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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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큐, 혹 싸리꽃을 아시나요? 얼마 전 우리 동네 뒷산에 싸리꽃이 피었답니다. 코끝을 간질이는 알싸한 향에 이끌려 가만히 꽃을 들여다보았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마치 자신이 이 산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떵떵거리며 핀 이 꽃이 또 어찌 보면 혼자만 덩그러니 외떨어져 피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그뿐이 아니에요. 모진 비바람에도 꼼짝도 않을 듯 옹골지게 핀 이 꽃이 살랑거리는 바람에 슬며시 반응하는가하면 비라도 조금 맞으면 색을 더욱 진하게 드러내어 마치 수줍은 새색시의 붉은 뺨처럼 보이기도 한답니다. 어쩌면 차가운 달빛의 처연함을, 사무치게 누군가를 부르는 그리움을, 생명이 주는 희열을, 애끓는 욕망을 이 작은 꽃 한 송이가 모두 삼키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거대한 우주가 돌고 있는 이 꽃을 당신께서 보았다면 무어라 하였을까요. 장미꽃처럼 화려하지 않다고 백합처럼 눈부시지 않다고 싸리꽃을 내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것은 당신의 삶과 사랑을 닮았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세상에 남긴 향기를 찾아, 당신이 세상과 작별을 하는 날로부터 천천히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전날, 15일 전, 16일 전, 24일 전, 한달 전, 석달 전, 일년 전, 또 일년 전… 그렇게 당신이 19살이던 해까지 되돌아갑니다. 당신의 원통한 마지막 순간과 마주하기까지 내 가슴이 진정되어 있던 적은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무엇이 나의 가슴을 그토록 뛰게 만든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태풍의 눈 속에 고요히 서 있는 당신을 보았을 뿐입니다. 그럼요. 나는 보았습니다. 한가로이 강가를 거니는 학처럼 고고한 당신의 삶이지만, 또르르 구르는 이슬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아침처럼 고요한 당신의 삶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요. 당신은 또한 무엇도 녹여버릴 수 있을 만큼의 정열을 가슴에 품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미를 탐하는 엄청난 집착입니까, 먼 옛날 가슴에 품은 여인의 숨결입니까? 

 리큐, 이 두 가지를 빼고선 당신의 삶을 설명할 수 없을 테지요. 고매함의 이면에 담긴 미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당신을 천하제일의 다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한 여인이 당신의 좁은 다실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추구한 다도의 아름다움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던가요. 집착과 사랑에서. 어쩌면 당신의 파괴적인 미의 성향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당신에게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완전히 깨뜨려야 할 다완과 다르지 않았겠지요. 당신은 쓸쓸함과 고단함 속에 타오르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깨지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동경해마지 않는 하늘조차도 언제나 맑지만은 않은 것을 떠올리면 당신이 옮음을 알겠습니다. 활짝 갠 하늘의 보름달보다 구름 낀 하늘의 한적한 달이 더욱 운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리다 마는 그림처럼, 새기다 마는 조각처럼 미완성이기에 아름답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당신은 불완전한 미를 사랑하였습니다. 허나 그것을 지키려는 태도에는 조금의 굽힘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가슴 안에서 화석이 되어버린 여인과 그 여인의 유품인 녹유향합을 지키기 위한 당신의 태도도 그랬지요. 당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절벽 끝에 선 듯 위태로울 때 당신은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누가 갖고 싶어하든 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산산조각 내겠습니다.(p.106) 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지키지 못한 것은 여자입니까, 녹유향합입니까. 당신이 지키지 못한 것은 무엇도 없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당신은 당신의 방법으로 소중한 것들을 지켜낸 것이니까요.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것을 당신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존재 할 수 있게 만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달리 무엇을 더 할 수 있었을까요.

 히데요시의 뜻대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다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난세에 다인의 길을 걷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천하제일의 다두가 되었습니다. 미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당신은 천하를 호령하는 만만치 않은 사람 히데요시에게 만만치 않은 사람이 되었지요. 최고 권력자 히데요시를 거역하는 유일한 한 사람이 되었지요. 당신은 그런 분이었어요. 누구의 비위도 맞추지 않는 사람. 오로지 아름다운 것 앞에서만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 목숨보다 차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당신은 어찌하여 그리할 수 있었나요. 그것은 혹 당신이 지키지 못한 처절한 사랑의 불꽃인지요. 그 꺼지지 않는 불꽃이 당신을 그토록 뜨겁고 단단하게 만들었던가요. 가야 할 길은 끝끝내 가고야 마는 집착을 만들었던가요. 그리하여 천하의 권세를 가진 히데요시에게 마지막까지 굽히지 않을 수 있었나요. 그리하여 원통한 죽음을 택하였나요. 그러나 리큐, 당신은 결코 패배자가 아닙니다. 인생은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히데요시의 삶은 너무도 풍류가 없지 않습니까.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는 법. 실패하면 다시 하면 그만이라는 당신의 말이 더욱 가슴에 녹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누구보다도 진하게 살아남은 것인지도.

 리큐, 나에게 차를 한잔 주시겠어요? 당신 자신과 다름없는 당신의 좁은 다실에 나를 초대하여 주시겠어요? 그리하면 나는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를 들으며 미쓰나리가 말하던 선경을 노니는 기분을 느껴 볼 수 있을 테지요. 그리고 당신의 사랑과 인생이 담긴 차 한 잔에는 내가 지금 현세에 살아 있다는 기쁨을 만끽할 것입니다. 항상 짊어지고 다녔던 삶이 주는 무게를 잠시 내려놓겠습니다. 그곳에서 보내는 한가로운 시간들에서 더욱 뜨겁게 살아갈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살아갈 힘을 얻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탐닉할 것입니다. 당신과 함께 하는 고요하고 평온한 시간 속에 잠시나마 머물고 싶습니다. 당신의 좁은 다실로 나를 초대하여 주시겠어요? 당신을 닮은 싸리꽃 한 송이에 당신께 편지를 띄웁니다. 이 꽃의 진한 향이 흐르고 흘러 당신께 닿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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