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
김사과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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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나는 맹렬히 자유를 찾아 다니진 않았어도 다른 애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교실의 보헤미안이었다. 남들 다 다닌다는 학원도 마다하고 하고 싶은 게임이나 읽고 싶은 책만 찾아 헤맸고 죽어도 빠질 수 없다는 야자를 거짓말을 불사해가며 제끼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아마 학교에서 나를 보기란 꽤 어려웠을 거다. 수업시간을 제외하면 쉬는 시간에 도통 제 자리에 앉아 있던 적이 없으니까. 그렇다고 성적이 바닥을 기는 건 아니었으니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공부한 셈이라고나 할까.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이해를 하든 말든 결과가 수학방정식처럼 깨끗하고 완벽하게 나온다면 어른들은 뭐라 하지 않는다는 걸. 그게 내가 자유를 찾아 헤매도 큰 제재를 받지 않는 비결이었다. 적당히 적당히. 자유를 위해 눈에 보이는 결과를 저당잡히는 거.

 

그로부터 몇 년, 그 때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지금은 그게 못내 우습다. 되돌아보는 일은 그게 멀지 않은 과거임에도 쑥스러움과 민망함으로 그저 입가에 미소만 남길 뿐이니까. 그 당시 몰랐던 걸 지금은 알고 있기도 하고, 그 때 가지고 있었던 걸 잃어 버렸기도 하고. 몇 년 더 앞섰다고 지금의 아이들이 그저 측은하기도, 부럽기도 하고.

 

과도기, 라고 부르면 그 시간을 어렵게 넘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귀엽게 되바라진 미나에게 미안하고, 오싹할 정도로 엇나가버린 수정이에게 미안하고. 어떻게든 넘기기만 하면 되지, 라는 결과론적 생각은, 불행히도 인생이 아닌 수능까지만 통하는 개념이었고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한 아이들은 어딘가 일그러진 채 두고두고 후회한다. 수정이는 좀 더 자유로웠어야 했다. 규격화된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점수로만 평가되어선 안 되는 거였다. 점수가 인격을 표상화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체제를 쓰레기라고 비웃으면서도 그것을 얌전히 따라가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 사이에 감정을 잃어버렸으니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던 옛 어르신의 말씀처럼 그 나이 때에는 좀 더 활기차게 살아야 했다. 신나게 놀다가 숨을 헐떡이고 격한 감정에 휘말려서 눈물도 뚝둑 흘리고. 친구와 투닥거리고 싸우며 입을 삐죽이고. 늘상 새로워 일기를 꽉 채우진 못해도 소소한 행복을 느꼈어야 했다. 물론 내가 학교 점수나 사회적인 결과에 신경쓰는 걸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그 사람의 미래에 관련된 일이고, 어쩌면 어떤 삶의 수준을 유지할지에 관한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감정이 메말라서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는냔 말이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거북함은, 배워야 할 것의 부재로 망가져버린 아이들이 불쌍하고 또 불쌍해서 한기가 되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읽기에도 불편한 아이들의 이야기와 나름의 생각을 착실하게 따라가는 소설은 어찌보면 곳곳에 광기에 차 있기도 하다. 수정이가 작고 작은 검은 고양이를 감정에 못 이겨 죽여버렸듯이, 무언가의 부재는 수정이를 이리저리 비틀어댄다. 소설 속에서 몇 번 나오지도 않는 부모님들의 존재는 수정이의 가슴 속에 자신을 깎아 내리게 되는 요소 중의 하나지만 그 덕에 수정이는 가족이 줄 수 있는 안락함 역시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감정을 자연스레 풀어내는 방법을, 수정이는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녀가 아는 거라곤 완벽해 지는 것 뿐이었다. 완벽한 수식, 완벽한 문장구조. 그렇게 완벽하게 가꾸어지며 감정을 표출할 입구는 점점 좁아지고 본능과도 같은 방법은 완벽함 속에 묻히고 만다.

