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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뭐라 이름붙일 수 있을까? 어디에서 어떤 근무를 했던지 간에 자신의 군생활이 가장 힘들었다고 주장하는 전역자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대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장 크고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당대에 대한 규정은 우리가 몸담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다소 과장될 수밖에 없다. 언제나 자신의 살고 있는 시대가 전환의 시기, 위기의 시기, 혁명의 시기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넘쳐났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을 염두에 둔다 하더라도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유동하는 근대란 무엇인가? 번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제도·풍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14)라고 한다. 바우만이 보기에 이 세계에서 우리들의 모든 것, 아마 거의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16) 마르크스에 의하면 견고했던 모든 것을 대기 속으로 녹여버리는, 혹은 슘페터가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이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은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함으로써 자신의 내적 동력을 얻는다. 마치 액체처럼 고정되지 않고 환경과 조건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자본주의적 양식이 우리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다고 바우만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유동하는 근대를 특징짓는 현상은 무엇이 있을까? 그는 먼저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적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를 보면 알 수 있듯,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에 가서 무슨 일을 했고, 무슨 물건을 샀는지, 즉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경쟁적으로 전시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 하는 것이다. 실로 전시라는 말이 적절한데, 이 모습이 마치 쇼핑몰 진열장에 전시된 상품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제원을 지칭하던 스펙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오히려 개인의 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전용되는 현실을 보면 쉬이 동감할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을 상품으로써 전시한 결과는 역설적으로 프라이버시의 소멸이다. 프라이버시란 인권 의식을 바탕으로 성립된 근대 사회 이후 결코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권리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프라이버시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었다.”(74)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을 전시하는 모습, 즉 자신의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에 강제적 혹은 자발적으로 노출함으로써 근대 이후 프라이버시가 가지고 있던 의미는 희석된다. 혹은 오히려 볼거리로 전락한다. 더구나 현대인들은 휴대전화를 사용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끊임없는 접속 가능성과 끊임없는 이용 가능성”(81)의 상태에 놓아둔다.

 

이처럼 타인에게 보여지고 이용되길 바라는 삶은 우리를 유행에 민감하게 만들고, 새로운 상품을 계속 소비하게 만들고, 기업과 병원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기준에 자신을 맞춰가게 만든다. 이는 얼핏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강제적 과정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시장은 노동의 유연성을 요구할 수밖에 없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일상화된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포장해야만 한다. 소비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즉 소비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마저도 소비시장에 팔 수 있는 상품으로 제공해야만 하는 사회”(325~326)라는 악순환이 우리가 처한 현실인 것이다. 결국 바우만의 진단은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의 삶, 상품이자 볼거리인 삶이 바로 우리 현대인의 삶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양식은 결국 불평등으로 귀결된다. 소비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소비 능력의 차이는 자연스레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예란 테르보른의 말을 빌려 이러한 물질과 자원의 불평등생명 유지에서의 불평등, 더 나아가 실존적인 불평등을 낳는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는 도덕이 황폐화되는 현실이나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지해지거나 무감각해지는 상황, 또 인간의 일반적인 고통뿐 아니라 인간들이 매일 동료 인간들에게 가하는 그 해악에 대해서까지도 습관적인 일로 바라보게 되는 상황”(193), 즉 우리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긍정적 가치들이 점차 침식되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점차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잃는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 도래하는 것이다. 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31) 이처럼 이 책에 실린 마흔네 통의 편지를 통해 바우만이 우리에게 전하는 현대 사회의 양상은 대단히 우울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있는가? 마지막 편지에서 바우만은 카뮈를 인용하며 반란과 혁명, 자유를 향한 노력들이야말로 인간의 실존에 필연적인 측면들”(389)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이 새로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싸워나가길 요구하는 것이다. 편지의 제목도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이다. 주목할 것은 나의 반항나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나의 반항이 단지 나의 존재만을 보증해 준다면, 이 저항은 그저 무수히 많은 개별적 존재의 자기 확인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된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단순한 자기 확인은 자폐적 위안이나 과시일 뿐이다. 나의 저항이 타인과 연대로 확장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저항은 의미를 획득하고 마침내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우만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사회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현대 사회가 강요하는 질서에 저항하고 벗어나야 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관심을 회복해야 한다. 결국 고독을 위해 연대하라. 이 조언이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도록 귀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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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2-10-31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입니다.....^^

