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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좋은
글 혹은 좋은 책이란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기준은 이렇다.
글의
모든 구성 요소가 충족이유율을 만족하는 글.
즉,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단 각각이 자신의 자리에 위치해야할 필연성을 지닌 글.
그
단어,
문장,
문단이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글.
모든
구절이 결론이라는 목적지로 차근차근 향하도록 디딤돌이 되는 글.
그러므로
어떤 단어나 문장을 빼고 문단의 순서가 바뀌어도 상관없는 글,
도대체
이 개념과 저 문장이 왜 사용되었는지 알 수 없는 글,
이런
글들은 아마 좋은 글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기준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책은 세상에 없을 테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널리 인정받는 대가라 할지라도 종종 자신의 글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습이 이해가 된다.
아마도
완전성이란 인간의 것이 아닐 터이므로.
그러나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이
자신의 글을 출판해 다른 이들에게 읽히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못하더라도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한 명의 저자로서 완성되는 일일 테니 말이다.
리뷰의
서두에 이렇게 길게 좋은 책의 기준을 늘어놓는 것은 개인적으로 이 책이 대단히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는
분명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일정
부분 저자의 탓도 있다고 항변하고 싶다.
저자는
서문에서 “인문학이
필요한 자리는 사회과학으로 때우려 하고 사회과학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인문학으로 얼버무리려는 어설픈 짓을 한 것 같아 느끼는
두려움”(6)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보다 근본적으로 글을 구성하는 논리에 대해 묻고 싶다.
먼저
간단하게 제목이 준 실망을 얘기해 보자.
제목은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아마도
이 제목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라는
단어에서 ‘방식’이나
‘원인’을
떠올릴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은
어떠한 방식으로 작동되는가,
서울이
이렇게 작동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등 서울이 현재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데에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책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책은 대부분 소비 공간이자 계층 분화 공간으로써의 서울,
그러므로
물신과 배제의 공간으로써의 서울의 풍경을 피상적으로 스케치하는 데 머물고 있다.
물론
갖가지 이론을 언급하며 풍경에 대한 설명을 해보려는 부분도 있지만,
이
역시 분석이라기보다는 얼핏 스쳐지나가는 단상에 가깝다.
저자로서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어떻게’라는
단어에는 ‘어떤
방법이나 방식으로’나
‘어떤
이유로.
또는
무슨 까닭으로’
뿐만
아니라 ‘어떤
모양이나 형편으로’라는
뜻도 있으니 말이다.
그저
서울의 ‘모양이나
형편’을
스케치하는 것이 목적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공간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며,
그렇게
만들어지는 공간은 다시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므로
사람은 공간을 만들고 공간은 사람을 만든다.”(17)고
말한다.
즉,
이처럼
사람과 공간의 변증법을 인식하는 사회과학자라면,
인간이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인간을 만드는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더 나은 공간을 위한 실천을 제안해주길 바라는 게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독자의 기대가
아닐까.
이런
기대는 본문에서 더욱 무참히 무너진다.
책은
서울의 특정 공간에 대한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그 공간의 현재 모습을 탐색하고,
그러한
모습에 내포하는 의미를 분석하여 오늘날 서울,
곧
도시에서의 삶이란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않다.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설명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조합은 불협화음을 내며 삐걱대고,
맥락에
맞지 않는 삽입들이 집중을 방해한다.
예를
들어,
한
페이지 반 정도의 분량인 ‘사교육,
그
죄수의 딜레마’라는
부분을 보자.
저자는
죄수의 딜레마에 대해 간략히 설명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교육은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다.
아무도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면 나는(실은
내 아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교육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
모두
사교육을 받는다면 나도 사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뒤처지지 않을 것이므로.
결국
모두 경쟁적으로 사교육을 받게 된다.
물론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다.
‘사교육을
받으면 성적이 오른다’라는
것이다.
입시
경쟁,
정확하게는
학벌 취득을 위한 경쟁은 유전자와 훈육의 결합체다.
