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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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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엊그제 신문들은 한 경제연구원의 설문조사결과를 빌려 가계부채가 올해 한국 경제의 최대 위협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전했다. 작년 말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총액은 900조원을 넘어섰으며, 매년 50조원 이상씩 증가하는 추세로 볼 때 적어도 2013년에는 100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1000조원이면 우리나라의 한해 GDP에 맞먹는 수준이며 단순 계산으로 국민 1인당 2000만원씩의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는 단지 우리나라만의 상황이 아니다. 세계로 눈을 돌려보아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저자의 지적처럼 오늘날 전 세계의 금융가들이 늘린 부채의 규모는 지구촌 국가들의 GDP를 전부 합친 것보다도 크다.”(29) 사람들은 자신들이 버는 것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부채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하고자 한다.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가 문명을 세우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기원전 35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5000여 년의 시간 동안, 유럽지역뿐만 아니라 중국, 중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걸쳐 흩어져 있는 부채의 역사를 샅샅이 검토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 저자는 부채의 역사가 곧 경제의 역사이며,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보다 나은 전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좀 더 명확히 하자면, 저자가 보기에 현재와 같은 상업경제(혹은 시장경제)가 역사적 필연은 아니며, 이러한 경제체제는 2009년 금융위기와 같이 전지구적으로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자신이 인간경제라고 이름붙인 상업경제 이전의 원초적 경제 형태로의 회복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저자는 현재 상식처럼 퍼져있는 경제학의 기본적 전제가 허구임을 지적한다. 맨 처음 물물교환으로 상품 간의 거래가 시작되었고, 물물교환의 불편함을 덜고자 화폐가 발명되었으며, 이는 종국에 현재와 같은 신용거래를 낳게 되었다는 기존의 통념이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사실과 다르며, 오히려 실제 역사는 그 순서가 정반대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물교환을 통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 시장의 이미지란 환상에 불과하며, 시장이란 군수품 조달과 같은 정부의 특정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화폐 역시 전쟁이나 약탈, 노예무역과 같은 폭력적 상황과 맞물려 탄생했음을 지적한다.

 

신용시스템은 상대적으로 사회적 평화를 누리는 시기나 신뢰의 네트워크(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든, 상인조합이나 신앙공동체 같은 초국가적 조직이든 불문) 사이에 통용되는 경향을 보인다. 반면 전쟁과 약탈이 특징인 시기에는 신용시스템이 귀금속으로 대체된다. 게다가 시대를 불문하고 약탈적인 대출이 지속되다 보면 부채위기가 나타나게 된다.”(383)

 

특히 돈의 등장은 심각한 가치의 전도를 가져온다. 우리가 흔히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라고 불평할 때의 바로 그 의미, 즉 인간을 위한 수단이 오히려 목적이 되어버려 인간이 돈에 종속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돈은 도덕적 명령이 될 잠재력을 늘 갖고 있다. 그런 성격을 지닌 돈이 확장되도록 내버려둬 봐라. 그러면 돈은 금방 매우 단호한 도덕이 되어 버릴 것이다. () 인간관계조차도 비용과 편익을 따져야 하는 것으로 바뀔 것이다.”(566~567) 그리고 그 결과는 인간마저도 돈으로 가치가 평가되고 심지어 그 가치에 따라 거래되는 노예제의 등장이다. 이는 인권의식이 대단히 발달했다고 하는 현대 사회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임금노동과 노예제도 사이에는 이상한 유사성이 있고 또 있어 왔다. () 노예주인과 노예,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원칙적으로 비인간적인 때문이기도 하다. 당신이 팔려나갔든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빌려준 처지든, 소유주가 바뀌는 순간, 당신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명령을 이해할 수 있고 지시받은 바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뿐이다.”(619~620)

 

