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의 소녀시대 지식여행자 1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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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친구와 함께 쇼핑을 갔었습니다. 여름휴가 때 입을 옷을 사기 위한 것이었지요. 시원해 보이는 원피스, 돌청색 스키니진, 새하얀 블라우스 등 여러 가지 옷들이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다양한 옷들 속에서 저에게 가장 잘 어울릴만한 옷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때문에 거울 앞에 서서 옷을 대보기도 하고 직접 입어보기도 하면서 옷 고르는 일에 열중하였답니다.

 그렇게 이옷저옷을 구경하다가 장식이 매우 요란한 블라우스를 보았습니다. 목 부분의 카라 전체가 레이스로 되어 있고, 밑 부분에는 커다란 리본까지 묶여 있어 조금은 부담스러운 옷이었어요. 저는 그 옷을 보고는 "이런 옷을 사는 사람이 정말 있을까?" 하고 친구에게 속삭였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파는 거겠지." 하고 대답을 하였는데, 잠시 후 친구의 말대로 한 손님이 와서 그 옷을 사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다른 옷을 구경하고 있던 저는 정말로 그 옷을 사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너무 나의 잣대로만 옷을 평가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습니다. 이 옷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다양한 옷들만큼이나 다양한 개개인의 취향을 인정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제가 예쁘다고 고른 옷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요. 그래서 옷가게에는 그렇게도 다양한 디자인의 옷들이 있었나 봅니다.

 생각해보니 이 세상에는 나와 다른 사람이 참 많이도 존재합니다. 나와 비슷한 점을 가진 사람보다 다른 점을 가진 사람을 찾는 일이 훨씬 더 수월할 것입니다. 함께 쇼핑을 간 친구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서 똑같이 생긴 동생이 있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그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어요. 두 사람 모두 교복을 입었었고, 머리 길이도 비슷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오자 각자의 취향이 확실하게 드러났어요. 쌍둥이 중 언니인 제 친구는, 대학생이 되자 더욱 여성스러워졌습니다. 머리를 마음껏 기를 수 있게 되자 허리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길렀고, 옷은 예쁜 치마만 골라 입었습니다. 친구의 쌍둥이 동생은 대학생이 되고서도 짧은 머리가 편하다며 머리를 기르지 않았고, 바지가 활동하기 좋다며 치마를 입지 않았어요. 상황이 이러하니, 그 둘은 신체 사이즈가 같은데도 옷을 나눠 입지 못한다고 합니다. 쌍둥이조차도 이렇게 다른 점이 많은데,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다른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와 비슷한 사람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은 것이겠지요. 

 
그렇게 서로 다른 것이 많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갑니다. 그것은 어쩌면 다름이 가진 성질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자석의 양극과 같기 때문이 아닐까요.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다름'이라는 단어에 '매력'이라는 옷을 입힌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에게서, 다르다는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요네하라 마리, 그녀는 우리나라가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동족상잔의 쓰디쓴 잔을 마시던 해에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그리고 그녀의 나이 열 살 때에는,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아버지를 따라 체코의 수도 프라하로 건너가 5년 동안 공산당 간부자제 전용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낸 것이, 바로 이 책 <프라하의 소녀시대>이지요.

