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노네 고만물상 (보급판 문고본)
가와카미 히로미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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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책은 내가 산 책이 아니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살 때 1+1 이벤트로 딸려온, 말하자면 덤이었다. 공중그네를 만족스레 읽고 다음 읽을 것을 찾아 헤매던 눈에 들어온 게 이 노란빛의 작고 가벼운 책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서도 알다시피, 나는 일본소설의 '아기자기한 생활 묘사'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이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돼 '덤'으로 딸려왔는지 모를만한 책이었다. 뭐, 이런 류 싫어하는 사람은 또 싫어하겠지만서도.

 

위의 표지에서 보다시피 표지는 샛노란 색에 마치 판화라도 찍은 듯한 검은 그림이 새겨져 있다. 내가 일본식 화풍에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지극히 일본 스러운 분위기다. 위의 표지에선 안 나와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덤이라 그런걸까!) 왼편에 색이 빠진듯한 분홍띠에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 가와카미 히로미 신작 장편'이라 쓰여 있다. (나중에 알고보니 보급판이라서 표지가 다른 거였다...)원래 있는 것만 봐와서 일까, 위의 표지는 어째 김이 새 보이는걸.

 

표지에서도 느껴지지만 전체적인 책 분위기는 잔잔하며 조금 멍-하다. 제목인 나카노네 고만물상은 화자인 히토미가 일하고 있는 무늬만 골동품점으로 주인은 나카노 씨. 나카노 씨는 조금 별난 구석이 있는데다 여자를 조금 밝히는, 어찌보면 지극히 평범한 중년 아저씨다. 그 곳엔 다케오라는 매우 과묵한 직원이 또 한 명. 각각 따로 보면 (나름) 평범한 이들이 모여 있으니 묘하게 멍뎅한 느낌의 콤비가 되고 만다. 거기에 나카노 씨의 누나인 마사요 씨까지.

 

읽다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나카노네 고만물상에는 결코 격정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일들이 두리뭉실~하게 사람에게 상처입히는 일이 적은 책상 모서리처럼, 그냥 그렇게 일어난다. 그래서 읽으면서도 그렇게 마음 졸일 일도, 골치 아프게 생각할 일도 없다. 어찌보면 그게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다 읽고 나서 주인공들처럼 싱글싱글 웃고 있을 때였다. 이 이야기 안에서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는 사랑을 했고, 누군가는 이별을 했는데도 세상을 돌아갔다. 그런 사소한 일들을 부품삼아 어떻게든 돌아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카노 씨의 고만물상은 조금은 마음 편한, 동떨어진 곳엣 위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느긋한(그 자신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저 표지처럼 빛이 바랜 듯한 분위기의 관계들을 보다보면 나도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야기 안에서 고만물상이 다시 부활했을 때, 나 역시 기뻤다. 그 사이좋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얼굴을 맡댄 게 너무 좋아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뭐  독자를 편하게 만드는 게 이 책의 소임이었다면 그 몫은 확실히 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나른한 토요일 오후에 추천!

 

인상깊은 구절들.

-지독하게 자기만 아는 사람이 고약한 냄새를 풍기지.

-인간이 무서워. 나자신은 더 무서워.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일본식 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하시는 분.

+이렇다할 사건이 없어도 싫증내지 않으실 분.

+나른한 토요일 오후에 읽을 책을 찾으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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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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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공포 장르는 좋아하기는 커녕 피하는 편이다. 어렸을 적 우연찮게 읽게된 공포 소설 한권 덕에 그 책이 있는 서재방에는 들어가지도 못했고, 다 큰 지금도 <장화, 홍련> 한 편 보고 일주일간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런 내가 '흡혈귀'가 나오는 <나는 전설이다>를 보고자 마음 먹은 건, 미신적 존재인 흡혈귀를 과학적 시각으로 풀이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나는 전설이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한 건, 내 어학연수 시절의 막바지였다. 윌 스미스가 주연이라더라, 라는 소식과 함께 3번째로 영화화 되는 <나는 전설이다>라는 작품이 한참 인터넷을 뒤지던 내 눈에 들어왔다. 정보를 접하기에 인터넷보다 빠른 곳이 또 있을까. 당장 신나게 정보검색에 나섰다. 미국 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작가라 자료는 무궁무진했다. 판독능력은 바닥을 쳤지만, 기대감은 부풀어만 갔다. 영화보다 원작 책 쪽에.