더 큰 문제는 2009년의 금융위기에서 드러났듯이 이러한 체제가 파국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상당한 비중의 인구가 실제로 자본주의의 영속성을 믿기 시작하는 순간, 특히 신용시스템들을 마치 영원히 이 땅에 존재할 것처럼 취급하기 시작하는 순간,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629~630)라고 주장한다. 이는 부동산 불패를 외치며 집값은 언제나 뛰기 마련이라 여기고 투기에 열을 올려왔던 이들이 부동산 버블을 불러왔고, 이제 그 버블이 언제 꺼질까라는 두려움에 노심초사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경제체제 하에서 이러한 파국은 역사적 전례에 비추어보았을 때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인간경제로의 회복을 촉구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인간경제란 무엇인가. 저자에 따르면 인간경제 돈이 물건을 구입하는 수단이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끊는 사회적 통화의 역할을 하는 경제”(283)를 의미한다. 즉 돈이 지금과 같은 가치의 척도로서 등가물을 표시하기 위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음을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 의무이자 권리임을 상징하는 경제를 말한다. 그러한 경제 하에선 노예주인과 노예, 고용주와 피고용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경제적 속박을 당하는 관계가 아니라, 진정으로 동등한 인간들 사이의 상호부조가 자연스럽게 생성된다. 이와 같은 인간경제의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에스키모의 사례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일로 감사하다는 말을 듣길 좋아하지 않아요. 오늘 내가 얻은 것을 내일 당신이 얻을 수 있어요. 여기 속담에 선물이 노예를 만들고 채찍이 개를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141)

 

저자는 실제로 인간 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경제가 주요한 경제형태였음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거의 7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서 알 수 있듯이, 관련 분야를 전공하는 이들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겠지만, 거꾸로 나와 같은 비전공자들이 교양으로 읽기엔 분량이나 내용의 구성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부채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봄으로써 빚이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라는 일반적 상식에서 벗어나 성경에 나오는 희년 정신과 같은 대규모 부채탕감 계획이 전혀 허황된 일이 아님을, 나아가 얼마든지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이 깨달을 수 있게 된다면 저자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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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01-2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관점이 선명해 보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자본주의 발명은 100년이 조금 넘었지요. 그렇다면 인류역사를 놓고 볼 때 아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하죠.
그래서 희망해봅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그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구 곳곳에 자본주의의 악의 꽃은 만발했다가 이제 지려하나 봐요,
온갖 악취와 병폐에 시달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마도! 인간과 인간 사이, 인간과 동물 사이,...조금 더 가까워질 날이 오겠지 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nunc 2012-01-27 00:15   좋아요 0 | URL
저 역시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런 일은 한 250년쯤 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있어요.^^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겠죠.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2012년이 되었다. 총선과 대선이 연달아 치뤄지고 진정성이니 거짓이니 진짜니 가짜니 따위의 온갖 말의 성찬이 사회를 지배하리라 예상된다. 그 속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선 그 말들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곰씹어보는 것이리라. 그런 이유에서 1월의 관심 키워드는 정치.

 

 

  1. <말과 권력>, 이준웅 지음, 한길사

 

   요즘 트위터를 보고 있노라면 소통의 도구가 오히려 폭력과 억압의 도구로 쉽게 변질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의 의견에 대해 반론이나 합리적 토론을 하기보다는 감정적 욕설을 쏟아내는 모습들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치와 관련된 의견들에 이런 모습이 집중되는 경향이 보이는데, 그 사람이 한 말의 의미를 곰곰이 따져보기보단 그 말이 우리한에 유리한가 아닌가, 혹은 그 사람은 우리 편이냐 아니냐 식의 재단이 먼저 이루어진 후 무조건 동의하거나 무조건 반대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합리적 대화가 가능한가, 와 같은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나와 참과 좋음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른 자들과 말을 섞지 않고는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저자의 주장이 실현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이 궁금해 진다.

 

 

  

 

  2. <왜 대의민주주의인가>, 강정인 외 지음, 이학사

 

  책소개에서 제시하는 이 책의 핵심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가 '대표의 실패'와 '심의의 실패'로 압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대표와 대리의 절묘한 배합, 그리고 이 바탕 위에서 심의의 공간을 확대해나감으로써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능성을 발굴하는 것이다." 왜 오늘날 대의민주주의는 대표의 기능도 심의의 기능도 실패한 것인가, 대표와 대리의 차이는 무엇이고 심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등등 다양한 질문이 떠오른다. 한 저자의 일관된 논의가 아니라 다양한 저자들의 논문 모음집이라는 점에서 정연한 해답을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앞의 책의 연장선에서 함께 읽어봐야 할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최태욱 엮음, 폴리테이아