 소설보다도 더 소설 같은 그녀의 삶에 연신 놀랐습니다.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이 되질 않아 오래도록 제 심장의 뜀박질이 멈추질 않았어요. 몇 번이나 책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놀란 가슴을 다독이고 나서야, 그녀가 남긴 인생의 흔적을 따라가 볼 수 있었답니다. 그녀의 독특한 인생행보를 따라가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가자, 아직 봄이 오기 전의 프라하와 파란만장한 동유럽의 현대사가 그려진 풍속화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결코 일반적이라고 할 수 없는 그녀의 이야기가 그녀만의 섬세한 문체와 버무려져 색감 진한 화폭이 되었더군요. 생생한 그 그림 속에서 그 시절 속 인물들이 툭 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어요. 이념과 사상의 대립이 있던 그 시절에도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있었습니다. 괜찮다면, 그 시절 그곳에 잠시 머물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순수했을 그 시절 속엔, 멋진 추억을 함께 만들던 친구들이 있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자신의 고국 그리스의 하늘을 "그건 말야, 정말 쨍하고 깨질 듯이 파래" 라며 자랑스러워하던 리차,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새빨간 거짓말쟁이 아냐, 언제나 객관적이며 누구에 대해서도 어떤 일에 대해서도 깨인 눈으로 약간 조소를 하던 야스나가 바로 그들입니다.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를 찾아나서는 일은 마음먹기는 쉬워도 실행으로 옮기기는 어렵습니다. 꿈을 꾸기는 쉬워도 그것을 이루는 일은 어렵듯이 말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적에 아버지의 일 때문에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제일 오래 다녔던 학교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다녔던 곳입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후에도 그곳은 도무지 잊히질 않는 거예요. 새로 이사 간 곳에 비하면 그곳은 전혀 멋스럽지도 않았고 학교도 멀어서 다니기 힘들었는데도 말이에요. 태어난 고향도 아니었는데 향수병에 걸린 것처럼 그곳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그곳은 제 마음속 고향이었나 봅니다. 이따금씩 그곳의 풍경이 가슴속에 밀려왔습니다. 참 커다랗게 느껴졌던 학교 운동장, 친구와 군것질하던 학교 앞 문구점, 아빠가 오실 시간이 되면 마당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멀리 아빠의 모습이 보이면 동생과 함께 뛰어갔던 골목길, 그 모습은 눈을 감으면 더욱 생생해져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사 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엄마를 졸라 그곳에 다녀오기도 했었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작게 접어진 종이가 되어 마음 속 보이지 않는 곳에 담아졌습니다. 더 이상 그곳에 데려다 달라고 엄마를 조르지도 않았어요.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오면서 시간이 많아지자 접어졌던 종이가 마구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그곳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지요.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리움과 비례하게 두려움도 커졌습니다. 혹시 그곳이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변했을까봐 겁이 났던 것입니다. 우리 집이 있던 골목길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서지는 않았을까, 학교 앞 문구점은 다른 곳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제가 기억하는 그곳의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곳을 찾아가기가 두려웠던 것입니다. 내 기억 속 그곳과는 너무 달라, 마음 속 고향을 알아보지 못할까봐 겁이 났습니다. 그곳에 대한 오래 간직한 추억이 무참히 무너져 내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그곳을 찾아가지 못하게 되었죠. 

 요네하라 마리도 친구들을 찾아 나설 때 설레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세월에 변했을 친구들의 모습이, 분명히 그때와는 다를 친구들의 모습이 조금은 걱정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냅니다. 동유럽의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는 친구들의 안위가 궁금하기도 하고 세월에 변했을 친구들의 모습이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도 친구들을 찾아 나선 그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저는 겁이 나서 하지 못한 일을 요네하라 마리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가 친구들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얼마나 손에 땀을 쥐었는지 모릅니다. 멀리까지 찾아왔는데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봐, 찾고 있는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을까봐 그 과정이 담긴 페이지는 저도 모르게 빨리 빨리 읽고 있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요네하라 마리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한장 한장 재빨리 넘겨갔습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친구들은 무사히 있어주었습니다. 그들이 재회하는 장면에서는, 제가 오래된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기뻤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어느새 저는 마리의 친구들과 더없이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무사히 있어준 리차, 아냐, 야스나를 향해 인사를 하였습니다. 격동의 시기를 잘 견뎌주고 있어서 고맙다고 그렇게 저도 모르게 그들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시기는 자신들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국가의 운명에 의해서 휘둘러져야 했을 테지요. 
그럼에도 그들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온몸으로 받아내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대를 받아들이는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세상의 모순을 느끼기도 하고,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산 그녀들이지만 그것이 꼭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틀린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산 것이겠지요.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인정한다면 이데올로기나 종교 분쟁으로 전쟁을 치루는 일은 없을 텐데요.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서, 이렇게 나와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세상을 둥글게 만드는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어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같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습니다. 어쩌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다른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이 우리의 일생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이 있어 세상이 더 재미있는 것이 아닐까요. 옷가게에 같은 옷들만 있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모든 사람이 같은 소리만 낸다면 얼마나 재미없을까요. 서로 다른 음들이 모여야 멋진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거겠지요. 그것들이 만들어 내는 음이 불협화음이면 좀 어떻습니까. 그마저도 아름다운 것을요.



ps.  
이 책을 통해 느낀 감정을 이 책 속 한 구절로 말하고자 합니다.
p.233 그녀들의 모습은 어떤 소중한 추억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아무래도 저는 제 마음속 고향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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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8-03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못 읽었는데,
읽은 후 님이랑 느낌을 나눠도 좋을 것 같아요~^^