 

원작의 팬이었던 사람들은 이번의 영화가 전작 못지않게 실망스럽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를 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지만, "나는 전설이다"라는 주인공의 마지막 대사에서 느낄 수 있는 전설의 이중적 의미가 영화에선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원작 팬들은 다들 '헐리우드식 전설의 영웅'을 만들어놨다며 흥분하고 있는 듯 하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든 생각은, 책이 참 두껍다...였다. 그치만 두꺼우면서도 두께에 비해 가벼워 들고다니며 읽길 좋아하는 내 기호에 딱 맞아 흡족하기도 했다. <나는 전설이다>가 책의 절반밖에 오지 않는 길이였다는 건 좀 충격적이었지만. 뒤의 단편들의 기괴한 분위기도 나름 마음에 들어 즐겁게 읽어내렸다. 흡입력이 강해 읽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세시간여. 확실히 영화화할 만큼 비주얼이 강할 소설이었다. 내가 무슨 감독도 아닌데 읽어내려가면서 이미지가 떠올라 옛날에 유행하던 만화소설이라도 읽는 기분이었달까.

 

내용은 분량만큼 간단하지만 담긴 의미는 분량도 내용도 뛰어넘는다. 새로운 시각의(50년대였으니까) 흡혈귀와 "나는 전설이다" 고작 2마디에 압축된 모든 의미. 거기다 일상과 비일상을 절묘하게 버무린 묘사력까지. 왜 이 작품이 아직도 인기가 있는지 알만했다.

사람에게는 생존욕구가 가장 큰 본능이라고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 먹고, 자고, 움직인다. 하지만 주인공 네빌에게 가장 큰 욕구는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핵전쟁이후 모래폭풍으로 퍼진 '흡혈 박테리아' 덕분에 사람들은 죽거나 살아있거나 흡혈귀가 되지만, 네빌은 홀로 면역이 되어 있어 '인간'으로 남는다. 그는 흡혈귀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집을 수리하고 무장하였으며 낮에는 잠을 자는 흡혈귀들을 '사냥'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여기까지는 단순히 생존본능이라고 볼 수 도 있다. 살아가기 위해 적을 죽인다, 는 건 가장 오래된 야생의 법칙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네빌은 영사기를 틀고, 레코드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외로워 했다. 그를 괴롭히는 건, 집 밖의 적들의 고함소리에 자신이 '홀로' 남았다는 걸 상기하는 것이었으며 자신의 욕구를 풀 존재가 곁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었고, 과거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의 추억이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네빌은 아마 뼈저리게 깨달았을 듯 하다. 그는 몇 년만에 자신옆의 다른 존재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그런 그에게 엔딩은 오히려 후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순순히 마지막을 수용한 그는 분명 사무치게 외로웠을거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전설이다"라는 대사로 끝을 맺는다. 분명 그는 전설이 되겠지. 정상과 비정상, 일상과 비일상을 넘나드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리뷰라고 해도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으니 직접적으로 말은 않겠지만, 흡혈귀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 매우 놀랐다. 가물가물한 학창시절의 생물시간을 떠올리며 열심히 읽었던 것 같다.

정말 재밌으면서도 생각이 깊은 소설, <나는 전설이다>.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한 번 보고 비교해 보고 싶다.