그렇게 답답한 수정이에게 미나는 단 하나 남은 표출구였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가진 아이. 곁에 있음으로 해서 그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친구 아닌 친구. 미나는 수정이만큼 완벽하지도, 그 반대로 아주 자유롭지도 않았지만 그 중간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을 조율할 줄 알았다. 그 것이 친구의 자살로 치우쳐버리고 말았지만. 수정이에게 그 과정은 단 하나 남은 감정을 자신으로부터 잡아 뜯기는 일과도 같았을 것이다. 미나가 '진짜' 감정을 느끼고 마음껏 표출하게 되면 자신의 감정은 가짜가 되어 버리고 마니까. 자신이 완벽하다 믿은 수정이에게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수정이가 가지는 감정은 보통의 친구들이 가질 수 있는 질투와 시기, 가벼운 독점욕이지만 그걸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서는 백치와도 같은 수정이 때문에 점점 상황은 꼬여만 간다. 수정이는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깜짝놀랄만큼 어리고 무지해 갓난아이처럼 자신이 최우선이라 다른 이들의 감정을 살필 여력이 없다. 잃어버릴까봐 조급해 할수록 멀어져만 간다. 그 상실감.

 

왜 아이들이 그렇게 혹독한 일을 겪어야만 했나. 가엾이 죽어버린 미나가 불쌍하다. 미쳐버린 수정을 당해낼 수는 없었을 거다. 억울해서 어이할꼬. 하나뿐인 친구를 죽이고도 홀가분해 보이는 수정이가 측은하다. 언젠가 크게 후회할텐데. 무난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을 부재의 두려움에 크게 만들어 버린 아이가 한없이 작아보인다. 왜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돌봐주지 않는가. 조금만 다독이고 관심 기울여 주면 될 것을. 몸만 멀뚱히 커버린다고 정신마저 다 자란 건 아닌데. 살기가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아이들인데. 자신의 감정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선택한 아이가, 분명 어딘가 존재할 세상이기에 슬프다. 그것을 알면서도 무심히 지나치는 어른이 다수 존재할 세상이기에 불편하다. 그걸 여태 무관심히 방치했던 내가 생각나 기분이 나쁘다.

 

불편한 소설이다, 미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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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여신님 2020-06-27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20년에 이 리뷰를 읽어요. 감동적인 리뷰입니다~~감사합니다
 
흑설공주 이야기 흑설공주
바바라 G. 워커 지음, 박혜란 옮김 / 뜨인돌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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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엄마와 신촌에 나갔다왔다. 가게에 나가시는 엄마의 점심 시간에 맞춰서 옷을 입고, 귀걸이를 갈아끼우고 수선을 부리다보니 벌써 11시 반.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아르바이트 아줌마와 교대하고 있는 엄마에게 척하니 팔짱을 껴보았다. 오랜만의 모녀 나들이에 기분이 들떠서 룰루랄라 버스 정거장으로 향하다 버스를 두 대나 놓쳤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추운게 대수랴 버스 놓친 게 대수랴. 추운 건 겨울이니 어쩔 수 없고 버스야 기다리면 되지. 추위로 상기된 발간 얼굴로 히히덕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실은 이번 토요일날 큰 이모 생신 선물을 사러 나가는 길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크리스마스 이브,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들뜨는 날이니까. 신촌에 내리니 역시나 사람들로 북적거려 파스타를 먹으러 가는 길도 어찌나 힘들던지. 겨우 2층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아 피자와 파스타를 주문하고 나서야 창 밖을 내다볼 여유가 생겼다. 이 집 맛있어, 엄마. 엄마는 뭔가 매운 거 먹고 싶은데. 진짜 맛있어. 맛없음 내가 낼게. 히히 웃으며 장담하는 날 보고 엄마가 용돈도 없다며 라고 웃었다.

엄마와 수다를 떨면 재미있다. 워낙에 뭔가를 숨기지 못하는 체질에다 엄마한테 모조리 말해버리는 내 습관 때문에 한 마디만 꺼내도 금방 아, 그거? 하고 맞장구를 쳐주니 이때다 싶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친구랑 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엄마와 나 사이에는 있다. 해물 스파게티를 돌돌 말며 이야기는 어린 시절 보았던 애니메이션으로 옮아갔다.

"엄마, 흙꼭두장군 기억해?"

얼마 전 어렵사리 인터넷에서 본 옛날의 애니메이션의 제목을 꺼냈다. 사실 엄마가 기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그 어렸을 적 보여준 거 말이지?" 라고 대답했을 때에는 솔직히 놀랐다. 어렸던 나에게만 추억인 줄 알았더니 엄마에게도 그 제목이 추억의 한 조각이었던 모양이다. 신이 난 나는 얼마 전 인터넷에서 다시 봤는데, 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되게 오랜만에 봐서 재미있긴 했는데 옛날에 보던거랑 느낌이 다르더라구."