그러므로
사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은 결국 학부모가 가진 문화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욕망과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이다.”(82~83)
죄수의
딜레마와 사교육 경쟁의 유비는 그럴 듯하다.
개인의
이익 추구가 전체적인 파국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시
경쟁”
이후의
두 문장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입시
경쟁이 유전자와 훈육의 결합체라는 문장이 죄수의 딜레마와 사교육의 유사성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또한
결론을 의미하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다음에 나오는 문장,
사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은 욕망과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죄수의
딜레마와 사교육의 유사성에서 사교육의 장이 욕망과 규율이 작동하는 공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결론 내려질 수 있는가?
나는
이 논리구조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백번
양보하여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려 노력해보자.
사교육은
죄수의 딜레마와도 같다.
사교육
게임에 던져진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사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입시 경쟁에서는 타고난 지능뿐만 아니라 후천적 교육의 역할도 크므로,
자녀들이
입시 경쟁에 승리하기를 욕망하는 부모들은 사교육에 투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를
‘왜냐하면’으로
바꾸면 약간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바로 앞의 부분과 똑같은 말일 뿐이다.
게다가
여전히 “훈육”이니
“규율”이니
하는 단어가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부모가
억지로 사교육을 시키기 때문일까?
그저
죄수의 딜레마의 “죄수”가
푸코의 <감시와
처벌>로
비약하여 훈육,
규율,
욕망과
같은 단어들이 나열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초록물고기>라는
영화를 언급한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잠깐 소개한 후,
영화가
1997년에
만들어졌음을 상기하고 이를 곧 IMF와
연결시킨다.
이를
통해 주인공 막둥이의 몰락이 저자로 하여금 “적어도
이 순간 내게는 맨주먹 하나로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가보려다가 결국 좌절하고 마는 수많은 우리의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275)고
고백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십여
년 전의 영화지만 오늘날의 징후를 보여주는 작품일 수도 있고,
십여
년 동안 우리 사회가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바로 이어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할리우드 영화 <파
앤드 어웨이>를
소개하며,
한국
자본주의 성장을 이끌어 온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가 무너질 때,
서구
‘선진’
자본주의가
바라는 사회,
즉
사람들이 자신의 조건에선 절대 성공할 수 없을 깨닫고,
계층에
따라 격리되어 관리,
통제되는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막둥이의 몰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사회가 이제 ‘맨주먹
하나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선진’
사회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가?
그렇다면
굳이 <파
앤드 어웨이>라는
작품을 언급할 필요는 없다.
<초록물고기>만
가지고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니.
아니면
‘아메리칸
드림’은
과거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지만 막둥이의 몰락에서 알 수 있듯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초록물고기>보다
<파
앤드 어웨이>를
먼저 소개하는 게 자연스럽다.
더구나
<초록물고기>나
<파
앤드 어웨이>에
대한 설명 어디서도 저자가 이후 강조하는 공간적 격리나 통제의 공간에 대한 은유를 읽을 수 없다.
도대체
이 맥락에서 두 영화가 등장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경제학자로서의
설명력이 힘을 발휘하는 “렌트경제”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책의
대부분이 이런 식의 인과관계가 약한 나열로 점철되고 있다.
스피노자에서
알랭 드 보통까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정이현까지,
<유브
갓 메일>에서
<파
앤드 어웨이>까지,
온갖
사상가들과 소설과 영화들이 인용되지만 중요한 맥락을 가지고 언급되기 보다는 그저 지적 편력을 자랑하기 위한 소품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얼핏
떠오른 단상들을 이리저리 꿰어 가까스로 이어붙이고 있긴 하지만,
이러한
짜깁기가 점묘파의 그림이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멋진 작품이 되지 못하고 그저 마구잡이로 무질서하게 널려 있는 작품이 되고
말았다.
물론
누군가는 여기서 심오한 통찰을 읽어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책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