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된 언어 -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 개정판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고종석은 한 칼럼 지면을 통해 절필을 선언했다.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는 칼럼의 구절은 시대의 어떤 분위기와 조응하면서 깊은 울림을 줬다. 그러니까 무한 경쟁이 야기한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탓에 더 이상 책 읽을 여유 따위는 가지지 못하는 세태. 뿐만 아니라 정부비판이 상관모독죄가 되고 북한을 조롱하기 위한 리트윗이 국가보안법 위반이 되는, 그리하여 우리가 자신의 말과 생각을 스스로 검열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 글의 힘이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깨달은 자의 절망감 같은 것이 읽혀졌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절필에 대해 아쉬워하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고백과 달리 그의 복귀를 촉구하는 칼럼이 두 일간지에 나란히 실리기도 했다(박구용, <고종석의 절필, 피로와 배반 사이에서>/오길영, <어느 에세이스트의 절필>). 과연 요즘 시대의 어떤 에세이스트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도 그의 글을 찬찬히 읽어본 이라면 그의 글이 주는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수려한 문체와 단정한 생각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그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억압적인 사회 풍토가 오랫동안 지속된 탓에 진보연하는 것이 지식인 사회에서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져 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자유주의적 우파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내비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에둘러 말하거나 의뭉스럽게 눙치지도 않는다. 비록 많은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길 꺼려하지 않는 이유는 타인의 평가를 고려하여 짐짓 점잖은 척하는 일이 그가 자주 쓰는 표현처럼 부정직한 짓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직한 글쓰기. 이것이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이다.

 

그의 정직함은 무엇보다 그의 자유주의에서 기원한다. 그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라는 근대적 이념과 체제를 열렬히 옹호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공화국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유의 신성함에 대한 옹호, 그 중에서도 사상·양심·언론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신념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처럼 억압이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이 도저한 자유주의자의 음성은 어떤 쾌감마저 준다.

 

<감염된 언어>는 제목처럼 언어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이토록 길게 돌아온 이유는 그의 언어관이 바로 자유주의라는 초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신문과 잡지 같은 공적 지면을 통해 한국어에 대해 숙고하고 음미해보길 권했던 사람이다. 그러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들, 즉 한국어의 매력을 수려한 문장으로 풀어내는 <말들의 풍경>, <모국어의 속살>, <어루만지다> 등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말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언어를 훌륭하게 다룰 줄 아는 이의 언어에 대한 태도, 언어관을 읽을 수 있는 책이 바로 <감염된 언어>.

 

그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언어가 소통의 도구임을 확고히 한다. 소통은 언어가 존재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이유다. 소통할 수 없을 때 언어는 쇠약해지고 끝내 사멸한다.”(98)언어가 세계관을 규정한다.’와 같은 말들에 익숙한 요즘의 시선에서 보면 구닥다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언어학자로서의 배움과 기자로서의 경험은 언어가 지닌 도구 이상의 몫이 언어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닐 것”(205)이라는데 무게를 실어주는 듯하다.

 

소통의 도구로써의 언어라는 기둥은 두 가지 방향으로 가지를 친다. 하나는 소통의 가능성을 넓혀주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긍정이다. 그는 외래어나 한자 교육, 심지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통신 언어에 이르기까지 언중의 소통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관대하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설령 대부분의 경우 한자어의 이해에 한자 지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한자 지식이 한자어의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241) “방언이 박멸해야 할 언어 바이러스가 아니라 한 언어를 풍성하고 아름답데 만드는 꽃잎이요 곁가지들이라면, 채팅 언어도 그럴 것이다.”(103)

 

이런 생각은 복거일의 제안으로 한바탕 논란이 된 적이 있는 영어공용화론의 긍정적 검토에까지 이른다. 그가 보기에 영어는 이미 세계어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앞으로 이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영어를 무시하는 일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오늘날 언어의 위계 질서 내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영어다. 그리고 앞으로 머지않은 시기에, 영어를 쓰지 않고 민족어를 쓴다는 것은 지식과 정보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추방하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196) 인터넷을 오가는 언어의 80%가 영어라는 현실을 떠올려 볼 때 그의 주장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이를 미국의 패권적 현실에 순응하자는 주장으로 읽는 이들이 많은 듯하다. 그러나 개정판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영어공용화론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 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205~206)

 

그렇다고 그가 영어공용화를 언어 정책의 차원에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언어는 사용자들의 소통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 필요가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진화적 과정일 뿐이다. 굳이 정책적으로 개입해서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부질없는 짓이다. 가장 좋은 문화정책이 문화를 그냥 놓아두는 것, 즉 무책이듯, 가장 좋은 언어정책은 언어를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175)

 

그러나 이 부질없는 짓을 열심히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언어순수주의자들이다. 그래서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언어순수주의에 대한 반대로 뻗어나간다. 그가 보기에 언어순수주의자들은 언어의 본질이 소통의 도구라는 사실을 망각한 이들이다. 순수주의자들 가운데는 순수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소통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 국어사전의 한 구석에 박혀 있을 뿐 실생활에서는 오래 전에 죽어버린 말을 끄집어내 사용하는 경우 말이다. 이런 말들은 그 소통 효과에서 외국어나 다름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런 실천을 해야 하는가.”(99)

 

그래서 그는 순수한 한국어라는 것이 과연 얼마나 허구적인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고 이어져왔다고 해도 수백 년 전의 한국어와 지금의 한국어는 얼마나 다른지 논증한 후, 순수한 한국어를 복원하려는 시도들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전체주의의 혐의를 읽어낸다. 언어순결주의, 즉 외국어의 그림자와 메아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박해, 혼혈인 혐오, 북벌·정왜의 망상, 장애인 멸시까지는 그리 먼 걸음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30)

 

결국 한국어에 담긴 아름다움에 천착하면서도 순수성에 대한 집착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깊이 몸담고 있는 자유에의 갈망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 개인의 자유와 그 자유들이 서로 어울려 빚어내는 다양성의 무늬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아름다움은 섞임과 스밈 속에, 불순함 속에 있다.”(104) 물론 이 결론에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글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던 감염된 언어에 대한 시선이 어느새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고종석의 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