"원래 그런 법이야. 영화도 처녀 때 봤던 거 지금 보면 영 다르다니까."

"그치? 나 저번에 인어공주 빌려봤는데... 다시 보니까 애가 어찌나 아빠 말을 안 듣던지."

투덜대며 인어공주의 흉을 보는 날 엄마가 으하하 웃으며 바라보고는 너도 이제 늙은거야, 라고 말했다.

"어렸을 적에는 비평없이 보니까, 무작정 재미있다고 느끼는거지."

파스타를 감아 올리며 엄마 앞에서 입을 내밀고 있는 딸이 귀엽다는 듯 엄마가 말한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적에 비평이니 뭐니 할리가 있나. 그저 부드럽게 움직이는 화면에 눈을 빼앗겨 헤헤 거릴 뿐이지. 거기다 비평할 나이쯤 되면 동화는 손도 대지 않게 되니, 언제까지나 재미있었다고 기억하게 되는 거겠지.

 

내가 동화책을 접한 건, 엄마가 머리맡에서 읽어줬기 때문도, 집안에 동화책이 가지런히 꽂혀있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놀러간 친구 집 구석에 쳐박혀 있던 얇은 책들, 뭔가 하고 들여다 봤던 그 날이 내가 처음으로 동화책을 봤던 날이었다. 그리고 TV에서 해준 명작동화 애니메이션. 그래서 더 동화를 좋아하는지도 모르지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동화의 재조명이 이루어져서 기쁘다. 새롭게 번역되어 나온 동화도 재미있고, 그림 동화의 본모습이라며 나온 잔혹동화도 나름 재미있고, 각색된 동화 역시 재미있다. 그리고 이 [흑설공주 이야기]처럼 어느 누군가를 겨냥해 나온 동화 역시 재미있다. 어쩐지 읽고 있으면 디즈니사에서 나온 영화, "마법에 걸린 사랑"이 생각난다. 원작을 재치있게 각색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둘 다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간에 보고 있으면 어렸을 적 봤던 동화들처럼 그저 즐겁게 바라보고 있는 날 느낄 수 있다. 동화든 뭐든 이야기의 주된 임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거, 라고 굳게 믿는 나에게 오랜만에 '동화'를 보면서도 비평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 있어 하루가 즐거웠다. 비록 읽고난 뒤에 다시 보면 또 다시 나이먹은 내가 튀어나오겠지만. 잠시나마 어린아이처럼 웃었다는 거 자체가 중요한 거 아니겠어.

책 중에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건 '릴리와 로즈'였다. 애초에 원작 동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니와 마지막에 공주와 릴리가 깔깔깔 웃는다는 대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당찬 여자아이들이 자기들만의 비밀이 즐거워 마주보며 크게 웃는 다는 이야기가 어찌나 훈훈하던지. 골치아픈 2세 이야기는 당당하게 해결하고 언제나 사이좋게 웃음지을 생각에 나 역시 흐뭇했다. 동화는 이런 거 아닐까. 어린아이들에게는 웃음을 주고, 어른들에게는 흐뭇함을 주는 거. 내 스스로를 어른으로 칭하기에는 아직 한참 어리고 미숙하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동화를 바라볼 수는 없는 나이니까. 확실히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기존의 동화와는 조금 다르다. 우선 세상의 모든 딸들을 위한 동화, 라는 부제가 무색치 않게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이 소녀들이었고, 여느 동화가 바라보지 않는, 동화의 나라에도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물론 동화답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허구의 이야기에 끊임없이 현실을 들이대는 건 재미없으니까.

 