 

+공포소설 좋아하시는 분

+흡혈귀 좋아하시는 분

+미국의 쟁쟁한 공포소설 작가들의 정신적 스승이 누군지 궁금하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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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프로젝트
다비드 사피어 지음, 이미옥 옮김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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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도 알다시피 (환생 프로젝트라니!) 이 책은 환생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내가 별 5개를 주기는 쉽지 않은데, 이 책은 어찌나 재미있던지 망설임도 없이 별 5개, 라고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환생 프로젝트라, 제목이 붙여져 있기는 하지만 종교적인 색채로 보는 환생이 아니라 굉장히 유쾌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점점 존재가 희미해지는 듯 보이는 불교지만 외국에서는 어째 사람들이 점점 관심을 보이고 있다하더니 이렇게 재미난 소재가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우리 나라에서는 교과서나 책에서나 봤던 <환생>. 내가 환생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은 사실 스님들이 작은 미물도 죽이기 싫어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걸어갔다던 이야기였다. 미물이라도 죽이면 나쁜 업보가 쌓여 다음 생에는 인간이 아닌 동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달라이 라마의 환생도.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에 똑같은 관심(즉 그닥)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환생이니 업보니 하는 게 와닿지 않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해박한 지식이나 진지한 생각보다는 웃음 속의 깨달음을 중시한다.

 

주인공인 킴 랑에는 매우 성공한 여자 아나운서로, 남편 알렉스와 딸 릴리를 가족으로 둔 여자였다. 너무 성공한 나머지 딸과 놀아주지도 못하고 남편과는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남편은 매우 좋은 남자임에도!) 킴이 <킴>으로서 있던 마지막 날은 딸애의 생일이면서 독일 텔레비전 수상식이 있던 날이었다. 딸애의 생일파티를 뒤로 하고 시상식으로 달려가지만 여러 가지 일은 꼬이고 꼬여 엉망진창이다. 거기다 잘생긴 남자와 바람까지 피우게 되고... 여러모로 엉망진창이었던 하루를 정리하기 위해 올라간 옥상에서 우주 정거장의 파편을 맞고 사망한다. (애도) 하지만 눈을 떠보니 웬걸, 자신이 개미가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스스로를 부처, 즉 붓다라고 소개하는 "뚱보" 개미까지! 킴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여서 개미로 태어났다는 말에 킴은 격분하지만 도리가 없다. 다시 가족을 되찾기 위해 어떻게든 접근하려 애를 쓰지만 그 와중에 다시 죽어버리고... 다시 개미로 태어난 킴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환생한 개미인 "카사노바"를 만나 좋 더 좋은 업보를 쌓아 가족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그래서 얄미운 남편의 새 애인을 떼어놓고자 노력한다.

 

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 과정의 스케일이 어마어마하게 큰 만큼 (온갖 동물을 다 거치니ㅋㅋ)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게다가 게스토도 빠방하니 어! 하고 상큼하게 놀라주며 훌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중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인 카사노바는 이름이 좀 웃긴 인물, 이 아니라 정말 카사노바 본인으로 영 좋은 업보와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 탓에 무려 113년 동안 개미로 환생했다. 전적으로 킴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 소설 중간중간에 * 표시와 함께 쓰여진 말풍선안의 카사노바 관점의 글은 정말 매력덩어리라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환생이니 업보니 하는 용어가 많이 쓰이고 그게 글을 이끌어 가지만, 이 소설의 제일 중요한 건, 삶의 소중한 순간은 극락보다 좋다, 라는 교훈아닌 진리를 말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훈계조로 말했다면 재미가 없었겠지만 각종 동물들의 삶을 겪으며 벌어지는 해프닝에 주인공이 가진, 가족을 향한 사랑에 유머까지 곁들이니 금상첨화!

독일 책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재밌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물론 작가의 개성과 실력 덕분이겠지만. 이게 첫 번째 책이라 하니 앞으로의 작품도 너무너무 기대가 된다.

 

