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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편지 - 화석연료에 중독된 인류에게 보내는 경고
리처드 하인버그 지음, 송광섭.송기원 옮김 / 부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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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4월 20일, 해상 석유 시추시설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하루 5,000 배럴(몇몇 전문가들은 하루 10만 배럴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에 달하는 원유가 멕시코 만 바다 속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한다. 사고가 발생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도록 아직 구멍 뚫린 채취관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고, 그 사이 기름은 계속 바다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2007년 태안반도의 참혹함을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한 달이 다 되도록 채취관을 막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손상된 채취관이 심해 1,500미터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고로 인해 우리 국민이 알게 된 지식 중 하나는, 수심 40미터 정도만 되어도 인간이 직접 작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다 속 1,500미터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보수 작업이란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난 7일에도 한 차례 보수를 위한 기술적 시도가 있었으나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실패했다고 한다. 실패 후 해당 석유회사의 최고경영자는 "심해에 대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게 아직도 엄청나게 많다"며 "위험 상황과 실제로 맞닥뜨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결국 발생 가능한 위험 요인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적절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심해 채굴을 시작했다는 고백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성급한 석유 채굴이 진행되고 있는가? 이는 아마 이 책의 저자가 심각한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는 ‘석유정점’(Peak Oil) 때문일 것이다. 석유정점이란 “세계의 석유 채취가 정점에 달하는 시기를 지적하는 용어”로, 저자에 따르면 “대부분의 정통한 분석가들은 이 시점이 20~30년 안에 닥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한다. 몇몇 보수적인 분석가들은 그 시기를 2010년으로 잡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어찌됐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석유 생산이 감소하리라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석유 생산의 감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우리나라의 경우 전체 에너지의 석유 의존도가 45% 정도라고 한다. 다시 말해 우리 생활의 거의 절반이 석유를 활용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이 유지된다면 석유가 고갈되었을 때 닥칠 불편이란 대단할 것이다. 일상적으로 전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현존하는 운송 수단인 자동차, 배, 비행기 모두 석유를 사용하는 기기이므로 지역 혹은 국제간 무역은 파탄날 것이다. 석유 의존도가 높은 산업화된 농업이 타격을 입어 식량 위기가 심각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이라크 전쟁과 같은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점점 희소해지는 석유자원을 쟁취하기 위한 국제적 분쟁이 증가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100년 후의 가상의 인물이 보내는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이 과정, 즉 석유 감소로 우리가 처하게 될 예측가능한 미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후변화와 석유정점의 해결책은 대체에너지원의 발견이라는 대체 전략과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거나 에너지 없이 견디는 보존 전략 두 가지뿐이다.”(210)

물론 정점이 곧 고갈은 아니므로 석유가 완전히 고갈되기 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석유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실용화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진행되어온 대체에너지원 개발을 떠올려 보자. 원자력은 체르노빌 사태로 알 수 있듯이 그 안전성에 대해 안심할 수 없다. 또한 안전성이 충분히 확보된다고 해도 우라늄이라는 물질 역시 한정되어 있는 자원이라는 점에서 지속성을 보장할 수 없다. 태양에너지는 석유에 비해 에너지 효율성이 대단히 떨어져 보조수단은 될 수 있어도 대체제가 되긴 어려워 보인다. 곡물을 활용한 바이오디젤은 대규모 식량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결국 현재 상황에서 파국으로 치닫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유지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거나 에너지 없이 견디는 보존 전략”, 즉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체제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 이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소련의 붕괴로 값싼 석유의 사용이 불가능해졌던 쿠바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주장한다. 물론 지금과 같은 편리함은 다소 감소하겠지만, 농촌 문화의 부활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꾸준한 노력만이 우리 사회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고 강조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라다크라는 마을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삶의 모습이 이미 과거에 있었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삶의 모습은 석유가 고갈됐을 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그 삶의 방식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톡톡한 대가를 치루고 떠밀려 갈 것인가, 선택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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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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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혜경이를 업은 혜경 엄마가 어두운 골목에서 나에게 했던 말은 ‘할 만하겠니?’였다. 내 손에는 그때 만 원이 쥐여 있었다. 까슬한 지폐의 감촉이 생생하다. 손에 땀이 찼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자꾸 살 만하겠니,로 떠올리곤 했다.”(오늘처럼 고요히) 

작가에 의하면 원래 제목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소설집의 경우 대표적인 단편의 제목을 책 제목으로 뽑곤 하는데, 책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 중 그런 제목을 가진 소설은 없다. 그러므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란 여기에 실린 소설들을 통해서, 그리고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글쓰기를 통해 작가가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냐는 물음에 스스로 찾은 답이었다.”(작가의 말)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먼저 ‘누구나 아는 것들’은 무엇일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자 서로 다른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누구나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게 있기나 한 걸까? ‘있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이다. 만일 엄마와 함께 지하철 노숙하는 여자아이에게 누군가 호의를 베풀어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자신의 방에 재워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세상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앞으로 나에게 벌어질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열세 살) 혹은 이제 막 가슴에 멍울이 지기 시작한 여자아이가 고속도로 휴게소에다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가기 위해 고속도로 갓길을 걷고 있을 때, 누군가 차를 세워 태워주고 허기를 달래라고 만두를 건넨다면? “나는 다 먹기도 전에 내가 먹은 만두 값을 지불해야 된다는 것을 직감했다. (…) 선의도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순애보)

