은 약 30억 명이다. 30억 명의 2.5퍼센트라면 7,500만 명이다. 50퍼센트라면 15억 명이다.”(303)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만약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의 문제이다. 독감의 특성상 또 다른 전 세계적 유행과 질병과 죽음이 일어날 것은 확실하다. 문제는 언제 이런 일이 벌어질지를 예측하는 것이다.”(296~297)

2011년 새해가 밝은지 채 얼마 되지 않아, 우리나라 전역은 구제역과 조류 독감에 신종 플루까지 더해져 몸살을 앓고 있다. 새해부터 각종 바이러스가 우리의 생명과 환경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상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스나 홍콩 독감과 같이 엄청난 피해를 남길 수도 있다. 저자의 경고처럼 이는 단지 ‘언제’의 문제일 뿐이다. 철저하게 대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협동하는 살아 있는 것들, 즉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의 활기찬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 내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건강과 질병과 세계 정체 및 판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좋든 싫든 미생물은 우리의 존재를 규정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 - 동물, 인간, 질병
E. 풀러 토리 & 로버트 H. 욜켄 지음, 박종윤 옮김 / 이음 / 201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11월 29일 경북 안동에서 최초 발생한 구제역이 4개월 동안 거의 전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는 하나 전국적으로 400만 마리 이상의 소와 돼지가 생매장 되었다. 현재는 다소 진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가축이동제한은 풀리지 않고 있고, 또한 살처분 지역의 지하수 오염과 같은 추가 피해가 예상되고 있어 구제역 파동의 여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 우리를 두렵게 했던 사스(SARS)나 신종 플루, 조류 독감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전염병이 생명체를 위협하는 현상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에든버러 대학 연구진은 인체에서 질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1,415개 미생물의 목록을 작성했다. 그중 868개, 즉 61%가 동물에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것이라고 한다. […]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물이 사람에게 전파한 미생물을 모두 목록에 포함시킨다면 인체 감염의 3/4 이상이 동물원성 미생물에 의한 것이 된다. 나머지 1/4 역시 대부분 상속 감염으로서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하기 전에 동물이 초기 인류에게 전파했던 것들이다.(35)

최근 번역되어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책 <1만 년의 폭발>(헨리 하펜딩/그레고리 코크란 지음, 김명주 옮김, 글항아리, 2010)은 1만 년 전 인류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게 되면서 급속한 환경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인류의 진화가 폭발적으로 가속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는 이러한 급격한 폭발이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된 사건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목축을 통해 인간과 동물의 접촉 빈도가 증가하면서 각종 동물을 숙주로 삼아 기생하던 미생물들이 다양한 변이를 일으켜 마침내 인간까지 자신의 숙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동물원성 미생물이 인간에게 침투하는 다양한 경로를 자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부모를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되거나(2장), 사냥이나 목축을 통해 동물과의 접촉 빈도가 높아짐으로써 감염이 증가하게 된다(3, 4장). 또한 인간이 도시와 같이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병원균의 감염 경로를 단축시키기도 하고(5장), 무역을 통해 먼 지역에까지 전파하기도 한다(6장). 현대에는 애완동물을 기르거나(7장) 거대화된 육류 산업을 통해(8장) 동물원성 미생물에 감염되기도 하고, 현대적인 먹이사슬의 변화로 인해 새로운 미생물이 출현하기도 하며(9장), 인간의 성생활이나 기술 변화, 생태 변화 등으로 인해 새롭게 확산되는 전염병도 있다(10장).