 

  이 책 역시 올해 벌어질 정치 논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책일 것이다. 최근 한나라당이 자신들의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용어를 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는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 실제 내용이 어떠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모든 정치 세력들은 '자유', '진보', '개혁'과 같은 용어들을 자신들의 구호로 내세우게 될 것이다. 또한 그 결과 진짜 진보와 가짜 진보, 자유주의의 진정한 의미, 자유민주주의의 허구성 등등에 대한 논쟁도 그만큼 거세질 것이다. 이 책은 <리얼 진보>(레디앙, 2010)에 대한 자유주의 진영의 대답일 수도 있지만, 올해 벌어질 논쟁의 첫 출발일 수도 있다.

 

 

 

 

  

 

  4. <20세기 최고의 식량학자, 바빌로프>, 피터 프링글 지음, 서승순 옮김, 아카이브

 

  올해 벌어질 국내 정치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 대한 관심도 중요할테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그러자 이 책이 눈에 들어온다. 책소개를 보면 "그는 ‘전 세계의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려면 농업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라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세계를 무대로 온 삶을 바친 열정적인 과학자이면서 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있음을 인식한 최초의 과학자였다."라고 한다. 전세계적 빈곤의 문제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기반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과학기술의 발전이란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물론 이는 과학이 아니라 정치가 문제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겠다. 어쨌건 자신의 부와 명예가 아닌 전인류의 복지를 위해 고민한 과학자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다.

 

 

 

  

  5. <생각하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요?>, 데이비드 로텐버그 지음, 박준식 옮김, 낮은산

 

  이 책의 주인공은 아르네 네스라는 노르웨이의 낯선 철학자이다. 소개글을 보면 그는 '심층생태학'의 창시자이자 철학교수, 레지스탕스, 환경운동가, 은둔자 등의 다채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다양한 이력을 거쳐 그가 도달한 통찰은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생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회피하지 말고 기꺼이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당연하지만 실행하기 쉽지 않은 조언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되새기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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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역사
자크 엘루 지음, 박광덕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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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컴퓨터, 스마트폰, 스마트TV 등 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현대의 기술들을 보면서 기술이 현대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최근 후쿠시마 사태로 인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이나 스마트폰 중독과 같은 현상들에서 보여지 듯, 기술이 우리 삶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또한 분명하기에 기술에 대한 성찰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회적, 인간적 또는 정신적 사실도 현대사회에 있어 기술이라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처럼 이해되지 않은 것도 없다.”는 자크 엘륄(출판사에서는 자크 엘루라고 했지만 엘륄이 더 적절하다)의 지적처럼 기술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기술이란 것이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기술의 역사>는 이러한 친숙함과 당연함을 재고해보길 요구한다.

 

엘륄은 <기술의 역사>의 영역판 앞에 실린 독자들을 위한 노트에서 현대 기술을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어서) 인간 활동의 전 분야에서 합리적으로 도달되고 절대적 효율성을 갖는 방법들의 총체로 정의한다. 즉 그는 기술이 창조하는 세계가 인위적인 세계이며, 그 과정은 체계화, 노동 분업, 표준형의 설정, 생산 규범 등과 같이 합리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종래의 기술관을 그대로 이어받긴 하지만,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합리적 과정의 기준이란 수치적 계산에 기초하여 유일한 최고의 수단을 선택하는 절대적 효율성이며,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엘륄이 특히 강조하는 것은 총체성으로서의 기술이다. 그는 내가 기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것은 하나의 결과를 얻기 위한 기계나 기술 또는 이러저러한 절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각각의 기술들이 독립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이야기하는 기술의 형태 또는 기술의 분야를 살펴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엘륄은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기계적 기술과 지능적 기술(카드색인표, 도서관 등)의 형태 외에도 현대 기술에는 세 가지 주요한 분야가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경제 기술, 이는 전적으로 생산에 종속되며 노동의 조직에서부터 경제 계획에 까지 걸쳐 있다. 둘째는 조직 기술인데, 이는 다수의 대중과 관련이 있으며 상업적 또는 산업적 분야, 법적 분야, 국가와 행정부, 경찰력에도 응용된다. 마지막으로 인간 기술이 있는데, 이것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의학과 유전학에서부터 교육 기술, 작업 지도, 노동 기술, 오락 기술, 스포츠, 프로파간다 분야에까지 이른다. 즉 그는 모든 기술적 수단들이 하나의 단일한 현상으로서의 기술아래 놓인다고 보고 있으며, 단일한 현상으로서의 기술은 인간의 삶과 활동을 지배하는 하나의 새롭고 특수한 환경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총체성으로서의 기술, 즉 현대 기술이 가지는 특징은 무엇인가? 엘륄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현대 기술의 특징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술 선택의 자동성(Automatism of Technical Choice) : 기술은 자기 지시적(self-directing)’이어서 효율성이라는 유일한 기준에 의해 인도될 뿐이며, 인간의 선택은 기술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자기증식성(Self-augmentation) : 기술은 자기증식성을 가지고 있어서 기술의 성장은 자동적이고 불가역적으로 진행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 접근은 하나의 기술적 해결을 낳지만, 이 해결은 다시 더 많은 기술적 해결이 필요한 문제들을 낳게 된다.