책은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런 동화를 엄마에게서 듣고 싶었다. 어렸을 적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머리맡에서 동화책 읽어주기, 같은 엄마의 사랑이 넘치는 이벤트가 문득 그리워졌다. 물론 구구단 테이프를 밤새 틀어주신 적은 있어도, 아플 때 밤 새 곁에 있어주시긴 했어도 낮에도 책은 읽어주시지 않았던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그런 일은 없을 듯 하지만. 왜 흔히들 외국 가족 영화를 보면 귀여운 무늬의 침대에 누운 금발 머리 아가들 옆에 엄마나 아빠가 누워서 "옛날 옛적에..."라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나. 졸음 가득한 어린 아이가 눈을 깜박이고 그러면 엄마 아빠는 아이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해주고는 불을 끄고 문을 닫아주는, 그런 장면이 자꾸 눈에 밟히는 책이었다. 어른을 겨냥한 책이라 삽화가 많이 있는 편은 아니었는데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김에 삽화도 좀 더 넣어 좋았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헤헤 웃으며 엄마와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고 먹느라 풀러두었던 목도리를 둘렀다. 먼저 계산하러 나가는 엄마 뒤를 졸졸 따라 나가니 직원분이 우리 둘을 보고 빙그레 웃는다. 왜요? 물으면 따님이 어머님을 정말 많이 닮아서요. 라고 다시 웃는다. 가파른 2층 계단을 내려오며 엄마도 나도 멋쩍게 웃었다. 둘 다 통통과니 닮았다는 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잠시 헷갈리다가도 뭐 어떠랴 싶어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오늘 밤은 엄마와 함께 책을 읽자. 나중에 오늘이 추억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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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 지구상에 단 한 명뿐인 죽음대역배우
이세벽 지음 / 굿북(GoodBook)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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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북 출판사에서 주관한 제 3회 독후감 대회에 투고했던 리뷰입니다.
미흡한 글답게 상은 타지 못했지만 나름 열심히 써서 애착을 가지고 있는 리뷰입니다. 


놈에게서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공포와 연민으로 몰아넣는 죽음의 냄새가 났다.(11p)

처음 책을 펴들었을 때, 놈, 이라는 다소 비속어적인 호칭에 순간 움찔했다. 무엇보다 '모리'라는 단어에서 내가 연상했던 부드러운 스토리가 아닌데? 놈. 이름이 없어 불렀던 그 호칭이 소름끼친다. 시작부터 깔끔하고도 음습한 내음이 났다. 이름은 운명이라고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감이라더라. 이름이 없으면 존재할지언정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남에게 불려야 쓸모 있는 그것이 없으면,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 로서의 제구실을 못한다. 처음, 모리라고도 불리지 못했던 '놈'이 서로 의사소통하는 '사람'이 아닌 본능에 의해 살아가는 짐승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예상이 파격적으로 깨져버린 뒤 내가 처음의 모리에게서 느꼈던 것은 책 속의 인물들같이 죽음에 이를 정도의 오싹함도 혐오도, 심지어는 연민도 아니었다. 물론 죽음의 존재를 종이 너머로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특히나 그게 모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다면. 내가 느꼈던 것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실험쥐를 바라보는 과학자 같은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하면 좋을까.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죽음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형상화된 죽음이 가져올 결과가 궁금했다고 해야 할까.

특히나 이 소설이 '한국 소설'이었기에 더 했다.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의 예를 한국 영화들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보고, 아 한국 소설이구나, 하고 느꼈다. 새삼스럽게. 거기에 네티즌이 반응하는 그 생생한 반응. 다른 어느 나라에 가도 우리나라처럼 인터넷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 있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한다. 장점보다 부작용이 부각되는 우리 사회의 연예계 최대 이슈인 악성 댓글에 의한 자살이 이어지고 있는 현재라면 더더욱 그럴 테고. 그걸 고스란히, 한 인간이 인터넷상에서 왜곡되어 가는 과정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긴 소설이라 그 현실감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르브낭이라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알 수조차 없는 소재를 끌어와도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책이었다. 방송계 쪽의 일은 모르지만, 돈과 시간, 건강, 그리고 죽음에 대한 생생한 공포가.

현실감 하니 르브낭이 실제로 있는지 너무나 궁금해진다. <모리>의 독자라면 누구나 조금씩은 궁금해 할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이 소설이 그 수수께끼를 파헤치는 미스터리 소설이 아니라 모리가 부활한 죽은 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모리가 '죽음'에서 벗어났는지는 끝내 나오지 않지만 도처에 숨어 있는 현실의 트랩 덕에 '르브낭'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설령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르브낭이 대표하는 죽음은 어쨌거나 그 어딘가에 존재하니까. 죽음은 영리하다. 그보다 영리하고 약삭빠른 게 있을까. 피어오르는 어둠 속에 매혹적인 향기를 내뿜는 그것에 사람들은 굴복하고 만다. 매력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간에.