이처럼 미생물이 동물에서 인간으로 전파됨으로써 벌어진 피해의 목록도 다양하다. 매년 2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말라리아, 미국을 테러의 공포 몰아넣은 탄저병, 역시 전 세계에서 해마다 2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가며 지난 100년 동안 1억 명 이상을 사망케 한 결핵,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거의 몰살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천연두와 홍역, 유럽 인구의 1/3~1/4 정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흑사병, 식중독을 유발하는 살모넬라, 그리고 최근에 등장한 사스(SARS), 조류 독감, 에이즈 등 그 목록은 끝이 없다. 더구나 정확한 기록이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다양한 문명들의 몰락에 이와 같은 동물원성 미생물에 의해 야기된 역병이 크게 혹은 조금이라도 관여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몇 분 안에, 원생동물은 며칠 이내에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새로운 세대를 구성하려면 20년이 필요하다. 인간과 미생물의 전쟁에서 진화와 적응의 속도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38)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이와 같은 미생물들의 침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저자들의 대답은 다소 비관적이다. “현재 박테리아는 30만~100만종 정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2억 5,000만 년 동안 암염 속에 잠들어 있다가 부활할 정도로 견고하다(19). 바이러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종류만 5000종이 넘으며 “이 모두가, 특히 RNA 타입은 매우 불안정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자신의 유전자 물질을 다른 세포 속으로 집어넣는다.”(21) 다시 말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들은 그 구성이 매우 단순하고 번식 주기가 대단히 짧기 때문에 다양한 돌연변이가 가능하다. 원래의 숙주뿐만 아니라 새로운 숙주에도 적응할 수 있는 변종, 또는 항체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는 변종 등이 얼마든지 쉽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환상에 가깝다.

문제는 전염병이 ‘나타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언제’ 그리고 ‘얼마나 자주’ 나타나느냐 이다.(269)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노력도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미생물의 종류뿐만 아니라 제약회사의 이권과 같은 정치적 이해관계, 동물 질병과 인간 질병에 대한 업무 분리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난관 또한 산재해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천연두를 완전히 박멸할 수 있었듯이, 인류가 동물원성 전염병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부단한 연구와 노력을 지속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전염성 질환을 관리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전세계적 네트워크의 수립, 동물 전문가와 의료 전문가의 협력, 감염 예방을 위한 철저한 교육 등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역설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건강한 상태의 인간의 몸에도 엄청난 수의 미생물이 존재한다. 모든 미생물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며, 어떤 미생물들은 오히려 유익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단 하나의 변종 혹은 신종 바이러스가 인간을 비롯한 다른 여러 동물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이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그리고 구제역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 손으로 생각하기
매튜 크로포드 지음, 정희은 옮김 / 이음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갖가지 전자 키트가 초중고생의 장난감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동네 문방구나 세운상가 등지를 뒤져 거짓말 탐지기나 도난 방지기, 라디오 키트 따위를 사서 설명서를 보며 부품 하나하나를 직접 납땜하며 조립하곤 했었다. 완성한 후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설명서와 다르게 연결된 부품이 있는지, 혹시 부품의 극성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거꾸로 연결하지는 않았는지 하나하나 따져보며 분해와 재조립을 몇 번씩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키트가 제대로 작동하면 마치 대단한 일을 이뤄낸 것처럼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매우 조잡하고 그다지 실용적 쓸모도 없었지만 이런 키트를 조립하는 일은 마치 TV나 냉장고 같은 복잡한 전자 제품의 원리를 깨달은 것 같은 기분, 그리고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는 기분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 책은 바로 이 두 가지 기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숙련된 육체노동을 통해 물질 세계와 체계적으로 만난다. 이 만남은 자연과학을 탄생시켰다.”(32)

다른 포유류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가장 큰 외형적 특징은 인간만이 온전히 두 발로 서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네 발 동물이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곧 나머지 두 발이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워진 두 손을 통해 인간은 다양한 도구들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지금과 같은 문명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저자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우리는 망치를 쳐다봄으로써가 아니라 손에 쥐고 사용함으로써 알게 되듯이,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그것을 직접 다룰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획기적으로 자연을 변형하고 가공하고 조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자유로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인간을 인간이 진정으로 자연에 대한 탐구자이자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로운 두 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그뿐만 아니다.