어느멋진날 2010-08-03 18:44   좋아요 0 | URL
제 동지를 만난 것 같아요. 양철나무꾼님 정말 반가워요.^ㅡ^
앞으로 님 서재에 자주 놀러갈께요~~ㅎㅎ
프라하의 소녀시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양철나무꾼님도 읽어보셔용~~
 
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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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큐, 혹 싸리꽃을 아시나요? 얼마 전 우리 동네 뒷산에 싸리꽃이 피었답니다. 코끝을 간질이는 알싸한 향에 이끌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마치 자신이 이 산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떵떵거리며 핀 이 꽃이 또 어찌 보면 혼자만 덩그러니 외떨어져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그뿐이 아니에요. 모진 비바람에도 꼼짝도 않을 듯 옹골지게 핀 이 꽃이 살랑거리는 바람에 슬며시 반응하는가하면 비라도 조금 맞으면 색을 더욱 진하게 드러내어 마치 수줍은 새색시의 붉은 뺨처럼 보이기도 한답니다. 어쩌면 차가운 달빛의 처연함을, 사무치게 누군가를 부르는 그리움을, 생명이 주는 희열을, 애끓는 욕망을 이 작은 꽃 한 송이가 모두 삼키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거대한 우주가 돌고 있는 이 꽃을 당신께서 보았다면 무어라 하였을까요. 장미꽃처럼 화려하지 않다고 백합처럼 눈부시지 않다고 싸리꽃을 내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과 사랑을 닮았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세상에 남긴 향기를 찾아, 당신이 세상과 작별을 하는 날로부터 천천히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전날, 15일 전, 16일 전, 24일 전, 한달 전, 석달 전, 일년 전, 또 일년 전… 그렇게 당신이 19살이던 해까지 되돌아갑니다. 당신의 원통한 마지막 순간과 마주하기까지 내 가슴이 진정되어 있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무엇이 나의 가슴을 그토록 뛰게 만든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태풍의 눈 속에 고요히 서 있는 당신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럼요. 나는 보았습니다. 한가로이 강가를 거니는 학처럼 고고한 당신의 삶이지만, 또르르 구르는 이슬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아침처럼 고요한 당신의 삶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요. 당신은 또한 무엇도 녹여버릴 수 있을 만큼의 정열을 가슴에 품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미를 탐하는 엄청난 집착입니까, 먼 옛날 가슴에 품은 여인의 숨결입니까? 

 리큐, 이 두 가지를 빼고선 당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을 테지요. 고매함의 이면에 담긴 미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당신을 천하제일의 다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한 여인이 당신의 좁은 다실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추구한 다도의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던가요. 집착과 사랑에서. 어쩌면 당신의 파괴적인 미의 성향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당신에게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완전히 깨뜨려야 할 다완과 다르지 않았겠지요. 당신은 쓸쓸함과 고단함 속에 타오르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깨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동경해마지 않는 하늘조차도 언제나 맑지만은 않은 것을 떠올리면 당신이 옮음을 알겠습니다. 활짝 갠 하늘의 보름달보다 구름 낀 하늘의 한적한 달이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리다 마는 그림처럼, 새기다 마는 조각처럼 미완성이기에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당신은 불완전한 미를 사랑하였습니다. 허나 그것을 지키려는 태도에는 조금의 굽힘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가슴 안에서 화석이 되어버린 여인과 그 여인의 유품인 녹유향합을 지키기 위한 당신의 태도도 그랬지요. 당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절벽 끝에 선 듯 위태로울 때 당신은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누가 갖고 싶어하든 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산산조각 내겠습니다.(p.106) 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지키지 못한 것은 여자입니까, 녹유향합입니까. 당신이 지키지 못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당신은 당신의 방법으로 소중한 것들을 지켜낸 것이니까요.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당신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존재 할 수 있게 만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달리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요.