그런 의미에서 모리, 라는 부드러운 어감의 이름은 그를 표현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섬뜩하고 동시에 가여우며 매혹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을 대표하면서도 인간인 그를 위한 그 어떤 특별한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힘을 지닌 그를,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그를 그런 부드러운 이름으로 부르다니. 불평 많은 독자인 내가 일단 의구심을 품게 되니 많은 사람이 죽음에 중독되어 갈수록 불만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모리가 끝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고 그토록 동경하던 삶을 되찾게 된 순간 생각했다. 성 감독은 그 이름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해 보고자 했고, 작가는 그 이름을 통해 죽음에 삶의 이름을 주었다는 걸.

모리가 준수한 청년이 되는 것은 상당히 예상 외였다. ‘준수’하다니 말이다. 예전의 그를 편안하게 여긴 건 죽음을 갈망하고 시도했던 연주뿐이었다. 그녀는 모리에게 삶의 상징이 되었고, 모리는 그녀를 무작정 끌어안고 독차지하고 싶어 했다. 사진촬영 장면에서 보듯이 연주는 모리에게 ‘삶’ 그 자체였다. 삶을 동경한 죽음이라고나 할까. 그런 연주가 죽은 뒤에야 모리가 준수해 지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녀가 모리에게 끌렸다면 그저 그런 연애 이야기가 되었을 테지만, 살아있는 자의 당연한 공포에 직면하게 된 그녀는 죽음을 동경하는 나약함에서 삶의 공포로 돌아왔다. 끝내 모리를 거부하다 죽음을 맞이한 그녀는 아이러니한 삶 속에서 죽음에 가장 근접한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게 모리의 아이러니, 삶을 향해 다가갈수록 죽음의 본연에 다가가는 걸 더더욱 부각시키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성 감독과 종필은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순수하리만치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들.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군들 자신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누군들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달콤한 기회의 끈을 망설이지 않고 도덕심으로 내칠 수 있겠냔 말이다. 물론 성 감독은 애초에 모리를 끌어들인 인간으로 일찍 죽어버리는 벌 아닌 벌을 받는다. 모리는, 죽음은 세상에 그런 식으로 보여져서는 안 되었다. 그가 쓴 마지막 시나리오가 앞날을 예견하면서 예언자의 성격을 띠지만 그래서 남는 것이 무어란 말인가.

종필은, 파멸했다. 욕심에 의해 죽음에 끌려들어 가면서. 그게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거다. TV에서 보여지는 죽음이 가짜라고 해서, 그 섬뜩한 죽음을 끌어와야 했는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살아가며 묵묵히 치러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런 죽음을 상품처럼 포장해서 내놓는 것은, 그 우울한 아름다움을 들이대는 것은 살인이나 마찬가지이다. 완벽한 살인. 죽음의 공포는 한순간 숨이 막히게 하지만 중독되듯 사람을 끌어당긴다. 인생의 마지막, 그 너머로 결코 다시 넘어올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하는 본능과 인간의 호기심이 양립하는 그 경계에서 많은 사람이 죽음에 탐닉했다.

그렇다면 모리를 동경하는 아이들은 순수한 피해자일까. 인간의 무의식적인, 죽음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그들은 TV 속의 유행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현 사태마저 풍자한다. 아이들이 죽음을 영웅처럼 떠받들어도 책을 읽는 내내 객관적인 관찰자이길 자처한 나는 그 아이들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일 뿐이었다. 군중심리에 떠밀리지만 알아채질 못하는 사람들. 하지만 딱히 그 아이들만을 탓할 수는 없을 거다. 모리의 사진촬영 장면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가의 주문에 광기를 띤다. 줄줄이 이어지는 신화와 문학작품을 넘나드는 죽음의 화면이 이어진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했던가. 먼 옛날부터 인간은 죽음에 탐닉했고, 그것은 삶의 가장 극적인 일부분이었다. 비참함과 아름다움, 그 상반된 미를 동시에 풍기는. 죽음 앞에서 누가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될 수 있을까. 그 앞에 우리는 평등한 것을.