+유쾌한 소설을 읽고 싶으신 분

+미드 <내 이름은 얼>을 보고 소재가 참신하다 생각하셨던 분

+삶의 소중한 것이 궁금하신 분

+환생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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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라이프 (보급판 문고본)
앨리스 카이퍼즈 지음, 신현림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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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제 저녁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 참을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책장을 넘겼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가가 시큰하다.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고 가슴이 울려서 펑펑 울어봤다.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상큼하게 가라앉는 하늘빛 바탕에 아기자기 귀여운 노란빛 그림들이 늘어선 표지는 자세히 보면 하늘빛 포스트잇이 붙어 있기에, 책을 다 읽은 지금 어쩐지 또 새롭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 들은 건 좀 됐지만 별 생각은 없었다. 내용이 뭐다, 라고 들은 건 아니었고 새로나온 책을 체크할 때 독특하다는 사람들의 평을 본 것 뿐이었으니까. 거기다 사람들이 좋다, 좋다 하면 어쩐지 하기 싫어지는 이놈의 청개구리 기질 덕에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 이 책을 보게된 건, 아마 우연이었을 테지만, 필연이라 생각하고 싶다. 처음에는 흥미였다. 어, 나 이 책 어디서 들어봤어, 라는 아주 가벼운 흥미. 책도 가볍고 작아 책장에서 쏙 빼들어 대뜸 중간을 펼쳤다. 독특하다는 사람들의 평대로 속 안은 보통의 문단 형식이 아니라 노란 포스트잇 위에 적어놓은 짤막한 문장들로 되어 있었다. 한 장 두장,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넘겼다. 너무 일상적이고, 공간에 비해 글이 너무 적었으니까. 그런데.

 

쿠궁. 그냥 갑자기 눈가가 시큰해졌다. 눈물이 나오기 전 급격하게 몰리는 열기에 정신이 없었다.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에서 울 수는 없어, 라는 쓰잘데기 없는 오기로 책을 가까스로 덮고 제 자리로 밀어넣었다. (*다 읽은 책은 북카트에 놓아주세요, 라는 말은 무시한 채)원래 목적이었던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에 싱숭생숭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뜬금없이 엄마가 보고 싶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엉엉 울고 싶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내 머리 속을 제일 크게 차지하고 있던 생각은, 다음엔 꼭 빌려서 엄마랑 같이 읽어야 겠다, 였다.

 

그래서 빌려온 그 책을, 단숨에 다 읽고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고 말았다. 귀엽지만 인간마음을 (당연히) 모르는 우리집 강아지는 주인이 울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내 발가락을 물고 있었다. 이 책 덕분에 코가 다 헐었다. 나쁜 것, 날 울리다니.

 

내용은 아주아주 간단하다. 주의할 것은 절대 픽션이라는 것. 실화라고 생각하면 더 슬프다. 물론 실화일 수도 있다. 상황이 그만큼 일상적이니까.

부모가 이혼해 산부인과 의사인 엄마와 함께 사는 클레어는 겨우 15살 소녀다. 엄마가 너무 바빠서 제대로 얼굴 맞대고 이야기 할 시간도 없기에 그 둘은 냉장고 위에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서로에게 말을 전한다. 심부름, 친구 이야기, 아빠 이야기, 토끼 이야기 등등. 바쁜 엄마에게 클레어가 조금 불만이 있던 것 빼고는 아무 이상이 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엄마가 덜컥 유방암에 걸렸다. 혼자 사는 엄마로서 딸에게 힘든 짐을 지우고 싶지 않던 엄마는 일상처럼 딸을 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클레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엄마가 정말 아픈건지 실감을 하지 못해 자신의 남자친구니 휴가니 하는 불만을 얼굴 보기 힘든 엄마에게 쏟아붓고 만다. 그런 와중에 엄마의 유방암이 특이해 계속 진행되고 클레어는 더이상 현실을 피할 수가 없다. 엄마 또한. 클레어는 엄마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엄마의 일생을 좀 더 이해하고 싶었다. 엄마는 더이상 딸이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죽음 앞에서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딸이라 아들과 엄마, 아들과 아빠 사이는 잘 모른다. 그래도 딸과 엄마 사이는 좀 안다. 내가 겪고 있으니까. 나는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는 딸은 단연코 아니다. 게다가 아무래도 아빠와는 공통화제가 별로 없어 가끔( 아주 가끔은) 사랑하는 데도 불구하고 시간을 지내기가 불편할 때가 있다. (특히나 아빠와 내가 거의 혼자 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지만 엄마와는 할 얘기가 무궁무진하다. 큰 딸이라 예전에는 해주지 않던 엄마의 힘들었던 시절, 친가, 외가 쪽 이야기, 우리 어렸을 적 이야기, 등등 민감한 이야기부터 가볍게는 연예인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등. 불행히도 내 성격의 80%는 아빠쪽이라 엄마와 자주 싸우기도 하지만, 그만큼 엄마가 더 가까운 건 사실이다.