“손을 쓰는 능력을 통해 자신을 세상에 구체적으로 드러낼 때 얻는 만족감은 사람을 차분하고 침착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만족감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말로 자기를 설명해야 한다는 절박한 느낌을 덜어준다.”(25)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낸다는 것은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입증하는 한 가지, 그러나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손을 사용하여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유형(有形)의 물건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 <완전한 은둔자>의 귀스타브와 같이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진리를 머릿속으로 깨닫고 있다 해도 그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납득시키지 못한다면 한낱 개의 트림으로 허공에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고 싶어 할까? 그것은 인간이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거의 일 년에 달하는 긴 시간동안 부모가 공들여 보살펴주지 않는다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의존적 존재이다. 더 나아가 현대 사회와 같은 생활 조건 하에서 인간이 자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고, 우리들 각자는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닌 세상에 의존한다.”(262)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쓸모를 입증하는 일은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 된다. 저자가 행위주체성(agency)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손노동을 통한 자기 존재의 확인이 인간의 근원적 욕구이자 행복의 원천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손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즉, 손기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은 어떻게 인간의 존재가 빛나게 되는지 깊이 고민하는 일이다.”(83)

그러나 현대 소비주의 사회는 행위주체성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 시대다. 여전히 의존적이긴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의존, 즉 서로의 쓸모를 교환하는 상호의존이 아닌 일방적 의존이 지배적 양식이 되고 있다.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그렇기 때문에 그 작동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행위주체성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저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구입하기만 하면 되는 선택의 자유로 대체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간단한 고장이라도 직접 원인을 파악하여 고치려 하기 보다는 무조건 전문 기술자를 맡겨버리거나 아니면 아예 버리고 새 것을 사려 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이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와 여기서 비롯된 손노동에 대한 경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벗어나 도구 사용자로서의 본성을 일깨워 행위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특정한 종류의 자립, 즉 자기 물건의 주인 되기”를 권한다. “이렇게 되려면 기본적으로 우리가 소유한 것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즉, 그것들의 기원, 작동 원리, 수리 및 유지 방법 등 물질적인 대상이 우리에게 분명히 드러나는 모든 방식들을 이해해야만 소유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259)

만일 어떤 물건이 고장 났을 경우, 우리가 직접 수리할 수 없을지라도 물건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다면 수리 기사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어디가 문제고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등등. 이렇게 귀동냥으로 들은 지식은 다음에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스스로 고쳐볼 용기를 주는 유용한 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개인의 지식이 공동의 지식으로 확장되고 공동의 지식이 개인에게 유용하게 사용되는, 자립과 공존이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바로 저자의 바람인 듯하다.

이제 전자 키트 따위를 만지작대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시간에 학원에서 영어단어나 수학공식을 외우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고 근사한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삶이 행복하고 평안할까? 저자는 자신의 삶을 증거로 꺼내 보이며 그렇지 않다고 항변한다. 어느 한가로운 휴일, 낡은 공구들을 꺼내 저자가 권하듯 창고에 처박혀 있는 고장 난 물건들을 뚝딱대며 자립과 공존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다가오는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함께 치러지는 해이다. 벌써부터 내년에 벌어질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선제적 이슈들이 정당 혹은 정치인을 중심으로 하나씩 제출되고 있다. 이에 따라 차기 대권주자로 누가 유력한지에 대한 하마평과 그에 따른 갈등과 줄서기가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또한 정권을 유지 혹은 탈환하기 위해 각종 정치 세력 및 정당 간의 연합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예측과 논쟁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다. 아무리 정치 혐오증이 만연해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2년 동안 좋건 싫건, 혹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 사회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소용돌이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정치의 발견>의 저자는 책 제목 그대로 정치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재발견’도 아니고 ‘발견’이라니,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껏 정치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인가. 저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주지하다시피 자생적 갈등과 투쟁을 통해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정착시킨 유럽과 달리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미국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별다른 갈등 없이 민주주의가 이식되었고, 그로 인해 “분명 제도로는 민주주의인데 그 안에 아무런 사회적 내용도 정치적 갈등의 흔적도 각인되지 않았다.” 이 위에 분단과 전쟁의 효과가 덧붙여지면서 남한과 북한은 자연스럽게 권위주의 사회로 퇴행하게 되었고, “서로 다른 사회경제적 내용을 이념의 틀 안에서 발전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이 실천”되면서 바람직한 정치적 가치들은 모두 민주주의라고 이름 붙여지는 일종의 “신화로서의 민주주의”가 성립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발견’해내지 못한다면, “그저 듣기 좋은 공허한 담론 내지 우리를 잘못된 실천으로 이끄는 이데올로기”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인가? 이는 현재 우리가 처한 조건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상화된 민주주의가 곧잘 얘기하곤 하는 직접 민주주의와 같은 체제는 극히 제한된 조건, 즉 고대 아테네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소규모 지역이나 타인의 잉여 노동력이 충분히 제공될 때에야 비로소 성립 가능한 체제이지 현대 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스위스와 같은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직접 민주주의의 가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다고 해도 그것이 항상 바람직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도 아니다. 현대 국가와 같은 대규모 사회 하에서 민주주의란 ‘인민의 직접 지배’ 체제가 아니라 ‘인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 체제, 즉 대의 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인식한다면, “대의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가 영향력 있는 정치과정으로 자리 잡는 것이며, 그때의 핵심은 좋은 정당을 만드는 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정당이 필요하고, 좋은 정당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미국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를 인용하며 정당이란 사회 갈등을 적절히 사회화하는 역할의 담지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입만 열면 화해와 통합을 부르짖는 우리 정치사를 생각한다면 다소 낯선 얘기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건 지역·종교·소득·직업·성·고용형태 등에서 구성원들 간의 사회적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차이가 자연스럽게 갈등을 형성하게 된다. “갈등 없이는 그 누구도 인간들의 사회 속에서 존재할 수 없다.” 민주주의 자체가 이러한 갈등 때문에 성립된 정치체제이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의 전개와 해소가 직접적인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다시 말해 갈등이 개별적 차원에서만 머문다면 갈등을 야기하는 사회적 제도에 영향력을 끼치기 힘들고, 더 나아가 이미 기득권을 가진 상층에 유리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최대한 많은 사람이 갈등에 관여할 수 있도록 갈등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정당이다. 사회 갈등을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기 위한 적극적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그래서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 정당이 바로 좋은 정당이다.