그렇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까 결국 살아간다는 건 항상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걸 알기에 귀찮고 하기 싫고 당장 때려 치고 싶더라도, 매일 아침 꾸역꾸역 학교로 일터로 지친 몸을 이끌고 기어나가는 것이다. “아니, 힘들었어. 하지만 힘들 수 없는 일 년이었다. 성과물을 받기 위해 소비된 시간이었으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러니 공평하다.”(엄마들)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하루하루를, 일 년을, 그리하여 마침내 평생을.

그렇다면 우리는 이 자명한 사실을, 이 삶의 비참함과 고통을 누구나 알면서도, 왜 ‘아무도 말하지 않는가.’ 그러나 거꾸로 삶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굳이 말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오히려 “일상의 너저분함을 고스란히 보이는 걸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이 비루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섬처럼 외롭더라도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었다. 그들에게 동정을 받거나 충고를 들을 바에야, 오해를 받으며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차라리 나았다.”(하루)라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누구나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기에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억울한 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데 굳이 말할 이유는 무어란 말인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고통이란 오로지 그 자신만의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말하고들 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과 공감하는 이의 고통이 같은 것일 수 없다.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기에 인간의 언어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선험자들이 초산모에게 산고의 절대적 고통에 함묵하듯이, “그것은 경험으로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엄마들) 설령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줄 적절한 언어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타인에게도 적절한 것인지 확신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우리는 삶의 비참과 고통 앞에서 침묵하게 되는 것이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라고 자조하면서.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저 ‘살 만하겠니?’라고 묻는다.

당신은 살 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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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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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모순된 면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순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앎의 불일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텔리들이 특목고 비판하지만 자기 아이가 특목고 들어가면 좋아들 해요. 아이가 여상이라도 가 봐요.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어요.”(p.34)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경우는 앎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신념과 평소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가령 “시장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한테는 시장 경쟁력을 알뜰하게 챙겨주는 그런 모습”(p.64)을 보이거나 “껍질이 주는 기득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만날 지배계급들을 욕하는”(p.305) 경우, 그의 앎과 삶은 모순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보통 ‘위선’이라고 부르죠.

또한 앎과 앎의 불일치도 있습니다. 이는 한 영역의 앎과 다른 영역의 앎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하는 분들이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p.121)이거나 “평소엔 좌파연 하다가 선거 때만 되면 고심 끝에 비판적 지지”(p.198)를 한다면, 그는 사회 진보와 가정 진보, 바람직한 정치 전략과 현실적 정치 전략 사이의 상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보통 ‘지적 불성실’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러한 모순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가진 모순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모순을 인식했을 때 나오는 반응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모순을 교정하거나 아니면 회피하거나.

“변한 건 자신인데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변화한 세상에서 자신은 여전히 가장 현실적인 진보다, 이런 주장들을 한단 말이에요.”(p.151)

자신의 모순을 교정하려는 노력, 즉 문제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나하나 되짚어 고치려는 시도를 우리는 ‘자기 성찰’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자신의 모순을 이러저러한 외적 조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회피해 버릴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를 ‘자기 합리화’라고 부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쉽게 자기 합리화에 빠져듭니다. 성찰보다는 합리화가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이죠. 성찰은 앎이든 삶이든 혹은 둘 모두든 무언가를 바꾸어야 하는데, 앎과 삶 모두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돼 온 것이기에 이를 바꾸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합리화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서도, 다시 말해 아무런 괴로움 없이도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 것처럼 느껴지죠.

김규항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은 우리들이 가진 위선과 지적 불성실을 지적하며,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터뷰어인 지승호의 지적처럼, 많은 이들이 그에게 “만날 그 얘기 지겹지 않아? 뒤에서 힘 빼는 거야, 뭐야? 자기 혼자 1등급 한우마냥 명품 진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p.9) 등등의 불평을 터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 역시 겸연쩍음을 모면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한 방식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오늘은 없어요. 만날 미래만 있죠. 보다 나은 내년, 보다 풍요로운 3년 후, 보다 안정적인 5년 후, 그리고 또 내 아이의 10년 후, 늘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입니다. 그게 평생 동안이에요.”(p.302)

아테네의 등에 역할을 자처했던 소크라테스처럼, 김규항은 '돈'과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해져 버린, 또한 그렇게 자기합리화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유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잘사는 게 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에만 주변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즉 바로 '지금 여기'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주었던 아테네인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주는 불편함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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