이 책에서 아무리 엄마가 바빴어도, 클레어가 엄마에게 느끼는 유대감은 아빠 사이의 유대감과는 또 다를거다. 엄마와 딸 사이니까. 같이 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더 슬펐겠지.

 

어쩜 이렇게 이 책은 날 울리는지 모르겠다. 그냥 생각만 해도 찡해져서 뒤죽박죽이 된 채 울상이 되어 버린다. 우리 엄마가 낮잠 자고 있는 이 시간에도.

 

중학교 시절,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길렀던 강아지 하늘이가 죽었을 때 나는 일주일을 울었다. 처음 죽어있는 고 작은 털복숭이 강아지를 봤을 때는 충격으로 울었고, 그 차가워진 몸을 수건에 싸서 묻을 때도 울었고,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울었다. 저녁 밥상에서도, 방 안에서도, 그 녀석의 물건들이 어느 순간에 튀어나올 때도 울었다. 저녁 밥상 앞에서 울고 있는 내가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만큼,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하늘이를 좋아했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누군가가 죽은 뒤 우는 사람은, 그 사람 살아 생전에 잘 해주지 못해 미안해서 우는 거다."라고. 근데 사실이 그랬다. 처음엔 더이상 그 조그만 녀석이 왕왕 대며 짖는 소리도, 부드러운 털뭉치도, 따뜻했던 몸도 더이상 없다고 생각해 눈물이 나왔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내가 녀석을 예뻐 할 줄만 알고 씻겨주지도 배설물을 치워주지도 않은 그 미안함에, 냄새난다고 놀아주지도 않았던 그 미안함에 울게 되었다. 너무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고작 1년 지낸 개가 죽어도 그런데, 우리 엄마가 죽는다면... 클레어는 강한거다. 나 같으면 만날 울면서 지낼거야.

 

이 세상의 모든 딸들과 엄마들의 일상에 꼭꼭 필요한 책. 아들들도 보면 좋구요. 단지 남들이 우는 거 보기 싫으면 집에서 혼자 읽을 것!

 

*기억하고 싶은 글귀 (옮겨 쓰며 또 울고....)

-피터와 함께 창밖을 보고 있었어, 클레어. 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면서. 따사로운 햇볕에 눈이 녹기 시작하고 피터의 부드러운 털이 햇살을 가득 머금고 있네. 모든 게 잘될 것 같아. (55)

-엄마, 지난밤에 피곤해 보이더라. 잠잘 가다 느꼈어. 지금보다 더 걱정해야 되나? 이런 건 글로 묻는 게 더 쉽고 편해. 엄마 기분이 어떤지, 치료를 어찌 되는지 물어볼 땐 말야. (84)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지. 엄마가 아픈데도 이러다니. 엄마 방사선 치료도 같이 못 가고,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처럼 이기적으로 굴어서 미안해요. (103)

-엄마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말 안 하면서 왜 나는 엄마한테 다 얘기해야 해? (107)

-엄마, 집에 없네. 엄마는 늘 밖에 있는 사람이잖아. 전혀 이상할 건 없지. 안 그래? 냉장고에 붙은 엄마 메모 봤어. 만약 엄마가 있음 직접 말할 텐데. 없으니까 여기다 쓸 수밖에 없잖아!

마이클은 최고야. 재미있고, 똑똑하고, 귀엽고 내가 원할 때 내 곁에 있어 줘. 이건 엄마보다 더 나은 점이야. 아빠보다도. 그리고 엄마도 아빠랑 헤어졌으면서 마이클과의 일에 대해 충고할 입장은 아니라고 봐! (115)

-아빠는 우리가 너무 오래 싸우는 것 같대. 대화가 부족해서 그렇대. 난 엄마를 걱정해야 할지 그냥 내 인생이나 신경 써야 할지 모르겠어. (123)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런 일들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책은 없구나. 그런 책이 있음 좋겠어.