nunc 2012-10-31 12: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공포는 돈이 된다. 공포 영화나 놀이공원의 각종 기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식의 공포 체험도 돈이 되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보거나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공포를 체험해 봄으로써 느끼는 즐거움때문이지 순수한 공포 그 자체 때문은 아니다. 진짜 돈이 되는 공포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모든 식품 중에서도 우유는 불순물, 특히 결핵과 장티푸스균이 번식하기에 최적의 장소”(36)

“‘창자의 부패로 인해 유발되는 질병이 사라진다면 인간의 수명은 120-140세까지도 연장될 수 있을 것이다.”(52)

햄버거는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것보다 약간 더 나은 것일 뿐”(89)

화학 첨가물이 식품의 부패를 막거나 지연시킨다면 분명 소화 시스템에도 유해할 것”(124)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비타민 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다.”(147)

신선하거나 자연 그대로의식품을 멀리하고, 저장 식품과 가공식품을 선호하는 트렌드가 미국인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173)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에서 간단히 뽑아본 목록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먹거리를 두고 벌어졌던 다양한 논란들, 즉 대개는 터무니없었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던 사건들과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배경을 폭로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주로 190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걸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20세기 초와 미국이라는 시간적·공간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리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왜일까? 당장 오늘의 신문을 펼쳐 사회면이나 건강, 혹은 과학 지면을 펼쳐보기만 해도 위와 유사한 문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포는 돈이 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되는 일은 생명력이 길다.

 

공포는 왜 돈이 되는가? 아마 그것은 인간이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 먼 원시시대의 인간은, 아니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최초의 생명이 탄생한 이후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의 생존과 번식을 최상의 목표로 삼았을 테고, 안정적인 생존과 번식을 위해 위험한 것과 마주치면 무조건 도망치도록 본능적으로 학습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유전자 어딘가에 깊이 각인된 위험을 회피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성향은 생명의 진화를 비롯하여 문명의 발달과 과학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자연을 정복했다고 자부하는 현재에도 그런 성향이 남아 있을까? 당연하다. 수십만 년 혹은 수백만 년을 단위로 이루어지는 장구한 진화의 역사에서 약 1만 년의 문명의 역사나 겨우 수백 년밖에 되지 않은 과학혁명 이후의 시간은 인간에 내재된 성향을 변화시키기엔 대단히 짧은 시간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여전히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와 경계심을 가지고 있고, 잘 알지 못하는 분야나 영역에 선뜻 뛰어들길 주저한다. 오히려 자신 주변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기에 문득 비가시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어떤 것이 나타나게 되면 더 큰 불안을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광우병 사태를 생각해보자. 미국산 소고기를 먹고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자가용을 이용하다 사망할 확률보다 훨씬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미국산 소고기를 꺼려했고 수입을 결정한 정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이는 자동차 운전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에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반해, 광우병은 언제 어떻게 어떤 경로로 나에게 침투할지 알기 어렵기에 극미한 확률에도 불구하고 더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위험회피성향의 당연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두려움과 불안, 즉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투자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생존을 위한 자연스런 반응인 것이다.

 

기업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공포 마케팅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걸 먹지 않으면 이런저런 병에 걸리게 될 거야.’ ‘이걸 먹으면 이렇게 건강해질 거야.’ ‘저런 걸 먹으면 해롭기 때문에 이런 걸 먹어야 해.’ 등의 말들이 전문가의 연구 결과라는 이름표를 달고 미디어에 등장하면 사람들은 불안감에 휩싸여 기존의 식습관을 바꾸고 새로운 식품으로 몰려간다. 열기가 한풀 식을 때쯤이면 다른 것이 등장하여 또 한바탕 바람을 일으킨다. 이 주기가 하도 다양한 종류에서 반복되어 일어나다 보니 이번에 몸에 좋다고 판명된 것이 얼마 전에는 몸에 해롭다고 판명되어 끊었던 것이라는 코미디 같은 일도 벌어진다.

