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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평점 :
1.
첫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제목이 <눈물 닦고 스피노자>라니. 게다가 부제는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다. 제목과 부제만 보고 언뜻 든 생각은, 또 철학자 한 명을 팔아 힐링이니 뭐니 하는 책이 나왔구나, 라는 것이었다. 이런 선입견이 든 것은, 개인적으로 최근 유행하고 있는 힐링이니 멘토니 하는 얘기들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들이 처한 여러 가지 문제들은 대부분 사회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는데, 힐링을 말하는 책들은 대부분 이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치환해버린다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책을 보자. 이 책의 어느 구절을 보면 나에게 닥친 시련을 축복으로 여기라고 충고한다.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다. 그러나 시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 시련이란 것이 과연 내가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최저임금이 터무니없이 낮아 아무리 일을 한다고 해도 생활이 어려운데, 이걸 과연 축복으로 여길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다보면 이런 종류의 글들이 제시하는 해법, 즉 지금까지와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고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라는 조언이 부질없는 소리로 들린다. 그런 채찍질의 결과가 지금과 같은 사회가 아닌가.
책을 펼쳐들자, 저자는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서점에 나와 있는 심리학 책들은 하나같이 “너의 마음의 태도나 자세를 바꾸어라. 그러면 마음이 치유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해법은 이와 다르다.”(6) 예를 들어 “불안을 단지 개인적 심리 상태로 보고 불안정한 사회 현실들, 이를테면 비정규직, 불안정 주거, 양극화, 경쟁, 빈곤, 실업, 가정 해체, 영양과 위생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단지 의학적이고 임상적 수준에서의 논의로 제한되고 만다. 불안의 배후에는 불안한 사회 현실이 있다.”(16~17) 그러니까 이 책은 개인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의 변화에만 한정되지 않고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 구조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듯하다. 잠시 가졌던 선입견을 반성하며 본문을 읽는다.
2.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자주 언급되는 다양한 정신 질환을 여러 등장인물의 가상 사례에 적용하여 풀어내고 있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다소 유치하고 과장되게 설정하긴 했지만, 사실 주인공 김철수나 그의 여자 친구, 혹은 여고생과 그녀의 어머니 등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힘들어하는 등등. 이런 유형의 사고, 태도, 행위가 보다 극단화되면 이를 정신 질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질환의 목록은 불안증, 우울증, 피해망상증, 신경증, 강박증, 과대망상증, 도착증, 공황장애, 중독, 경계선 인격 장애, 조울증, 관계망상, 분열증, 공포증까지 총 14가지나 된다.
이처럼 다양한 정신 질환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 해법은 결국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내재성’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자신의 관계망과 배치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공동체와 접속해야 한다. 서로의 욕망이 긍정되어 기쁨으로 가득차고, 서로를 사랑해서 변해가며 자신의 독특한 가치에 공감하는 공동체 속으로 자신의 배치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관계의 변화에 따라 점차 마음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6) 현대인들이 겪는 다양한 정신 질환은 결국 잘못된 관계망에 놓여 자신의 욕망이 마음껏 표출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놓여 있는 관계망의 배치를 바꾼다면, 그리하여 부정적 관계망이 긍정적 관계망으로 변화된다면 우리는 사랑과 기쁨의 관계 속에서 행복의 공동체를 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의 배치를 바꾸기 위해선 자신의 내적 욕구와 능력을 진지하게 성찰한 후, 그에 맞춰 지금과 다른 무엇가로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이 책에서 스피노자가 권하는 치유의 방법론이다.
3.