 

단일성(Monism) : 모든 개별적 기술을 포함하는 기술 현상은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며, 이 기술 현상은 최우선적으로 효율성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어디에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특성을 나타낸다. 게다가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은 서로 다른 부분을 보완, 강화하기 때문에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는 식으로 분리될 수 없다.

 

기술의 결합 필요성(The Necessary Linking Together of Techniques) : 기술들은 서로 결합되어발전해 간다. 예를 들어 경제 기술은 정치 기술을 요구하고, 이것은 다시 프로파간다 기술을 요구하는 식이다.

 

기술의 보편성(Technical Universalism) : 기술은 지리적으로도 질적으로도보편인 것이 되었다. 기술이 지리적으로 보편적이라 함은 기술이 이제 전지구적인 환경이 되었다는 것이며, 질적으로 보편적이 되었다는 것은 기술 체계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 퍼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기술의 마지막 특징인 기술의 자율성’(The Autonomy of Technique)으로 귀결된다. 즉 위에 서술한 다섯 가지의 특징들로 인해 기술은 경제, 정치 같은 외적 요인들과 관련하여 자율적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현재의 경제나 정치, 사회 중 어느 것도 기술발전을 결정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반대로 기술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야기하고 결정하는 핵심적인 원동력이다. 외부적인 필요성이 더 이상 기술을 결정짓지 못한다. 기술 자신의 내부적인 필요성이 결정인자인 것이다. 기술은 그 자신의 특별한 법칙 및 결정력을 지닌 그 자체로 하나의 실재가 되었다.” 더 나아가 기술의 힘과 자율성은 너무나 잘 확보되어 있어 기술 그 자체가 무엇이 도덕적인 것인지의 판단기준이 되었고 새로운 도덕을 만드는 창조자가 되었다. 따라서 기술은 새로운 문명의 창조자 역할을 하게 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러한 기술의 자율성은 결국 비관적 결정론이 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기술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기술의 목적과 특성, 자율성 및 기술적 규칙의 총체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의 소망과 열망은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1990년에 씌어진 다른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기술의 과정을 변화시키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우리는 인간 역사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게임은 끝났다. 컴퓨터에 힘입어 기술 체계는 인간 의지의 통제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나 버렸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기술 체계의 속도와 방향을 주재하는 자가 아니다. 우리는 매개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엘륄의 <기술의 역사>는 짐짓 과장되고 단정적인 어조로 비관적인 미래를 그려내고 있다. 그것이 더욱 비관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엘륄이 그려내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스마트폰을 구입하기보다는 스마트폰이 최신의 기술이기 때문에 사야한다고 생각한다. 원자력 발전소가 큰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이와 같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열광과 효율성에 대한 종속이 그 어느 곳보다 뜨거운 우리 사회에서 엘륄의 통찰력은 더욱 빛을 발한다. 물론 그가 기술 사회의 거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하는 기술혹은 기술 현상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며, 또한 실증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논증하기보다는 직관적 이해에 기대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고 있는 직관은 첨단 기술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기술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며, 기술 사회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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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일단 책은 재미있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당시에는 품위 있는표현이었는지 모르지만 요즘 읽기엔 다소 민망하고 오글거리는 편지 문구들을 견뎌낼 수 있다면, 루소와 흄이라는 세계적으로 걸출한 두 사상가 사이에서 벌어진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다. 또한 꼼꼼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충실하게 18세기 유럽 사회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풍속이나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좋은 읽을거리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읽힐 정도로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는 저자들 그리고 역자의 뛰어난 능력도 돋보인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 이상의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출판사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철학사의 또 다른 결정적인 한 장면을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처럼 엮어낸 <루소의 개>는 철학적 재미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인문학적 호기심까지 두루 충족시켜주며, 계몽주의라는 철학사의 위대한 조류를 더없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루소와 흄의 갈등이 철학사의 결정적인 한 장면이 될 수 있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유명한 사상가들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의 다툼을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사적으로 유명한 두 사람이 싸웠다더라 정도를 철학사의 결정적인 한 장면으로 부르는 것은 과도하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둘이 가진 사상의 차이로 인해 심각한 철학적 논쟁이 벌어졌거나, 두 사람의 갈등이 각자의 사고에 영향을 미쳐 독창적 사상을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때에라야 결정적인 한 장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성격상 흄의 사고방식은 대담하지 않고 온화한 반면, 루소는 타고난 반골이었다. 흄이 낙관론자라면 루소는 비관론자였고, 흄이 사교적이라면 루소는 고독을 즐겼다. 흄은 타협하기를 좋아했고, 루소는 대결하기를 좋아했다. 스타일을 보면 루소는 역설을 즐겼고, 흄은 명확함을 숭배했다. 루소의 언어가 화려하고 감정적이었다면, 흄의 언어는 직설적이며 침착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추상적인 사유를 갈망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철학자였지만, 각자의 철학적 세계는 서로 달랐다. 의견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계 맺을 가능성조차 없었다는 뜻이다.”(196~197)