 

문제는 이러한 공포마케팅이 음식과 같은 필수품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식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것이기에 조심스럽게 여기는 게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경쟁 사회 속에서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아니 적어도 남들에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식으로 불안감을 자극하는 마케팅이 점점 확장되어 간다. 성형과 미용 그리고 사교육이 바로 이런 공포마케팅으로 급성장한 대표적 분야일 것이다.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소비. 이를 아는 기업들은 더 많이 팔기 위해 계속 불안감을 자극해야 한다. 일종의 협박의 경제학.

 

어떻게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 정답이 있을 리 만무하겠지만, 내 개인적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무관심합리적 의심이 꽤 효과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무관심이란 건강에 대한 무관심을 말한다. 좀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건강에 대한 조바심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유발해 더 해롭다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먹고 싶은 걸 먹고 먹기 싫은 걸 안 먹었을 때의 심리적 행복감이 억지로 무언가를 먹거나 안 먹을 때의 괴로움보다 더 건강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 근거는 없다(!).

 

합리적 의심이란 미디어의 속성과 과학적 발견의 절차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미디어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된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다. 또한 과학적 발견이란 수많은 반복된 검증 실험을 거쳐 이론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기에 논문 하나로 모든 게 명백하게 밝혀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유명 학술지에 실린 논문 하나를 근거로 미디어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면 일단 의심하고 기다려보는 것이다. 반대 주장이 나와 뒤집히든 근거들이 추가되어 확증되든 할 테고, 그때 뭔가 변화를 시도해도 충분하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기다리다보면 무관심(!)해지게 된다. 꽤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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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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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얼마 전 고종석은 한 칼럼 지면을 통해 절필을 선언했다.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는 칼럼의 구절은 시대의 어떤 분위기와 조응하면서 깊은 울림을 줬다. 그러니까 무한 경쟁이 야기한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탓에 더 이상 책 읽을 여유 따위는 가지지 못하는 세태. 뿐만 아니라 정부비판이 상관모독죄가 되고 북한을 조롱하기 위한 리트윗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는, 그리하여 우리가 자신의 말과 생각을 스스로 검열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글의 힘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깨달은 자의 절망감 같은 것이 읽혀졌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절필에 대해 아쉬워하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고백과 달리 그의 복귀를 촉구하는 칼럼이 두 일간지에 나란히 실리기도 했다(박구용, <고종석의 절필, 피로와 배반 사이에서>/오길영, <어느 에세이스트의 절필>). 과연 요즘 시대의 어떤 에세이스트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도 그의 글을 찬찬히 읽어본 이라면 그의 글이 주는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수려한 문체와 단정한 생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억압적인 사회 풍토가 오랫동안 지속된 탓에 진보연하는 것이 지식인 사회에서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져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유주의적 우파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내비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에둘러 말하거나 의뭉스럽게 눙치지도 않는다. 비록 많은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길 꺼려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평가를 고려하여 짐짓 점잖은 척하는 일이 그가 자주 쓰는 표현처럼 부정직한 짓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글쓰기. 이것이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이다.

 

그의 정직함은 무엇보다 그의 자유주의에서 기원한다. 그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라는 근대적 이념과 체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의 신성함에 대한 옹호, 그 중에서도 사상·양심·언론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신념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처럼 억압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이 도저한 자유주의자의 음성은 어떤 쾌감마저 준다.

 

<감염된 언어>는 제목처럼 언어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길게 돌아온 이유는 그의 언어관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신문과 잡지 같은 공적 지면을 통해 한국어에 대해 숙고하고 음미해보길 권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들, 즉 한국어의 매력을 수려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말들의 풍경>, <모국어의 속살>, <어루만지다> 등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말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언어를 훌륭하게 다룰 줄 아는 이의 언어에 대한 태도, 언어관을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감염된 언어>.