나 역시 죽음에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수많은 문학작품과 각종 매체들을 통해 보여진 죽음은 가련하고 슬펐으며 아름답기까지 했으니.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죽음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죽음이 아름다워 보인다면 그것은 그 이면에 깔린 슬픔과 아픔 때문이라는 것을. 모리, 그는 내게 읽는 내내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발버둥치는 그가 어쩐지 측은하기도 했고 한 편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인 죽음이 그렇다는 게 특히나 그랬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얘기하고 공감하고 웃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보통 인간. 그래서 기뻤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라도 그가 ‘인간’임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어서. 죽음이 삶을 가질 수 있어서 기뻤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바라본다. 모리, 지구상에 단 한 명 뿐‘이었던’ 죽음 대역배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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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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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아버지가 없다. 두 분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어렸을 적부터 궁금했던 질문은 길거리에서 할아버지와 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튀어나와 날 망연하게 만든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나오는 박사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딘가 어수룩하지만 인자하고 아이라면 깜박죽는, 내 상상 속의 할아버지 같았다. 칭찬을 퍼부어주고 반짝이는 눈으로 어린아이를 지켜보고 일일이 변화를 감지하는. 어디까지나 상냥하고 다정한.

이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어땠을까. 자신이 알고있는 모든 것을 차근차근 시간에 쫓기지도 않고 사소한 일에 실망하지도 않고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의 가치에 무지한 상냥한 사람. 항상 남을 배려하는, 너무나 다정한 사람.

 

난 수학을 무척 싫어한다. 고등학교 때까지 성적은 좋았지만 성적과는 무관하게 수학이라면 머리가 아찔해졌다. 시험 기간만 아니면 수학책은 그저 책상 옆에 쌓아둔 교과서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래서 책 속에 줄줄이 나오는 수학은 잠시나마 날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 분명 내 수학 성적은 좋았는데 몇 년 지났다고 이렇게 다 까먹다니. 하지만 이내 어지러이 나오는 수학에도 익숙해지고 수학을 더없이 소중한 듯이 대하는 한없이 진지한 박사의 태도에 '내'가 감화된 것처럼, 고등학교 수학시간에 지겹다고 느꼈던 수들이 오밀조밀 생명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박사가 수학에 바쳐온 세월은 어느 누구보다 진지할 것이고 어느 무엇보다 농밀하겠지. 그 한결같음은 분야를 불구하고 아름답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서 사랑을 듬뿍 받는 어린아이만큼 강한 것도 없다. 루트처럼 평평한 머리통 덕에 루트라 불리는 '나'의 아들 역시 이상한 할아버지로부터 난데없이 애정을 담뿍 받으니 그 애정을 고스란히 돌려줄 수 있는 아이가 되었다. 가슴 깊숙이에서 솟아나오는 배려, 박사를 굳게 믿고 있는 순수한 마음. 루트는 박사를 믿지 않았던 엄마에게 화를 낼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애정에 기반한 믿음이랄까.

 

하지만 80분밖에 기억이 지속되지 않는 박사의 기억은 잔인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잔인한 것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어느 날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양복에 바스락 거리는 메모가 잔뜩 달려있고, 그 속에서 자신의 병을 읽게 된다면. 몇번이고 좌절하고 몇 번이고 잊어버릴테지만. 그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 겪었을 그 순박한 할아버지가 가슴아파서.

 

애정은 보통 기억에서 나온다. 그 농축된 기간에서 흐르는 애정, 기억. 내가 기억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큼 잔인한 일도 없다. 억울하고, 까맣게 잊어버릴 걸 알고 있기에 더더욱. 박사에게 수학은 공기와 같다. 눈앞에 문제가 있으면 푸는 것이 당연하고, 골몰하는 것이 당연하고, 풀고나도 왜 그것이 칭찬받을 일인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사물을 보는 감각이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사처럼 한평생 수를 존경하고 흠모해온 사람만이 할수 있는, 드문 일인 것이다. 굳건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누군가의 기억에 항상 올곧게 아름답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파출부와 주인(실주인은 아니지만)의 관계는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관계이기에 누구보다 무관심해질 수도 있는 관계지만 반대로 더더욱 농밀한 감정이 쌓일 수도 있는 관계라고 생각한다. 끝이 다가온다는 생각이 만드는 조그만 선물이라고 할까나.

 

 

누군가가 나에게 이 책을 추천을 주었을 때, 가슴이 따뜻해 지는 책이라고 했다. 아,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무 생각 없없지만, 정말이다. 비록 가슴이 꽉차올라 먹먹해지는 따뜻함일지라도 여운이 긴, 따뜻한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따뜻한 애정의 공기가 균일하게 퍼져있는 그런 따뜻한 책.