 

저자들은 둘이 매우 상반된 인물이었고 이러한 차이가 둘 간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는 의도를 언뜻 내비친다. 그러나 이 차이가 두 사람간의 철학적 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바로 흄의 질투혹은 허영과 루소의 의심이라는 개인적 인성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둘이 서로 처음 만났을 당시는 각자가 자신의 대표작들을 출간한 이후이다. 즉 각자의 사상이 이미 널리 알려진 후임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의 사상에 대해 철학적 논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 만남이 철학사적으로 결정적인 어떤 장면이 될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물론 철학자의 사상과 그의 인성을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철학적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당시 유럽의 풍습이나 살롱 문화, 편지 왕래 등을 통해 인문학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철학자의 사상에 대한 소개는 한 장(11)에만 국한되어 있고, 사상과 인성의 관계가 책 전반에 걸쳐 유의미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볼테르나 디드로, 달랑베르와 같은 주요 인물들이 주변 인물로 처리되고 있기에 계몽주의라는 철학사의 위대한 조류를 더없이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역사적으로 유명한 위인들의 에피소드를 재밌게 다루고 있는 역사서 이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책을 가십사(Gossip)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가십은 재미있다. ‘그 사람이 그랬다더라.’ 이는 오늘날과 같은 스타의 시대에 완전무결할 것 같은 위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혹은 그들의 결점을 폭로하여, 대단해 보이던 그들도 결국 나와 다르지 않음을 혹은 나보다 더 천박한 존재임을 내비침으로써 소시민적 자기위안에 봉사한다. ‘대단한 줄 알았더니 별 거 아니네.’와 같은 일종의 뒷담화. 술자리의 한담으로 가십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다.