 

그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언어가 소통의 도구임을 확고히 한다.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소통할 수 없을 때 언어는 쇠약해지고 끝내 사멸한다.”(98)언어가 세계관을 규정한다.’와 같은 말들에 익숙한 요즘의 시선에서 보면 구닥다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학자로서의 배움과 기자로서의 경험은 언어가 지닌 도구 이상의 몫이 언어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닐 것”(205)이라는데 무게를 실어주는 듯하다.

 

소통의 도구로써의 언어라는 기둥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하나는 소통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긍정이다. 그는 외래어나 한자 교육, 심지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통신 언어에 이르기까지 언중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관대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대부분의 경우 한자어의 이해에 한자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자 지식이 한자어의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241) “방언이 박멸해야 할 언어 바이러스가 아니라 한 언어를 풍성하고 아름답데 만드는 꽃잎이요 곁가지들이라면, 채팅 언어도 그럴 것이다.”(103)

 

이런 생각은 복거일의 제안으로 한바탕 논란이 된 적이 있는 영어공용화론의 긍정적 검토에까지 이른다. 그가 보기에 영어는 이미 세계어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 이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영어를 무시하는 일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오늘날 언어의 위계 질서 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영어다. 그리고 앞으로 머지않은 시기에, 영어를 쓰지 않고 민족어를 쓴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추방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196) 인터넷을 오가는 언어의 80%가 영어라는 현실을 떠올려 볼 때 그의 주장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이를 미국의 패권적 현실에 순응하자는 주장으로 읽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개정판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영어공용화론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205~206)

 

그렇다고 그가 영어공용화를 언어 정책의 차원에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언어는 사용자들의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필요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진화적 과정일 뿐이다. 굳이 정책적으로 개입해서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부질없는 짓이다. 가장 좋은 문화정책이 문화를 그냥 놓아두는 것, 즉 무책이듯, 가장 좋은 언어정책은 언어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175)

 

그러나 이 부질없는 짓을 열심히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언어순수주의자들이다. 그래서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언어순수주의에 대한 반대로 뻗어나간다. 그가 보기에 언어순수주의자들은 언어의 본질이 소통의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들이다. 순수주의자들 가운데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 국어사전의 한 구석에 박혀 있을 뿐 실생활에서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말을 끄집어내 사용하는 경우 말이다. 이런 말들은 그 소통 효과에서 외국어나 다름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런 실천을 해야 하는가.”(99)

 

그래서 그는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허구적인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져왔다고 해도 수백 년 전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얼마나 다른지 논증한 후, 순수한 한국어를 복원하려는 시도들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혐의를 읽어낸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30)

 

결국 한국어에 담긴 아름다움에 천착하면서도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깊이 몸담고 있는 자유에의 갈망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들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다양성의 무늬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104) 물론 이 결론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던 감염된 언어에 대한 시선이 어느새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종석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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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드디어 11기 신간평가단의 마지막 추천.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라고 하지만 막상 과학 관련 도서는 거의 추천된 적이 없는 듯 하다. 마지막이니만큼 한번쯤 과학 도서가 선정되길 바라며 추천 도서를 골라본다.

 

 

1. <양자 불가사의>

양자역학과 관련된 책들을 몇 권 읽어보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양자역학을 내 것으로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물리학적 배경지식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아마 양자역학 자체가 가진 난해함도 한몫 하지 않았을까 위안도 해본다. 해서 '양자역학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는 소개글을 보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번에는 뭔가 좀 명확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이번 달에도 양자역학을 쉽게 설명했다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다. 물론 직접 읽어봐야 알겠지만 교양강좌의 내용을 출판한 책이라는 점이 기대를 갖게 한다.

 

 

 

 

2. <얽힘의 시대>

책소개는 다음과 같다. "양자 물리학의 근본 개념 중 하나인 양자 얽힘을 파헤친 대단히 독창적이고 풍성한 탐구의 기록이다." 양자역학도 어려운데 '양자 얽힘'이라니. 책의 목차를 보면 시기별로 양자역학의 역사를 일별한 듯한 시도로도 보인다. <양자 불가사의>를 읽으며 함께 읽기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추천 목록에 올린다.