이렇게 책을 읽다보니 두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하나는 구체적 내용에 관한 것이다. 잘못된 관계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혹은 현대인은 애초에 어떻게 해서 잘못된 관계망에 놓이게 되었나?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차근차근 따져보자. 먼저 관계망이란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를 의미하는 듯하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들로 구성된 그물망 같은 구조가 떠오른다. 이런 그물망은 한 개인에게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고 그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주변의 요구에 자신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런데 주변의 요구가 개인의 자발적 욕망을 제한하는 것이라면 개인은 내적 욕망과 외적 요구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외적 요구에 따르게 된다. 내적 욕망이 억압되는 것이다. 잘못된 관계망이란 이처럼 개인의 내적 욕망을 억압하는 관계망을 의미하며, 이 억압이 정신 질환의 원인이 된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관계망은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나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과 사회는 나에게 왜 그런 그릇된 요구를 하는 것일까? 그들 역시 잘못된 관계망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릇된 요구를 했던 관계망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잘못된 관계망을 형성하게 한 최초의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잘못된 관계망이란 인간 사회의 본질적 조건인가? 아쉽게도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왜냐하면 최초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원인을 해소하는 방식의 대안이 가능할 것이고, 인간 사회의 본질적 조건이라고 한다면 관계망을 바꾸려는 혹은 벗어나려는 행위가 무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배치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개인들이 긴밀히 연결된 그물망, 즉 유기체적 관계망이라고 한다면 한 개인의 변화는 그물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배치를 바꾸는 것은 전체의 관계망을 변화시키는 일이 된다. 이는 마치 오셀로 게임과도 같다. 오셀로 게임은 판에 놓인 한 알의 색이 변하면 그에 따라 다른 색들도 변화한다. 하나의 변화가 전체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다. 아주 멋지다. 그러나 그건 어떻게 가능한가? 개인의 의지, 관계망을 벗어나려는 개인의 적극적 노력을 통해? ‘변용에의 의지’와 같은 개인적 결단이 중요한 것인가? 잠깐, 이것은 맨 처음 언급한 힐링 서적들의 조언들과 유사한 게 아닌가? 개인적인 변용과 사랑의 노력이 새로운 흐름을 창출하는 것과 개인적 마음가짐의 변화로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잘 모르겠다.
4.
그래서 이러한 의문은 두 번째 의문으로 이어진다. 과연 이러한 말들을 스피노자 자신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 스피노자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보다 ‘필연성에 대한 인식’이다.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엄격한 결정론적 세계,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최종 원인인 신(즉 자연)의 관점에서 만물을 파악하는 것, 이런 것이 내가 스피노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이다. 물론 이런 이미지는 내가 서양철학사를 읽으며 갖게 된 것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스피노자 철학의 정수가 그의 절대적인 필연성에 관한 학설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실제로, 필연성이 모든 것을 다 지배하고 있는 생각이다.”(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 하권, p.230) “우리가 사물들을 신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신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필연성에 따르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그들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즉 우리는 그들을 논리적으로 결합된 무한한 체계의 일부로서 파악하게 된다.”(코플스톤, 합리론, p.394)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의지적 자유란 환상이며, 진정한 자유란 필연성을 인식하고 그 필연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나의 견해를 따르자면 나는 본질적인 필연성에 의해 행동하고 현존하는 것을 자유롭다고 부르며, 본질적인 필연성이 아닌 다른 이유로 인해 어떤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고 실존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은 구속 상태에 있다고 부르고 있다. … 당신도 잘 알고 있듯이 나는 자유를 자유로운 의지 속에 포함시키지는 않지만 자유로운 필연성 속에는 포함시키고 있다.”(슐러에게 보내는 편지)
그렇다면 이러한 필연성에 대한 인식과 ‘변용에의 의지’와 같은 결단은 어떻게 양립가능한가? 책 속의 스피노자는 새로운 것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라고 충고하고 있는데, 만일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새로운 것으로 몸을 던질 수 있는가? 코플스톤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만일 각각이 이미 어떤 방식으로 행위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사람들에게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는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다. 물론 이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권고하는 자는 이미 그렇게 권고하도록 결정되어 있고, 권고하는 것 자체가 권고를 받는 사람의 행위를 결정하는 요소 중의 하나라고 대답할 것이다.”(위의 책, 400~401)
이처럼 치유의 방법론으로 ‘자신의 배치를 바꿀 것’을 권유하는 스피노자와 필연성을 인식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스피노자는 얼핏 모순돼 보인다. 왜 모순되어 보일까? 혹시 이는 저자의 전공이기도 한 펠릭스 가타리가 심리치료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한 스피노자이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던 스피노자에 대한 지식이 잘못되었거나, 이 책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둘 사이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고리가 있는데 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일 것이다. 어쨌든 술술 읽히는 책이었지만, 읽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점점 미궁에 빠진다. 어쩌면 이것이 철학책을 읽는 재미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꼭 읽어야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