 

문제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그 밖의 모든 것을 규정해버리는 도구로 변하기 쉽다는 데 있다. 그 사람의 말, 사상, 논리는 사라져버리고 결국 그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한 인간 따위의 규정이 모든 것을 대체해 버리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흄의 회의주의와 같은 그들의 사상에 대한 고민이 기억에 남을까 아니면 의심증 환자인 루소허영에 들뜬 흄이 기억에 남을까. 아무래도 후자가 더 유력하지 않을까. 결국 이 책은 루소와 흄에 정통한 이들에게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는 출판사의 소개와 같은 만족을 주긴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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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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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2012년은 아주 기묘한 한 해가 될 것 같다. 한미 FTA의 발효로 인해 사회 곳곳에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가속화 될 것이면서, 동시에 총선과 대선으로 인해 (실제로 실현되건 안 되건) 각종 복지 공약이 넘쳐나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한쪽에선 사람들을 무한 경쟁의 정글로 몰아넣으면서 다른 한쪽에선 잘먹고 잘살게 해주겠다고 큰소리쳐대는 기묘한 풍경, 이것이 우리가 아마도 2012년에 맞이하게 될 모습일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힘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풍경은 기묘하면서도 우울한 풍경이 될 것이다.

 

현실이 우울할수록 사람들은 자꾸 다른 곳을 쳐다보게 된다. 그래서 취업이 힘들고 가진 일자리를 지키기도 힘들고 결국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지자, 사람들이 자연스레 복권 같은 것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눈돌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그 어느 곳보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팽배한 미국, 그곳에서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가장 많이 접하고 있는 노동전문 변호사 심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소개하는 미국의 우울한 풍경 하나를 보자.

 

나는 어떤 흑인 전기공을 대리해서 소송을 진행했다. 그는 경력과 기술에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응급 복구 작업을 하다 피자를 먹었다는 이유로 전력 공급 업체 컴에드(ComEd)에서 해고되어 해고 철회 소송을 냈다. 당시 단전 사태가 발생해 응급 복구에 매달리느라 끼니도 거른 채 연장 근무 중이었고, 그 혼자만 피자를 먹었으면 모르되 현장에 있던 동료 직원과 함께 나눠 먹었다. 또 현장을 오래 비웠던 것도 아니었다. 한 조각만 겨우 입에 집어놓고 곧바로 현장에 복귀했다. 그런데도 해고되고 말았다. 컴에드의 설명에 따르면, 배를 채우기 위해 현장을 잠깐 비워도 무방한 다른 직원과 달리 그는 작업 중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분류돼 있었단다. 이제 판사들은 경영자들 무서워하기 때문에 당연히 해고의 효력은 그대로 인정되었다.”(264)

 

현장을 잠깐 비워도 무방한 사람과 작업 중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되는 사람의 구분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혹은 경영자들을 무서워하는 판사들의 모습에서 수백억 대의 부당이득에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회장님들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벌인 파업임에도 불구하고 회사에 끼친 손실금을 보장하라며 수억의 배상판결을 받게 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과도한 연상일까. 이처럼 몰상식한 현실에 대해 분노와 좌절감을 느꼈다면 자연스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눈에 들어온 나라가 독일이다. 미국에서 노동전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토머스 게이건은 이 책에서 자신이 독일에 잠시 체류하면서 경험하게 된 사회보장체계의 장점들과 그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소개하고 있다.

 

저자가 무엇보다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듣는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제도는 세금 폭탄수준의 높은 세율로 인해 노동의욕 하락과 생산성 저하를 불러올 수밖에 없고, 공공 부분이 비대화되어 사회적 비효율성이 증가하게 되며, 그래서 결국 총체적 침체로 인한 국가경쟁력 약화와 GDP의 감소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보기에 이는 반만 맞는 얘기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나머지 절반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미국은 전세계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이지만 현실은 어떠한가.유럽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500시간 정도이다. 이에 비해 미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1800시간이다. 하지만 실상을 따져 보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2300시간 이상을 일한다.”(32) 게다가 “GDP 증가분의 3분의 2 이상이 부자에게 돌아갔다. 예를 들어 2005년 미국 생산직 노동자의 시간당 실질임금은 1973년에 비해 약 8퍼센트 하락한 반면 시간당 산출량은 55퍼센트 상승했다.”(33) 다시 말해 높은 GDP란 결국 더 많은 시간 일한 결과일 뿐인데다 그 상승된 GDP의 대부분도 부자들이 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어쩌구 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눈여겨봐야 될 대목이다.

