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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어디 가?
장 루이 푸르니에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9년 2월
평점 :
"아빠"하고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면, 나는 어느새 어린아이가 된다. 나의 모든 어리광을 다 받아주고, 나의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줄 것 같은 그 이름, ’아빠’다. 아무리 잘난 남자를 데려와도 내가 아깝다고 말해줄 한사람, 이 세상에서 오롯이 내 편인 든든한 한사람, 아빠. 내가 어렸을 적에 아빠는 슈퍼맨이 되어, 나와 동생을 번쩍 안아 목마도 태워주고 비행기도 태워주셨다. 또 내가 크리스마스트리에 커다란 양말을 걸어놓고 잠이 드는 밤에는, 산타할아버지가 되어 꽤 멋진 선물을 놓고 가셨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산타할아버지가 아빠라는 사실을. 산타할아버지는 루돌프 썰매를 타고 오지 않는다는 것을, 착한 어린이한테만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유치원에 다닐 적에 알았다. 아빠가 이 사실을 알면 좀 실망하실 것 같다. 그래도, 아빠가 영화에 나오는 진짜 슈퍼맨이 아니지만 나에게는 슈퍼맨이었듯이, 진짜 산타할아버지는 아니지만 아빠는 나에게 더없이 멋진 산타할아버지였다.
생각해보면, 아빠와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이 제일 많았던 것은 내가 어릴 때였다. 아빠와 내가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었던 것도, 아빠와 내가 같이 찍은 사진이 제일 많았던 것도, 내가 어렸을 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말을 정말 많이 했다고 한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지 쉴 새 없이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했다고. 그 쉴 새 없는 질문에 쉴 새 없이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언제나 아빠였다. 내가 하는 수많은 질문 중에는 대답하기 난감한 것도 있었을 테고, 아무리 대답을 해줘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난감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고, 아무리 친절하게 알려줘도 이해하지 못할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체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언제나 아빠 몫이었다. 1부터 10까지 세는 법을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꼭 몇 개를 빼먹고 세는 나에게, 숫자 세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아빠 몫이었다. 엄마가 몇 번이나 알려주어도 나는 금세 까먹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숫자 세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아빠는 숫자들에 음을 붙였다. 노래를 불러 나에게 숫자를 익히게 한 것이다. 음치에 박치인 아빠는, 딸에게 숫자 세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작곡가가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나와 동생이 아직 어릴 때, 엄마는 시장에 나가 일을 하셨다. 새벽같이 나가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나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를 대신해서, 아빠가 김밥을 만들어주셨다. 그때까지 아빠는 음식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로 그 김밥은 아빠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싼 김밥이었다. 김밥에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 김밥재료도 모르면서 일단 나와 동생에게 무엇이라도 먹여야겠다는 마음에 만들었을 것이다. 아빠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싼 그 김밥에는 밥과 김치, 딱 두 가지가 들어갔다. 그런데도 그 맛은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동생과 나는 어릴 때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을 그때 아빠의 김밥으로 꼽는다. 이 말을 하면 아빠는 그게 뭐가 맛있었냐면서 신기해하신다. 배가 너무 고파서 그 김밥이 맛있었던 것인지, 아빠의 정성이 듬뿍 들어가 맛있었던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나와 동생에게 그날 아빠가 멋진 요리사였던 것은 확실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나를 위해 그렇게 작곡가도 되어주고, 요리사도 되어주었다. 노래도 엄청 못하면서, 요리 한번 해본적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아빠는 내 키다리 아저씨임이 틀림없다.
<아빠 어디가?> 이 책의 저자 ’장-루이 푸르니에’도 두 아들의 키다리 아저씨이다. 성탄이 되면 왠지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하고 싶다는 장-루이.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술관에도 가고, 영화관에도 가고, 고급 레스토랑에도 가보고 싶다고 했다. 여느 아빠들처럼. 아마도 그는, 나의 아빠가 그랬듯이 아이들에게 슈퍼맨도 되어주고, 산타할아버지도 되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처럼. 아빠가 태워주는 목마와 비행기에 까르르 웃음 짓고, 크리스마스 날에는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그런 시절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오래도록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아이들의 시계는 거기서 멈춰버렸다. 계속해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게, 세상의 험난함을 모르고 살아도 되게, 아빠를 언제까지나 슈퍼맨이라고 믿고 살아도 되게, 어른이 되는 것을 그만 두었다. 말을 제법 할 나이가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도 인형을 물고 빨며 다니기로 한다.
그의 아이들은 정신적으로도, 또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가진 아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만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기 좋은 때가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리라. 또한 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가 힘이 들었던 것이리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놓지 못해 미안하고, 더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 미안한 아빠는 아이들을 위해 책을 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그 마음 어떻게라도 전하고 싶은 아빠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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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금, 그래도 아빠는 너희들에게 책 한권을 선물하려 한단다. 내 아들들을 위해 아빠가 쓰는 책이야. 우리 모두가 너희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쓰는 책이요, 너희들이 그저 장애인증명서에 붙여진 사진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쓰는 책이란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하지 못한 말들을 적는 그런 책…… 아마도 후회겠지. (p.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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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는 다른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빠인 장-루이가 겪었을 아픔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날마다 자라기는커녕 퇴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들이,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에 겨웠을 것이다. 애틋함, 절망, 체념, 사랑, 안타까움, 원망의 마음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왔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할 수도 있었다. 나 너무 불쌍하지 않느냐고, 세상에 장애아를 둘이나 두었다고. 하지만 그는, 그러는 대신 미소 지으며 웃을 수 있는 글을 쓰기로 한다. 장애아를 둔 아빠라도 아이들을 보며 웃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아이들을 놀리기까지 한다. 나는 그 부분을 읽을 때 놀라서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읽고 그랬다. 장애인에 대한 나의 선입견 때문에 그의 유머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웃음이 났다. 장애를 가진 아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어린 아이로 마튜와 토마를 이해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부릉! 부릉!" 하며 차 소리를 내는 마튜. 어디 간다고 알려주어도 금세 까먹고 "아빠 어디가?" "아빠 어디가?" 묻는 토마. 그 아이들은 단지 남들과 다를 뿐이다. 어린 시절 모습 그대로 있고 싶어서 어른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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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르다는 것. 이것이 꼭 남들보다 못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남들과 다를 뿐이다.
……
아인슈타인, 모차르트, 미켈란젤로. 이들은 모두 남들과 달랐다.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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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로 공을 찾으러 먼저 하늘나라에 간 마튜와 자신의 손과 대화를 나누는 토마를 그저 동정하지는 않으려 한다. 마튜와 토마도 자신들의 이름이 동정 받을 대상으로 남는 것은 원치 않을 것 같다. 어른이 되기 싫었던 유쾌한 두 아이, 자신의 아빠를 언제까지나 슈퍼맨으로 믿고 싶었던 두 아이, 아빠에게 웃음을 주었던 두 아이로 기억하고 싶다.
나의 아빠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목마도, 비행기도 태워주시지 않지만 나에겐 여전히 슈퍼맨이고, 키다리 아저씨이다. 마튜와 토마는 다른 아이들처럼 자라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아빠에겐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제 아이들의 모습은 아빠의 기억 속에, 또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회자될 것이다. 그것이 장-루이의 바람대로 마튜와 토마의 삶이 그래도 살아볼만한 것이었음을 말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