 히데요시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다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난세에 다인의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천하제일의 다두가 되었습니다. 미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신은 천하를 호령하는 만만치 않은 사람 히데요시에게 만만치 않은 사람이 되었지요. 최고 권력자 히데요시를 거역하는 유일한 한 사람이 되었지요. 당신은 그런 분이었어요. 누구의 비위도 맞추지 않는 사람. 오로지 아름다운 것 앞에서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 목숨보다 차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당신은 어찌하여 그리할 수 있었나요. 그것은 혹 당신이 지키지 못한 처절한 사랑의 불꽃인지요. 그 꺼지지 않는 불꽃이 당신을 그토록 뜨겁고 단단하게 만들었던가요. 가야 할 길은 끝끝내 가고야 마는 집착을 만들었던가요. 그리하여 천하의 권세를 가진 히데요시에게 마지막까지 굽히지 않을 수 있었나요. 그리하여 원통한 죽음을 택하였나요. 그러나 리큐, 당신은 결코 패배자가 아닙니다. 인생은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히데요시의 삶은 너무도 풍류가 없지 않습니까.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는 법. 실패하면 다시 하면 그만이라는 당신의 말이 더욱 가슴에 녹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누구보다도 진하게 살아남은 것인지도.

 리큐, 나에게 차를 한잔 주시겠어요? 당신 자신과 다름없는 당신의 좁은 다실에 나를 초대하여 주시겠어요? 그리하면 나는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미쓰나리가 말하던 선경을 노니는 기분을 느껴 볼 수 있을 테지요. 그리고 당신의 사랑과 인생이 담긴 차 한 잔에는 내가 지금 현세에 살아 있다는 기쁨을 만끽할 것입니다. 항상 짊어지고 다녔던 삶이 주는 무게를 잠시 내려놓겠습니다. 그곳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시간들에서 더욱 뜨겁게 살아갈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살아갈 힘을 얻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탐닉할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 속에 잠시나마 머물고 싶습니다. 당신의 좁은 다실로 나를 초대하여 주시겠어요? 당신을 닮은 싸리꽃 한 송이에 당신께 편지를 띄웁니다. 이 꽃의 진한 향이 흐르고 흘러 당신께 닿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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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6월 4주


 본격적인 장마 시작에 앞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하여 드디어 어제, 작은 방 한구석에 두었던 선풍기를 꺼내 묵은 먼지를 닦아 내었다. 선풍기를 깨끗하게 잘 보관해 두었으면 이런 번거로운 일은 없었을 테지만 내 게으른 성격 탓에 몸이 두 배로 고생을 하였다. 그래도 쓱쓱 닦여 나가는 먼지를 보니 밀려둔 숙제를 끝낸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선풍기 바람과 함께하는 여름밤을 좋아한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는 이상하게 잠을 돋우는 성질이 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내 마음도 시원해진다. 에어컨 바람보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더 좋아하는 것은 내가 촌사람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별난 취향이라 할 수도 있으나 뭐 어떠랴, 나에게는 이 더운 여름날 더위를 이길 수 있게 해주는 비책인 것을. 비책이 있기에, 더위와의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여름도 싫지 않다.  

 여름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는 '더위를 이길 비책을 갖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살인 같은 더위 속에 그것을 이겨낼 비책을 찾지 못한다면 아마 여름은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위와 싸울 수 있는 근사한 병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면 여름은 즐길 수 있는 계절이 될 것이다. 올 여름 휴가는 어디로 떠날 까 계획을 세우며 더위를 날려버릴 수도 있고,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영화관에 가서 재미있는 영화를 한편 보며 지금이 여름인 것을 잠시 잊을 수도 있고, 시원한 수박 한 덩어리 잘라서 먹거나, 팥빙수 한 그릇 먹으며 더위를 잊을 수도 있겠다. 이번 주에 내가 택한 방법은 어제 실행에 옮겼듯 선풍기와 함께 하기, 그리고 제대를 코앞에 둔 동생과 시원한 영화관에서 재미있는 영화보기였다. 6월 4주, 더위로부터 탈출해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하게 해준 영화 3편을 소개한다.