 

더구나 이는 명목상의 차이일 뿐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뭇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유럽인이 누리는 6주 휴가의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할 경우 유럽인의 1인당 GDP는 대폭 올라가기 마련이다. 이러면 굳이 공공재 혜택까지 계산에 넣지 않아도 유럽인이 미국인보다 물질적으로도더 잘 산다고 할 수 있다. () 유럽인은 연간 700시간 이상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가 있다. 다른 언어를 하나 더 익히거나 스리랑카를 여행할 수도 있고 독서를 할 수도 있다. 지금의 GDP로는 측정할 수 없는 여가의 가치를 마음껏 누리며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것이다.”(34~35) 이처럼 널리 알려진 교육이나 의료, 공적 연금과 같은 공공재 혜택뿐만 아니라 경제적, 물질적 측면에서도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자신이 노동전문 변호사인 이유도 있겠지만, 저자는 그 이유를 노동 관련 제도에서 찾는다. 저자가 보기에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은 바로 직장평의회, 노사공동결정, 지역별임금결정제도이다.

 

직장평의회는 노동자의 대표로 선출된 위원이 노동 여건 등과 관련된 사안을 경영자와 합의해야 하는 제도로, 직장평의회 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직장 동료의 복지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기업 경영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142) 또한 노사공동결정제도는 회사 이사회를 구성하는 데 있어 이사회의 이사는 주주와 헤지펀드 쪽에서 절반을 뽑고 사원 쪽에서 그 나머지 절반을 뽑아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말한다.(143) 이처럼 직장평의회와 노사공동결정제도는 노동자가 직접 경영에 참여함으로써 경영자를 감시하고 노사 간의 자연스러운 합의를 유도할 수 있는 제도이다. 물론 이 두 제도는 저자도 인정하듯이 독일이라는 지역적 특수성, 즉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와 이로 인해 기술자를 우대하는 풍토 등이 반영되어 오랜 시간 정착되어온 제도이기에 다른 나라에 곧바로 적용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제도인 지역별임금결정제도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제도는 산별노조와 유사한 형태의 동일한 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로 구성된 노동조합이 “1평방마일(1.6제곱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동일 업종 노동자의 임금을 일괄적으로 정하는 단체교섭”(146)을 할 수 있는 제도로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의 원칙이 최대로 실현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의 의미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역별임금결정제도의 핵심은 어떤 기업도 임금을 놓고 다른 기업과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과 똑같은 세상에서 살 수 있게 하는 진정한 사회민주주의 제도이다. 이 제도가 있기에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독일이 상대적으로 평등한 것이다.”(147)

 

특히 이는 우리나라처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사회에서 주목해봐야 할 제도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생각을 잠시 덧붙이자면, 나는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장 시급히 고려해야 할 것이 바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원칙의 현실화라고 생각한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2010년 현재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은 54.8%라고 한다. 물론 이는 전체 직종별 단순 비교이기 때문에 동일 노동에서는 그 비율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얼마 전 한 잡지에 현대자동차나 모 중공업의 경우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연봉은 절반을 받고 있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게다가 정규직이 받는 4대 보험이나 상여금, 자녀학비지원 등 각종 복지제도를 고려하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에서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장하는데 이는 세계 경제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현실적 조건을 고려한다면 당장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중간 단계로서 동일 노동 동일 임금제도가 도입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실질적 임금 상승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제도는 같은 일을 하면 같은 임금을 받는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쉬운 주장이면서도 동시에 정규직과 비정규식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처럼 탄탄한 독일의 사회복지체계가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독일 경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온 원동력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물론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은 독일 모델의 한계나 단점에 대한 언급보다는 예찬 일색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또한 저자가 항변하고 있듯이 독일 모델의 한계나 단점은 미국 언론에서 지겹도록 떠들어대고 있기에 굳이 이 책에서 균형을 맞추려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예찬 자체가 편향된 언론에 대한 균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애쓸수록 우리의 삶의 질은 하락한다.”고 저자는 단호하게 주장한다.

 

한 때 한 카드 회사의 광고로 인해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아마 다가올 새해에도 올해에는 돈 많이 벌어라와 같은 이야기들이 오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열심히 일한 만큼 그 대가나 나에게 돌아오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국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야라는 자괴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어떤 나라로 만들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심화와 정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의 집중이 동시에 진행될 2012년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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