 

 

 

 

 

 

 

3. <미국 기술의 사회사>

기술사 및 기술사회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루스 슈워츠 코완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절판된 <과학기술과 가사노동>이라는 책에서 과학기술이 가사노동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주었으리라는 통념을 깨트려주기도 했고, 냉장고가 왜 지금처럼 윙윙 소리를 내게 되었는지를 추적하여 기술 선택의 사회적 맥락을 조명한 학자이기도 하다. 이런 저자의 책이 새롭게 번역되어 나와 기쁘다.

 

 

 

 

 

 

4. <기계산책자>

'기계비평'이란 것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는지 모르겠지만, "기계와 인간 간의 인터페이스가 갖는 의미를 파헤치고, 그것이 낳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삶에 방식에 대해 깊이 사유한다."는 소개로 볼 때, 기술의 사회적 효과에 대한 성찰을 의도하고 있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요즘은 워낙 비평이란 단어가 포괄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기에 그것이 피상적인 인상비평일지 아니면 (위의 코완과 같이)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한 깊이 있는 연구일지 잘 모르겠다. 어쨌건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5. <광기>

개인적으로 라캉 이론가 중 가장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새 책이다. 책소개를 죽 훑어보니 역시 정신분석학의 기본적 개념들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려는 의도로 쓰여진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심 저자의 새 책이기에 아무 고민없이 추천 도서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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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절필 선언 이후로 주변에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종종 들린다. 그의 저서 대부분을 구입해 읽었고 최근의 칼럼들도 챙겨 읽던 충실한 독자로서 나 역시 어떤 아쉬움이 있다. 마치 나의 과거 일부분이 영원히 닫혀버린 느낌. 그의 수려한 문장이 주던 짜릿한 쾌감을 더 이상 맛볼 수 없다는 아쉬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시 복귀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확고한 자유주의자 논객으로서 우리 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구체적 대안을 요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그에겐 논객으로서의 새로움이 없었다. 사회에 대한 발언은 점점 줄었고, 간혹 발언을 한다고 해도 예전에 했던 얘기들이 변주되어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회고담으로 차곡차곡 채우고 있었다.

 

더 이상 새롭게 할 말이 없는 논객. 이는 두 가지 가능성을 의미한다. 하나는 그가 사회비평을 왕성하게 하던 시기로부터 우리 사회가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기에 동일한 얘기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하나는 지적 게으름으로 인해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를 내놓을 게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글쓰기의 동력을 가질 수 없을 테니, 절필은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물론 (선의의 독자로서) 나는 전자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절필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 사실 그가 자신의 글에서 꾸준히 제기한 요구사항은 대단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민주주의 공화국의 원칙을 지키고 사회적 소수자를 보호하자.’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민주주의를 유린할 가능성이 높은 박근혜가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어 있고,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억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이다.

 

이건 단지 보수 진영만을 향한 것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문구 중 하나는 정치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현실 속에서 만들어놓은 결과이지 그의 내심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후, ‘노무현의 진정성운운하는 이들에게 했던 일갈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그놈의 진정성을 놓지 못하고, 오늘날 다시 안철수나 문재인 등에게 덧씌우고 있다. 이쪽도 시궁창이긴 마찬가지다.

 

근 십여 년 동안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짜증. 나는 이것이 그를 절필로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짜증이 누적되고 왜곡되어 독설로 바뀌기 전에 놔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고맙게도 그는 많은 책을 출판해 놓았기에 그의 문장이 그립다면 언제든 다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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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2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그래서 고종석의 글이 요즘 안 보였던거군요...글쓰는 것이 전부인 글쟁이에게 글쓰는 일이 무능력해 보이고, 그래서 글쓰는 일을 포기했다는 말이 너무 서글프게 들리네요.

nunc 2012-09-27 11:54   좋아요 0 | URL
그냥 제 개인적인 느낌과 해석일 뿐입니다.^^;
혹시 절필선언 안 읽어보셨다면,여기서 읽어보시면 됩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29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