1. 포화속으로 -학도병들과 함께 하는 가슴 먹먹한 여행



 처음 '포화속으로' 출연배우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궁금했다. 차승원, TOP, 권상우 이들 중 과연 주인공은 누구인지. 자신은 TOP을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며 주인공은 TOP이라는 권상우의 말을 듣고서도 그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승원, 권상우라는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TOP이 주인공이라는 말은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TOP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차승원, 권상우라는 톱배우들의 포스에 눌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나 '스타일'에서 보았듯이, 주연보다 조연의 포스가 세서 주인공들이 빛을 발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TOP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빅뱅의 멤버 TOP이 아닌 영화배우 TOP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영화 '포화속으로'가 실제 있었던 일을 재구성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은, 영화관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출연배우들의 이름만 보고 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은 전혀 모르고 들어왔던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동생이 "누나, 이 영화 많이 슬프대. 맘 단단히 먹고 봐." 하고 겁을 주었다. 이 말을 영화 보러 가기 전에 해주었으면 마스카라는 칠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의 첫 시작을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배우 TOP의 모습을. 'TOP이 쟁쟁한 배우들 틈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기나 하였을까' 하며 우려했던 것은 다만 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TOP은 배우였다. 그것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자질 있는 배우. 그가 연기한 오장범이라는 캐릭터는 초반 겁 많고 어수룩한 모습에서 후반에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중대장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쉽지 않은 캐릭터였음에도 TOP은 어리숙한 모습과 카리스마 있는 모습 모두를 어색함 없이 보여준다. 전쟁은 왜 해야 하는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는 괴리감, 아픔, 그리움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해 낸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200% 이상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든다. 신인배우 발굴을 이 영화의 성과 중 하나로 뽑아도 될는지. 배우 TOP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또한 배우 권상우의 재발견도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그가 인터뷰할 때 했던 말대로 그는 TOP을 받쳐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싸움짱 갑조가 그가 맡은 역할이다. 얇은 목소리 톤 때문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데 이상하게 잘 드러맞는다. 부조화속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배우 권상우가 가진 힘이다.

 포화속으로는 6.25 전쟁을 다룬 영화이다. 아마도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6.25 전쟁을 떠올리며 북한을 경계하고 적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아픔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화합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날의 전쟁처럼 다 같이 죽자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 같이 살기 위해 동포애로 서로를 감싸 안아야 할 때이다. 가족들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라 생각한다. 

2. 방자전 -짐승남 방자를 만날 수 있었던 여행



 춘향전 속에서 방자는 조연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방자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심부름꾼이었다. 춘향과 이도령이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주고 그들의 절절한 사랑편지를 전해주는 역할이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거짓이었다고 알려준다. 당신이 알고 있는 춘향전은 거짓이라고 말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로 헷갈리게 된다. 무엇이 진짜인가. 춘향이가 사랑한 것은 이도령인가, 방자인가. 이도령이 사랑한 것은 춘향이인가, 권력인가. 익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뒤집어엎는 것이 상상력의 결과물이라 한다면 이 영화가 바로 그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그것도 매우 발칙하고 방자한 상상력의 결과물.   

 김대우 감독은 내용을 비트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정관념을 깬 캐스팅까지 시도하였다. 이 영화를 보는 포인트가 이색적인 캐스팅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가볍고 코믹한 역할이 어울릴 것 같은 류승범이 이몽룡 역할을 맡았고, 훤칠한 키에 귀공자 역할이 어울릴 것 같은 김주혁이 방자를 맡았다. 류승범이 한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몽룡 역할을 맡은 것이 재미있다고 말한다고 했듯이 나 또한 이 캐스팅이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느꼈다. 캐스팅도 뒤집어엎는다니.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캐릭터를 뒤집었으니 캐스팅도 뒤집어엎어야 하지 않았겠나. 밉상에 찌질이 이몽룡과 남성미 물씬 풍기는 방자니 말이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배우 모두 새로운 모험을 시도한 것 같다. 춘향전이 아닌 방자전을 보여주기 위해, 또한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캐릭터가 아닌 그것을 비튼 캐릭터를 맛깔나게 연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또 이 영화를 말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배우 오달수와 송새벽이다. 방자에게 춘향의 마음을 사로잡을 비책을 알려주는 마 노인 역할의 오달수, 능청맞고 특이한 말투의 변학도 송새벽은 이 영화에 빠져서는 안 될 감초들이다. 영화의 웃음 포인트 절반 이상은 그들에게 있다. 춘향전에선 볼 수 없었던 마 노인의 캐릭터, 그리고 새롭게 해석한 변학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 되게 해주었다. 웃음 담당 두 캐릭터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강렬하게 머리에 남아있다.    

 25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둔 방자전. 그 인기는 단지 노출 수위가 높아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뒤집기 묘미를 제대로 살린 감독의 기발한 상상력과 열연한 주연배우들, 그리고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한 조연 배우들의 합작품이라 생각한다. 연인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 같다.
 