넌 학교도 다녀야 하고 좋은 친구도 사귀어야 하고 그 외에 보통의 열다섯 살짜리 아이가 할 일들을 해야잖니. 이런 것들이 각각 잘되야,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어. (124)

-그동안 엄마한테 화내서 미안해. 그 어느 때보다 진심으로 미안해. (125)

-말할 수가 없어, 클레어. 미안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127)

-병은 나을 수 있어. 엄마를 위해 내가 강해지도록 노력할게. 엄마도 나을 거라는 거 잊지 마. 꼭 그래야 해. 엄만 좋아질 거야. (129)

-네가 몹시 필요할 만큼 엄만 너무 약해졌어. 하지만 나 때문에 네 생활이 흐트러지고 네가 고생하는 건 싫어. 그냥 엄마의 어린 딸로 남길 바란단다. 그래서 알리지 않았어. (132)

-엄마가 내 나이였을 땐 어땠을지 궁금해. 학교에서 우린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 우린 틀림없이 친구가 됐을 거야. (135)

-공원을 함께 걷자. 엄마가 좋아하는 분홍색 꽃들도 보고. 그 꽃 이름이 무였더라? 강가에 서서 해가 지는 풍경도 보고. 내가 산책하는 내내 엄마 손을 잡고 있을 거야. 4시에 만날까? (143)

-나는 여자인 엄마를 상상하는 게 어려웠어. 엄마를 여자가 아니라 엄마로만 알았던 거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 여자로서의 엄마 얘기를 해 줄래요? (153)

-엄마를 바라볼 때/ 내가 꿈꾸는 여인을 본다/ 강인하고 용기있고/ 아름답고 자유로운/ 엄마, 사랑해 (160)

-의사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다 있네?"라고 한 말이 기억나. 농담이었는데 엄만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어. 내겐 기적이었어. (166)

-선물 몽땅 맘에 들어. 그중에 최고의 선물은 엄마야. 바깥에서 보다니. (167)

-때때로 인생이 어렵고, 세상이 힘든 곳이며, 우리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걸 네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클레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가끔 누구 책임도 아닌 일이 일어나기도 해. (171)

-클레어, 오늘 아침 부엌에서 춤추던 네 모습이 떠올라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풀잎 끝이 갈색으로 물들어 가고 불쌍한 피터는 아직도 더위에 헐떡거리는데, 춤추는 너만이 맑고 신선했단다. 사랑해. (183)

-나도 엄마의 아픔을 함께하고 싶어. (187)

-길이 구부러지고 휘어져도

  우리는 함께 있을 거야

  구부러진 인생을 껴안고

  우리는 기댈 거야

  서로에게

  엄마는 나에게

  나는 엄마에게 (196)

-넌 나에게 큰 힘이 되고 있어. 나도 너한테 이렇게 잘해 준 적이 있었던가 싶다.

  나는 좋은 엄마였니? 이건 모든 엄마들이 묻고 싶어도 감히 묻기 힘든 질문이지. 물론 엄마들에겐 물을 기회도 잘 없겠지. (200)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는 내 엄마잖아. (201)

-엄마는 네가 정말 필요해, 아가. 아무에게도 기댈 수 없던 싱글맘인 내가 너한테 기대는 건 익숙치 않아서 그랬어. 자신을 돌봐 줄 딸이 절실히 필요한 반쪽 여자가 되는 게 쉽지가 않네. (206)

-나는 널 어리고, 맑고, 빛으로 가득 찬 존재로만 끌어안고 있었지. 내가 너에게 몹쓸 짓을 했더구나. 내가 널 어른이 되도록 해 주면 넌 그렇게 될 거야. 그리고 난 그렇게 해야 하고. (2007)

-내가 가질 시간이 이제 없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 시간들을 낭비하고 중요한 걸 놓친 것만 같구나. 그래도 나에겐 네가 있지.

사랑하는 딸이. 너는 내 삶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의미와 기쁨을 주었어. (207)

-문득 내가 엄마 인생을 거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내 나이에는 어땠어? 아빠와 주로 무엇을 얘기했지?