그렇다면 좋은 정당은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저자는 무엇보다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현재 우리의 정치가들, 특히 진보적 정치가들은 두 가지 오류에 빠져 있다. 하나는 정치에 고고한 도덕적 이상만을 투영하는 있는 경우다. 베버가 지적했듯이 “선한 목적과 도덕적으로 의심될 만한 수단을 결합”해야 하는 것이 정치의 운명이다. 정치가란 이러한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고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을 통해 유익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정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정치가로서의 책임 윤리를 방기하는 일일 뿐이다.

정치가들이 보이고 있는 다른 오류는 시민들의 의식 수준을 탓하며 ‘깨어있는 시민’이 되길 요구하거나 자신을 그들과 다르게 여기며 진보적 이론에 자족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이러한 태도는 정치가들이 자신의 무기력 혹은 소극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잘못은 현 체제가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다”는 알린스키의 지적을 깊이 새기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기초해 사회 갈등을 조직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려 노력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치가들이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 가치를 수혈하거나 계몽하려 하지 말고 보통 사람들의 경험의 세계에 기초해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야만 대중들이 자존감을 가지고 정치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의 발견”이란 ‘이상으로서의 민주주의’에서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로의 회복을 의미하며, 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정당 정치 체제의 정착과 정치가들의 각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강연으로 진행된 내용을 담은 짧은 책이기에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밀한 논증이나 제기될 수 있는 반론들에 대한 꼼꼼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저자의 출판 의도 또한 앞으로 벌어질 정치적 소용돌이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는 키잡이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이를 위한 고민과 논쟁을 촉발하는 역할로 한정하고 있는 듯하다.