3. 맨발의 꿈 (6월 24일 개봉) - 동티모르 아이들을 만나러 곧 떠날 여행
 


 온 나라가 축구로 떠들썩하다. 우리나라가 16강 대열에 합류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90분 동안 가슴 조마조마하며 선수들을 지켜 본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2002년의 뜨거웠던 열정을 기억하기에 더더욱 그러한가 보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장면을 다시 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제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도 그런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의 동방예의지국슛, 박주영의 그림 같은 프리킥, 든든한 캡틴 박지성이 수비수들을 제치고 넣은 골 모두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지금, 축구에 관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그 감동과 여운을 크게 만들어 줄 것 같다. 혹자는 온 나라가 월드컵, 월드컵 하니 지겹다고 하나 즐길 때는 즐겨야 할 것이다. 날마다 월드컵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내가 이번 주에 볼 영화는 '맨발의 꿈'이다. 스포츠를 소재로 만든 영화는, 거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감동을 주기에 더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억지로 주는 감동이 아니라 마음을 잔잔하게 울리는 감동이라 그렇다. 동티모르의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친 김신환 전 축구선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김태균 감독이 동티모르 현지에서 찍은 영화인 '맨발의 꿈' 역시 더없는 감동을 선사해주리라 믿는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개봉을 했고 평도 매우 좋다고 하니 조금은 기대하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주인공 박희순에 대한 기대도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의 능숙한 연기와 존재감이 영화를 심심하지 않게 만들 것이라 예상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연기도 꽤나 훌륭하다고 들었다. 박희순과 아이들의 조합이 어떨지 궁금하다.

 꿈을 꾸기 시작할 때 기적이 시작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2002년 4강 신화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간절히 염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6강이라는 우리의 처음 목표는 이루어졌지만 또 다시 4강 신화를 꿈꾸어본다. 기적이 시작될 수 있도록.

 맨발의 소년들이 이뤄내는 기적을 말년 휴가를 나온 동생과 함께 보러갈 것이다. (요즘 영화 보러가는 파트너가 주로 동생이라는.) 가난하지만 꿈은 가난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기적의 이야기를 역시 꿈은 가난하지 않은 동생과 함께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 동생은 꿈만 너무 큰 것이 아닌가.^^:) 또 한 번 한국 대표 팀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과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함께 응원했던 사람들과 이 영화를 보면 그 감동이 생생이 되살아날 것이다.


 덥다고 짜증만 내지 말고 시원한 영화 한편 보러가는 것을 추천한다. 잠시 무더운 여름날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거다. 6.25전쟁 때의 학도병을 만나는 여행에서는 전쟁의 아픔을 다시는 겪지 말 것을 다짐하며 돌아왔다. (영화가 끝나도 나가지 못하고 한참 울던 사람도 있었으니 마스카라는 칠하지 않을 것을 권장함.) 짐승남 방자를 만날 수 있었던 여행에서는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의 재미를 느꼈다. 뒤집어엎는 것의 묘미란. 이번 달 남은 여행에서는 축구의 여운을 좀 더 느끼려 한다. 우리나라가 8강. 4강까지 가길 기원하면서 박희순과 동티모르의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더위 까짓것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거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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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동 한 그릇
구리 료헤이 지음, 최영혁 옮김 / 청조사 / 2010년 5월
구판절판


이 책은 가난한 시대를 살았던 어른과 가난을 모르고 자라는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라고 하네요. 그래서 이 책이 어른과 아이를 위한 동화라고 불리나 봅니다. 몸소 가난한 시대를 겪으며 살아온 어른들에게는 어려웠지만 이웃과 나누며 살았던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시대를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치열한 경쟁의 시간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나눔과 베풂이 있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요.
<우동 한그릇>의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책에 나오는 우동 집 주인과 같은 분이 있다면 세상은 정말 아름다운 것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은 기억이 나네요.

세 명이서 음식점에 들어가 일인분만 주문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한번 상상해 봅니다. 성질이 고약한 종업원을 만난다면 그 음식점에서 좋지 않은 소리를 한바탕 듣고 쫓겨날 것이고, 운이 좋아 친절한 종업원을 만난다면 웃으면서 안 된다고 하는 말을 듣겠지요. "죄송하지만 손님, 세분이서 일인분을 주문하시는 것은 곤란합니다." 선뜻 일인분의 주문을 받아주는 주인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 가게 문을 닫을 시간에 찾아온 것도 모자라 셋이서 일인분을 주문하는 손님을 상냥하게 맞아준 주인아주머니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두 아이에게 우동 일인분밖에 시켜주지 못하는 한 어머니를, 주인아주머니는 따뜻하게 받아주었습니다. 우동 일인분에 반 덩어리를 더 넣어 삶아 그들을 대접한 것입니다.