(중략) 이런 모든 질문들이 날 울려요, 엄마. 왠지 모르겠어. 아마도 이런 질문들이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어른들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같기 때문인가 봐. 나 무섭고 싫어. (209)

-부엌에 앉아 사진 자르는 네 모습 영원토록 봤음 좋겠다. (212)

-엄마는 내게 미래와 당당히 맞설 힘을 줬어요.

최악을 준비하며 최선을 희망한다. 엄마, 좋은 생각이죠? (213)

-그리고 난 '더 좋은 엄마'를 바라지 않아요. 나에겐 엄마는 최고의 엄마야. (215)

-미래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넌 괜찮을 거야. 그렇지?

더 이상 멋진 딸은 없단다. (222)

-나에게도 더 멋진 엄마는 없어. (223)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걸. 엄마, 이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야. 엄마랑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도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있어서 기뻐. (229)

 

+세상의 모든 딸과 어머니께

+펑펑 울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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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잡학사전 - 영어에 목마른 미드족의 필수품, 미국 드라마
박수진 지음 / 길벗이지톡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제목에서 보다시피 미국드라마 통칭 미드에 관한 책이다. 그렇다고 각종 미드를 정리, 분석해 놓은 책이란 뜻은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미국드라마를 통해 영어배우기, 정도의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볼 수 있다, 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는 이유는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잡아주는 것 보다는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속어로 쓰인 표현들을 모아둔 책이라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흥미를 돋구어 영어에 관심을 가지게 할 순 있어도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어 배우기>의 정석에 해당하진 않기 때문이다.

 

사실 표지는 굉장히 친근하다. 각종 미드들의 주인공들을 캐리커쳐로 그려놓았는데 난 밑바닥에 보이는 그리썸 반장님이 너무 귀여우셔서 ㅠ (캐릭터 편애중) 일단 유명한 미국 드라마는 그 당시 대박이었든 <프리즌 브레이크>를 포함해 다 모였었고, 혹시 그 드라마를 모르더라도 예문이 적혀 있어서 가볍게~ 즐기면서 읽을 수 있다.

 

내가 제일 좋았던 부분은 CD가 함께 들어 있어서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고, 둘째로 좋았던 건 내가 아는 드라마가 많이 나왔다는 점이었다. Friends는 물론이고 NCIS, Numb3rs, CSI, House 등등.... (취향이 보이고 있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만한 드라마이면서 각종 <전문>계 드라마다 보니 생소하고 전문적인, 그러면서도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들이 많이 나와서 좋은 예가 많았고, 거기에 미국의 배경문화까지 설명해 놓아서 읽는 즐거움까지 있었으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미국 드라마 뿐만 아니라 미국 영화에서도 당연한 얘기지만, 미국 내에서 실제로 많이 쓰이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문제는 그 대사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토툐, 여기는 이제 캔자스가 아닌가봐." 라는 대사가 과연 무슨 뜻일까. 물론 아시는 분은 이게 <오즈의 마법사>에서 예쁘게 양갈래를 묶고 나왔던 도로시가 애완견 토토에게 말을 걸었던 대사라는 걸 알아차리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이 대사가 쓰인다면 무슨 말일까. 혹은 hair of the dog이 무슨 뜻일까. 이 책을 보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관용적 해석이나 역사, 혹은 문화에서 우러나오는 관용적 표현 덕에 졸려울 틈이 없다.

 

당시 꾸역꾸역 노트북에 옷가지, 무거운 책들까지 싸들고 기내로 짐을 들고 갔는데도 이 책을 놓을 수가 없어 손에 들고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공항에서 다음 비행기를 기다릴 때도 읽고, 비행기 안에서 혼자 심심할 때도 읽고. 나중에 거기서 나온 드라마를 보다가 생각나면 또 읽고.

여러모로 재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미드를 좋아하시는 분

+가볍게 읽을 영어관련 책이 필요하신 분

+미드를 볼 때 속어 때문에 궁금한 게 많으셨던 분

+미국 문화에 관심이 있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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