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6월 4주


 본격적인 장마 시작에 앞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리하여 드디어 어제, 작은 방 한구석에 두었던 선풍기를 꺼내 묵은 먼지를 닦아 내었다. 선풍기를 깨끗하게 잘 보관해 두었으면 이런 번거로운 일은 없었을 테지만 내 게으른 성격 탓에 몸이 두 배로 고생을 하였다. 그래도 쓱쓱 닦여 나가는 먼지를 보니 밀려둔 숙제를 끝낸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선풍기 바람과 함께하는 여름밤을 좋아한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는 이상하게 잠을 돋우는 성질이 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거짓말처럼 내 마음도 시원해진다. 에어컨 바람보다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더 좋아하는 것은 내가 촌사람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별난 취향이라 할 수도 있으나 뭐 어떠랴, 나에게는 이 더운 여름날 더위를 이길 수 있게 해주는 비책인 것을. 비책이 있기에, 더위와의 한판 승부를 벌여야 하는 여름도 싫지 않다.  

 여름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는 '더위를 이길 비책을 갖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살인 같은 더위 속에 그것을 이겨낼 비책을 찾지 못한다면 아마 여름은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더위와 싸울 수 있는 근사한 병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면 여름은 즐길 수 있는 계절이 될 것이다. 올 여름 휴가는 어디로 떠날 까 계획을 세우며 더위를 날려버릴 수도 있고,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영화관에 가서 재미있는 영화를 한편 보며 지금이 여름인 것을 잠시 잊을 수도 있고, 시원한 수박 한 덩어리 잘라서 먹거나, 팥빙수 한 그릇 먹으며 더위를 잊을 수도 있겠다. 이번 주에 내가 택한 방법은 어제 실행에 옮겼듯 선풍기와 함께 하기, 그리고 제대를 코앞에 둔 동생과 시원한 영화관에서 재미있는 영화보기였다. 6월 4주, 더위로부터 탈출해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하게 해준 영화 3편을 소개한다.

1. 포화속으로 -학도병들과 함께 하는 가슴 먹먹한 여행



 처음 '포화속으로' 출연배우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궁금했다. 차승원, TOP, 권상우 이들 중 과연 주인공은 누구인지. 자신은 TOP을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며 주인공은 TOP이라는 권상우의 말을 듣고서도 그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승원, 권상우라는 쟁쟁한 배우들 사이에서 TOP이 주인공이라는 말은 선뜻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TOP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차승원, 권상우라는 톱배우들의 포스에 눌리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나 '스타일'에서 보았듯이, 주연보다 조연의 포스가 세서 주인공들이 빛을 발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TOP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빅뱅의 멤버 TOP이 아닌 영화배우 TOP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영화 '포화속으로'가 실제 있었던 일을 재구성하여 만든 것이라는 것은, 영화관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출연배우들의 이름만 보고 보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은 전혀 모르고 들어왔던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동생이 "누나, 이 영화 많이 슬프대. 맘 단단히 먹고 봐." 하고 겁을 주었다. 이 말을 영화 보러 가기 전에 해주었으면 마스카라는 칠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영화의 첫 시작을 맞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배우 TOP의 모습을. 'TOP이 쟁쟁한 배우들 틈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기나 하였을까' 하며 우려했던 것은 다만 나의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TOP은 배우였다. 그것도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자질 있는 배우. 그가 연기한 오장범이라는 캐릭터는 초반 겁 많고 어수룩한 모습에서 후반에는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중대장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쉽지 않은 캐릭터였음에도 TOP은 어리숙한 모습과 카리스마 있는 모습 모두를 어색함 없이 보여준다. 전쟁은 왜 해야 하는 것인지, 왜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품으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는 괴리감, 아픔, 그리움의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해 낸다.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200% 이상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든다. 신인배우 발굴을 이 영화의 성과 중 하나로 뽑아도 될는지. 배우 TOP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또한 배우 권상우의 재발견도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그가 인터뷰할 때 했던 말대로 그는 TOP을 받쳐주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 이상의 것을 보여주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싸움짱 갑조가 그가 맡은 역할이다. 얇은 목소리 톤 때문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데 이상하게 잘 드러맞는다. 부조화속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배우 권상우가 가진 힘이다.

 포화속으로는 6.25 전쟁을 다룬 영화이다. 아마도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6.25 전쟁을 떠올리며 북한을 경계하고 적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아픔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화합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날의 전쟁처럼 다 같이 죽자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다 같이 살기 위해 동포애로 서로를 감싸 안아야 할 때이다. 가족들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라 생각한다. 

2. 방자전 -짐승남 방자를 만날 수 있었던 여행



 춘향전 속에서 방자는 조연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방자는 춘향과 이도령의 사랑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는 심부름꾼이었다. 춘향과 이도령이 만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주고 그들의 절절한 사랑편지를 전해주는 역할이 그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거짓이었다고 알려준다. 당신이 알고 있는 춘향전은 거짓이라고 말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로 헷갈리게 된다. 무엇이 진짜인가. 춘향이가 사랑한 것은 이도령인가, 방자인가. 이도령이 사랑한 것은 춘향이인가, 권력인가. 익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뒤집어엎는 것이 상상력의 결과물이라 한다면 이 영화가 바로 그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그것도 매우 발칙하고 방자한 상상력의 결과물.   