그 가족은 해마다 섣달 그믐날에 우동 집을 찾아왔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 가족들이 처음 찾아온 날 앉았던 2번 테이블로 그들을 안내했고 언제부터인가는 그 가족들이 찾아올 날에는 2번 테이블을 예약 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잊지 않고 그 가족들을 기다린 것이죠.

시간이 흘러 일인분의 우동을 맛있게 먹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우동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곤 우동 한 그릇이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12월 31일 밤 가족과 함께 먹은 한 그릇의 우동이 그렇게 맛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셋이서 일인분만 시켜 먹었는데도 고맙다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말해주는 주인아주머니가 정말 감사했다고 합니다.
가난했지만 가족과 함께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먹을 수 있었기에, 우동 한 그릇만 시키는데도 반갑게 맞아주는 주인아주머니가 있었기에 그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나봅니다. 우동 가격이 올랐음에도 예전 가격으로 메뉴표를 바꾸어 놓고 그들을 기다려준 우동 집 북해정은 세 모자가 살아가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우동 한 그릇에 담긴 사랑의 힘이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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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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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하고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나는 어느새 어린아이가 된다. 나의 모든 어리광을 다 받아주고, 나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줄 것 같은 그 이름, ’아빠’다. 아무리 잘난 남자를 데려와도 내가 아깝다고 말해줄 한사람, 이 세상에서 오롯이 내 편인 든든한 한사람, 아빠. 내가 어렸을 적에 아빠는 슈퍼맨이 되어, 나와 동생을 번쩍 안아 목마도 태워주고 비행기도 태워주셨다. 또 내가 크리스마스트리에 커다란 양말을 걸어놓고 잠이 드는 밤에는, 산타할아버지가 되어 꽤 멋진 선물을 놓고 가셨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아빠라는 사실을. 산타할아버지는 루돌프 썰매를 타고 오지 않는다는 것을, 착한 어린이한테만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유치원에 다닐 적에 알았다.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좀 실망하실 것 같다. 그래도, 아빠가 영화에 나오는 진짜 슈퍼맨이 아니지만 나에게는 슈퍼맨이었듯이, 진짜 산타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아빠는 나에게 더없이 멋진 산타할아버지였다. 

 생각해보면, 아빠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이 제일 많았던 것은 내가 어릴 때였다. 아빠와 내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었던 것도, 아빠와 내가 같이 찍은 사진이 제일 많았던 것도, 내가 어렸을 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말을 정말 많이 했다고 한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쉴 새 없이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했다고. 그 쉴 새 없는 질문에 쉴 새 없이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언제나 아빠였다. 내가 하는 수많은 질문 중에는 대답하기 난감한 것도 있었을 테고, 아무리 대답을 해줘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난감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고, 아무리 친절하게 알려줘도 이해하지 못할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체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언제나 아빠 몫이었다. 1부터 10까지 세는 법을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꼭 몇 개를 빼먹고 세는 나에게, 숫자 세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아빠 몫이었다. 엄마가 몇 번이나 알려주어도 나는 금세 까먹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숫자 세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아빠는 숫자들에 음을 붙였다. 노래를 불러 나에게 숫자를 익히게 한 것이다. 음치에 박치인 아빠는, 딸에게 숫자 세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작곡가가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나와 동생이 아직 어릴 때, 엄마는 시장에 나가 일을 하셨다. 새벽같이 나가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나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를 대신해서, 아빠가 김밥을 만들어주셨다. 그때까지 아빠는 음식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로 그 김밥은 아빠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싼 김밥이었다. 김밥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 김밥재료도 모르면서 일단 나와 동생에게 무엇이라도 먹여야겠다는 마음에 만들었을 것이다. 아빠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싼 그 김밥에는 밥과 김치, 딱 두 가지가 들어갔다. 그런데도 그 맛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동생과 나는 어릴 때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을 그때 아빠의 김밥으로 꼽는다. 이 말을 하면 아빠는 그게 뭐가 맛있었냐면서 신기해하신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 김밥이 맛있었던 것인지, 아빠의 정성이 듬뿍 들어가 맛있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나와 동생에게 그날 아빠가 멋진 요리사였던 것은 확실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나를 위해 그렇게 작곡가도 되어주고, 요리사도 되어주었다. 노래도 엄청 못하면서, 요리 한번 해본적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아빠는 내 키다리 아저씨임이 틀림없다. 