이런 식의 정치 팜플렛이 대개 그러하듯이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논의는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이러한 원론을 구체적 차원에 접목할 때 생겨난다. 저자는 무엇보다 정치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목적과 수단의 불편한 조합이라는 정치적 책임 윤리를 자각하고 이를 담대하게 이끌어나갈 리더십의 출현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히 일종의 엘리트주의로 치부해버리고 무시하는 것은 저자가 비판하는 관념론이나 추상론에 머무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정치가로서의 책임 윤리를 자각하고 있는 정치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뛰어난 개인이 혜성같이 등장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당원이 지도부에게, 시민들이 정치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해야 하는가? 전자라면 (저자 스스로 비판했던) 혁명의 상황이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리며 상황의 악화를 방기하는 무책임한 혁명가들의 상황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후자라고 한다면 구성원들이 이미 바람직한 정치의 상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고, 이는 저자가 지적하듯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충분히 정착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결국 바람직한 정치가가 등장하기 위해선 시민의 의식이 성숙해야 하고, 시민의 의식이 성숙하기 위해선 바람직한 정치가가 필요한 일종의 순환 논법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채찍질하며 발전해 나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것이 바로 저자의 의도일 것이다. 정치를 하려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기에 상대적으로 정치가의 역할이 강조된 것이리다. 그러나 대중 서적으로 출판을 할 땐 이에 대한 충분한 부연 설명이 덧붙여졌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삼김시대 같은 카리스마 있는 명망가 중심의 권위주의적 정당 정치와는 다른 저자가 바라는 바람직한 정당 정치의 변별력이 어디에서 생겨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칭 - 자연의 패턴 속으로 떠나는 여행 승산의 대칭 시리즈 4
마커스 드 사토이 지음, 안기연 옮김 / 승산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누구나 한번쯤은 방의 벽지나 욕실의 타일, 거리의 보도 블럭이 만들어내는 오묘한 무늬들에 정신을 빼앗긴 적이 있을 것이다. 혹은 현대 미학을 다루고 있는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에셔의 판화를 보고 기묘한 감정을 느껴봤을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대칭을 탐구하는 수학과 수학자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이들이라면, 대체로 수학책이란 쳐다보기도 싫은 숫자와 기호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공식들이 조그마한 글씨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책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물론 이 책에서도 숫자와 기호, 공식들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수학적 훈련을 받은 이들이 아니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고차원(무려 196,883차원)에서 만들어지는 대칭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수학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다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교양 과학서로 손색이 없는 이유는 이처럼 어려운 내용을 설명해 내는 저자의 능력에 있다. 저자는 일상의 사례에서 시작해 점차 전문적인 내용으로 독자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다. 지루해질듯 싶으면 익살스런 경험담이나 농담을 끼워 넣어 킥킥거리게 만드는가 하면, 천재 수학자들의 생애와 에피소드들을 적절히 배치하여 흥미를 돋우기도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상을 각 장의 앞머리와 말미에 배치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저자의 탐구여정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동행인처럼 느끼게 만든다. 마치 수학자 친구가 들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에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은?’을 연발하고 있는 모습이랄까. 장담컨대 450여 페이지의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재미있는 교양 과학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왜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재밌는 교양 과학서를 찾기 어려운 것일까, 하는 점이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에 훌륭한 책들을 알지 못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가 선정한 “2010년 올해의 과학도서” 목록을 봐도 열 권 중 단 한 권만이 국내 저작물이라는 점은 내 생각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는 좋은 교양 과학서들이 없을까? 이는 아마 어렸을 때부터 엄격하게 문과와 이과가 분리되는 교육환경 탓일 가능성이 크다. 어린 오귀스탱루이 코시의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라그랑주가 코시의 아버지에게 했다는 조언을 들어보자. “저 아이가 문학 공부를 마치기 전까지는 수학책을 건드리거나 숫자 하나라도 쓰게 해서는 안 되네.”(214)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의 평생을 좌우할) 자신의 계열이 결정된다. 그 결정은 또 어떠한가. 대체로 수학을 잘하면 이과, 수학을 못하면 문과라는 식이다. 수학 때문에 수능성적의 격차가 많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계열이 결정되고 나면, 문과생들은 과학 과목과, 이과생들은 사회 과목과 담을 쌓게 된다. 그 담은 대학에 올라가면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진다. 상황이 이러하니 문학이나 영화와 같이 사람들에게 익숙한 내용을 활용하여 자신의 연구 내용을 설명하는 과학 서적이나, 반대로 최신의 과학적 연구 성과들에 기초한 인문학 서적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온갖 곳에서 자연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통섭’이란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겉보기 결합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통섭, 즉 인문학적 사유와 자연과학적 사유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위해선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러한 성찰이 선행되지 않는 한, 마커스 드 사토이 같은 저자의 탄생을 기대하는 일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