 김대우 감독은 내용을 비트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정관념을 깬 캐스팅까지 시도하였다. 이 영화를 보는 포인트가 이색적인 캐스팅에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가볍고 코믹한 역할이 어울릴 것 같은 류승범이 이몽룡 역할을 맡았고, 훤칠한 키에 귀공자 역할이 어울릴 것 같은 김주혁이 방자를 맡았다. 류승범이 한 인터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이몽룡 역할을 맡은 것이 재미있다고 말한다고 했듯이 나 또한 이 캐스팅이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느꼈다. 캐스팅도 뒤집어엎는다니.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캐릭터를 뒤집었으니 캐스팅도 뒤집어엎어야 하지 않았겠나. 밉상에 찌질이 이몽룡과 남성미 물씬 풍기는 방자니 말이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배우 모두 새로운 모험을 시도한 것 같다. 춘향전이 아닌 방자전을 보여주기 위해, 또한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한 캐릭터가 아닌 그것을 비튼 캐릭터를 맛깔나게 연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을 배우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또 이 영화를 말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배우 오달수와 송새벽이다. 방자에게 춘향의 마음을 사로잡을 비책을 알려주는 마 노인 역할의 오달수, 능청맞고 특이한 말투의 변학도 송새벽은 이 영화에 빠져서는 안 될 감초들이다. 영화의 웃음 포인트 절반 이상은 그들에게 있다. 춘향전에선 볼 수 없었던 마 노인의 캐릭터, 그리고 새롭게 해석한 변학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영화의 재미를 배가 되게 해주었다. 웃음 담당 두 캐릭터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강렬하게 머리에 남아있다.    

 25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둔 방자전. 그 인기는 단지 노출 수위가 높아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뒤집기 묘미를 제대로 살린 감독의 기발한 상상력과 열연한 주연배우들, 그리고 감초 역할을 제대로 한 조연 배우들의 합작품이라 생각한다. 연인과 함께 보면 좋을 영화 같다.
 

3. 맨발의 꿈 (6월 24일 개봉) - 동티모르 아이들을 만나러 곧 떠날 여행
 


 온 나라가 축구로 떠들썩하다. 우리나라가 16강 대열에 합류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90분 동안 가슴 조마조마하며 선수들을 지켜 본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2002년의 뜨거웠던 열정을 기억하기에 더더욱 그러한가 보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장면을 다시 보면 소름이 돋는다. 이제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도 그런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골 넣는 수비수 이정수의 동방예의지국슛, 박주영의 그림 같은 프리킥, 든든한 캡틴 박지성이 수비수들을 제치고 넣은 골 모두 내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원정 첫 16강 진출이라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지금, 축구에 관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은 그 감동과 여운을 크게 만들어 줄 것 같다. 혹자는 온 나라가 월드컵, 월드컵 하니 지겹다고 하나 즐길 때는 즐겨야 할 것이다. 날마다 월드컵이 아니지 않나. 그래서 내가 이번 주에 볼 영화는 '맨발의 꿈'이다. 스포츠를 소재로 만든 영화는, 거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는 감동을 주기에 더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 억지로 주는 감동이 아니라 마음을 잔잔하게 울리는 감동이라 그렇다. 동티모르의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친 김신환 전 축구선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김태균 감독이 동티모르 현지에서 찍은 영화인 '맨발의 꿈' 역시 더없는 감동을 선사해주리라 믿는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개봉을 했고 평도 매우 좋다고 하니 조금은 기대하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주인공 박희순에 대한 기대도 이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의 능숙한 연기와 존재감이 영화를 심심하지 않게 만들 것이라 예상한다. 그리고 아이들의 연기도 꽤나 훌륭하다고 들었다. 박희순과 아이들의 조합이 어떨지 궁금하다.

 꿈을 꾸기 시작할 때 기적이 시작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2002년 4강 신화는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간절히 염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6강이라는 우리의 처음 목표는 이루어졌지만 또 다시 4강 신화를 꿈꾸어본다. 기적이 시작될 수 있도록.

 맨발의 소년들이 이뤄내는 기적을 말년 휴가를 나온 동생과 함께 보러갈 것이다. (요즘 영화 보러가는 파트너가 주로 동생이라는.) 가난하지만 꿈은 가난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기적의 이야기를 역시 꿈은 가난하지 않은 동생과 함께 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 동생은 꿈만 너무 큰 것이 아닌가.^^:) 또 한 번 한국 대표 팀의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과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함께 응원했던 사람들과 이 영화를 보면 그 감동이 생생이 되살아날 것이다.


 덥다고 짜증만 내지 말고 시원한 영화 한편 보러가는 것을 추천한다. 잠시 무더운 여름날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거다. 6.25전쟁 때의 학도병을 만나는 여행에서는 전쟁의 아픔을 다시는 겪지 말 것을 다짐하며 돌아왔다. (영화가 끝나도 나가지 못하고 한참 울던 사람도 있었으니 마스카라는 칠하지 않을 것을 권장함.) 짐승남 방자를 만날 수 있었던 여행에서는 세상을 거꾸로 보는 것의 재미를 느꼈다. 뒤집어엎는 것의 묘미란. 이번 달 남은 여행에서는 축구의 여운을 좀 더 느끼려 한다. 우리나라가 8강. 4강까지 가길 기원하면서 박희순과 동티모르의 아이들을 만날 것이다. 더위 까짓것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거야~^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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