 <아빠 어디가?> 이 책의 저자 ’장-루이 푸르니에’도 두 아들의 키다리 아저씨이다. 성탄이 되면 왠지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장-루이.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술관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가고, 고급 레스토랑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여느 아빠들처럼. 아마도 그는, 나의 아빠가 그랬듯이 아이들에게 슈퍼맨도 되어주고, 산타할아버지도 되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처럼. 아빠가 태워주는 목마와 비행기에 까르르 웃음 짓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그런 시절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오래도록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들의 시계는 거기서 멈춰버렸다. 계속해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게, 세상의 험난함을 모르고 살아도 되게, 아빠를 언제까지나 슈퍼맨이라고 믿고 살아도 되게, 어른이 되는 것을 그만 두었다. 말을 제법 할 나이가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도 인형을 물고 빨며 다니기로 한다. 

 그의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도, 또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가진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만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좋은 때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리라. 또한 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가 힘이 들었던 것이리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놓지 못해 미안하고, 더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 미안한 아빠는 아이들을 위해 책을 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 마음 어떻게라도 전하고 싶은 아빠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  

   
  그런 지금, 그래도 아빠는 너희들에게 책 한권을 선물하려 한단다. 내 아들들을 위해 아빠가 쓰는 책이야. 우리 모두가 너희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 책이요, 너희들이 그저 장애인증명서에 붙여진 사진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쓰는 책이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을 적는 그런 책…… 아마도 후회겠지. (p.8)  
   
 
 남들과는 다른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빠인 장-루이가 겪었을 아픔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날마다 자라기는커녕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이,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에 겨웠을 것이다. 애틋함, 절망, 체념, 사랑, 안타까움, 원망의 마음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왔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할 수도 있었다. 나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고, 세상에 장애아를 둘이나 두었다고.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미소 지으며 웃을 수 있는 글을 쓰기로 한다. 장애아를 둔 아빠라도 아이들을 보며 웃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놀리기까지 한다. 나는 그 부분을 읽을 때 놀라서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읽고 그랬다. 장애인에 대한 나의 선입견 때문에 그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웃음이 났다. 장애를 가진 아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어린 아이로 마튜와 토마를 이해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부릉! 부릉!" 하며 차 소리를 내는 마튜. 어디 간다고 알려주어도 금세 까먹고 "아빠 어디가?" "아빠 어디가?" 묻는 토마. 그 아이들은 단지 남들과 다를 뿐이다.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있고 싶어서 어른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이것이 꼭 남들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남들과 다를 뿐이다. 
……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이들은 모두 남들과 달랐다. (p.137)

 
   

 나는, 홀로 공을 찾으러 먼저 하늘나라에 간 마튜와 자신의 손과 대화를 나누는 토마를 그저 동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마튜와 토마도 자신들의 이름이 동정 받을 대상으로 남는 것은 원치 않을 것 같다. 어른이 되기 싫었던 유쾌한 두 아이, 자신의 아빠를 언제까지나 슈퍼맨으로 믿고 싶었던 두 아이, 아빠에게 웃음을 주었던 두 아이로 기억하고 싶다. 

 나의 아빠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목마도, 비행기도 태워주시지 않지만 나에겐 여전히 슈퍼맨이고, 키다리 아저씨이다. 마튜와 토마는 다른 아이들처럼 자라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아빠에겐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제 아이들의 모습은 아빠의 기억 속에, 또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회자될 것이다. 그것이 장-루이의 바람대로 마튜와 토마의 삶이 그래도 살아볼만한 것이었음을 말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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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2010-06-11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프지 않게 쓴 글이 정말 사람 마음을 시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으로 알게 됐어요

어느멋진날 2010-06-11 20:47   좋아요 0 | URL
머큐리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정말 담담하게 쓴 글인데도 코 끝이 찡해지는 부분이 많았어요.

라로 2010-06-11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누구세요!!
저도 오랫만에 왔었어서~~~~ㅎㅎㅎㅎ
반가와요~~~~~~.^^리뷰도 추천이야요~.

어느멋진날 2010-06-11 20:48   좋아요 0 | URL
나비님!!! 정말 오랜만이죠?^^
저두 무지하게 반가워요♥
앞으로 나비님 서재 자주자주 들릴께요~~

2010-06-12 1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2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