 

이미 많은 분들이 읽었고 뒤늦게 읽은 감이 있지만, 늦게나마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게 너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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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보이
팀 보울러 지음, 정해영 옮김 / 놀(다산북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별은 따라갈 수 없다. 극복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이별은 그런 존재다. 뭐, 사교성은 쥐똥만큼도 없는 내가 겪은 이별이라고 해봤자 손에 꼽을 정도지만, '죽음'이란 이별은 항상 따라갈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길렀던 동그란 눈이 귀여웠던 강아지도, 노란 털이 보송보송했던 병아리도. 하지만, 따라갈 수 있는 이별도 있다는 걸 안다. 차근차근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서 끝까지 곁에 있어줄 수 있는 그런 이별.

 

사실 내가 이 소설을 읽은 건 작년 겨울이었다. 교양시간 쉬는 시간에 도서간으로 달려가 빌려온 책들 중 하나였다. 공부는 안 했지만, 답답한 시험 분위기에서 집어든 책이라 제목이나 평가는 익히 알고 있음에도 책장을 넘기는 손이 무거웠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하는 후회와 '그래도 읽고 싶다...'라는 마음 사이에서 우왕좌왕 하다 한 장씩 넘긴 책은, 생각보다 매끄럽게 술술 넘어갔다.

 

이 소설은 감성적이고, 반짝거리는 표지만큼 아름답다. 청소년 취향의 심플한 문체로 되어 있어서 읽기도 쉬운데다 잔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판타지적인 요소(판타지의 뜻이 '현실이 아닌' 이라는 개념하에)가 있다고는 해도 청소년 판타지의 최고봉격인 해리포터와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니 비교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해리포터가 현실이 판타지인 본격 판타지물이라면 이 소설은 현실에 판타지를 한 구석에 끌어들여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결말의 모호함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싶어 지식인 검색을 해보았는데 역시나, 라고 할까...표면적인 스토리는 따라가도 그 속의 맥락을 놓친 분들이 꽤 된 듯 싶다. (아니 그 때 당시의 이야기지만서도.) 애초에 문체와 구성은 쉬운 반면에 담긴 이야기는 조금 철학적인 편이라 아직 어린 분들에게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다. 아니, 혹시 여러번 읽으라는 작가의 의도인걸까...

 

내용은 사실 정말 간단하다. 수영을 굉장히 좋아하는 소녀 제스는, 수영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헤엄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제스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조금 괴팍한 성격이지만 제스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분이셨다. 몸이 안 좋아지신 할아버지를 위해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고향마을에 가서 지내는 동안, 제스는 신비로운 소년, '리버보이'를 만나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워 하지만 점점 멀어져가는 할아버지와 리버보이, 그리고 자신 사이에서 서서히 무언가를 깨닫는다.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묵묵히 강물이 흐르듯이 깔아놓은 책 안에서 제스는 리버보이와 함께 헤엄쳤다. 천진하다고 해야할까, 제스의 수영에 대한 애정은 감탄이 나올 정도다. 내가 부모님이였다면 무척 걱정했을 테지만, 나는 인생에서 몰두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이미 반정도는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 제스가 부러웠다.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어하듯. 이미 지나온 시절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나도 저렇게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나갔다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부질없는 생각은 머리속을 떠나질 않는다. 분명 제스처럼 누군가의 죽음을 슬프게 배웅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알게 되었겠지.

 

열다섯살이라는 나이는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어린이와 어른의 경계선인 모양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그랬고 <리버보이>에서도 그렇다. 어찌보면 제스는 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어린시절에도 작별은 고한 것과 같다.

-전형적인 성장소설이지만, '리버보이'라는 존재가 그 전형을 벗어나게 해주었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리버보이는 할아버지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한 때, 수영하기를 좋아했던, 헤엄쳐서 바다에 나가고 싶어했던 과묵한 소년이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어떻게 세상으로 돌아갔는지를 나타낼 수 있는 완벽한 존재.

할아버지는, 그리고 리버보이 또한, 제스에게 상냥하다. 자신이 사랑했고, 자신을 닮은, 그리고 더더욱 닮아갈 뒤에 남겨둘 사람이기 때문에.

 

글쎄, 비록 울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감동적이고 환상적인 책이라고 본다. 일단, 할아버지와 제스의 관계가. 그리고 할아버지의 나름 만족스러웠던 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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